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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4
by 우정호

가수 비가 배우로 미국 무대 노크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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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04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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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 한국 가수 최초 일본 도쿄돔 입성, 미국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이라는 유의미한 기록을 남기셨습니다.  

 

비 : 아, 네. 도쿄돔 공연은 딱 한 번 했는데, 너무 화려했고, 너무 감사했어요. 도쿄돔은 일반적으로 거의 한 4만 명에서 5만 명 정도 관객이 차야 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쨌든 도쿄돔 공연할 때 저희 회사랑 프로모터도 의견이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우리 쪽에선 그 정도는 못 채울 거라 조금 더 작은 규모 공연장에서 2, 3회 공연을 매진시키고 싶다는 입장이었고. 사이타마 아레나라는 곳이 도쿄돔 다음으로 큰 공연장이었는데 거기서 몇 회를 진행하자는 생각이었고, 프로모터는 ‘아니다, 이건 어떤 상징성이 있으니까 진행하자’는 입장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기무라 타쿠야 있던 SMAP이라는 그룹이 늘 도쿄돔을 꽉 채워서 많이 했죠. 그런데 SMAP은 제가 어렸을 때 이태원이나 동대문에서 비디오테이프 구해가지고 보던 가수들 중 하나였거든요. 마이클 잭슨, 아무로 나미에, SMAP... 춤을 공부를 해야 되는데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고, 레퍼런스가 없는 거예요. (한숨) 안 되겠다. 그래서 동대문 가서 ‘아저씨...’ (웃음) 

 

그런데 꼭 가면 웃긴 게 있어요. 중학생이 가서 ‘아저씨’ 이러면 100명 중 99명은 야한 동영상인 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래? 이거 줘?’, ‘아니, 저는 이게 아니고..’.(웃음) ‘혹시 아무로 나미에나 마이클 잭슨, 마돈나 공연 테이프 있나요?’그러면 ‘이야, 그래? 이거 아니고?’ 이런 식으로... 

 

저희가 안무 스킬들을 익힐 때 이제 ‘딴다’고 표현하는데, 그 공연 테이프들 보면서 익히고 숙지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거기 나오는 그런 도쿄 돔인데, ‘내가 여기서 공연을 한다고? 에이, 이건 아닌 것 같은데’했죠. 왜냐하면 도쿄돔 공연 전에 잠실 주경기장에서 했거든요. 도쿄돔이 거기보다 넓고 높아요.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해 본 저로서는 정말 사람이 어떻게 보이냐면 (손톱 끝 나타내며) 요만해요. 사실 가수로서는 적어도 한 5천 명 정도 규모에서 공연해야 제일 좋거든요. 눈앞에서 다 같이 시선 맞춰주고. 그게 제일 재미있어요. 5천 명에서 많게는 만 명. 그게 넘어가는 순간 공연하는 퍼포머 입장에서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안 보여요. 왜냐하면 폭죽을 쏴야 되기 때문에 거리도 안정거리를 유지해야 되니까 손 한 번 못 잡아주는 거죠. 연출에 따라서는 뭐 이를테면 카트를 타고 내려오면서 쭉 한 바퀴 돌기도 하지만 그건 손 한 번 잘못 잡았다가 사고 나면 또 안 되잖아요. 

 

그런데 5천, 4천, 많게는 한 8천 명까지는 아이 컨택이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잠실 주경기장이 저한테는 화려하고 좋고 기억이 남았는데, 내가 뭐 했는지 모르겠는 거계요, 2시간 동안. ‘도쿄돔은 이거보다 더 하지 않을까?’그런 생각 했는데, 일본에 계신 프로모터 분들도 워낙 프로셨고, 그래서 정말 도쿄돔을 꽉 채워서 했죠. 저한테는 정말 상징적이었어요. 말 그대로 일본 음악계의 심장이었는데.

 

-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은 어땠나요?

