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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4
by 최승원

대한민국 대중음악계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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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14작성자  by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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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대 말 대한한국에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본의 시티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가수와 음악제작자들도 앞다투어 시티팝이라는 장르를 리바이벌하기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다시금 재조명받은 아티스트 빛과 소금을 한국 시티팝의 선구자로 추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시티팝만을 했던 아티스트가 아니었으며, 그들의 히트곡 ‘샴푸의 요정’만으로 빛과 소금의 음악을 정의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등장한 전설적인 실력파 뮤지션들과 그 뿌리를 함께 한 살아있는 역사이며, 그들의 세련된 음악성은 세대를 뛰어넘어 아직도 유효하다. 독보적인 뮤지션으로서 대중가요계에 충격과 환희를 동시에 보여준 뮤지션이 바로 빛과 소금이다. 

 

(아카이브 K는 빛과 소금과 2020년 7월 인터뷰했다.)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박성식: 저희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어요. 남산 밑에 해방촌이라고, 지금은 굉장히 힙한 동네가 됐는데. 그때 같은 동네에 살았고 거기는 6·25 전쟁 이후에 실향민들이 통일되면 빨리 고향에 가려고 서울역에 가까운 쪽 남산 밑에다가 이렇게 터를 잡고 살던 지역인데 해방촌이 된 거죠. 그래서, 그래서 저도 실향민의 후예이고 장기호 씨도 실향민의 후손이고 해서 같은 동네에서 이렇게 살게 됐죠.
장기호: 그때 빨리 북으로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 서울역 근처에다 잡았던 거야? 

박성식: 통일... 통일되면.

장기호: 아, 통일이 되면.

박성식: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말귀를 잘못 알아들어서.

장기호: (웃음)

박성식: (웃음)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았고, 초등학교 동창이고, 그러니까 50년 넘었죠. 친구 사이인지가. 

 

- 두 분이서 음악을 지금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상상하셨나요?

 

박성식: (웃음) 상상 못 했죠. 저희는 둘 다 교회를 다녔는데 실향민들이 북에서 피난 내려올 때 교회가 통째로 교인들과 같이 내려왔다.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많이 접했는데, 복음성가 같은 것들이 60~70년대 대중음악 수준보다 굉장히 높았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런 복음 음악을 들으면서 자라오게 됐고, 그것이 음악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던 것 같아요. 

 

- 어렸을 적부터 악기를 잘 다루었는지?

 

박성식: 아니요. 저는 음대에 가고 싶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장기호: 네. 교회 때문에 음악과 친숙해졌고, 당시는 일반 대중음악보다 교회와 관련된 음악을 훨씬 더 접하기 쉬웠고, 수준도 굉장히 높았거든요.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많이 좀 아팠어요. 라디오로 음악만 듣고 있었죠. 그리고 박성식 씨하고 저하고는 걸어서 10~20분 정도의 거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전혀 음악 할 것 같지 않은 친구가 그때 통기타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죠. 

- 장기호 씨는 음반 가게를 하셨다고.

 

장기호: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하면서 취미도 살릴 겸 돈도 벌면서 효도도 할 겸, 학비도 벌 겸, 뭐 할 것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그 당시 레코드 가게가 상당히 많았어요. 70~90년대 이때가 전 세계적으로 팝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는데, 제가 거기에 꽂혀서 평생은 아니지만, 만약에 내가 레코드숍을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즐기고 돈도 벌면서 일거양득이 되겠구나 하고 시작을 했죠. 그런데 레코드숍을 차리려면 돈이 들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를 속였죠. (웃음)
박성식: 속인 게 아니라 아버님을 설득...
장기호: 설득, 설득했죠. 그래서 “아버님, 제게 투자해 주시면, 제가 한 달에 얼마씩 꼬박꼬박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니까 그 이야기에 아버지가 아무 생각도 안 하시고 그냥 주시던데요? (웃음) 그래서 한 달인가, 두 달만 드리고, 그다음부터는 안 드렸어요. (웃음)
 

박성식: 그때가 1980년. 제가 자주 놀러 갔었어요. 레코드숍을 아지트 삼아 거기서 놀고, 음악 듣고, 또 장기호 씨가 베이스 기타를 열심히 뜯고 그래서 (웃음), 대단하게 됐죠. 어떻게 저렇게 슬랩 베이스를.. 당시에 퀸시 존스의 ‘Ai No Corrida’라는 곡이 있었는데, 그 앨범이 나오면서 훵크, 디스코가 굉장히 붐업이 됐을 때였습니다. 그 앨범에서 듣는 베이스 소리랑 거의 똑같이 막 연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죠.

