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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by 최승원

전설적인 뮤지션과 함께한 빛과 소금의 독보적인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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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15작성자  by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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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에서 이어집니다.)

 

 - 박성식 씨가 작곡하고 김현식 씨가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이 들어간 김현식 3집 앨범 판매량은 어느 정도였나요? 
 

박정식: 그거는 사장님밖에 모르시죠.

장기호: (웃음)

박정식: 기록상으로는 30만 장으로 되어 있는데, 골든디스크상 한국일보인가에서 주는 상이 있었어요. 그 상을 받을 당시에 집계된 판매 수량인 것 같고요. 그 이후에 얼마나 팔렸는지 모르죠.
장기호: 그런데 그 당시에 김영 사장님이 사이드 A의 첫 번째 곡 있죠?

박성식: 널 잊고...

장기호: 네. 비...

박성식: ‘빗속의 연가’

장기호: ‘빗속의 연가’ 그 곡을 밀려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비처럼 음악처럼’에 밀렸죠. 대중들 반응은 다른 데서 오니까.


- ‘비처럼 음악처럼’ 탄생 비화가 있을까요?

 

박성식: 비화가 있죠. 젊었을 때 누구나 다 연애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젊었을 때 했던 연애들은 꼭 이별이 있고 이별할 때는 비가 또 그렇게 오고 (웃음) 일반적인 상황인데, 저는 군대에 있었을 때니까 속수무책인 거죠. 이별을 정리하는 방법도 없고 스스로 위로할 줄도 모르고. (군대에서 이별 후) 그래서 멀리 떠난다, 유학을 간다. 이런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그런 이유를 대면서 이별을 통보받고, 그래서 피아노곡을 만들어서 악보를 다 적고, 그게 이제 ‘비처럼 음악처럼’인데 나중에 가사를 붙이게 된 거죠. 노래는 물론 만들게 되면서. 

 

원래 타이틀 곡이 아니었나요?

 

박성식: 타이틀 곡이 아니었고, 그때는 레코드판 시대니까 A면, B면이 있잖아요. A면 타이틀곡은 ‘빗속의 연가’고 B면 첫 번째 곡이 ‘비처럼 음악처럼’이었어요.
 

장기호: 그런데 당시 재미있는 사실이, 지금은 CD도 아니고 음원이니까 개념이 많이 달라졌는데 레코드 A면 B면이 있잖아요. 그러면 제작자마다 어떤 제작자는 미는 곡을 넘버에 넣는 경우가 있고 어떤 제작자는 두 번째에 넣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데는 세 번째에 넣는 경우가 있고, 다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그 당시 동아기획 같은 경우 주로 앞면에다가 미는 경향이 있었죠.
 

- 당시, 두 분은 김현식 씨 보컬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박성식: 저는 세계적인 보컬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제 한국어로 된 가사로 노래하시지만, 보컬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나 감성 같은 것이 정말 세계적인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디서 느끼냐면, 커버 곡을 부를 때 보면 원곡자보다 훨씬 더 맛깔나게 만들어서 불러요. 그래서 빌 비더스의 ‘저스트 투 오브 어스 (Just Two of Us)’ 같은 곡도 원곡이 주는 그런 끈적한 느낌이 있다면 김현식 씨가 그 곡을 커버해서 부르면 또 새로운 느낌의 어떤 퓨전다움이 확 살아나거든요. 그러니까 보컬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정말 엄청났던 것 같아요. 

우리가 합주실에서 연습하다가 장난스럽게 ‘저스트 투 오브 어스’ 같은 곡을 하고 있으면, 장난스럽게 부르고, 그 느낌들이 어휴, 저는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대단한 보컬리스트구나. 
 

장기호: 제가 느낀 김현식 씨의 보컬은 한국적인 스타일과 서양적인 스타일이 잘 섞여 있다고 보는데, 한국적으로 본다 그러면 약간 국악 성향의 어떤 판소리나, 그런 훈련도 했다고 제가 들은 것 같고요. 그다음에 외국의 경우를 보면 아무래도 록 성향의 그런 가수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봤을 때 현식이 형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가수 조 카커하고 비슷했어요. 