 

비 : 아,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두 가지로 나누어져요. 작은 곳이 있고, 만 석이 넘는 큰 곳이 있고. 미국 내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가수들만 했던 미국 맨해튼 심장부 안에 있는 4천~5천 석 짜리 공연장이 있어요. 거기서 공연을 하게 된 거예요. 원래 공연장을 잘 안 내주거든요.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얘가 뭔데 여기서 공연을 한다고 하지?’이렇게 된 거예요.  

 

당시 뉴욕에서 공연 진행했던 프로모터 분이 제 소개를 워낙 잘 해놓으셨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 덕분에 같이, JYP랑 만들어 나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어려운 문들을 통과할 수 있었고. 지금 JYP 사장님과 진영이 형님이 정말 노력 많이 하셨죠. 저를 어떻게든 더 미국 본토 내에서 더 보여주려고.

 

- 공연장엔 한국인들이 많았나요, 현지인들이 많았나요?

 

비 : 히스패닉. 그러니까 희한하게 남미분들이 많았어요. 그다음 퍼센티지로 따지면 당연히 우리 한인들이 반 정도 됐죠. 그리고 나머지 분들이 백인, 흑인, 히스패닉 섞여있던 것 같아요. 그때 기억이 많이 나던 게, 제 스승님인 진영이 형이 어떻게든 저를 성공시키고 싶으시니까 그냥 초대를 했던 거예요. 뭐 퍼프 대디, 그리고 오마리온(Omarion)이라고 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저스틴 비버 정도의 인기였고. 어셔도 왔죠. 그 당시 어셔, 오마리온, 크리스 브라운, 이렇게 세 분이 춤, 댄스로 1등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퍼프 대디는 당시로 따지면 미국의 진영이 형,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들 중 가장 큰 거목이 퍼프 대디, 제이 지였으니까. 저한테는 너무 꿈같은 현실이었고, 그러면서 거기 왔던 다른 언론들도 많이 놀랐고. 그래서 다음 날 지역 아침 신문에 1면으로 났던 기억이 있어요. 저한테는 너무나 감사했던 날이죠. 저도 지금 아이돌을 제작하고 있지만 진영이 형이 저를 위해서 정말 많이 서포트해 주셨구나하는 느낌을 받게 하는 공연이었죠. 

 

- 당시 일본이나 홍콩 같은 다른 아시아권 가수들은 해외 활동 스케줄을 미리 짜놓고 그에 맞게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비 씨의 경우 스케줄을 미리 짜고 그대로 진행했던 건가요?

 

비 : 네. 짜 놨는데 저희는 변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느 지역에서 좀 탄력받으면 그에 맞게 바로 넘어가야 한다거나 하는. 그래서 사실 처음 짜놓은 해외 활동 스케줄 대로, 플랜대로 쭉 갔으면 좋앗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어요. 당시는 진영이 형, 그리고 그 당시 JYP 사장님의 촉으로 많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 프로듀싱 중인 가수에게 비슷한 상황이 온다고 생각하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비 : 이게 양날의 검인데, 그 당시엔 의사결정권이 진영이 형, 그다음에 저에게 있었어요. 그런데 진영이 형의 감과 촉 때문에 그래도 뉴욕에서 공연을 하고 매디슨 스퀘어까지 간 게 아닌가... 만약 기존 타임 테이블 대로 움직였으면 그런 기회는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또 이게, 가수라는 직업은 공연하기 위한 감이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뭐, 스케줄 대로면 천천히 갈 수는 있었겠으나 타임테이블 대로니까 좋았을 거고, 결국 그때는 프로듀서인 진영이 형 감대로, 저도 제 감대로 있었고, JYP 사장님 감대로 많이 움직여 왔어요. 