장기호: 거기서 이제 김종진 씨도 만난 거예요. 알고 봤더니 김종진 씨가 우리 초등학교 1년 후배였었죠. 당시 김종진 씨는 고3이었고, 레코드숍이 버스정류장 바로 앞이라서 사람들이 버스를 타려고 기다릴 때 즐겁게 버스 기다리면서 들으라고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죠. 그런데 김종진 씨가 이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데, 이런 표정으로 계속 안 가고 버스를 안 타고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가게에 들어와서 인사하고, 알고 봤더니 초등학교 후배고 같은 동네에 살았었구나 해서 김종진 씨와의 인연이 시작됐죠. 
 

- 그때 대부분의 매출이 팝 앨범이었죠?

 

장기호: 그렇죠. 팝 라이선스가 우리나라랑 계약됐고, 70~80년대의 빌보드 차트를 보면 정말 휘황찬란한 음악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라이선스가 나올 때마다 제가 청계천 가서 물건 떼오고 팔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가요는 지금처럼 음반이 제작되는 양이 많지 않았죠. 그리고 음반이 한 번 나오면 1년 이상을 끌고 갔으니까. 청계천 레코드 가게 주인들이 자기 오토바이로 LP 같은 걸 갖고 와서 새로 나온 것 있는데, 사시라고 해서 가격 보고 필요한 거 있으면 사들이고 했었죠. 그리고 그 동네가 사실 미8군이 바로 뒤에 있었거든요. 지금은 이전한 것 같은데, 미군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 음악들 접하기가 용이했고, 미군들도 가게에 많이 들어왔었습니다. 많이 팔지는 못했지만 (웃음)

- 어떻게 세션으로 데뷔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성식: 제 기억으로는, 장기호 씨가 또 인맥이 굉장히 넓은 편이에요. 쉽게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그런데 그 당시에 김광민 씨, 한상원 씨, 정원영 씨 저희 1년 선배 형들이거든요. 그 형들하고 이렇게 만나고 그러더라고요.

 

- 그분들과는 어떻게 아셨어요?

 

장기호: 그 당시 박성식 씨는 클래식 음악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고, 머리도 길고 파마하고 이렇게 베토벤 악보 딱~ 끼고 다녀서...
박성식: (웃음) 

장기호: 우리가 ‘박토벤’이라고 별명을 지어줬어요. 박토벤이라고. 이제 클래식을, 클래식 음대를... 그러니까 박성식 씨도 아마 그때 피아노과 재수를 하고 있었을 거예요. 같은 재수생이었죠. (웃음) 그런데 클래식을 하면서도 외국의 음악들을 나보다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아버님께서 미군 부대 관계 일을 하시면서 미국에서 히트하는 테이프 같은 것들을.

박성식: 카트리지라고 그러거든요.

장기호: 카트리지, 네, 맞아요.

박성식: 8트랙짜리, 그걸 많이 들었죠. 

장기호: 그러다가 어쨌든 김종진 씨를 만나게 되는데, 김종진 씨랑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제 가게에 꽂혀 있는 레코드판을 딱 보더니 “형,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요즘은 내가 밴드 성향이 베이스 연주에 많이 관심이 많다고 그랬더니... 그리고 그 당시에 대학가요제가 막~ 붐이 일 때거든요. 79년 ‘나 어떡해’부터 나오고. 그러니까 지금보다 오히려 그 당시가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밴드가 많이 나왔을 때죠. 그러면서 저는 이상하게 저음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래서 저음을 듣다가 음악에서 이상한 소리가 막, 타악기도 아닌데 뭐 이상한 소리가 막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지? 하고 봤더니 그게 이제 베이스에서 나오는 그 당시 한참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슬랩 테크닉이라고. 그래서 그 훵크 베이스 테크닉이 정말 궁금해서 그런 음악들만 찾아서 듣고 있었는데 김종진 씨가 우리 집에 한번 와 보겠느냐고. 그래서 아, 좋다고 갔죠. 집이 후암동 종점에 있더라고요. 들어갔더니 우리 가게보다 판이 더 많은 거야. 한쪽 벽에 쫙 레코드판이 쫙 꽂혀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 이제 이 음악도 들어 봐라, 저 음악도 들어 봐라. 그러면서 막 들려주는데 그때 제가 와, 아직 내가 음악을 듣는 시야가 굉장히 좁았구나. 그런데 김종진 씨는 어떻게 그 음악들을 다 알았는지 굉장히 다양한 종류와 장르의 음반들을 갖고 있었고 그다음 거기에서 제가 리 릿나워라고 하는 미국의 재즈 퓨전 기타 연주자의 앨범에서 [리얼 훵크]라는 앨범을 들으면서, 베이스 슬랩의 아주 진가를 보여준 마커스 밀러라고 하는 베이시스트가 있거든요. 지금도 유명한 베이시스트지만,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김종진 씨랑 이제 팝과 재즈의 상황에 관해서 관심을 더 갖게 되었죠.

