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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
by 최승원

대중음악계의 새로운 산실 '동아기획'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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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16작성자  by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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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이어집니다.)

 

빛과 소금 1집도 동아기획에서 나왔잖아요. 동아기획 소속이 되신 계기 기억하세요?

 

장기호: 일단 김현식 씨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다음에 한경훈 씨하고 저하고. 맨 처음에 제가 먼저 뭔가 제작을 하려고, 혼자 동아기획에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김영 사장님이 김현식 씨랑 저희가 활동했던 경력이 있고, 저를 알기 때문에, 사장님이 두 장을 제작하자고 해서 계약을 했죠. 말하자면 사장님이 김현식 씨랑, 우리의 음악을 알고 있어서 거의 그냥 뭐 조건도 없이 그냥 받아들인 거죠, 자연스럽게. 

 

김영 사장님은 음악적으로 터치를 하지 않으셨나요?

 

장기호: 그렇지만 본인이 밀어야 할 곡은 분명히 찾거든요. 그러니까 그분은 내가 마음에 드는 거 딱... 둘도 필요 없고 딱 하나만 찾는다, 이거죠. 그런데 거기에서 밀리면 결국은 거기서 음반을 못 내게 되는 케이스인데, 저희 1집 듣고 별로 그렇게 별로 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제 기억에는. 오히려 푸른하늘... 푸른하늘 같은 스타일을 좋아했죠. 

박성식: 유형석 씨 음악을 더 선호하셨고. 그러니까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빛과소금을 하면, 혹시 비처럼 음악처럼 같은 게 또 터지지 않을까.

장기호: 그렇지.

박성식: 이런 기대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저희 빛과 소금으로 활동할 때는 그런 음악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음악이 없었기 때문에.

- 김영 사장님이 ‘샴푸의 요정’이 터졌을 때 뭐라고 그러셨어요?

 

장기호: 그 당시는 터진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박성식: (웃음)

장기호: ‘비처럼 음악처럼’은 그 당시에 터진 곡인데 ‘샴푸의 요정’은 그 당시 히트곡이라고 별로 못 느꼈었어요. 당시 연예부 기자들이랑 인터뷰하면, 빛과 소금한테 따라다니는 꼬리가 뭐냐 하면, “당신네 음악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이 퀄리티로 어떻게 대중으로 들어갈 거냐. 그게 너네들은 가장 큰 숙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 우리 음악이 어려운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죠. 

참 묘하게도 계속 라디오에 나오고 또 최근에 아마 제 기억으로는 ‘비처럼 음악처럼’하고 ‘샴푸의 요정’이 국내 가요계에서 리메이크가 많이 된 곡 중 하나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최근까지 방탄소년단 후속으로 나오는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에 젊은 친구들까지 또다시 만들어 주어서, 저는 또 선배 입장에서 아주 까마득한 후배들이 제 음악을 다시 해석하는 걸 보면서 참 감개무량하죠. 

 

많은 젊은 뮤지션들이 ‘샴푸의 요정’을 리메이크 하는데, 다 마음에 드시는지.

 

박성식: 마음에 든다기보다 일단 고맙죠.
장기호: 네.
박성식: 일단 세대를 뛰어넘어 우리들의 젊은 시절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글 쓰고 만들었던 음악들을 같이 공유해 주는 거잖아요. 공감해 주고.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최근에는 또 트로트 프로그램에서 ‘비처럼 음악처럼’을 하고 싶다고 또 연락이 와서 제가 승인을 해 줬어요. 영탁이라는 분이 그 노래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척 궁금합니다. 어떻게 부를지 (웃음)

장기호: 영탁이라는 친구가 그 태권도 하는...
박성식: 아니, 아니 그 친구는 나태주.
장기호: 아, 나태주 (태권도 동작하며 노래) 비가 내리고 ~ 음악이 ~ 그럼 완전 웃기겠다. (웃음)

 

박지영레코드에 대해 혹시 알고 계세요? 확실히 기억하고 계신 것이 있는지.

 

장기호: 박지영레코드는 이제 당시에 동아기획이 원래 거기서 출발했을 거예요. 사무실을 거기에서 쓰다가 나중에 분리됐는데 그래서 초창기에는 이제 박지영레코드사에 많이 저희가 들렀죠. 그런데 박지영 씨는 저는 그 당시에는 뵙지 못했고. 다만 이제 거기 직원들이 나중에 동아기획 쪽에 가서 일도 도와주고 그랬죠. 박지영레코드사가 그래도 당시 보유했던 앨범들이 상당히 다양하고, 새로운 신보도 계속 갖고 오고 그래서, 만약에 저도 필요한 앨범이 있으면 거기에서 좀 사고 그런 기억이 있죠.

