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브라토, 또는 바이브레이션의 무수한 초상(肖像) > 칼럼 아카이브K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칼럼

칼럼

2023.08.24
by 이충걸

비브라토, 또는 바이브레이션의 무수한 초상(肖像)

페이지 정보

작성일 23-08-24작성자  by  이충걸 

본문



 

직선의 동요만 부르던 그때, 후두를 위아래로 움직여 음정을 터는 가수들이 나는 참 신기했다. 혀와 후두개와 인두 벽이 목의 외부 근육으로 전달하는 움직임, 꿀렁거리는 턱밑 근육 시스템은 어린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목소리를 왜 떨지? 모든 음표는 꼬리가 벗겨지면서 비브라토를 원하는 걸까? 혹시 현악기 연주자들을 따라 한 걸까? 아님 그 반대? 가수에겐 비브라토가 제일 큰 무기일까? 가수가 특정 모음에서만 비브라토를 쓴다면 잘 못 배워서일까? 낮은 음 비브라토는 왜 자주 흔들릴까? 그런데 비브라토와 바이브레이션의 차이는 뭐지?

 

알고 보니 지구의 모든 가수가 장르 불문 일정량의 비브라토를 구사하고 있었다. 아예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비브라토가 시대의 표현력이자 보컬의 성배인 것처럼. 그게 없는 가수는 보컬 테크닉이 떨어지는 것처럼. (세상엔 비브라토 훈련 시스템이 따로 있는 게 분명해.)

 

평생 별의별 비브라토를 보았다. 페인트 브러시로 지우는 것 같은 비브라토, 바람의 깃발처럼 코드를 가로지르는 비브라토, 달콤하게 흐르는 버터 같은 비브라토, 블루스 스타일의 바이올린 비브라토, 너무 작은 파동을 그려서 농장의 아기 양에게 배운 것 같은 비브라토, 하도 과도해 차라리 유머스러운 비브라토, 턱을 딱딱거리는 스타카토 비브라토, 유령처럼 격렬하게 떠는 비브라토, 엔진 같은 금속적 비브라토, 바느질의 감침질처럼 휘감는 비브라토...

 

그런데 비브라토에는 횡격막 지지, 열린 목구멍, 부드러운 입천장, 혀의 위치, 모음 배치, 공명과 이완의 균형이라는 해부학적 요소가 있지만, 가수의 목이 가늘거나 두껍거나, 갑상선 연골이 도드라졌거나 후두 돌출부가 밋밋하거나 아무 상관 없어 보였다. 인체 생리학은 다 다르되 가끔 무의식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비브라토를 타고나는 가수도 보인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하는 여덟 살 아이처럼 그냥 주어진 것 같은 비브라토는 학습된 기술이라기보다 거의 계시 같다. 성대가 알아서 진동하며 원하는 속도로 생성한달까. 정말이지 진짜 비브라토는 헐떡이는 개처럼 복부를 움직인다고 위조할 수 없다. 그건 단지 발성 매커니즘의 신경근 흥분이나 턱과 혀의 교감 신경 운동이 아니니까.

 

빼어난 가수들은 비브라토를 보컬 스타일로 차용한다. 그런데 목소리의 색상과 질감이 다르듯, 비브라토도 다 달라서 서로 복제할 순 없다. 공기압과 정밀도 사이에서 폭발하는 윤시내의 비브라토, 멜로디에 주어진 공간을 고려하지 않으나 고음에 특히 해방감을 주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비브라토, 완만하게 증가해선 피치를 부드럽게 흐리는 빙 크로스비나 한상일의 비브라토, 촘촘한 스윙으로 밀어 부치다 음색 미학 자체를 보여주는 임희숙의 비브라토, 조밀한 트레몰로 사운드를 시뮬레이션하듯 하는 윤복희의 비브라토, 공습경보 1분 뒤 터지는 이선희의 다이너마이트 비브라토, 꼭 크리스토퍼 월켄의 연기 같아서 설명할 수 없으되 보고 듣는 것으로도 충분한 린다 론스타트의 비브라토...

