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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이충걸

긴 이야길랑 그만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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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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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녹을 정도로 더운 8월, 부산 가는 열차를 탔다. 열다섯 살. 밤이었고, 조도 낮은 주황색 백열등이 여름의 피란민들로 빽빽한 객실에 수증기처럼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나는 완전히 텅 빈 마음으로 먼지로 덮인 것 같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이 맥주를 마시고 볼륨 높여 떠드는 객실 중앙에서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들고 상체를 구부린 채 주파수를 조절하는 시멘트 회사 유니폼의 아저씨를 보았다. 그 얼굴은 분명 흥분에 휩싸여 웃고 있었다.

 

졸린 공기 속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앉아 있던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래는 먼지투성이 마을에서 시간 여행 터널로 나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누구와 헤어진 적도 없었던 나의 첫 이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긴 이야길랑 그만둬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나요
지금 이야길랑 그만둬요 누가 빼앗고 잃었나요
사랑하는 사람아 처음으로 돌아가요
깊은 상처 묻어 두고서 처음으로 돌아가요
긴 이야길랑 그만둬요 누가 울고 누가 웃나요
지금 이야길랑 그만둬요 누가 떠나고 남았나요

 

박경애 <상처>



음악 자체는 음표와 공백의 조합일 테지만, 가사는 필시 말로 드러내거나 침묵할 수 없는 무엇을 표현할 것이다. 음표와 단어 사이의 공간은 내가 겪지 못 한 방식으로 나 스스로와 관련되게 해줄 것이다. 그땐 누굴 만난 적 없으니 헤어지지 않았고, 이별할 일도 없었으니 괴로움 같은 건 알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사를 경험한다는 것. 인지한 경험에 바로 닿는 가사의 출처. 나는 스피커에 머리를 대듯 지직거리는 노래가 나를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 박경애의 ‘상처’를 찾아 들었을 때는 서른 넘어서였다. 그때 내 눈앞에서 굴러가는 감정은 단순한 회상의 감각이 아니었다. 열다섯 살이던 나와의 만남, 자라버린 나, 멀어진 나, 그리고 지금 맞는 세상의 연약함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부동의 과거를 나에게 돌려주는 약속과 닮았을 것이다.  

 

노래 자체가 엄청난 양감과 감정의 무게를 지녔다 해도 가사가 없으면 무슨 효용성이 있다 할 것인가.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를 들었다 해도 그에 따르는 이야기가 없으면 작품의 내러티브가 어디까지 포함하는지, 작곡가가 음표에 부여한 의도는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작곡가가 섬세한, 장난스러운, 위협적인 같은 형용사의 뉘앙스를 음표에 부여했다 해도 온통 오리무중의 어둠 속에서 헤맬 것이다.

 

가사는 음악의 언어. 청자(聽者)를 다른 시간과 장소로 실어 나르는 고속도로. 음악과 가사는 서로를 격려하고 작동하며, 몇몇 단서가 누락되어 도저히 같을 수 없는 감정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든다.

 

비틀즈의  "Here Comes The Sun"을 들으면 여지없이 음표와 낱말의 시너지를 맛본다. 그늘 속의 경쾌한 음률은 "Here comes the sun and I say, it's alright" 단락 자체로 느껴진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어. 그래서 난 말해. 괜찮다고.” 이 노래가 애조 띤 마이너 키였다면 어떤 메시지로 들렸을까? 가사가 "그리고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어. 나는 말해. 모든 걸 불태워버려”였다면?

 

그렇지만 가사는 그 의미보다 자주 멜로디와 하모니의 매개체인 채 부차적인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렇다고 가사가 마땅한 예우며 배려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자체로 음악적 테크닉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가사의 영향이 음악 자체보다 클 때도 자주 있다. 왜냐하면, 노래는 단순히 사운드의 세계 또는 소리의 조합이 아니니까. 음악에 참여하는 마음은 개개인마다, 계절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노래 가사가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 증폭된 평화의 감각. 보다 심화된 단계의 존재감. 우리가 찬송가며 애국가를 노래할 때 더 큰 집단의 일부로 느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때 개인과 집단은 동시에 단어와 노래가 엮인 바로 그 순간을 헤엄친다. 너무나 단순하고 심오하게도.

열다섯 살의 추억 위에 너무나 많은 층이 쌓였다. 그러나 기억을 서술하는 것은 평소의 감각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일 뿐이다. 가끔 ‘상처’를 들으며 과거와 이어질 때, 십 대 시절의 삶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세상이 차라리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실체 없이 사라진 여름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런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언어가 음악에 내러티브와 디테일을 부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미묘한 정서적 복잡성을 주고, 음표와 코드 속에서 파토스의 깊이에 취하게 만드는 것.

 


이충걸 (전 GQ KOREA 편집장, 현 스누트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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