- 그럼 김영 사장님은 그 레코드사를 실제로 운영하시고, 레코드 상점도 운영을 해보셨으니까, 그런 레퍼런스 같은 것이 나중에 기획사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겠네요.
 

장기호: 네.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고, 김영 사장님이 예전부터 음악을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본인이 찾아내는 아티스트들이 있어요. 특히 아까도 얘기했지만, 김현식 씨처럼 이렇게 뭔가 이렇게 카리스마 있고 한 방에 이렇게 딱 귀를 휘어잡을 수 있는 후킹한 그런, 그런 가수를 찾는데, 그게 적중했던 가수가 김현식, 전인권 형님 같은 경우도 그랬고.

박성식: 그러니까 간단하게 얘기하면, 레코드사 사장님이니까 어떤 앨범이 제일 많이 팔리는지 알 거 아니에요. 

장기호: 그건 데이터가 있죠.
박성식: 그 앨범의 어떤 곡 때문에 사람들이 그 앨범을 사간다는 것도 알고. 그런 데이터들이 이렇게 축적이 돼 있으니까 뭐 들국화가 처음 나왔을 때도 그렇고 김현식 씨를 발굴했을 때도 그렇고 아, 되겠다. 투자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곡이 나오면 그런 곡을 찾아서 타이틀로 밀고. 그러니까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사업가적인 스킬들이 그 박지영레코드사를 통해서 축적된 데이터이기 때문에 그런 스킬들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거기에 비하면 빛과 소금은 흔히 ‘야마’라고 그러거든요. 히트될 만한 곡이 그분 기준에서는 없었죠.
장기호: 없었죠.
박성식: 그래서 저희는 구박 많이 받았어요. (웃음)

장기호: 회사에 딱 들어가면 저희는 찬밥 같은 대우였고 그 당시에.
박성식: 봄여름가을겨울이 딱 들어가면 환~한 미소와 
장기호: 어서 와. (웃음) 

박성식: “웰컴 투 마이 오피스” 뭐 그런 느낌이 있는데 저희가 딱 들어가면 

장기호: “왔냐?”

박성식: “어 왔냐?”

장기호: (웃음)

박성식: 그런 느낌. 

장기호: 아예 음반 판매량이 안 됐다 그러면... (웃음) 대우를 못 받죠. 아쉬웠지만.

박성식: 그런데 뭐 판이 아주 안 팔린 게 아니라, 그분 기준에 안 맞으니 찬밥 되는 거죠. 
장기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박성식: (웃음)

장기호: 저희가 사실 방송을 굉장히 가렸어요. 이거는 뭐가 어째서 안 나가고 이건 뭐가 어째서 안 나가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방송하러 나간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 그걸 몰랐던 거죠. 그때는 동아기획에서는 라디오는 많이 잡았어요. TV는 거의 안 했던 것 같은데, 라디오나 행사는 많이 했었죠. 


- 동아기획 레이블만 보고 음반을 사는 팬들은 그 음악을 다르게 들었던 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장기호: 네. 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당시에 어떤 트렌드와 확실하게 다른 컬러가 분명했고, 그다음에 그 당시의 음악, 대중음악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완성도가 높고 개성이 강했다. 그리고 예를 들면 당시에 일반적인 가창력 있는 남자 가수, 여자 가수가 조금 주류를 이뤘다면, 그때는 그런 솔로 가수보다는 뭔가 밴드 취향이라든지 싱어송라이터라든지, 이런 약간 틈새 같은 시장이었죠.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음악들이 히트하다 보니까 그런 쪽의 관계에 있는 싱어송라이터들이나 밴드들이 “야, 우리는 저기서 음반을 내야 돼” 하는 인식이 퍼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오는 경우를 보면 거의 다 그런 친구들이었죠. 실험적인 음악을 하고. 

- 강남의 뱅뱅사거리에 있는 ‘심플라이프’ 얘기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조동진 사단서부터 전인권 씨, 김현철 씨 동아기획 사단들까지 드나들던 중요한 장소라고.