 

쉽게 설명하자면 그런 거예요. ‘어? 동남아시아에서 반응이 좋은데? 여기에 좀 집중할까?’ 해서 한 달 막 활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광풍이 불어요. ‘일본에서 터졌어. 어? 일본 갑시다.’ 그래서 일본에서 가서 한 6개월 동안 일어 공부하고 막 이렇게 준비 딱 했는데 ‘어? 갑자기 미국에서 오라네?’ 그럼 사실 가 봐야 되잖아요. ‘잠깐만 기다려’ 그러고 또 미국으로 갔어요. ‘어? 여기 분위기 좋은데?’하면서 막 활동하다 보니까 이제 이미 다른 나라들에선 열기가 식은 거죠. 

 

그러니까 타이밍이라는 게 있잖아요. 커피를 마실 때 뜨거울 때 마셔야지 향이 있듯이, 다 식은 다음 마시느니 처음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는 게 낫지. 그러니까 그 타이밍들을 감 때문에 많이 놓치는 것도 있었지만, 분명히 그 감 때문에 제가 그래도 미국에서 공연을 해 보지 않았나. 

 

- 상황에 맞는 가장 유효한 선택지를 따라가야겠군요.

 

비 : 네, 뭐든지 타이밍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타이밍이 안 맞으면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너무 많으니까. 물론, 노력은 많이 안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좋으면 대성공을 할 때도 있는 거지만.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이를테면, 내가 수학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걸 공부할 땐 너무 즐거워서 2시간씩 공부해도 지루하지가 않다고 쳐요. 그런데 언어 영역은 시도 읽어야 하고 막 암기도 해야 하고 어쩌고저쩌고 (한숨) 죽네 사네 하면서 어떻게 1시간을 겨우 공부하고. 그럼 뭐가 더 공부가 되겠어요? 당연히 수학이 더 되는 거잖아요. 

 

그런 거죠. 그냥 열심히 했다가 타이밍도 잘 맞으면 좋은 거지만, 내가 언어 영역 열심히 안 했더라도, 갑자기 시험 문제에 내가 했던 것만 쫙 나오고, 수학은 2시간씩 매일 열심히 공부했는데, 문제가 너무 어렵게 나오면. 그건 타이밍이라고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진짜. 하나님한테. 내가 물론 노력은 했지만 나한테 너무 많은 걸 주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에 축하 공연 무대에 올랐을 때 크게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비 : 네, 중국에서 제가 활동을 또 많이 할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따지면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곳에서 저한테 폐막식에 좀 서줄 수 있냐고 했어요. 그래서 ‘무슨 소리냐, 중국 올림픽 폐막식인데 왜 내가 서야 하냐’ 그랬더니 ‘전 세계가 하나’라고 하는 거기 때문에 한국 아티스트 대표 한 명, 일본 아티스트 대표 한 명, 그리고 또 다른 나라 대표를 섭외해 공연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성룡 형님과 당시 유명했던 가수분들이 많이 나왔죠. 그래서 같이 노래를 하게 됐죠, 폐막식에서.

 

- 미국 진출 시 구체적으로 왔던 제안들은 어떠한 것들이었나요?

 

비 : 수많은 레코드사, 레이블들에서 왔어요. 유통사 통해 연락이 온 것보다 레이블들을 통해 왔어요. 이미 한 15년 전 일이고, 구체적인 이름을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하여튼 수많은 회사에서 연락이 왔었고, ‘그럼 그때 왜 음반으로는 진출 안 하셨죠? 음반을 왜 안 내셨어요?’라고 물어보신다면 당시엔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훨씬 더 컸어요. 그 당시엔 K-POP이 지금 같은 위상을 가진 시대는 아니었고, 할리우드에서 한참 아시안 배우들을 필요로 했던 상황이었어요. 그때 소니 픽처스, 유니버설,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같은 데서 그랬죠. 