 

’오 홀리 나잇’를 부르는 머라이어 캐리의 재능은 고음의 비브라토 없이는 밍밍할 것이다. 음표에 분포된 필수 요소인 채 비브라토는 머라이어식 노래의 접근 방식을 구별 짓는 특성이라서. 마리아 칼라스가 ‘토스카’에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며 연인의 삶과 자기의 미덕을 간청할 때, 톱니 같은 비브라토 사이에 끼어 찢겨질 것 같다가, 파바로티의 ‘나폴리’를 들으면, 세상에 비브라토가 없으면 노래가 얼마나 맛이 없었을까, 싶었다. (파바로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은 그가 어떤 음표에 비브라토가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 아주 신중하다는 걸 알게 해주었지.)

 

비브라토는 종종 특정 가수에게 개별화되었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 제랄드, 루이 암스트롱은 모두 비브라토를 완전히 다르게 사용했다. 비브라토는 또한 노래의 목숨이기도 하다. 에디트 피아프가 저성장한 발육 부진의 몸에, 빈털터리 같은 얼굴로 노래할 때 그 비브라토의 마리아쥬는 생생한 슬픔과 원시적 기쁨 사이의 마찰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서양 전통에서 비브라토는 마이크 없는 시대의 증폭 시스템이었다. 진동하는 공기 속에서 볼륨을 부풀려 오케스트라를 뚫을 만한 사운드로 출력하고 전압을 높이는 가수의 생리적 효과. 그렇다고 모든 단어 모든 구절에 비브라토를 구사할 수도 없다. 아주 빠른 구간의 음표는 비브라토 속도의 이탈을 수용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비브라토는 그래서 적을수록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안티 비브라토 운동이 휘몰아쳐 직선으로 부르는 노래를 칭송한다. 음색의 억양을 덜어낸 채 모든 음표를 곧게 펴는 노래가 마냥 순수하다고. 밥 딜런이나 유재하, 존 레논이나 쳇 베이커의 소극적인 비브라토는 뭔가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듯 취약하게 들린다. 그런데 가끔 두께감 없는 목소리가 그들을 전설로 만든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들 노래는 오페라가 아니라 대화에 가깝기도 하고. 아무튼 그들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음향 정보가 적은 목소리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사실 비브라토는 늘 주변에 있다. 목소리는 공기가 통과할 때 진동하기 때문에. 스트레이트 사운드에도 비브라토는 약간 있다. 그래도 세상에는 참아줄 수 없는 비브라토라는 게 있다. 목사님이 억지 비브라토를 제조해 음정 오류의 찬송가를 부르면 꼭 그분의 생목과 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합창단을 궤멸시켜 버리는 무지막지 비브라토는 꼭 공연을 망친 엿장수 같았고. 또 어느 남자 트로트 가수는 성대 덩어리가 너무 두꺼운지 비브라토 높낮이 범위가 반음을 초과한 데다 파형이 너무 넓어 부정확한 튜닝에 내성이 없는 나는 솔직히 너무 고역스러웠다.

 

고음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비브라토는 고전적이거나 오페라적인 접근 방식을 따른다. 그는 아주 서정적인 테너인데도 어마어마한 성대의 장력과 귀를 사로잡는 공명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낮은 음에서 숨이 멎을 듯 일렁거리는 비브라토는 그게 성대의 결함인지 약점인지 약한 흉성 때문인지와 상관없이 비브라토가 목소리에 가져다주는 자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사람의 세월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윽고 알게 된다. 비브라토는 음표를 따뜻하게 덥히는 색깔이자 표현력을 위한 터치라는 걸. 가수의 목소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고, 노래의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하는 표정이라는 걸. 가수의 미학 스타일이나 ‘문체’ 선택이 아니라 청자의 경험을 완전하게 채우는 세부 사항이라는 걸.

 

결국 비브라토는 취향과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이 지금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어떤 효과를 원하는지에 달려 있다. ‘나노’ 초로 요동치는 이 세계의 파동 속에서.

 

 

 

이충걸 (에세이스트, 인터뷰 집 ‘질문은 조금만’ 저자) 



공유하기

© www.archive-k.com
Total 24 / 1 page
검색 열기 닫기
게시물 검색

칼럼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