 

그분이 보면 김현식 씨가 노래할 때 (가슴을 넓게 열며) 이렇게 불러요. 그런데 조 카커라는 분이 흉식 호흡을 하거든요. 복식하고 흉식을 같이 쓰기는 하는데 가슴을 들고 목으로 막 똑같아요. 현식이 형하고. 그러니까 소리도 비슷하고, 그런 것 보면 조 카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개인적인 관찰에서 따온 얘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사실 김현식 씨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 보면 그냥 노래하기 위해서 소리를 만들어 낸다기보다는 그냥 내면에 있는 소리 자체를 그냥 확 내뱉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냥 소리를 질러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음악적으로 우리에게 와 닿는 가수는 제가 볼 때 김현식 씨가 좀 유일하지 않나. 그래서 김현식 씨 보면서 늘 느꼈던 건 뭐냐 하면, 자기만의 해석력이 확실히 있는, 어떤 곡이든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불러버리는, 그게 아마 김현식 씨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세운 게 아닌가. 

 

다른 질문이지만, 가수로서의 유재하 씨는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장기호: 유재하 씨는 본인의 가장 약점이 보컬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웃음) 얘기를 해 봤는데, 그런데 이제 그 당시는 워낙 70~80년대 워낙 세계적으로 너무 완성도도 높고 음악적으로 아주 상업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난... 그런 대중음악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거든요. 그런데 그 음악을 듣는 그 취향이나 그런 각도나 방향이 유재하 씨하고도 아주 비슷했어요. 물론 우리 다른 멤버들하고도 공유를 했지만, 당시 유재하 씨는 사실 보컬리스트보다는 어떤 음악 전체적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특히 당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이 주로 멜로디에만, 프론트맨에게만 꽂혀 있었다 그러면, 당시 팝 음악은 이제 배경이 굉장히 든든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걸 어떻게 가요에 도입해 볼까 하는 그 고민에 이제 빠져 있었기 때문에 노래 연습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보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것이 유재하만의 그런 트레이드 마크가 됐죠. 

 

빛과 소금 활동하시면서 김현식 씨한테 받은 영향이 있을까요?

 

박성식: 빛과 소금은 친구와 또 가까운 후배들과 거의 수평적인 조합이었기 때문에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현식이 형하고 할 때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좀 긴장을 많이 하고 연습에 임한다든가 공연에 임한다든가 혹은 방송을 한다든가 그랬는데 빛과 소금 할 때는 그런 어려움들이 없으니까 훨씬 더 자유스러움에서 나오는 음악적인 개성들이 또 이렇게 꽃을 피우지 않았나. 그런 점에 있어서는 현식이 형 영향이 큰 거죠.

- 어떤 면에서요?
 

박성식: 위압감을 없애줬으니까. 음악적으로 이어받은 영향은 별로 없었고요. 일단 보컬 측면에서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저희는 노래를 부르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장기호 씨가 아주 매끄럽고 예쁘게 노래를 잘하니까 저는 뒤에서 백킹맨으로만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현식이 형의 음악적인 영향은 그렇게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기호: 저 같은 경우 김현식 씨를 약간 종교적인 상황에서 바라본다면, 종교적인 용어 중 ‘어노인팅(Anointing)’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카리스마가 있는 거죠. 저는 실용음악과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해봤지만 정말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인데도 안 와닿는 음악이 있고요. 그렇지 않은데도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음악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김현식 씨는 그 두 개를 다 가지고 있었던 분이었죠. 그런데 제가 김현식 씨 밑에서, 밑이라고 그러기는 좀 그렇지만, 김현식 씨와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을 하다가 김현식 씨와 결별하고 김종진과 전태관 군이 봄여름가을겨울을 하고, 우리는 조금 더 있다가 빛과소금을 했을 때, 저 엄청난 가수 밑에 있었던 우리가 어떻게 노래까지 부를 것이냐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히 컸거든요. 그런데 일단 김종진 씨가 1집을 딱 만들고 와서 ‘어? 종진이도 노래하네?’ (웃음)
 
