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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
by 박세회

사랑의 시작 같은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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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16작성자  by  박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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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2월 11일 오전 열시가 조금 안된 시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 네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컨트롤 룸에선 조지 마틴과 엔지니어 마크 르위슨 그리고 보조 엔지니어 리처드 랭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한 세션, 오후 한 세션, 내친김에 저녁 세션까지.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10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네 명의 남자는 자신들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에 들어갈 14곡 중 10곡을 녹음했다. 레코딩 기록은 585분. 이날 녹음된 곡들은 미래에 태어날 수많은 이들의 청춘을 결정지었다. 개중에는 물론 나도 포함이다. 특히 ‘I Saw Her Standing There’에서 시작해 ‘Please Please Me’, ‘Do You Want to Know A Secret’으로 이어지는 한낮의 태양 같은 사랑 노래들은 한창 스펀지처럼 세상의 감정들을 학습하던 나의 십 대를 지배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후에 다른 어떤 음악으로 치료를 받아본들 사춘기의 귀를 지배했던 사운드에서 헤어 나올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 이건 그 후에 내가 비틀즈의 다른 여러 앨범들을 사랑하면서도 유독 백비트 시절의 비틀즈를 첫사랑처럼 항상 그리워하는 이유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댄스 홀 건너편에 서 있는 열일곱 살 소녀보다, 소년의 심장을 더 두군거리게 하는 건 이 세상에 필요치 않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번거로워지는 나이가 되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틀즈의 팝 넘버들에 사춘기를 지배받은 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동네 이리(Erie)에서 아빠의 전자제품 잡화점 잡무나 도와주던 아마추어 드러머 가이 패터슨은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지미 매팅글리의 밴드 ‘원더스’에 대타로 참여하게 된다. 원래 지미의 밴드에서 드러머였던 친구가 사고를 당해 팔이 부러져서다. 동네 댄스홀에서 열린 경연 당일, 제대로 리허설도 해보지 못하고 오른 밴드가 연주할 노래는 지미의 자작곡인 미드 템포의 잔잔한 러브송 ‘That Thing You do’. 그러나,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가이는 드럼 스틱으로 템포 사인을 보내고 136bpm의 백비트 로큰롤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밴드 멤버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는다. 보컬리스트이자 밴드의 프런트맨인 지미가 드럼 쪽으로 다가가 ‘너무 빨라. 줄여, 속도를 줄이라고!’라며 화를 내보지만 가이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다. 쿵따딱쿵딱, 덩기덕쿵덕. 1마디에 1번 스트로크를 하며 겨우 따라오던 기타들이 빠른 박에 맞는 리듬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워킹을 하던 베이스가 춤을 춘다. 경연 따위는 본 척도 않고 먹고 마시기 바쁘던 관객들이 하나 둘 무대 앞으로 몰려들어 몸을 흔들자,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던 보컬 지미 역시 벅찬 가슴의 감정을 소리에 담아 외치기 시작한다. “난 이런 사랑은 해본 적인 없고,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렇게 팝 멜로디의 로큰롤이 완성된다. 

 

이 장면은 완벽한 기타 팝 넘버의 탄생을 은유적으로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지미 매팅글리는 속 좁고 재능 없는 인물 정도로 그려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대단한 프런트맨이다. 그는 사실 ‘That Thing You do’의 매혹적인 멜로디를 만든 작곡가이자, 사랑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사는 남자의 마음을 적절하게 풀어낼 줄 아는 작사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꾸밈없는 보컬은 얼마나 예쁜가. 문제는 이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재능과 예쁜 목소리를 동시에 가진 사람들의 성향이다. 이들은 항상 자신의 보컬을 뽐낼 수 있는 포맷, 사운드가 많이 비어 있고, 목소리의 음역대와 겹치는 악기가 적은 편곡을 선호한다. ‘That Thing You do’가 미드 템포의 발라드 넘버였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 로큰롤 비트를 입힌다면? 우린 이미 그 정답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멜로디 메이커이며, 최정상급의 보컬리스트인 폴 매카트니는 14살 때 극장에 <The Girl Can’t Help It>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충격에 빠졌다. 종종 ‘최초의 로큰롤 뮤직 영화’로 일컬어지는 이 영화 속에서 리틀 리처드가 ‘레디 테디’를 부르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만난 존이라는 친구 역시 <The Girl Can’t Help It>을 사랑했다. 존 역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최고의 멜로디 메이커였지만, 그의 피에도 이미 리틀 리처드가 흐르고 있었다. 지미 매팅글리의 멜로디를 쓸 줄 아는 두 사람이 가이 패터슨의 로큰롤 템포를 꿈꾸며 비틀즈가 시작된 셈이다. 

 

이 스타일이 특이하게도 한국 가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조합이라는 점은 어린 시절 나의 미스터리였다. 16마디 짜리 벌스에 16마디 짜리 후렴. 종종 브릿지가 하나 혹은 아주 특이한 경우 두 개뿐인 로큰롤 리듬의 팝송, 짧으면 2분 30초, 길면 3분 30초의 소년기적 노래들은 어째서 한국에선 자생하지 못한 것일까? 거기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유래 없이 각박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익히 봐왔던 영미권 틴 무비들을 떠올려보자. 예를 들면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같은 영화 안엔 미식축구가 있고, 치어리더가 있고, 드레스가 있고, 수트가 있고, 파티가 있고, 로맨스가 있다. 십 대로 분한 히스 레저가 역시 십 대로 분한 줄리아 스타일스를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그 배경에 ‘I Saw Her Standing There’가 흐른다면? 아니다. 영화 속에서 히스 레저는 친구에게 매수되어 줄리아 스타일스를 꼬시는 역할이었으니 ‘Do You Want to Know A Secret’이 낫겠다. 마치 그 장면을 위해 만든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처럼 느껴질 것이다. 팝 멜로디의 로큰롤은 십 대의 사랑, 혹은 다른 어떤 가치관의 방해도 받지 않는 이십 대 초반의 사랑,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호르몬의 순수한 욕망이 소리의 형태로 육화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폴 매카트니의 멜로디를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한국의 아이들은 순수한 욕망의 시절을 학원과 참고서에 다 빼앗기고 있으니, 로맨틱 코미디 같은 노래를 쓴다는 게 힘들 건 아닐까? 아주 오래전 한 드라마 작가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제일 쓰기 어려운 게 십 대 혹은 이십 대의 로맨틱 코미디에요. 십 대도 힘들지만 요새는 이십 대도 너무 힘들어서 달콤한 얘기를 그릴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의 일이 수십 년 동안 한국 음악 세계에서도 벌어진 건 아닐까? 

 

우리 가요에 그런 노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송골매 2집의 타이틀곡 ‘어쩌다 마주친’과 3집의 타이틀곡 ‘처음 본 순간’이 대표적이다. 항공대학교의 스쿨 밴드 활주로로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은 배철수는 밴드 송골매를 결성하고 첫 번째 앨범을 발표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밴드 송골매가 날개를 단 것은 배철수가 가요제 시절부터 눈여겨 봐왔던 홍익대학교 스쿨 밴드 블랙테트라 출신의 구창모를 영입하면서였다. 

 

잊지 말 것. 배철수의 락 스피릿 위에 구창모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얹힌 순간, 우리 가요에서 가장 눈부신 사랑 노래들이 태어났다는 사실 말이다.

 

 

박세회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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