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12. 두 영웅이 탄생하던 바로 그 해 - 강변가요제의 이상은과 대학가요제의 무한궤도 > 대중음악실록 아카이브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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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6
by 배순탁

1980s 1988.12. 두 영웅이 탄생하던 바로 그 해 - 강변가요제의 이상은과 대학가요제의 무한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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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2-26작성자  by  배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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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가요제 전성기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가요제의 흐름이 정점을 맞이한 해, 1988년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하긴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가요제는 가수가 되기 위한 등용문으로 무명의 아마추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골든 로드였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1988년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화제를 모았던 해다. 핵심이라 할 두 가요제를 통해 두 뮤지션이 한 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1988년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회문화적 분기점이 된 해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적 분위기 완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들이 있었다. 경범죄 처벌법 개정으로 형식적이나마 존재하던 장발과 미니스커트에 대한 단속 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전해 결정된 언론기본법 폐지가 실질 적용되며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과 잡지가 창간하거나 복간됐다. 1987년부터 점점 완화되어 1989년 1월, 전면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해 사상 최초로 출국자 수가 1백만 명을 돌파했다. 여담으로, 맥도날드 1호점이 서울에 문을 연 것도 1988년이다.

 

그해 여름 강변가요제, 이상은의 ‘담다디’가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상은이 ‘담다디’로 대상을 받은 다음 날부터 아이들은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했다. 개다리춤은 당시 수학여행 장기자랑의 필수 대결 종목이기도 했다. 아이들만 춘 건 아니었다. 어른들도 리듬에 맞춰 개다리 춤을 췄다. 그러니까, 거의 전국민이 ‘담다디’에 맞춰 개다리 춤을 췄다. 세상은 이런 걸 가리켜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이상은의 ‘담다디’는 가요제 역사상 가장 임팩트 있었던 현상들 중 하나였다.

 

그해 겨울 대학가요제, 마지막 밴드가 출연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 순간 대상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끝났다’는 분위기였다. 진짜 그랬다. 당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그대에게’의 웅장한 키보드 전주가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말이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심사위원을 맡고 있던 당대의 가왕 조용필도 이를 느꼈다. 시작을 알리는 신디사이저 전주만으로도 조용필은 이 밴드의 우승을 확신했다. 그는 만점을 던졌다. 팀의 이름은 무한궤도. 신해철과 정석원이 몸담고 있었다.

 

신해철과 이상은 모두 ‘80년대의 아이들’이다.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1981년 과외를 전면 금지했다. 지금처럼 입시학원 산업이 크지 않았던 시절, 과외 철폐는 의도와 상관없이 청소년들에게 자유 시간을 대폭 선물했다. 그들 중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AFKN을 통해 흘러나오는 최신 팝을 들었고, 청계천 등지에서 불법 유통되는 일본 음악 프로그램을 돌려 봤다. 고등학교에는 스쿨밴드 붐이 불었으며 전인권, 김현식이 언더그라운드의 스타가 됐다. 시나위와 부활, 백두산이 헤비메탈 붐을 이끌었다. 이 모든 것을 10대 시절 경험한 아이들이 1988년을 전후하여 대학생이 됐다. 1970년 생인 이상은, 1968년 생인 신해철 같은 이들 말이다. 1980년대라는 시간 동안 공식, 비공식적으로 쌓인 한 세대의 문화적 역량이 1988년의 두 가요제를 통해 폭발한 것이다.

 

보통 가요제가 끝나면 대상 외에도 인기를 얻는 경우가 없지 않다. 예를 들어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는 ‘담다디’도 있었지만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도 있었다. 한데 1988년 대학가요제에는 없었다.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스윽하고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만큼 ‘그대에게’가 내뿜었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고인돌’로 금상을 거머쥔 주병선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가 본격 스타덤에 오른 건 그로부터 1년 뒤인 1989년 ‘칠갑산’을 발표하고 나서였다.

 

1988년 이후 가요제 출신 스타가 전무했던 건 아니다. 박선주, 장윤정, 전람회 등의 면면이 이를 증거한다. 그럼에도, 전국민을 들었다 놨다 했던 강렬한 데뷔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1988년이 최후였다고 봐야 한다.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가 정점이었다.

 

데뷔와 동시에 정상에 올라선 이상은과 무한궤도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다. 정확히는 이상은(Lee-tzsche), 신해철, 015B, 그리고 넥스트(N.EX.T)다. 1990년대 이후의 음악계의 지분을 나눈다면, 1988년 두 가요제의 몫을 제외해서는 안 된다.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배순탁의 B사이드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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