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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0
by 이규탁

1960s 1995.06. SM 엔터테인먼트 설립 – 케이팝 창세기가 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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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20작성자  by  이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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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역사는 1989년 이수만이 설립한 ‘SM 기획’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이수만은 전자음악이 팝에 도입되는 과정과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탄생과 성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귀국 후 그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당시 음반제작사의 관행에서 벗어나 기획부터 제작까지 체계적 시스템을 갖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들고자 했다. 후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로 잘 알려지게 되는, 이태원의 스타 DJ였던 최진열이 A&R 및 매니저를 맡았고 한국 미디 초창기 선구자 중 하나였던 홍종화가 수석 프로듀서로 영입됐다. 이태원의 춤꾼이었던 현진영을 발탁, 노래와 춤을 트레이닝 시켜 1990년 ‘슬픈 마네킹’으로 데뷔시켰다.

 

현진영은 1992년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라이벌로 불리며 댄스 음악 혁명의 주역 중 하나가 됐고, SM기획은 한동준, 김광진 등의 앨범을 발매하며 시장에 안착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회사의 핵심 가수로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원했던 현진영이 1993년 3집 발매 직후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어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에 이수만은 1995년 ‘SM엔터테인먼트’라는 새로운 이름 아래 회사를 재정비하였다. 당시 회사에 남아있던 가수는 알앤비(R&B) 싱어송라이터로 춤과 노래, 작곡에 모두 능했던 유영진, 그리고 가수 데뷔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몇몇 연습생뿐이었다고 한다. 현재 케이팝(K-Pop) 대표 기획사이자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한국 음악산업을 대표하는 레이블 SM의 시작이다.

 

SM의 역사가 시작된 1995년은 어떻게 보면 현재 글로벌 인기 장르 중 하나가 된 케이팝이 수면 아래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995년은 한국 대중음악산업의 성장과 폭발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해 발매된 4집 수록곡으로 전국의 많은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유명한 노래 ’Come Back Home’, 그리고 사전심의제도 철폐에 큰 공헌을 한 곡 ‘시대유감’을 통해 대중음악과 가수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졌음을 입증했다.

 

방탄소년단의 앨범 [Map of the Soul: Persona]에 의해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단일 앨범으로서 국내 최다 음반 판매량 기록(약 300만 장)을 보유하고 있던 김건모 3집도, 그리고 전 국민적인 대히트곡 ‘날개 잃은 천사’가 실린 룰라의 2집(약 200만 장)도 모두 이 해에 나온 앨범이다. 또한 이 시기는 음악을 듣는 매체가 LP에서 CD와 카세트테이프로 완벽하게 전환된 때 이자, 이 해 시작된 케이블TV 방송 덕분에 하루 종일 뮤직비디오와 음악만 틀어 주는 TV 채널이 보급된 시대이기도 하다. 히트곡 하나만 나오면 당연히 수십 만장의 음반이 팔렸던, 장밋빛 기대로 가득 찼던 해다.

 

이러한 한국 음악산업의 황금기에 설립된 SM은 한국 음악산업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회사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 이수만과 유영진이 기획, 작곡 등을 담당한 남성 5인조 그룹 H.O.T.(1996년 데뷔)의 대성공 이후 S.E.S., 신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보아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SM은 한국 음악산업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하는 기획사로 자리하게 된다. 특히 될성부른 떡잎들을 연습생으로 받아들여 교육·훈련시킨 후 가수로 데뷔시키고, 데뷔 이후에도 가수들의 공적인 활동은 물론 사생활까지도 관리 감독하는 소위 ‘토털 매니지먼트(total management)’는 현재까지도 케이팝 비즈니스 모델의 요체(要諦)이자 기본 전략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후 등장한 YG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한 현 케이팝 기획사들은 모두 SM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비즈니스 모델은 멀게는 미국의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1920-30년대 미국 영화 스튜디오들의 스타 발탁 및 관리 방식)이나 모타운 시스템(1960년대 미국 음반사 모타운의 소속 가수 육성·관리 및 음악 제작 방식), 가깝게는 일본 연예기획사 쟈니스의 아이돌 그룹 제작 및 운영 방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SM은 이들 해외 모델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경제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응용과 변형을 가하면서 그것을 케이팝 고유의 비즈니스 모델로 가다듬었다. SM을 케이팝 산업의 선구자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또한 SM은 케이팝 세계화를 위한 길을 개척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획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2000년 H.O.T.가 한국 가수로서는 최초로 베이징에서 단독 콘서트를 여는 등 일찍부터 중국 시장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적극적인 전략을 취했던 점이나 보아의 일본 활동을 위해 현지 회사 에이벡스(Avex) 그룹과 협업을 하며 성공을 거둔 것, 소속 그룹 슈퍼주니어에 중화권 멤버 ‘한경’을 포함하면서 현지화 전략을 제시한 것, 해외 작·편곡자들과의 적극적인 협업을 통해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온 점 등은 SM이 케이팝 세계화와 한류 전반에 끼친 큰 영향력을 보여준 사례이다.

 

 

이규탁(한국 조지메이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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