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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7
by 차승우

그대는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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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7작성자  by  차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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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만남. 한 남자의 생의 빛이 점점 사그라드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음악인으로서 나는, ‘음악 가문’이라는 배경의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고 해야겠다. 역시 음악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덧셈, 뺄셈을 하기 전부터 팝과 록의 고전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것들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내 삶을 규정하게 만드는 하나의 동기가 된 것이다.

 

차씨 집안 음악사의 시작은 셋째 큰아버지(고 차중락)의 활동으로 비롯된다.

 

큰아버지는 소싯적 육상 선수 출신이었던 양친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경복고 재학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했고, 대학 시절엔 보디빌더로 당시 미스터 코리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체육뿐 아니라 예능 전반에 걸쳐 다재다능했던 그는 회화적 감성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학도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음악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의 노래를 들은 주위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창 로커빌리나 스탠다드 팝 스타일이 유행하던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면 대성할 거란 격려에 그는 돌연 일본으로 밀항을 결심한다. 21세의 나이에 학업마저 접고 밀항선에 몸을 실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밀항 사기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돌아온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록 밴드라 칭해지는 '키보이스' 멤버였던 사촌 형 차도균의 권유에 따라 1963년 그룹에 합류한다.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관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큰아버지는 핸섬한 얼굴, 건장한 체격과 감미로운 바이브레이션 음색으로 가요계 대체 불가의 영역을 점하기에 이른다. 스물넷의 가을, ‘철없는 아내’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즈음, 그는 이대 메이퀸 출신이었던 애인과의 뼈아픈 실연을 겪는다. 그런 심경을 반영하듯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 편곡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발표한다. 이는 그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는 계기가 되며, 그를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호사다마, 바쁜 스케줄과 잦은 스캔들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그의 건강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다. 1968년 11월 10일, 큰아버지는 서울의 청량리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급성 뇌막염으로 쓰러져 신촌세브란스 3주간 입원 끝에 혼수상태, 결국 전신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가 스물여섯. 짧은 생을 마쳤다.

 

젊은 톱스타의 죽음으로 가요계와 방송계는 난리가 났다. ‘차중락의 새 앨범’으로 발매 예정이었던 음반은 ‘차중락의 유작 앨범’으로 바뀌었고, '낙엽의 눈물'과 '부르고 싶은 이름’이 타이틀곡으로 지정되어 발매됐다.

 

특히, 당시 음반 제작자들의 시선은 요절한 톱스타의 뒤를 이을 차기 주자 찾기에 쏠려 있었다. 그 결과, 큰아버지의 바로 손아래 아우인 아버지(고 차중광)와 그룹 ‘가이즈 앤 돌즈’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던 다섯째 작은아버지(차중용)에게 음반 제의와 방송 섭외가 쇄도했다. 다만 음악에 완전 뜻을 접은 작은아버지와 달리, 외모는 물론 음성까지 큰아버지를 빼다 박은 아버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사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가수에 그다지 뜻이 없었단다. 성동고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꽤 촉망받던 야구선수였고, 입대 전 잠시 큰 아버지의 대타로 밴드(키보이스) 활동을 경험한 후, 당시 스타덤에 오른 큰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몇 곡을 취입한 정도였다.

 

불행하게도 형님을 쏙 빼닮은 아우의 커리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종의 ‘애도 기간’이 지나가며 ‘가수’ 차중광의 정체성에 어떤 위기가 봉착하리란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였으리라.

 

음악인으로서 창의적인 고민을 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주어진 역할만을 강요받다시피 한 가수 생활. 음악 업계와 대중들은 그저 요절한 가수 차중락의 동생으로서 차중광을 소비할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특유의 한량 기질과 주벽으로 점점 방송가와는 멀어지게 됐고, 1983년 이혼 소송 이후론 오랜 기간 밤업소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새 가정을 꾸리고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보기도 했지만, 큰 재미를 보진 못하셨다.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든 아버지는 작은 술집을 운영하셨는데, 간간이 홀 중앙에서 작은 공연을 하곤 하셨다. 레퍼토리엔 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 있었다. 어찌 보면 큰아버지보다 훨씬 긴 시간을 불러온 노래이니, 어떤 의미에서 ‘가수 차중광’의 삶을 상징하는 곡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지 싶다.

 

3년 전 여름. 아버지는 암 3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이랄지, 아주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기에 투병 소식을 처음 듣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평생을 술과 로맨스밖에 모르던 양반이었다. 어릴 적엔 원망도 참 많이 했더랬다. 세월이 흐르며 점점 그런 아버지와 똑 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줄도 모른 채.

 

얼마간 병실을 오가며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날이 무너져가는 그의 몸과 마음을 목도하고 있던 나날 중, 부평 문화 재단으로부터 제의가 왔다. 가수 차중락의 노래를 아우와 조카가 ‘부자 콜라보레이션’으로 리메이크하는 기획이었다. 뜻밖의 반가운 소식에 아버지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아버지는 형님의 노래들 중 ‘그대는 가고’를 선택하셨다. 편곡/녹음 일정이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녹음에 참여하지 못하셨다. 편곡 작업 시기에 이미 병세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이었다. 1인 병실에서 완성된 곡을 들려드렸는데, 대체적으로 만족하시는 기색이었다. 특히 기타의 음색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결국 리메이크 된 ‘그대는 가고’는 큰아버지 차중락과 아버지 차중광, 두 형제를 추모하는 곡이 되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계실 때에도, 영전에서도 들려드렸다. 아버지 살아생전 당신의 음성에 더해 한 소절의 연주조차 녹음하지 못한 것이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의 삶 또한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로 접어들었다. 음악 활동을 재개한다면 또 어떤 가락과 장단이 나올지 모르겠다. 단, 숙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겐 음악인으로서, 차씨 가문의 울림을 전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가기 시작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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