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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조동희

소매 가득 바람 몰고 다니는 사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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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조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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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잠실 개발과 함께 성냥갑처럼 지어진 콘크리트 아파트들, 그 삭막함과 함께 떠오르는 건 갈색의 반지르르하던 전축 세트. 갓 이사 간 높고 낯선 곳에서의 허기로움을 달래려는 듯, 나는 그 낯선 기기에 집착했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기에, 여섯 살 소녀의 유일한 장난감이었던 그 전축에 공테이프 하나 구해 노래 녹음도 몇 백 번은 반복한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가 퇴근길에 LP 두 장을 들고 오셨다. 차이코프스키와 오빠가 판을 냈다고 가져다주신 '조동진 1집'. 당시 내가 가진 LP 판(꼭 LP 뒤에는 ‘판’이라고 붙여야 그 맛이 산다)이라고는 조동진 1집과 차이코프스키 두 장뿐이었는데, 가사가 있는 앨범이 덜 졸렸기에 당연히 오빠의 앨범만 들었다. 그것이 내겐 ‘리스닝’의 시작이었다. 

 

하루 종일 앨범을 듣고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곤 하던 아이는 혼자 그 노랫말로 자기만의 겨울을 만들고 바람을 그렸으며 달빛을 꿈꿨다. 

 

가죽 잠바를 입은 장발의 말 없는 청년, 조동진. 내 기억 속 오빠는 늘 그랬다. 말하기 보다 듣는 편이었고 좀처럼 감정의 기복도 보이지 않았던 그는 그의 노래와 참 닮았다. ‘긴긴 다리 위에  저녁해 걸릴 때면’,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바람 부는 길’을 하루 종일 듣다 보면 며칠만 지나도 턴테이블 바늘 끝에 먼지가 쓸려 붙어있었고, 그걸 조심스레 제거하는 것이 나만의 쾌감이었다. 

 

켜켜이 나 있는 그 틈에 소리가 새겨져 있다니, 그 틈에 바늘을 놓으면 다른 소리들을 내다니. 그 시절 턴테이블은 또래의 아이들은 모르는, 나만의 보물 상자와 같았다.

 

지금은 포크음악의 대부로 불리우는 조동진은 의외로 재즈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첫 데뷔를 했고, 연주자와 작곡가의 시절을 거쳐 13년 만에 발매한 <조동진 1집>은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30만 장을 팔았다고 들었다.

 

내가 듣던 조동진 1집은 대도 레코드사에서 나온 초반이었다. 앨범 재킷은 그의 지인들이 그려준 스케치들의 조합이었는데 당시의 다른 화려한 앨범 커버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심플하면서도 그로테스크했으며 사운드도 지금 음원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는 1집의 사운드에 비해 다듬어지지 않은 수수함이 있었다.

 

처음 듣는 관악기 소리며 초보 천사들의 합창 같은 코러스, 한 장의 착한 엽서를 보는듯한 가사가 어린 내 마음에, 저항의 소리를 덮으려는 천연색의 쇼 위에 살며시 스며들었다.

 

그중에서도 늘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만 들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본 것일지도. 그리고 그때부터 오랫동안, ‘소매 가득 바람을 몰고 다니는’ 어떤 사람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그 노래는 B면 두 번째 곡이어서 A면부터 쭈욱 듣다가 판을 뒤집어 걸고 엎드려있으면 기분 좋은 잠에 빠지기도 일쑤였다.

 

 

새벽 별 창 너머 아직 타오르니 

더딘 아침 해는 어디쯤 오는지

 

너는 벌써 잠 깨어 머리 빗어내리듯 

지난밤 궂은 꿈 쉽게 잊어버리고 

 

하늘 비친 눈먼 곳 바라보면 

무딘 내 마음은 무얼 말할지 

 

너는 벌써 저만치 햇살 아래 달리듯 

밀려오는 서글픔 쉽게 떨쳐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소매 가득 바람 몰고 다니며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묵은 햇살 다시 새롭게 하며 

 

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 라라 라라라

 

새벽 별 창 너머 아직 타오르니 

더딘 아침 해는 어디쯤 오는지 

 

 

조동진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상념으로 잠 못 드는 사람의 묵은 햇살을 새로운 하루로 바꿔주는, 궂은 꿈들은 머리 빗어내리듯 잊어버리는, 밀려오는 서글픔 햇살 아래 달리듯 떨쳐버리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화자는 그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두운 시대, 우리 모두가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그로부터 한참 후, 대학 때 영화를 전공하며 소련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만나 그의 세계에 심취했다. 그의 영화들은 한 편의 시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영상미가 있으며 물과 나무, 숲과 비...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 느리고 아름답고 강렬한 강물 같았다.

 

그 느낌은 마치 오빠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아릿한 평화 같았다. 조동진의 음악이 영상화된 듯한 느낌, ‘자고 일어나도 아까 그 장면‘ 같은 노래와 영화.

 

나는 그 고요와 평화와 아픔과 허무를 흡수하며 들판 한구석 홀로 자라난 식물처럼 희로애락을 반기고 잘 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오늘 하루도 새로이 보낸다.

 

내가 좋아하는 이 노래는 언제나

내 마음속 묵은 햇살 다시 새롭게 하니

 

 

조동희(작사가/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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