장기호: 그렇죠.심플라이프가, 뱅뱅사거리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요. 방배동에 카페 모이는 장소가 있어요. 저희는 ‘월화수목’이라는 카페나, 나중에 병진이 형이 하는 ‘파블로’?
박성식: ‘파블로.’
장기호: 파블로에서 저희는 많이 모였고 심플라이프도 가끔 기억은 나요. 그러니까 그들이 좋아하는 아지트가 있었죠. 그런 카페를 왜 갔냐면, 자기가 좋아하는 음반들이 거기 꽂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일반 대중적으로 이렇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고, 미국 본토에서 들여온 원판이죠. 예를 들면 김광민, 정원영, 한상원 이런 분들이랑도 거기 가야만 들을 수 있는 팬 메시니 음반이라든지, 알 제로 들으면서. 거기 가야 있으니까, 그 음반들이.

 

동부이촌동 사셨을 때, 바로 옆에 있었던 서울스튜디오를 여쭤볼게요. 거기서 어떤 점이 달랐나요?

 

박성식: 퀄리티가 되게 높았죠. 갖고 있던 장비라든가, 특히 이제 피아노 같은 경우는 스타일링이 그랜드피아노가 있었으니까. 두 대인가 있었어요.

장기호: 일단 지금은 그 정도 규모 되는 녹음실이 몇 개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규모로서는 가장 최고의 규모였고, 그다음에 엔지니어들도 굉장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안정권에 들어가 있는 프로덕션에 있는 분들이 거기를 많이 이용했죠. 가장 퀄리티에 관한 신뢰가 가는 장소였고.

 

서울스튜디오 외에 다른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보신 적 있으세요?

 

박성식: 네네.

장기호: 그럼요. 거의 대한민국에 있는 스튜디오는 다 갔죠.

박성식: 서울스튜디오의 경우는 딱 들어가면 굉장히 편안한 느낌이 있어요. 뮤지션들이 음악 작업을 할 때 이렇게 차분하게 시작하는 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거기 가면 그런 차분한 느낌이 있고 아마 이제 오케스트라 같은 거 녹음하려면 천장이 굉장히 높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높은 천장의 스튜디오가 있는데 거기에서 가령 예를 들어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하면 들어오는, 트랙으로 들어오는 소스들이 좀, 좀 다르게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장점이 많은 스튜디오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돼요.
장기호: 그리고 이제 위치적으로 제가 볼 때 서울스튜디오 정도의 레벨의 녹음실들이 여러 개 있었거든요. 괜찮은 녹음실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위치가 너무 멀다거나 아니면 주차하기가 너무 힘들다거나 이런 경우가 있었고, 서울스튜디오는 가장 접근성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았어요. 주차는 좀 어려웠지만, 주차는 할 수 있었으니까...
박성식: 집이 바로 그 옆인데, 뭐

장기호: 저는 그 당시는... 

박성식: (웃음) 바로 옆집인데. 

장기호: (박성식 멱살 잡으며) 그래서 뭐!
 

빛과 소금도 TV방송에 몇 번 출연하셨죠?

 

장기호: 아이러니하게 저희가 동아기획하고 이별하고 나서, 그리고 저희끼리 움직일 때, 저희를 봐주던 그 매니저분이 방송을 좀 잡았었죠. 지금 기억나는 거는 남대문 있잖아요. 거기를 최초로 저희한테 뮤직비디오를 찍기 위해서 오픈을 해 주셔서, 겨울에 추워 죽겠는데, 그냥 손 꽁꽁 얼어가면서 저는 콘트라베이스 들고 했던 기억이 나고, 그 뒤에 라디오 방송도 많이 했고. 그러니까 오히려 동아기획하고 결별하고 나서 방송을 좀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뭐 MBC의 ‘음악이 있는 곳에’라고 최명길 씨하고 저희가 같이 진행도 하면서 음악도 하면서 TV 프로그램도 했었고. 그리고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도 저희가 게스트로 많이 나갔죠. 이문세의 ‘별밤’의 뽐내기 대회. 그 방송 때문에 저희가 많이 알려졌죠. (웃음)
박성식: 음악 교실.

장기호: 네. 음악 교실. 

 

- 동아기획에서는 의도적으로 TV 출연을 안 했을까요?
 

장기호: 제 생각에는 TV 없이도 승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음악의 퀄리티와 그분의 가치관이 있잖아요. 홍보에 대한 가치관. 그게 분명히 있었고, 그때 그분 말씀에 의하면 뭐 라디오 몇 편 나오면 음반이 몇 퍼센트 움직이고, TV 몇 번 나오고, 움직이던 것이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비례 관계가 이제 없어진 거죠. 그러면서 동아기획도 결국은 방향을 틀고. 그러면서 컬러가 이제 점점 빠지기 시작을 했죠. 제 기억은 그래요.
 