박성식: (웃음)

장기호: 그래서 상당히 위로받았어요. 그런데 저도 사실은 노래보다 곡을 만들거나 연주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현식이 형처럼 노력해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제가 현식이 형한테서 느꼈던 것은 그야말로 ‘어노인팅’이라는 거죠. 남한테 없는 뭔가의 힘이 있는데, 아무나 소리 지른다고 해서 은혜받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박성식 씨가 옆에서 제 노래 듣다가 “야 너는 이렇게 부를 때 조금 매력이 있으니까, 이런 쪽으로 잘 살려봐”라고 해서 그 부분을 녹음해서 다시 들어보니까 사람들에게 매력 있게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럼 나도 현식이 형처럼 약간의 기름기가 있는가 보다.” 그런 생각을 가지도 저도 빛과 소금 하면서 노래도 하게 된 거죠.

 

- 김현식이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그리움으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기호: 제 생각에는 김현식 씨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의 한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김현식 씨 음악을 들으면 뭔가가 이렇게 좀 답답했던 게 이렇게 막 뚫리는 것 같고, 김현식 씨라는 어떤 음색이 주는 그 여운이 굉장히 강했고 그다음에 제 생각에는 너무 일찍 요절한 것이 더 그 김현식을 그리워하게 하는 그런 요소가 아닐까.


박성식: 저도 뭐 같은 생각인데, 왜 사람들이 김현식 씨 음악을 듣고 노래를 듣고 대리만족하듯이 스트레스가 풀리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김현식이 좀 그 성장 과정이 좀 불우한 환경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다니면서 무교동에 와서 노래하면서 밤일하고 나이 속이고 막 그렇게 생활했던 이야기를 많이 해 줬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겪었던 어려운 뭐 집안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환경들을 음악으로 응축시켜서 진짜 세상을 향해서 매질을 놨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고민과 고통을 안고 가는 수많은 사람이 김현식 씨 노래를 들으면서 대리만족하고 스트레스가 풀리고 힐링이 된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그분이 이렇게 짧게 살다 가셨지만, 그분이 남긴 음악이 그 임팩트가 굉장히 강했던 거로 생각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팀을 결성하게 된 계기를 여쭤볼게요.

 

장기호: 뭐 제가 대답할 수밖에 없겠네요. 빛과 소금 하기 전에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를 이제 이남이 선배께서 이제 ‘울고 싶어라’가 크게 히트를 하면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팀을 나가셨는지는 모르지만. (웃음) 어쨌든 이제 이남이 선배님이 팀을 나가고 그 뒤에 한 분이 또 들어오셨는데 그 뒤에 제가 이제 그 형님들이 오셔서 같이 한번 사랑과 평화를 해 보지 않겠느냐. 제안이 들어왔어요. 

 

당시로서는 뭐 사랑과 평화 그러면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최장수 그룹이고, 당시에 사랑의 평화의 영향력은 밴드 하는 모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죠. 일본에서도 굉장히 유명했거든요. 그 엄청난 밴드에 제가 또 베이시스트로 들어간다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이제 들떠서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제가 사랑과 평화보다, 조금 더 내 음악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때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가기 전, 뭔가 족적을 하나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시기였어요. 아마 그때 박성식 씨도 같이 사랑과 평화를 했었는데 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저는 그때 그만뒀고. 그런데 이 내용은 잘 아는 분들이 별로 없는데 누가 저한테 임재범 씨 테이프를 주면서 이 친구하고 한번 작업해 보지 않겠느냐고 테이프를 딱 줬어요. 카세트 테이프를 줬는데 가짜 영어로 막 “으레~으에” 하면서 노래한 것이었는데 (웃음) 들어보니까 이거 완전히 뭐...


