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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3
by 박세회

원체험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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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3작성자  by  박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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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가수가 로데오에서 Mercedes 몰 때, 우린 밑바닥에서 step by step. Baggy jean, 무지 티에 스타킹 캡. 조치원 지각생 자취방은 비가 새. 주중엔 미대생 주말엔 입시반 선생 동네로 컴백하면 두 걸음은 삐딱해.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봤던 언더그라운드 스테이지 그건 기대 이하. 그때가 트리거 블루오션인가 질럿 한 부대 센터에 두고 PC방 떠나 공책과 연필 buying. 들어선 랩 게임 초입 텃세 빼면 널찍하이 출구전략은 애초에 없지 아예. 핏속에 산소를 위로 다 보내 적어 보내 첫 줄을 뱉어보네. Yo 이제부터 내가 랩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압구정에 본가를 두고 홍익대학교 조치원캠퍼스(현 홍익대학교 세종캠퍼스)에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는 한 미대생이 랩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그린 가사다. 그는 이제 막 랩을 뱉기 시작해 자기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얼굴에 여드름이 솟을 정도로 쪽팔린 실력이었지만, 머릿속에는 ‘P-Type, UPT, 테디, 개리’의 벌스들이 흐른다. 출구전략도 없이, 힙합 제국의 거대한 땅에 깃발을 꽂은 선구자들의 뒤를 따르기 위해 ‘고시원 모드’로 가사를 써 내려간다. 언제나 내 마음속 국내 힙합의 최정상 래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개코의 이야기다. 


개코의 친구도 비슷한다. 눈치작전에 겨우 성공해 재수 삼수 없이 현역으로 대학에 들어가 ‘수염부’라는 랩 동아리을 만들고 랩 옹알이를 시작한 최자의 머릿속엔 ‘DMX, Nas와 영화 belly’가 있었다. 영화 [벨리]는 DMX와 Nas가 주연을 맡은 미국의 범죄물. 당연한 얘기지만, 랩 음악들이 러닝타임을 가득 채운다. 친구였던 두 사람이 한국 최고의 힙합 듀오 ‘다이나믹 듀오’를 만든 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스콰이어]의 피처 디렉터로 개코를 만나 인터뷰하던 때가 기억난다. 그는 힙합의 플렉스(flex) 문화에 대해 비판만 할 것은 아니라며 “(플렉스 가사를 쓰는 친구들은) 미디어의 자본 미화에 선동된 것도 있겠지만, 사실 정말 힘든 시절을 보내서 그런 것이기도 해요. 대체로 힙합을 하려는 요즘 세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부모님들이 빚이 있거나 가정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라고 말했다. “다듀(다이나믹 듀오)는 강남에서 태어났고 운 좋게 용돈 받으면서 살았고, 힙합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라면서.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때 우리가 기회를, 정 말 큰 행운을 잡았구나. 당시에는 이 장르에서 활동하는 팀이 별로 없어서, 조금만 튀어도 사람들이 진짜 좋아했어요. 아직 기준이 없었으니까요. 자리 잡기가 훨씬 쉬웠죠”라고. 문화는 그렇게 넓은 지역에 펼쳐져 번지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강남은 더 정확하게는 한강 쪽에 더 가까운 강남이다. 압구정, 신사, 논현이 그가 말하는 좁은 강남이다. 


순수 미술이나 문학 쪽의 창작자들은 종종 ‘예술적 원체험’이라는 단어를 쓴다. 어린 시절 너무나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크리에이티브의 신경들이 작동할 때마다 구애받게 되는 체험을 말한다. 여기서 ‘구애’는 사랑을 애걸하는 걸 뜻하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어떤 거대한 내적 동기이면서 가끔은 창작의 결계처럼 작동한다. 난 아마도 개코가 “형의 유학생 친구들이 방학 때 한국에 오면서 가져왔다”던 앨범들을 듣고 그런 원체험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직 힙합 뮤지션도 아닌 대학생이 PC방에서 게임 한 판 하는 데 죄의식을 느끼거나, 메모지를 들고 다니며 떠오르는 노랫말들을 적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모바일의 경험을 너무 저렴한 값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종종 ‘지역’의 영향을 가볍게 여기곤 한다. 그러나 원체험이 일어나는 곳은 대체로 오프라인이며 꼭 스탕달 신드롬처럼 찰나에 벌어지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최자의 가사에서처럼 ‘압구정 샤델리에서 죽 때리다 PC방 아님 두루넷 깔린 친구 집에서 밤새 vidnet digging rap 뮤비 보며 뒹굴’었던 경험 역시 원체험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비슷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인천구장과 맞붙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걸어서 20여 분 걸리는 동인천으로 놀러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사하라의 멤버들이 운영하던 ‘휠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친구들과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기타와 앰프를 사고, 수업을 빼먹고 음악감상실 ‘심지’에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죽돌이’를 자처하던 그때, 합주실에서 마주친 해당화라는 이름의 ‘여성 메탈 그룹’을 남몰래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그 멤버들 모두 우리보다 두 살에서 세 살이 많았는데, 언젠가 [핫뮤직]에 와일드로즈와 함께 거론되는 걸 보면서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자’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는 1991년부터 1995년 사이에 동인천 지역을 떠돌았던 한 청소년의 고백이다. 그는 나중에 음악 평론가가 되었다. 차우진의 이야기다. 그가 쓴 이 글은 음악 웹진 [웨이브]의 ‘지역의 음악 신’에 대한 특집 기사 시리즈 중 인천 편에 실렸다. 1993년 이후 인천의 메탈 신의 위세는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차우진 씨가 음악평론가가 될 수밖에 없는 내적 동기는 그 시기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거대한 감정으로 가득 찬 오프라인의 경험들은 어쩔 수 없는 물리적 이동의 한계에 갇혀 하나의 신을 만든다. 당연한 얘기다. 인천이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시애틀’로 불렸던 이유다. 비슷하게는 1990년대의 홍익대학교 앞, 비슷한 시기의 부산대학교 앞이 있을 것이다. 압구정도 마찬가지다. 압구정의 유학생 형들이 들고 온 힙합 세계의 신 문물들은 당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힙합 1~2세대들의 영혼에 평생 지울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원체험에 관한 얘기기도 하면서, 그런 모험에 가까운 경험으로 가득 찬 공간의 필요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 곳에서 누가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그것에 놀라 무언가를 골똘히 만들어내고 있을까? 더는 새로운 음악이 있을 수 없다는 ‘발전 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잔잔한 기다림의 흥분만은 포기할 수가 없다.  

 

 

박세회 (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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