 

미국의 음반 제작 시스템은 사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제 앨범을 내려고 그러면 투자자들이 없는 이상 제 돈으로 일단 앨범을 다 만들어야 돼요. 그 앨범을 갖고 뮤직비디오까지 찍고 그다음에 이걸 프로모션을 돌려야 돼요. 그래서 나랑 같이 할 사람을 또 찾고, 없으면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날아가죠. 그러니까 밥상으로 따지면, 밥상을 차리는데 반찬도 볶아야 되고, 밥도 안쳐야 되고, 국도 제가 끓여야 하는 입장인 거예요. 제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셋업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영화는 밥상이 이미 다 차려져 있으면 ‘어? 젓가락 놔도 될까요? 그다음에 숟가락 좀 놔도 될까요?’ 되게 간단하죠. 워너브라더스 같은 큰 배급사에서 영화 촬영에 대한 모든 시스템을 마련해 놓고, 감독님도 계시고 다른 배우들도 계시면 저는 대본만 쫙 달달 외우고 현장에 가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음악은 감독님도 제가 섭외해야 되고, 스튜디오도 섭외해야 되고, 뮤직비디오 장소 촬영장 섭외해야 되고, 뭐해야 되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제 입장으로서는 ‘어? 가만있어 봐. 앨범보다는 내가 빨리 미국 시장에 알리기에는 배우로서가 훨씬 입지가 좋겠는데? 가능성이 더 빠르겠는데?’ 해서 이제 오디션을 보고 처음 시작하게 된 게 제가 박찬욱 감독님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였죠. 찍고 나니까 저를 유심히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어요. 일본 배급사 중 워너브라더스 일본 지사장 어시스턴트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저를 되게 좋게 본 거예요. 그래서 저를 워너브라더스에 추천한 거죠. 그래서 워쇼스키 감독이 저를 보고 오라고 했는데, 여기서 더 웃긴 에피소드는 제가 안 갔어요.

 

- 왜 안 갔어요? 

 

비 : 월드 투어 할 때였는데, 제가 태국 다음 홍콩 공연하고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그 스케줄 중 하루 딱 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루를 써서 워쇼스키 감독 보기 위해 발리를 갔다 와야 되는 거예요. 아, 이거는 내가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전세기를 띄워서 갔다 온다고 해도, 발 살짝 담그고 나와야 되잖아요. 처음에는 저도 너무나 좋아했죠. 매트릭스를 찍은 감독이고. ‘나한테 이런 기회가 오다니, 가자’ 그랬는데, 하루 만에 왔다 갔다 해야 되는 상황이고... 

 

공연 끝나고 어떻게든 씻고 공항 가서 비행기 타고, 발리는 또 곧장 가는 게 없어요. 어디 경유해서 그날 다시 와서 홍콩이든 어디든 또 날아가고 내리자마자 헤어, 메이크업 받고 바로 공연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건 나는 할 수가 없다. (헛웃음) 당차게 못 간다 했죠. 그런데 워쇼스키 이장에서 그게 너무 재미있었나 봐요. ‘얘가 뭔데 내가 오라 그랬는데 안 왔지? 안 왔어. 그럼 기회를 줄게, 또. 언제 올 수 있어?’ 이렇게 된 거예요. ‘나 다음 주에 가능한데’ 그랬어요. (웃음) 그럼 4일 왔다 갈 수 있겠냐.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는 그냥 영상으로 오디션 보고, 세 번째 오디션을 가서 봤어요. 그러면서 ‘스피드레이서’를 찍게 됐고, 그다음에 워너브라더스랑 정식으로 미팅 하면서 ‘닌자 어쌔신’이라는 영화를 찍게 됐죠.

 

- 해외 진출이 있기 전, 국내를 돌며 진행한 단독 공연들은 팬들이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 : 월드투어 전에 잠실 체조경기장인가? 거의 한 3천 석 밖에 안 돼요. 그게 제 첫 공연이었고, 그다음에 부산에서 벡스코에서 공연했을 거예요.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쇼규모로 공연을 몇 개 더 했고요. 저희는 그때 너무 행복하고 좋았어요. ‘지방에서 우리가 공연할 수 있다니. 인지도가 이렇게 있는 건가?’ 그때 해외는 꿈도 못 꿨죠. 그다음에서야 태국이라는 데 가서 한번 공연을 해보자. 그렇게 된 거였고. 

