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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6
by 이충걸

가수는 (높은 음으로)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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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26작성자  by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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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경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왜 가수들이 노래는 안 부르고 비명을 지르지?’, ‘저렇게 성대 성능을 과도하게 써서 목소리를 날려버리면 어쩌지?’하곤 했다. 가수들이 높은 음을 내기 위해 광대뼈와 부비동을 움직여 커다란 미소를 만들며 스스로 밀어붙이고, 마이크를 먹어치울 듯 소리 지르고 으르렁대고 끙끙대는 걸 보면 조금 갸웃해진다. 언제부터 고음이 보컬의 기준이 되었을까? 고음을 낼 수 있다는 게 그렇게까지 인상적인 위업일까? 박일남이나 문주란 같은 ‘매혹의 저음 가수’는 다 어디 갔을까? 테너 말고 베이스는? 대중이 다 먹어치웠나?

 

노래의 세계에서 보컬 범위가 극단적으로 넓은 가수들은 그야말로 경외심을 부른다. 힘들이지 않고 놓은 음을 낸 뒤 고음역을 유지하는 휘트니 휴스턴의 제어력을 보면 그 흉곽을 드나드는 엄청난 공기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5옥타브에 걸친, 마치 악기 같은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은 장르와 상관없는 통제력으로 무대를 압살했다. 프린스의 평균 음역은 여성과 겹치지만 4옥타브가 넘는 유연한 보컬은 모든 반발을 지배했다. 머라이어 캐리가 ‘오 홀리 나잇’을 부를 때 기계처럼 정밀하고 얼음처럼 선명하게 높은 음을 치면, 감정은 지워지고 감탄이 남는다. 나는 읊조린다. 머라이어 캐리처럼 노래를 ‘연주’하는 사람은 없어.

 

인상적이다 못해 오싹한 높은 음, 모두를 얼어붙게 만드는 높은 음역으로 그들이 기념하는 것은 불가능해 뵈는 것을 해내는 인간의 아름다움 같다. 목소리의 한계를 초월해 우리의 정신성을 뒤흔드는 능력이랄까. 물론, 높은 음은 가수의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전달력을 강화시키고, 듣는 이의 귀청을 뚫어 주기도 할 것이다. 높은 음으로 튜닝해 성대의 장력을 높이면 고주파의 진폭이 커져 물리적으로 화려하게 들릴 테니. (사실 카스트라토가 여태껏 사랑받는 이유도 고음 때문 아닌가. 지금이야 보컬 능력을 위해 거세하진 않으니 누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겠지만.)

 

모든 가수는 각자의 방식으로 독특하다. 그래도 웬만하면 보컬 범위를 넓히고 싶을 것이다. 어떤 때 초고음은 스포츠의 업적처럼 신체의 제약에 미적 성취를 거두는 듯 보인다. 우사인 볼트가 100미터를 9.58초 만에 주파한 것처럼, 초고음은 연극처럼 높은 단위의 감정을 만든다. ‘위키드’에서 ‘디파잉 그래비티(Defying Gravity)’를 부르는 뮤지컬 배우의 3옥타브 보컬 범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상징적인 역할을 맡게 해줄 것이다.

 

데뷔 때 이선희는 음역이 2옥타브 반이라고 말했다. 그 때 가수에게 요구되던 음표는 그것으로 충분했지만 터무니없는 고음 인플레이션의 시대엔 상황이 좀 달라졌다. 관객들은 전주가 들리자마자 가수에게 높은 음을 치라고 연호한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수영, 사이클, 마라톤까지 결합한) 보컬 트라이애슬론의 메시아가 나오길 기다린다. 그러나 연습한다고 ‘밤의 여왕’ 조수미가 양철판 오리듯 꺼내는 F6, 피아노 건반 88개 중 85번째로 높은 음표에 도달할 수 없다. 소프라노의 4옥타브 도 C6이나 카운터테너의 3옥타브 미 E5를 낼 수 있는 가수는 드문 중에도 드물다. 그러니 그게 안 되는 가수는 문제를 유전학으로 돌리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이다.  

 

더 낮게 부르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시절에, 낮게 시작해서 낮게 쌓이는 목소리는 효율적이지도 않고 효용성도 없다. 읊조리는 노래는 자주 노래로 간주되지 않는다. 음역대 높은 가수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면 놀랍게도 지루하게 들린다. 그렇다고 고음이 가수를 본질적으로 더 나은 보컬리스트로 만들까? 좋은 가수가 되자고 모두가 파워 벨팅 디바가 되어야 하나?

 

나이 들면 생물학적으로 저음이 확장되고 일부 고음은 내기도 힘들어진다. 가수도 음조를 잃거나 목을 다치게 하지 않고는 높은 음을 못 내는 지점이 올 것이다. 그런데 더러는 나이 든 가수가 오리지널 키 말고 조옮김으로 몇 키 낮춰 부르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 트랙과 같은 키로 노래하지 않는 것이 마치 쇠락인 것처럼. (우리가 노래방에서 키를 내리는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최백호 식으로 말하자면 “여든에는 여든의 노래를 하면 될” 것이다.

 

캐슬린 페리어가 콘트라 알토 목소리로 부르는 ‘Blow the Wind Southerly’를 들을 때마다 고음 대신 억양과 음색, 통제력을 장착한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선택을 맛본다. 가수가 목소리를 사용하는 방법은 기술적인 발성보다 일곱 배 흥미롭다는 것을. 그러니까 한명숙의 ‘눈이 내리는데’를 들으며 음역대를 따지진 않는다. 그들은 좋은 보컬리스트가 되는 것만으론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로잡으니까. 즉, 고음이 아니라 멜로디를 노래하는 능력이야말로 보컬의 품질과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내면의 사이렌은 소리친다. 음표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범위 넘어 저 끝까지 탐색하는 건 자유야. 그렇지만 고음만이 노래의 깊이에 다다르게 하고 감정을 해석하게 해준다는 건 미신이야. 그러니까. 나의 가청 범위를 넘진 말아줘.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음향은 소음으로 들리니까. 

 

 

이충걸 (에세이스트, 인터뷰 집 ‘질문은 조금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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