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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by 임희윤

1980s 1989.08. 김현철 <Vol.1> – 벼락같은 천재의 벼락같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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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1-05작성자  by  임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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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ed by 김현철’

 

음반에 명시된 이 한 구절은 의미심장했다. 1969년생, 1989년 당시 약관에 불과한 나이였다. 이 청년은 당대 최고의 녹음실인 서울 스튜디오에서 김희현(드럼), 조동익(베이스기타), 함춘호, 손진태(기타)라는 일류 세션을 손수 지휘하며 자신의 데뷔 앨범을 완성했다. 음반에 실린 8곡 전곡을 홀로 작사, 작곡, 편곡했다. 벼락같은 천재의 벼락같은 데뷔작이었다. 이어질 19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 작곡가들은 이 음반에 실린 기술과 감성을 뛰어넘어야만 했다.

 

김현철은 미국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빚어진 재즈 퓨전과 스무드 재즈의 작곡·편곡 기법을 뼈와 뇌로 흡수한 뒤 이를 한국인의 심장과 혀를 통해 걸러 뿜어냈다. 모던 포크에 기반한 수록곡 ‘아침 향기’를 제외한 7곡은 기존 가요에서 듣기 힘든 요소가 여기저기서 매복했다 튀어나오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고리타분한 2박, 4박의 강세를 벗어나 펑키하게 출렁이는 리듬, 곡의 전반이나 중반에도 태연하게 작렬하는 전조, 슬픔과 기쁨의 이분법을 흐려버리는 세련된 긴장음과 미묘한 화성…

 

그러나 이런 고난도의 유별난 요소들이 결코 연주자들만의 내밀한 기쁨이나 과시, 특정 장르에 대한 열정을 위해 헌납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이 작품이 가장 유별난 지점이다. 김현철 1집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부분은 되레 친근한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다. 도시나 자연을 배경으로 비나 눈이 오고 설렘이나 회한을 느끼는 보편적인 한국인의 감성을 건드리는 노랫말과 주선율 말이다. 김현철은 이영훈, 유재하가 일군 한국적 팝의 품격을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했다.

 

김현철 본인의 신시사이저 연주를 비롯해 모든 연주자들의 백킹과 솔로는 원숙함을 넘어 유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마치 김현철만을 기다리며 악기를 벼린 듯 악곡 여기저기에 윤기 가득한 명연을 뿌려댔다. 국내에 재즈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게 1990년대 중후반이니, 김현철의 ‘재즈’는 시대를 한참 앞섰다. 작은 라이브 클럽도 아닌 서울 스튜디오에서 가요를 ‘가장’한 재즈 퓨전을 이렇듯 신선한 악곡을 배경으로 구현하는 경험은 베테랑 연주자들에게도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음반 전체에 신명이 넘실댐을 귀가 밝은 청자라면 누구든 감지할 수 있으리라.

 

‘오랜만에’, ‘춘천 가는 기차’, ‘동네’는 당대의 가요차트를 폭격할 만큼 자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세대, 장르, 취향을 초월한 가요의 스테디셀러로 남았다. ‘어떤날’의 감성과 ‘빛과 소금’의 화성이 공존한 이 작품은 2010년대 후반 들어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에 의해 다시 발견되면서 한국적 시티팝을 대표하는 역작으로 재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동아기획과 김영 사장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김현철은 1988년 박학기의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를 작사·작곡 하면서 작곡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는데, 그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김영 사장이 골프백 하나 가득 현금을 채워 담아 건네며 솔로 앨범 계약을 권한 일화는 유명하다. 김 사장의 지원은 금전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최고의 스튜디오와 연주자를 이 스무 살 청년에게 선뜻 내줬으며 편곡과 프로듀스에 이르는 창작과 제작의 전권을 맡긴 통 큰 그의 후원이 이 불세출의 데뷔작을 일궜다.

 

김현철은 이 작품 이후 장필순의 ‘어느 새’, 박학기의 ‘이미 그댄’을 지나 이소라의 작곡가와 프로듀서, ‘그대 안의 블루’ 등의 영화음악가로 1990년대 초반 우리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약관의 천재가 음악 제작의 전권을 틀어쥐고 가요계에 혁명을 가져온 사건은 그 이후 딱 한 번 더 도래하게 된다. 미디와 샘플링이라는 새 도구로 무장해 1992년 가요계에 진군한 서태지다.

 

 

임희윤 (음악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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