박성식: (웃음)

장기호: 제대로 된 서양의 어떤 록 보컬리스트인 거예요. 그래서 “이야, 이런 친구가 있었네.” 이제 그랬었는데 스타일이 나하고 안 맞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테이프를 누구한테 갖다 줬냐면 한경훈 씨라고, 이태원 ‘이브’라는 데서 DJ를 하고 있던 친구였어요. 이 친구가 한남동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이 친구한테 테이프를 주면서 ‘한번 작업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했는데 결국 둘이 작업을 안 했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이번에는 “나랑 한번 이거 한번 해 볼래?” 했는데, 한번 해 보고 싶다 해서 준비하는 과정에 “한경훈 씨가 성식이 형은 뭐 해요?” 물어보더라고 (웃음) 그래서 “성식이랑 같이하고 싶어?” 그랬더니 “성식이 형이랑 같이 하죠.” 이후 박성식 씨가 그때 학교를 졸업했을 때인가? 

 

박성식: 4학년 때니까 졸업하기 전.

장기호: 그래서 의기투합해서 나중에 합류하게 된 거죠. 그때가 1989년도? 

박성식: 89년.

장기호: 89년도, 방배동에... 그때 한경훈 씨가 한남동에서 방배동으로 지하로 이 왔는데, 거기가 이제 아지트가 돼서 모여서 서로의 음악을 공유했어요. 이제 그때만 해도 이제 롤렌드 MC500이라고 시퀀서.

박성식: 시퀀서

장기호: 지금은 이제 컴퓨터로 다 들어갔지만, 음악을 만드는 컴퓨터... 음악용 컴퓨터가 있었어요. 

박성식: 모니터 없는

장기호: 네. 그거로 저희가 작업을 해서 1990년도에 대망의 빛과 소금 집을 발표하게 되죠.

 

- 빛과 소금의 음악적 색깔은 처음부터 세 분이 맞으셨어요?


박성식: 세 사람이 다 달랐어요. 장기호 씨는 굉장히 실험적이고 그다음에 구조적인 면을 되게 아주 치밀하게 이렇게 하는 이런 색다른, 그러니까 독특한 음악이었고 한경호 씨는 조금 더 째지(Jazzy)한 느낌의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저는 약간 좀 클래시컬한 선율을 좀 강조하는 그런 색깔이었고. 그런데 셋이 같이 자기 곡들을 이렇게 들려주면서 서로 그... 좋아하는 곡들을 이렇게 같이 나누다 보니까 서로의 음악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금방 이렇게 같이 빛과 소금의 음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이제 공통 분모는 시퀀서로 다 작업을 했기 때문에 시퀀서 사용법에 대해서 서로 모르는 부분 물어보고.

 

코르그(Korg) 사에서 나온 키보드가 있었는데, 그 키보드 한 대로 시퀀서를 갖고 모든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운드도 더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빛과 소금의 느낌이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장기호 : 지금은 뭐 컴퓨터로 음악 만드는 게 일반화돼 있는데요. 그 당시 미디라고 하는 국제 규격의 용어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컴퓨터로 음악을 시작하는 그런 단계였기 때문에 80년대 후반에서부터 저희가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사실 첨단의 어떤 그런 거라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죠. 빛과소금 같은 경우, 저는 개인적으로 셋 중에서 제가 제일 음악적으로 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나도 음악을 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박성식 씨의 영향도 좀 받았고 그다음에 한경훈 씨랑 대화하면서 한경훈 씨도 아주 독특한 자기만의 음악적 세계가 있는데, 저하고 굉장히 코드가 맞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당시에 1~2집 같은 경우는 정말 우리 세 명의 색깔이 아주 3분의 1씩 잘 배합이 된 그런 음반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뒤부터는 조금씩 이제 컬러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죠. 지금 빛과 소금의 음악적인 색채하고요,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적인 색채하고 보시기에 좀 다르죠?

