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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9
by 조동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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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09작성자  by  조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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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징후를 보인다. 일종의 홍역에 비유하기도 하는 그 오버된 감성과 반항의 게이지는 내게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당시 즐겨보던 프로그램은 단연코 <젊음의 행진>. ‘짝꿍들’이라는 전속 무용단도 있는 청춘의 대표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1987년, 청조끼를 입은 낯선 얼굴의 청년이 <젊음의 행진> 무대 위 계단에 앉아 담담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스타일의 곡과 창법으로 수줍은 듯 자신의 데뷔곡을 불렀다.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 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엇갈림 속의 긴 잠에서 깨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묻진 않아도

나는 알고 있는 곳

그곳에 가려고 하네

 

근심 쌓인 순간들을

힘겹게 보내며

지워버린 그 기억들을

생각해 내곤 또 잊어버리고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단 한 번의 TV 출연뿐이었지만 라디오 전파를 타고 한 곡 한 곡 은은히 울려 퍼지던 그의 앨범. ‘유재하’라는 예쁜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고, 라디오에서 나오기만 기다리기에는 노래들이 너무 좋아 테이프를 사서 다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유재하의 노래들은 이상하게 단 한 번도, 단 한 곡도 질리지 않았다. 한 곡 한 곡 정성스러운 편곡, 가슴을 건드리는 가사며, 수려한 멜로디까지. 지난날, 텅 빈 오늘 밤, 우리들의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대 내 품에, 가리워진 길, 우울한 편지, Minuet... 놓칠 곡이 하나도 없었다.

 

이중 ‘사랑하기 때문에’는 조용필의 7집 앨범에서 먼저 발표되었고, ‘가리워진 길‘은 1986년 김현식에 의해 먼저 발표되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잠시 함께했고, 김현식의 밴드로 시작했다가 독자적인 밴드가 된 ‘봄 여름 가을 겨울’에도 함께 했기에, 이미 그는 당시 암암리에 ‘뮤지션의 뮤지션’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가 한양대 작곡과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듣고는 당시 가요로써는 낯설던 현의 소리들이 왜 그리 아름다운지 이유를 알았다.

 

엇박으로 시작하는 그의 노래들을 두고 유재하는 ‘박자도 못 맞추는 가수’라는 평을 받기도 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발매 시에는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발매 후 평론가들의 평가도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그 무명으로서 자괴감의 시간은 ‘지난날’의 히트로 모두 지워졌다. ‘지난 옛일 모두 기쁨이라고 하면서도 문득문득 흐뭇함에 젖는 건 왜일까~’, ‘생각 없이 헛되이 지낸다고 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아닐테니까~~’ 같은 가사의 맛, 딕션의 맛에 나는 푹 빠져버렸다.

 

그 당시, 내 기억에 음악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에서는 항상 ‘지난날’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지난날 잠실의 거리들이 눈과 귀에 선하다. 

 

이 시대 최고의 작곡가로 회자되게 만들었으며, 늘 최고의 명반으로 뽑히는 그의 유일한 앨범을 만든 유재하. 그런 그도 당시에는 이 ‘명반’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항상 ‘다음 앨범을 준비해야지’ 하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는 내게 약간의 용기와 희망이 되었다. ‘이런 천재 작곡가도 작품에 교만하지 않는구나, 뮤지션에게 자괴감은 숙명이구나...’ 하면서.

 

유재하는 1987년 11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 친구가 취해 몰던 자동차 옆자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짧은 음악 인생이 비록 아쉽지만, 단 한 장의 앨범이 세상에 남긴 영향은 대단하다. 그의 음악을 모르는 이는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이는 없을 것이다.

 

오늘 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듣는다.

들을 때마다 슬프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음악은 영원하기에.

슬픔은 아름다움의 그림자이기에.

 

 

조동희 (작사가,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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