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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4
by 조동희

내게 사랑이 너무 쓰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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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14작성자  by  조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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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먼 곳은 아니었지만 친척 집까지 가는 버스는 꽤나 두려운 여정이었다. 열한 살의 아이가 버스의 손잡이를 겨우 붙잡고 중력을 찾으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을 때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마음이 포근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

 

‘아.. 이건 무슨 노래지...?’ TV 쇼에서나 음악을 듣던 어린이에게 그 노래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순수하고 맑은 에너지였다. 그것은 흡사 동요 같기도, 아마추어 학생이 읊조리는 소리 같기도 하였는데, 한 초등학생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놓았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눈이 여려요

 

한 잎 지면 한 방울 눈물이 나요

슬픈 영활 보면 온종일 우울해요

 

거리에서 한번 마주친 눈빛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만약에 사랑에 빠진다면

온통 그 모습뿐일 거예요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어리거든요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아직 전 눈이 여려요

 

산울림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또래들보다 심신이 조숙했던 나는 ‘사랑’이란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 궁금해졌고, 거리에서 어느 잘생긴 남학생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왠지 오래 생각이 났다. 동시밖에 모르던 나는 몇몇 노랫말에서 ‘시’라는 어렴풋한 뉘앙스를 감각했고, 노트에 자주 따라 썼다. 그 작은 순간들이 나에게는 작사의 발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후 그 노래가 누구의 것인지 수소문하여 찾아냈고, 난 산울림의 팬이 되었으며, 삶의 골목골목마다 그 낮고 여리고 새로운 노래들이 해맑은 얼굴처럼 가득하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길기도 긴 제목들과 쉽고도 낯선 가사들은 나와 함께 나이를 들고, 나와 함께 추억을 담아준 것이다.

 

얼마 전, 산울림 데뷔 45주년 기념 '리마스터링 LP'가 나왔다. CD 디지털 음을 LP로 단순 변환하는 복각판이 아닌 마스터 릴 테이프를 부활시킨 앨범이다. 김창완 님이 자택에 보존해왔던 기존 산울림 음반 '마스터 릴 테이프 원본‘들의 그 포근한 아날로그 소리가 살아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오리지널에 최대한 가까운'이 아니라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새로운 수준'으로 음원들이 재탄생했다고 한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상위에 항상 자리하는 그 앨범들의 기나긴 생명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얼마 전 다시 들어본 산울림 1집은 서툰 연주지만 너무나 용감하고 새로워서 웃음이 났다. 푸른 젊음과 순수, 열망의 에너지, 한 앨범에도 아이의 노래, 반항아의 노래가 공존하면서, 정형화된 모든 틀에서 도망치는 음악.

 

요즘 실용음악과 입시나 가요제 심사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당신 다운 것은 어디에 있나요?’다. 세상 하나뿐인 나, 그리고 내 생각, 내 마음, 내 세상은 유일한 것인데 어느 틀에 맞추고 있나. 그 틀은 누가 만들었으며, 그 틀이 과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음악인가. 

 

틀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깨어져야 미덕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관습의 틀에 맞추는 것이 답은 아니다. 쫓아가지 말고 모셔와야 한다, 나만의 우주로.

 

어제 산울림의 둘째, 베이스 김창훈 선생님의 첫 솔로 공연에 초대되어 극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시간 여행을 해 덜컹이는 버스 안 작은 소녀가 되어있었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갑자기 바람이 차가와지네

 

산울림 <회상>

 

 

그 동요 같고 동시 같고 동화 같은 산울림의 세계가 내게 다시 성큼 걸어들어온 밤이었다.

 

나만의 우주도 다시 생동한다.

 

 

[사진출처=에꼴 드 고래] 

 

 

조동희(작사가/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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