 

2집 나오고 쇼케이스 하러 간 게 태국이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뒤로 드라마도 잘 되고, 앨범도 잘 되고 그러면서 아시아 투어 시작이 된 거죠. 그 전에 한국에서 첫 단독 공연할 때 제가 너무나 신경 쓰였던 게 ‘사람이 꽉 찰까? 3천 명이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너무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무대에 딱 섰는데 꽉 차 있는 거예요. 그 은색 불빛들... 제 트레이드 마크처럼 색깔이 있었던 게 은색이었거든요. ‘비’여서 실버였는데. 그런데 그게 꽉 차 있는 걸 보는 순간 ‘아, 너무 감사하구나’했죠. 

 

- 그런 엔돌핀은 누구나 겪어볼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네요.

 

비 : 다른 사람들이 ‘그게 어떤 기분이야?’ 하는데,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어떤... 명암이 갈리는 곳에 서 있는 기분인데. 그래서 참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힘든 것 같아요. 그 두 시간 동안 누리는 화려함과 내가 무슨 동작을 해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환호성. 그 시간이 딱 끝나면 혼자와의 싸움을 하는 거죠. 방 안에서 혼자, 샤워하면서 혼자. 

 

이게 여러분들이 연예인, 특히 가수의 직업이 얼마나 화려하고 좋을까 생각하시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그 두 시간을 위해서 가수들은 몇 개월씩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거거든요. 댄스 가수의 수명이 짧게는 4~5년이고, 지금은 한 10년 정도 되잖아요. 그걸 위해서 인생을 다 바치고. 그러다가 한순간에 외면받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그런 명과 암이 있죠. 

 

그러니까 저도 그때 좀 놀랐던 게 그거예요. 오, 그 기분이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 진짜 만나고 싶었던 여자의 손을 잡는 기분인가? 아니면 좋아하는 진짜, 뭐 내가. 로또 맞은 기분이야? 그런 거랑 차원이 달라요. 두 시간 동안 내가 누구인지 몰라. 그분이 오셨어요. 그분이 잠깐 오셨다가 ‘어?’ 이렇게 나가요. 그러니까 내가 뭘 했는지도 기억도 안 나고. 

 

- ‘내가 더 이상 국내 스타가 아니구나’ 체감했던 적은 언제인가요?

 

비 : 그렇게 얘기해 주시면 감사하고 대답하는 자체가 거만하고 오만하게 보이실 수 있고,  그러니까 이 질문 자체가 사실 조금 저한테 있어서는 부담스러운 질문인데요. 저는 홍콩에 비행기를 딱 타고 내렸을 때, 이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와, 새로운 시장이 열렸구나.’ 생각했어요. 

 

가요 프로로 치면, 거기 나올 수 있는 가수는 한 수백 팀 중 10팀 정도만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그중에도 1등 하는 가수는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 기분이었어요. 가요 프로에서 그게 어떤 프로가 됐든 1등 하는 게 제 소원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이루고 나서는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홍콩 공연 갈 때 이 게이트가 딱 열리는 순간 ‘아, 내가 아직 많이 모자랐구나. 그리고 나한테 있어서 기회는 더 있구나. 나는 이제 시작이구나’ 하면서 또 다른 꿈이 열리더라고요. 

 

공항 문이 열렸을 때 1층, 2층, 3층, 4층까지 사람들이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때도 저는 뒤에 누가 온 줄 알았어요. 그래서 ‘뭐지?’ 해서 봤는데, 다 홍콩에 있는 제 팬들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두려웠고,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 나 해외에서도 어떤 가능성이 있겠다. 나를 너무 낮게 보지 말자.’ 생각했죠. 저는 되게 저를 낮게 봤거든요, 늘. 그래서 더 노력하고 그래서 끈기 있게 했고. 정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을 정도로... 그때 그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요. 

 

 

[사진출처=레인컴퍼니]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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