방송국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규제에 대한 영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장기호: 예를 들면 이제 전인권 선배님 같은 경우는 이제 그 팀들이 전부 이렇게 서양의 록커처럼 머리도 길잖아요. 그래서 그때 제 기억에 아마 머리 긴 사람들은 출연 못 할 때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서 아유, 우리는 그냥 TV는 하지 말자. 그렇게 갔던 얘기도 제가 언뜻 들은 것 같아요.

 

- 방송에서 동아기획 뮤지션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곳은 라디오였군요.

 

장기호: 그렇죠. 어쩌면 그래서 더 대중들의 뇌리에 더 남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선배 뮤지션들인 들국화 멤버들과도 교류가 있었나요?

 

장기호: 그럼요. 사무실 가면, 늘 만나던 분이 전인권 선배님이고, 아쉬운 건 들국화 오리지널 멤버가 최성원 씨하고 전인권 씨 두 분 빼놓고 나머지는 다 지금 하늘나라로 가셨죠.
박성식: 손진태는 아주 뒤에 합류했지?
장기호: 나중에 합류했죠.


- 들국화가 대중음악사에서 고평가를 받는 이유가 뭘까요?

 

박성식: 독보적이잖아요. 음악 컬러자체가, 그런 스타일로 노래하는 보컬이 없잖아요. 그리고 첫 장을 열었기 때문에 굉장히 의미가 있는 거죠. 언더그라운드, 록 그다음에 보컬이 강조된 서양과 같은 록 음악을 하게 됐잖아요. 그전까지는 신중현 선생님이라든가 그냥 장르적인 그런 록, 한국적인 록이었다면 조금은 색다른 그런 록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기호: 조금 제가 첨을 한다면, 지금은 우리가 외국의 어떤 밴드랑 똑같이 연주한다고 해서 놀랄 만한 일이 별로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는 어떤 밴드가 예를 들어 비틀즈의 곡을 똑같이 연주했다고 하면 이건 굉장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각도에서 봤을 때 들국화의 음악이 당시에 우리가 듣던 가요와 팝의 영역에서 팝적으로 아주 근사치에 가까이 연주하고, 손색없이 작품도 나왔고, 또 인권이 형, 전인권 선배 보이스도 그랬고, 외모도 완전히 외국팀 같은 느낌이 강하게 어필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조동진 씨와도 직접 교류했나요?

장기호: 그렇죠.

박성식: 네 워낙 그러니까,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님 같은 느낌의 선배님이시기 때문에

장기호: (웃음)
박성식: 그렇게 디테일하게 음악적인 교류를 하거나 음악적인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이런 경우는 많지 않았고요. 주로 만나 뵈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야 음악 하는데 힘들지?”와 같이 좋은 얘기들만 해주셨어요. 마치 아버지 같은 느낌의 그런 선배님이셨죠. 저희는 개인적으로, 음악적으로 교류를 하거나 그런 적은 없는데, 작곡 수업 시간에 멜로디 순차 진행에 관해서 설명할 때 나뭇잎 사이로 곡을 딱 올려줘요. 그러면 막 순차 진행의 연결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분이 쓰신 음악들은 노랫말도 그렇고 멜로디 자체도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듣는 사람들을 배려한 그런 선율로 음악을 만들지 않았나,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창작한 멜로디라는 게 어떤 뜻인지 조금 설명 부탁드립니다.

 

박성식: 한번 들으면 바로 기억에 남는 멜로디죠. 미파솔미레도, 미파미미레레, 미파솔미레~ 이렇게 되는거예요.

 

그것은 ‘후크’가 아닌지?

 

박성식: 그런데 그 ‘후크’라는 개념이 시대별로 이렇게 장르별로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요. 포크 음악들은 순차적이고 선율이 차분한 멜로디의 특징이거든요. 거기에 아름다운 노랫말, 공감이 훨씬 더 많이 가는 노랫말이 오히려 후크 성격이 강하죠. 다시 말해서 선율은 어떤 음악적인 후킹보다는 차분한 느낌으로 전달만 해 주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조동진 선배님의 음악이 저희가 분석한 느낌의 그런 음악들이어서