 

그러다가 김종진 씨의 주변 친구들을 연결해서 가다 보니까 결국은 한상원 씨가 제일 먼저 저희하고 연결됐죠. 그다음에 이제 한상원 씨랑 얘기하다가 한상원 씨 집에 가서 음악 얘기하고 연습하고 그러다가 이제 김광민 씨가 왔어요. 그리고 그다음에 정원영 씨 만나고 그때부터 그분들하고 많이 교류했죠. 세션으로 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제 기억으로는 그때 한상원 씨, 김광민 씨, 저 그다음에 김종진 씨 이렇게 네 명이 함께 방배동 카페에 갔는데, 우연히 저희가 피자랑 맥주 먹으러 갔는데, 거기에 악기가 있었어요. 

 

펜더로즈 피아노라고 일렉 피아노가 있고, 베이스가 있었는데, 주인 형이 “야, 너희 한번 연주 한번 해봐라” 해서 잼을 하게 된 거예요. 즉석에서. 잼을 하다 보니까 그 주인 형이 이거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매주 요일 정해서 그날 너희가 연주해 주면 피자하고 먹을 것 다 주겠다고 해서 매주 갔죠. 그런데 이게 소문이 난 거예요. 당시 거기에 연예인들이 많이 왔었는데, 그중 한 분이었던 김현식 씨가 저희를 멀리서 보고 있었던 거죠.

 

- 그 카페 이름이 뭐에요?

 

장기호: 채플린, 방배동에. 지금은 없어졌죠. 

박성식: 채플린은 한남동 아닌가?

장기호: 거기 말고 방배동에 있었지 거기도 있었고. 

박성식: 응. 한남동에도 채플린이 있었지. 

장기호: 나중에 방배동, 한남동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당시로서는 아마추어였지만, 지금은 이제 대한민국 음악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들이 됐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그냥 별의별 것을 다 물어보고 연구하고 그랬었죠. 

 

- 채플린을 오가면서 마주쳤었던 다른 뮤지션들도 있으셨어요?


장기호: 제가 말씀을 드리면 옛날 뮤지션들. 예를 들면 최은옥 씨가 거기 자주 왔었고. ‘빗물’인가? ‘비’인가? 그 노래 부르셨던 분도 있었고. 그다음에 야구 선수가 왔는데 딱 보면 알 만한 당시의 셀럽이죠. 그런 분들이 좀 많이 왔었고, 김수철 씨도 아마 그때 거기서 뵀던 것 같아요. 

 

 - 굉장히 중요한, 유럽으로 치면 살롱 문화 같은 그런 공간이었네요. 

 

장기호: 그렇죠. 그리고 그 당시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나이트클럽 빼놓고는 클럽 카페에서 라이브 연주를 듣는 게 많지 않았거든요. 특히 나이트클럽은 주로 댄스 음악이지만 저희는 약간 실향민들이 통일되면 연주를 잘 모르면서 했지만. 그런 연주들 해 줬기 때문에 그 카페 분위기하고도 잘 맞았고 또 거기 오시는 분들의 정서하고도 좀 맞고 그래서 그거 때문에 잠시 저희가 재미있었죠.

 

 - 그 장소에서 김현식 씨를 처음 만나셨고, 이후 봄여름가을겨울이 결성되었나요?