김종진, 전태관 군은 어떻게 보면 둘 다 리듬 악기거든요. 반면 박성식 씨하고 저는 피아노하고 베이스니까 리듬 악기와 화성과 선율을 다루는 악기이기 때문에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은 상당히 비트가 강한 음악이 나올 수밖에 없고, 저희는 선율과 화성이 강조된 음악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아요.

 

박성식: 그래서 리듬 때문에 김종진과 전태관이 그렇게 싸웠다잖아요. (웃음) 더 확실한 리듬을 자리잡히게 하기 위해서 리듬에 대한 논쟁을 두 사람이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봄빛 프로젝트라고 봄여름가을겨울과 빛과소금 두 팀이 리유닛해서 음반을 하나 냈어요. 전태관 씨 1주기 기념으로, 그때도 보니까 리듬에 대한 의지가 너무 확고하시더라고요. 김종진 형님이 그래서 역시 다르다는 것을 느꼈죠. 

 

장기호: 저는 김현식 씨랑 할 때 많이 싸웠죠. 음악적으로 이견도 많고 그랬는데, 지금 이 나이에는 우리가 기술을 보여줄 것도 아니고 우리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우리 우정을 보여주자, 이런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종진이한테 따라갈 수밖에 없는... (웃음)

 

시퀀서, 신디사이저 나온 시기 빛과 소금은 가슴 뛰었던 일이잖아요.

 

장기호: 그렇죠.

박성식: 그렇죠. 우리가 최초로 전 앨범 곡을 다 시퀀서로 만들었으니까. 미디로.

장기호: 그게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제작비를 굉장히 절감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조금 더 프로그래밍을 더 많이 하면, 연주인들을 부르지 않고 컴퓨터가 다 해 주니까요. 

 

- 봄여름가을겨울도 시퀀서를 다 리듬 악기로만 썼는데.
 

장기호: 봄여름가을겨울은 시퀀서를 그렇게 많이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쓰기는 썼어요. 일단 그 팀은 드러머 전태관이 있었으니까, 리듬 세션 같은 경우 컴퓨터에 많이 의지하지 않은 것 같고, 반면 저희는 1집 때 거의 100% 컴퓨터 리듬에 의지했죠.

 

- 같은 음악 베이스로 같이 음악을 하셨다는 걸 알고 나니 흥미롭네요. 봄여름가을겨울은 ‘제네시스’ 같고, 빛과소금은 ‘아하’ 같은데 소리가. 시티팝 스럽기도 하고.

 

장기호: 어떤 면에서는 유사성이 있네요. 그런데 그 시티팝이라는 단어도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저희는 시티팝인지 잘 모르겠고, 요즘 와서 시티팝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그런 음악을 했구나 하는 거죠. (웃음) 다만 이제 어떤 도시적이고, 일반 대중 성향을 떠나서 추구하는 음악이 뭔가 지적인 면과 현대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아마 일본에서 나오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고.

 

빛과 소금의 표상 같은 곡 ‘샴푸의 요정’은 어떻게 나왔나요?

 

장기호 : 그건 또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김현식 씨랑 하고, 그다음에 사랑과 평화로 가기 전에, 드라마 제작자로 유명하신 송병주 씨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면서, 중간 친구를 통해서 저를 만나게 됐어요. 만났을 때 사실 음악을 안 하려 했었어요. 그때 저희가 새로운 것을 들고 왔는데, 컴퓨터 음악이 시작이 된 거예요.

 

앞으로 컴퓨터로 음악을 못하면 바보 되니까 우리가 컴퓨터로 제작하면 충분히 우리 인원이면 광고 음악이나 드라마 음악을 만들 수 있고, 스튜디오가 있으니까, 예전 현식이 형처럼 돌아다니면서 무대를 서는 게 아니니까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을 들었죠. 그 말에 제가 좀 배울 게 있을 것 같아서, 송병주 씨하고 방배동에 가서 스튜디오를 차렸어요. 그때 MBC에서 ‘베스트셀러 극장’이라는 단막극 프로그램이 굉장히 인기가 있었어요. 그중 황일래 감독님이라는 분이 연출력이 굉장히 뛰어난 분으로 인정받았죠.
 

