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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남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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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남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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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없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시대의 흐름에서 현재 음악의 소비는 과잉에 가깝다. 데이터 통신과 와이파이의 시대는 십년 전쯤 본격적으로 열렸다. 정확히 3G 가입자가 2G 가입자를 앞선 것이 12년 전이다. 2G시대에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통화하는 일이 가능했다. 새로 열린 3G 시대에서 가장 혁신적인 것은 통화가 아닌 음악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 이후 십 년, 그 사실은 너무 당연해졌다. ‘자신이 필요한 노래를 들을 수 없는 환경’에서 살 아가는 일은 현재 일종의 사고실험에 가깝다. 그전에는 음악이 담긴 테이프나 CD 등의 물리 매체를 구매해야만 음악을 재생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MP3 기계에 불법 다운로드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왠지 음악을 듣기에는 불편하지 않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하지만 첫 질문은 그 시절이 바탕이 되었다.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물리적인 영역에서, 음악이 없다면 사람은 얼마나 그리워지는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대륙횡단을 떠났다. 정확히 한국에서 이집트까지 대륙으로 횡단하는 루트였다. 페리로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세 달 간 비행기를 한 번도 타지 않고 카이로까지 가야 했다. 짐을 꾸리는 일부터가 난항이었다. 데이터 통신이 없어 여행 정보를 위해 가이드 북을 들고 가야 했다. 러시아, 동유럽, 중동 세 권의 가이드북을 배낭에 넣자 벌써 묵직했다. 시집 몇 권과 노트, 갈아입을 옷가지를 넣자 자리가 동나고 말았다. 이 짐을 물리적으로 짋어 메고 지구를 횡단해야 했다.

 

당시 핸드폰으로는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출국과 동시에 무용해지는 것도 핸드폰이었다. 음악은 보통 MP3 기계로 들었다. 음악을 위해 따로 기기를 챙겨 외출하던 아득한 시절이었다. 다운받은 음원을 선을 연결해 넣는 방식이었고 용량은 기기당 최대 30~40곡이 한계였다. 여행지를 감안하면 중간에 곡을 교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석 달간 MP3로 정해진 곡만 들어야 했다. 짐을 꾸리던 나는 과감하게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제했다. 어차피 고요 속에서 여행하는 고독의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혹은 그 많은 나라들에서 우연히 들려오는 타국의 음악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 길은 당연히 고달팠다. 한겨울이라 여행자라고는 만날 수 없었다. 세 달 동안 낯선 사람과 낯선 언어, 낯선 음식을 버텼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어차피 낯선 것을 체험하러 떠나온 길이었다. 하지만 분명 향수를 느꼈다. 가장 그리워지는 것은 자의로 봉인해버린 음악이었다. 한국 음악은 커녕 한국어도 듣기 어려웠다. 길에서 들려오는 음악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막바지에 중동으로 들어가자 더 심해졌다. 그들의 음악은 지나치게 영적이라 솔직히 음악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모국의 음악을 목이 마른 사람처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두 귀와 마음이 긁고 싶을 정도로 가려운 기분이었다. 머릿 속에서 그리운 노래가 들릴 지경이었다.

 

세 달 만에 카이로에 도착해 한국 항공사의 비행기표를 구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한국어가 들렸다. 내가 알던 질서가 여기 있었다. 착석하자 항공사에서 선곡한 가요가 있었다. 한국을 세 달이나 떠나 있었지만 업데이트가 늦어 오히려 옛날 노래 뿐이었다. 그중 최신 가요였고, 가장 반가웠던 노래는 보아의 <공중정원>이었다. 아시아의 별, 매년 새로운 정규 앨범을 발매하면서 한창 가요계 활동을 하고 있던 18년 전의 보아. 당시 SM은 대중음악에 진입한 최초의 대기업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보아는 SM의 간판으로 한일 양국에서 톱스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발표하는 노래는 그야말로 '유행가'였고 ‘대중가요’라는 범주 안에 편입되었다. <공중정원>이 포함된 5집을 발매한 당시 그의 만 나이는 19세였다.

 

나는 그의 노래를 좋아했다.이십 대 초반의 나는 공부하는 리스너였다. 매주 발매되는 주요 해외 앨범과 모든 국내 앨범을 듣고 그중 하나씩을 골라 평을 썼다. 내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면 했고, 그것들을 기록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막상 MP3를 채우던 노래는 '유행가'인 보아의 노래였다. 같은 집에 사는 동생이 '그렇게 열심히 들으면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보아의 유행가'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나는 리스너의 진심을 담아 그 '유행가'를 좋아했다. SM에 막 입사한 켄지와 전성기 보아의 탤런트가 함께 하던, 그의 음악은 현재 모국어로 창작되는 가장 세련된 음악이었다. 이것은 '유행가'로 지나칠 노래가 아니었다.

 

카이로에서 서울까지 여덟 시간 동안 <공중정원>을 돌려 들었다. 조악한 헤드셋으로 끝없이 반복되는 그의 목소리는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은 것 같았다. 그는 징그러운 기교로 첫 소절 을 힘차게 노래했다. "아직 넌 헤매고 있어 아마도 외로웠던거야. 밤하늘 가득 멀게만 보였던 곳을 너무 원했나봐." 분명한 모국어였다. 귀국하는 밤 비행기 창으로 빛나는 별이 보였다. 나는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아침에 공항에 내려 개강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토록 오래 헤매다가 아마도 외롭게. 음악이 없는 우리는 그리움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는 지금도 빛나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그때가 가장 빛났다. 그는 빛나던, 유행(遊⾏)의 시기를 나와 함께 했던 것이다.

 

 

남궁인 (작가,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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