 

장기호: 그때 김현식 씨가 저희를 봤어요. 한참 뒤에 제가 해방촌에서 동부이촌동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김현식 씨를 자주 뵀어요. 알고 봤더니 지금도 있는 서울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김현식 씨가 살고 있던 실향민들이 통일되면, 왼쪽은 삼익아파트인데, 저희가 살았었죠. 나중에 김현식 씨가 한동네 주민인 것을 알고, 김현식 씨는 그 카페에서 봤기 때문에 저 친구가 어떤 악기를 연주하고 어떤 음악적 성향이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김현식 씨는 나이트클럽에서 마치 황태자 같은,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었죠. 그리고 자기 밴드가 있었죠. 돌개바람? 

박성식: 돌개바람.

장기호: 돌개바람이라고 있었는데 그 새로운 밴드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음반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려고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한테 “네가 한번 팀 짜 볼래?”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박성식: 아, 제 생각에는 음악적 신분 세탁을 하기 위해서. 

장기호: (웃음)

박성식: 밴드를 새로 결성하지 않았나.

장기호: 그러니까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오기 위해서. 

박성식: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어서.

 

- 그 당시 김현식 씨가 봄여름가을겨울 하기 전에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했다는 것을 처음 듣습니다.

 

장기호: 엄청나게 유명했죠.

박성식: 아유 

장기호: 최고였죠. (엄지척)

박성식: 최고의 대우를 받는 나이트클럽 가수였어요. 저희도 당시에 사랑과 평화라는 선배님들이...

장기호: 그건 그 뒤 아닌가?

박성식: 80년도 마이하우스라는 나이트클럽인데 장기호 씨랑 가서 연주하는 거 보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나이트클럽에 밴드 문화가 굉장히 활성화돼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김현식 씨는 나이트클럽에서 톱 클래스 가수였어요. 

 

- 김현식 씨는 거기서 주로 무엇을 커버하셨어요?

 

박성식: 그때만 해도 1~2집이 나왔을 때니까. 자기 곡도 연주하고 주로 팝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장기호: 클럽에서는 커버 팀을 많이 했죠. 유명한 곡들 많이 하고. 

박성식: 춤을 춰야되니까. 

 

- 김현식 씨가 하던 전신 밴드 이름이 뭐였나요?

 

박성식: 돌개바람인데, 서브 보컬리스트가 누구였느냐면, 최호섭이라는 가수에요. ‘세월이 가면’ 부른 김현식 씨가 가끔 땡땡이 친다 그러죠? 일을 해야 하는데 다른 핑계 대고 안 가면 최호섭 씨가 메인 보컬로 노래했었죠. 

장기호: 그런데 본인이 자기 밴드가 있는데도 새로운 밴드를 찾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하고 상황은 다르지만, 자기 밴드를 구성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에 딱 맞는 사람들을 스카우트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제 생각에는 김현식 씨가 저희가 클럽에서 연주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러다가 네가 마음에 드는 애들로 골라. 뭐 이런 식으로 저한테 요청이 들어왔는데, 마침 그때 김수철 씨의 작은 거인이라는 밴드가 있었거든요. 잠시 저하고 김종진, 전태관하고 이렇게 밴드를 했었어요. 원래는. 그런데 얼마 안 하고 나온 상태에서 김현식 씨를 만나고, 저하고 밴드를 만들려고 하는데 생각나는 친구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종진이가 혹시 뭐하나 하고 전화했더니 자기네들도 얼마 전에 막 그만뒀다. 그래서 그때 제 기억에, 종로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서 김현식 씨한테 밴드 제의가 들어왔는데 같이 할 의향이 있느냐 물어봤더니 무조건 하겠다고 했죠. 일단은 전태관, 김종진, 저하고 김현식 씨를 만나서 앞으로의 음악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건반이 없었던 거죠. 건반 주자가. 건반을 어떻게 구할까 했더니, 그때 전태관 씨가 자기 친구 중에 아주 다재다능한 친구가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나고, 그다음에 정원영 씨 동생이 있었어요. 그 친구하고 유재하하고 전태관 씨하고 동창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유재하라는 친구 오디션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저는 좋다고 했죠. 

 

지금 기억나는 것이 경희대학교 밴드 연습실이 있었어요. 그때 경희대 쪽에 아는 선배가 있었는데 거기서 종진이랑, 나랑 태관이랑 악기 풀고 기다리고 있는데, 사실 우리는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어요. 유재하란 어떤 인물인가. 그랬는데 이미지가 전혀 음악을 할 것 같지 않은 이미지. 재하가 알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옷도 펑퍼짐한 점퍼에 악기를 잔뜩 들고 헉헉대고 들어오더라고요. 