여러 작품을 하다가 ‘샴푸의 요정’이라는 드라마를 받게 됐죠. 사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별로 없을 때였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국에서 외국의 음악을 마구 끼워 넣을 때였죠. 그런데 앞으로는 저작권 문제도 생길 것이고, 우리는 우리 음악을 만들자고 황일래 감독님이 말했어요. 외국인, 외국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 있는 것을 가져다가 집어넣는 것보다는 스스로 완성도를 올려야 한다고요. 그러면서 주제가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온 거죠. 당시 제가 곡을 맡게 됐고, 박성식 씨도 같이 있었죠?

 

박성식: (끄덕)

장기호: 그래서 곡을 만들어 놓고, 제가 노래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당시에 조규찬 같은 친구를 찾았어요. 신선하고 때 묻지 않은 느낌의 보컬을 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먼저 만들었기 때문에, 가이드 보컬을 미리 넣은 상태에서 황 감독님이 찾아오셨어요. 일단 대충 몇 분들이 들어보겠다고 해서, 그 필름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음악을 틀었죠.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 노래가 나오는데, 감독님이 탁 듣더니 “야, 이거 누가 불렀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 이거 가수는 따로 섭외할 건데, 일단 제가 불렀어요.” 그랬더니 “야, 그냥 가자. 이걸로.” 딱 그러시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아 그래도 돼요?” 그랬더니 “야, 가도 되겠다. 그냥 신선하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1988년도 베스트 단막극에 방영이 되었는데, 시청률이 굉장히 있었나 봐요. 그때 감독님이 저한테 따로 전화하셔서 “야, 너 이거 만약에 따로 음악을 하게 되더라도 음반에 넣어도 괜찮겠다. 사람들 반응이 너무 좋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때 어떤 생각을 가졌냐면, 사실 노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는데 “가만 있어 봐. 내가 만들고 내가 부른 노래도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나중에 빛과 소금 할 때도 부족하지만 이제 제가 들어가게 되고. (웃음) 그렇게 됐죠. 

 

- 그전에는 시티팝이라는 말보다 신스팝이나, 퓨전 재즈라는 단어 안에서 빛과 소금의 음악장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요?

 

박성식: 퓨전 재즈에는 안 들어간다고 보고요. 팝에 더 가깝죠.
장기호: 우리나라의 그 용어 정리에 있어서, 저는 우리나라식으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서양에서는 재즈가 아닌데, 여기서는 재즈라고 불렀죠. 원래 퓨전이라고 하면,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연주하던 악기와 그렇지 않은 악기의 조합이죠. 그래서 클래식 악기가 같이 붙는다든지 또는 재즈와 록이 섞인다든지. 그 마일즈 데이비스의 [비치스 풀] 같은 앨범이 최초의 퓨전 앨범이라고 재즈 히스토리를 가리키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퓨전 재즈라기보다는 조금 아까 박성식 씨가 말씀했던 것처럼, 재즈적인 요소가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희가 했던 건 팝이고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서양에서는 예를 들면 색소폰 부르는 사람... 색소폰 부르는 그... 케니지! 같은 경우는 절대로 재즈로 안 봐요. 그 사람을 어떻게 보냐면, 그래도 재즈 영역에 넣으려면 그 사람은 스무드 재즈라고 이렇게 영역을 나눠 버렸어요. 그래서 듣기 쉬운, 이지 리스닝한 재즈라 했는데. 

 

실제로 재즈 하는 사람들은 케니지를 인정을 안 하죠, 정통 재즈에서는. 그런데 저희 같은 경우는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재즈는 아니고, 하지만 재즈에서 사용하고 있는 보이싱, 그리고 ‘임프로비제이션’, 그러니까 즉흥적인 연주를 사용했고, 또 다소 재즈 록적인 리듬들을 많이 차용했기 때문에 퓨전 가요, 퓨전 팝 이 정도면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3부에서 계속.)

 

 

[사진출처=사운드트리]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최승원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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