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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4
by 배순탁

1960s 1996.10. 우연이 역사를 만들다 - 크라잉 넛 ‘말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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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2-04작성자  by  배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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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운명이 되는 순간이 있다. 실수가 전화위복이 되어 거대한 성취로 이어지는 경우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크라잉 넛이 바로 그랬다. 1995년 만약 그들이 길을 제대로 찾아 원래 목적지였던 클럽 [락 월드]로 잘 찾아갔다면 이후 그들의 밴드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다음처럼 상상해볼 수는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펑크 찬가인 ‘말달리자’가 탄생되지 못했거나 혹은 발표되었어도 별다른 주목조차 받지 못했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 어떤 곡은 마치 운명 같은 우연이 겹치면서 탄생한다. 거기에는 갓 태동한 홍대 인디 신이 있었고, 클럽 [드럭]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라잉 넛이 있었다. 이 세 개의 바퀴가 삼위일체의 운명처럼 맞물리면서 한국에서의 펑크가 본격화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당시 [드럭] 사장이었던 이석문씨에게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다. 과연 그렇다. 크라잉 넛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라인업이고 뭐고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악기를 제대로 연주할 능력을 갖춘 멤버 역시 전무했다. 마침 라이브를 할 밴드가 없던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엉망진창 밴드를 무대에 올릴 생각을 하다니, 이건 범인의 경지를 훌쩍 넘어서는 통찰임에 분명하다.

 

당시 드럭을 포함한 홍대 인디 신을 막 휩쓴 건 펑크(Punk) 열풍이었다. 그렇다면 펑크란 무엇인가. 1970년대 중 후반 영국에서 탄생한 장르를 말한다. 물론 미국 뉴욕에서도 펑크가 있었지만 홍대 인디 신에 영향을 미친 건 섹스 피스톨스(The Sex Pistols)를 위시로 한 영국 쪽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펑크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펑크는, 기본적으로 숙달된 연주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시를 한번 들어볼까. 만약 당신이 기타를 잡아본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펑크 뮤지션들은 당신의 귀에 대고 이렇게 유혹하듯 속삭일 것이다. “괜찮아. 코드 몇 개 배우고 그냥 하면 돼. 그것도 음악이 될 수 있어.”

 

이후 이 펑크의 정신을 계승해 1990년대 초반에 대폭발한 밴드를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다. 바로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이끈 너바나(Nirvana)다. 너바나는 음반 제목에서부터 펑크의 후계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의 최고 히트작 [Nevermind]는 바로 섹스 피스톨스의 대표작인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따라서 크라잉 넛을 필두로 한 한국에서의 펑크는 멀게는 영국 펑크, 가깝게는 그런지/얼터너티브 열풍이 이 땅에서 산파한 결과물이 된다.

 

무엇보다 1980년대와 비교해볼 때 이건 혁명적인 전환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980년대에는 언더그라운드 신이 있었다. 그 중 언더그라운드 록/메탈의 경우 밴드마다 스타일은 다 달랐지만 어쨌든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연주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명했다시피 홍대 인디 펑크는 그와 정반대의 태도를 지향했다.

 

이런 이유로 1990년대의 인디를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이전 세대에 반(反)하는 흐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무엇보다 홍대 인디 신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반감 같은 게 거의 없었다. 어쩌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정리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정반합의 원리로 굴러가지 않는다. 가끔은 맥락의 내부 아닌 외부에서 새로운 물결이 훅 치고 들어오기도 한다.

 

확실히 그랬다. 홍대 인디 신과 크라잉 넛이라는 존재는 가히 한국 대중음악역사에 길이 남을 ‘갑툭튀’였다. 그것은 생경하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인 풍경이었다. 클럽 [드럭]의 내부는 말 그대로 난장판 그 자체. 시설이건 밴드의 연주건 관객의 액션이건, 모든 면에서 ‘정돈되지 않음’을 일부러 지향했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야, 너도 음악 할 수 있어”라는 평등의 모토에 걸맞게 무대와 관객석은 조금도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밴드는 관객을 향해 널뛰기했고, 관객은 밴드와 무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국대중음악 역사에서 이렇게나 ‘젠체하지 않는 뮤지션/밴드’가 다발로 쏟아진 건 그때가 최초이자 현재까지 최후였다.

 

‘말달리자’가 전국구 인기를 모으게 된 건 아무래도 광고 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99년 해태 부라보콘 광고에 이 곡이 쓰이면서 본격적인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말달리자’는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노래였다. 광고가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해줬던 셈이다.

 

한데 한번 다음처럼 생각해보라. 그것이 광고든 무엇이든 천금 같은 기회를 만났음에도 정작 뇌관이 없어 폭발하지 못했던 노래를 찾는다면 부지기수일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1990년대 중반 크라잉 넛과 홍대 인디는 뇌관 그 자체였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가능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그 가능성이 정점에서 만개한 순간이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젊음의 찬가였다.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배순탁의 B사이드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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