 

“아, 내가 재하인데..” 막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야, 너 할 줄 아는 거 뭐야?” 그랬더니 나 기타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작곡도 하고 노래도 해. 그래서 한번 해보라고 했죠. 그랬더니 진짜 우리 앞에서 기타를 치는데, 그 당시 제 느낌에 김종진 씨보다 더 잘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그러더니 피아노 앞에 앉더니 “별 헤는 밤 ~” 이러면서, 무슨 노래냐고 물어보니, “내가 만든 거야.” 딱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야 그러면 우리 현식이 형한테 가자.” 그래서 김현식 씨를 같이 만났더니 김현식 씨가 무척 좋아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좋아했느냐 했더니, 연주자라기보다 곡을 쓰니까. 작곡을 잘하니까 본인이 재하한테 기대를 많이 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유재하, 저, 전태관, 김종진 그리고 김현식 이렇게 해서 다섯 명이 출발했죠. 

 

- 왜 돌개바람이라는 팀이 있었는데 새 밴드를 결성하려고 하셨을까요?

 

장기호: 제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제가 유추컨대, 돌개바람은 계속 클럽 일을 했어야 생활 유지가 되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 이미 그때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하고 이야기가 다 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본인의 음반 활동을 위해서 나이트클럽 활동을 접어야 하겠다는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새로운 밴드를 만들고 새로운 음악을 할 거면 조금 더 참신하고 젊은 친구들하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저의 생각이죠. 그런데 유재하 군이 녹음하기 한 달 정도 됐나, 갑자기 팀을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 그만두는 이유가?

 

장기호: 그 이유는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전태관, 박성식 저랑 이렇게 다 기억하는 내용 달라요.

박성식: 그 기억이 조금씩 달라서.

장기호: 네. 조금씩 다른데.

박성식: 제가 제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처음에 봄여름가을겨울 팀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전에 아셔야 할 게 뭐냐면, 김종진, 장기호, 저 이렇게 세 명이 함께 해군 홍보 대에서 같이 근무했었어요. 제가 다섯 달 늦게 입대했는데, 다른 친구들이 먼저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던 거죠. 굉장히 하고 싶었지만, 제대를 못 해서 저는 못 하는 거죠. 그 이후에 제대와 동시에 나도 하겠다고 해서 같이 하게 된 거예요. 그게 정확한 팩트고, 그때는 투 건반이었어요. 유재하, 박성식이 둘이 건반을 맡게 되었는데. 제가 제대를 9월에 하고 12월에 유재하 씨가 그만뒀어요. 그만둔 이유는 자기 솔로 음반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녹음을 위해서 팀을 그만둬야겠다고 해서 팀을 나가게 된 거죠.

 

- 봄여름가을겨울 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박성식: 글쎄, 그건 기억이 잘...

장기호: 그게 아마 저희가 대학로에서 파랑새극장인가, 어디에서 우리가...

박성식: 공연했었죠.

장기호: 옴니버스 공연을 했죠. 이광조 씨, 한영애 씨, 신촌블루스, 이정재 선생님.

박성식: 김현식.

장기호: 김현식. 이렇게 했었어요. 그때 김현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빅밴드 형식으로 했는데, 이게 완전히 대박이 난 거죠. 그래서 원래 공연하려고 했던 날짜보다 한 일주일인가 더 연장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님이 보너스를 줬나 봐요, 김현식에게. 

 

어디 가라고, 놀러 가라고. 그래서 저희가 이제 대천인가를 아마 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이제 “야, 팀 이름을 어떻게 정하지?” 그러면서 굉장히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중에서 어떻게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곡이 있었잖아요, 김현식 씨 작품 중에. 1집에 그 곡이 있는데 어떻게 우연히 거기에 다 동의를 했던 것 같은데 누가 이렇게 딱 내놨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마침 그때 네 명이니까 그래서 봄, 여름, 가을, 겨울 해서 한 명씩 하자. 그때 하나 남았나? 그래가지고... 

박성식: (웃음)

장기호: “야, 하나 남았다” 그러니까 “환절기 해라.” 뭐 이런 식으로 했던 얘기도 있어요. (웃음)

 

- 어떤 작업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는지 궁금해요. 