 지금도 너무너무 그분의 음악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조동진 씨가 만드신 가사에 존경을 보내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성식: 글쎄요. 뭐 어떻게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장기호: 제 각도에서 볼 때는요. 그거는 정말 훌륭한 말 그대로 음유시인. 그러니까 가창력에 의지한 그런 음악이라기보다는 본인의 감성에 충만한 그런 가사 말에 멜로디를 담아서 노래하기 때문에, 그분의 가창력을 듣는다기보다는 그 가사의 메시지를 그분의 음성을 통해서 시 낭독하듯이 듣는 음악인데,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김현식 씨에게는 없는 그 기름 부으심이 있는 그 ‘어노인팅’이 있는 거죠. (웃음) 

그래서 그 훅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 귀에 어떻게 걸릴 것이냐 하는 것이, 송 라이터들의 관점이긴 한데, 이게 자극적으로 우리 감정을 건드릴 거냐, 아니면 내면적으로 정서적으로 건드릴 거냐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동진 선배님은 제가 볼 때 그분 평소의 인격이나 인품, 행동, 언행들이 그 노래하고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에, 그분의 음악이 신비롭게 들렸던 것 같고, 아무 데나 함부로 나서지 않으시고 방송도 많이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잘 어우러져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정말 최고의 음유시인 중에 한 분이라고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박성식: 그분 음악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상상되는 기분이 들어요. 다른 음악들은 가사보다는 비트에 몸이 반응하잖아요. 그런데 그 형님의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상상하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만드는 그런 음악인 것 같아요.

장기호: 한국의 레너드 코헨? 이런 느낌이죠. (웃음)


- 같이 술자리도 하고 그러셨어요?

 

박성식: 저는 한 두 번밖에 없고요. 그리고 술도 많이 드시지 않고 오히려 동생인 동익이 형이 많이 먹었죠.

장기호: (웃음)

 

동아기획에서 마지막으로 여쭤보고 싶은 인물이 장필순 씨입니다. 어떤 분인가요?

 

박성식: 여자 조동진?
장기호: (웃음)

박성식: 장필순 친구는 엄청난 장면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가수죠. 그런 음악.

 

장기호: 그쪽 패밀리가 동아기획과 하나기획이라는 회사로 분리가 되면서, 동아기획보다 더 색깔이 강한 가수들이 그리로 다 들어갔고, 대중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아티스트 위주로 가는 음악. 콘텐츠들이 거의 그런 내용인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하지 못했어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서 보면 굉장히 기록할 만한 명작들이 많이 나왔죠. 낯선 사람들이라든지, 장필순 씨도 결국은 자기만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창법이나, 선곡 등이 당시에는 사람들이 왜 노래를 저렇게 하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데 지금 보면 그것이 장필순이라고 그 캐릭터가 완전히 정립된 것 같아요. 평소에는 이제 그런 캐릭터는 아니고요. 같이 이렇게 있다 보면 정말 재미있고 농담도 참 많이 하고. 한동안 가깝게 지냈고, 그 친구 앨범에 저도 몇 곡 참여하기도 했어요.

 

동아기획에서 같이 계시면서 빛과 소금도 협업을 많이 하신 편이세요?

 

장기호: 그렇죠. 많이 했죠. 거의 다 같이 작업 하지 않았나.
박성식: 신인 가수들 음반 제작하게 되면, 저희가 편곡도 해주고, 세션도 하고
장기호: 이정선 선배님도 우리가 같이 세션도 해드렸고, 코나도 있었고, 우석준이도 있었고, 거의 다 저희가 서로 필요한 사람들은 서로 공유했던 것 같아요. (웃음)

박성식: 승환이도 동아에서 첫 1집 내지 않았나? 승환이는 따로 냈나?
장기호: 이승환이? 그건 잘 모르겠네... 승환이.

 

아티스트들이 서로 도와주는 것이 동아기획이라는 패밀리 안에서의 분위기 였나요?

 

박성식: 신인 아티스트들이 요청을 해야 저희가 가는 건데, 신인 아티스트가 제작한다고 우리가 무조건 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요청하면 가는 거죠. 동아기획 식구니까.
장기호: 지금처럼 프로듀서 지시에 의해 상품을 찍어 내듯이 내는 게 아니라, 결국은 각자가 프로듀서 역할을 한 거죠. 동아기획, 하나기획도 그랬고.

- 동아기획을 멀리서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의 색깔이 있다.
 

장기호: 그렇죠. 그거 아마 제 생각에는 그 무렵이 80년대, 90년대 이때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세계적으로 팝 시장에서 굉장히 좋은 음악들이 많이 나왔던 그런 음악들을 잘하는 사람들이 듣고 자라고 연구 많이 하고 이런 분들이 이제 작업을 하다 보니까 그 음악적인 정서가 어느 정도 이렇게 교감이 일치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해요.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최승원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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