 

박성식: 일단 주로 김현식 형님이 자기 곡을 준비하고 다른 선배님들의 편곡을 해주고 세션들이 녹음하는 방식이었다면, 김현식 3집 앨범은 저희한테 숙제를 내줬어요. 만약에 월요일 녹음이면 월요일까지 꼭 하나씩 쓰도록 숙제를 내주면 하늘 같은 선배님이니까 뭐 쓰게 되더라고요. 그전에 준비했던 것도 정리하면서 작업했고, 이후에 어떤 것은 합격, 앨범에 넣자 그러면 그때부터 편곡에 대한 토의가 시작되고 합주해 보면서 각자 자기 의견들 이야기하면서 편곡 완성하고 녹음하는 방식을 했던 거죠. 

 

- 김현식 씨가 돌개바람하고 곡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기호: 아마 제 생각에는 돌개바람 그분들의 음악적인 능력을 저평가한다기보다는 창작하는 능력이 김현식 씨가 볼 때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저희 같은 경우도 뭐 현식이 형이랑 하면서 곡을 써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음반은 내야 하는데, “너 가진 곡 없나?” 이런 식으로 계속 물어보고 그랬었죠. 사실 박성식 씨 곡의 경우 ‘비처럼, 음악처럼’의 경우 그전에 이미 한 1년 전 그즈음인가? 
박성식: 한 6개월 전, 6개월 전에 문관철. 

장기호: 네네. 그 문관철 씨라고 저희 선배 형이 있는데 그 형이 먼저 앨범 수록을 했었어요.

박성식: 녹음을, 녹음했지. 발표는 안 했고.

장기호: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그 곡을 현식이형 앞에서 박성식 씨가 연주하니까 현식이 형이 벌써 귀가 번쩍이는... “야, 그거는 무슨 곡이냐?”라고 물어봤죠.

박성식: (웃음)

장기호: 아, 이건 사실 아는 형이 먼저 부른 곡인데 아, 이거... 그러면, 그러면서 “야, 이거 내가 부를게.” 이러면서 고민을 많이 했을 거예요. 이미 먼저 아는 형한테 선사했던 곡인데. 그런데 현식이 형이 “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불러.” 이렇게 된 거죠. 강제로 부르게 됐고, 저 같은 경우에는 군대에서 독학으로 작곡 공부하고 가장 기본적인 형식의 틀을 가진 AABA 형식의 곡을 한번 써 보자 해서 동요라고 생각하고 곡을 만들었는데 그 곡이 ‘그대와 단둘이서’라는 곡이거든요. 

 

저는 동요라고 생각했는데, 현식이 형이 듣더니 “야 이거 내가 부를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 형. 이거 동요인데?” 했는데 현식이 형이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이 뭐냐면 이야, 음악은 해석이구나. 동요 같이 불러서 동요이지, 김현식이라는 가수가 자기 스타일로 해석할 때는 또 다른 명곡으로 변할 수 있구나, 이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 동아기획은 크루라고 생각되는데 기획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떤 곳이었나요?

 

장기호: 기획사이기도 했죠. 그때하고 지금 하고 아주 다르지만, 그 당시에 가수가 자기 곡을 만들고 연주하는 케이스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레코드 회사에 소속돼 있으면 일종의 작곡가가 보통 프로듀서가 됐었죠. 작곡가나 편곡가가 그 사람이 곡을 받아주고 편곡자에게 편곡시키고 거기에 세션맨들한테 세션하고 결국은 가수는 주로 노래만 했던 상황이었는데 동아기획의 경우 그런 케이스보다는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그것이 아마 동아기획의 어떤 캐릭터를 결정짓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거의 한 번씩 데모 테이프를 동아기획에 던졌을 거예요.

 

- 오디션을 통해 뽑은 게 아니라, 음악가들이 알아서 모였는데, 저 친구가 음악을 잘하네 하면 그냥 모아서 영입하고, 패밀리가 생긴 유일한 사례인 것 같아요. 

 

장기호: 그러네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예전에 신중현 선배님 같은 경우도 좀 그러지 않았나 싶네요.
 

- 신중현님은 그분 중심으로 했다고 하면, 동아기획은 음악사적으로 봤을 때 중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요즘에 음악하는 분들은 트랙을 서로 주고받고 하는데 90년대의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장기호: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음악을 컴퓨터로 만드는 그 시점은 아날로그 음악 시대라고 보면 그 뒤에는 디지털 시대라고 봤을 때 음악적인 제작 과정 등이 상당히 급변하게 되죠. 요즘 음악은 컴퓨터 베이스로 하는 음악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 같고요.

 

 

(2부에서 계속.)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최승원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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