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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5
by 우정호

미성의 발라드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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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25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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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의 종장과 시작이 교차하던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사이. ’격변‘이라는 단어가 언론에 매일 오르내렸듯, 90년대를 기점으로 황금기를 맞은 대중가요 신도 ’태평성대‘의 최고점을 향해 급변하고 있었다. H.O.T. 젝스키스, SES, 핑클, 신화, 유승준(스티브 유), 이정현, 임창정 김현정, 그리고 god까지. 특정 장르나 팀에만 치우치지 않은 팬덤의 폭발적 수요가 있던 시기였으나, 시대의 정점은 존재해야 했다. 그 주인공은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나 비주얼로 승부한 게 아닌, 발라드로 전 연령대의 감성적 에고를 자극한 ’발라더‘ 조성모였다.

 

 

(아카이브 K는 조성모와 2020년 7월 인터뷰했다.) 

 

 

- 가수 데뷔 이전 음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였나요?

 

조성모 : 음악에 제대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좀 늦었고요. 자연스럽게 음악을 듣고 접하게 된 건 큰형님 영향이 있었어요. 제 큰형이 66년생이신데, 신촌이라든지 방배동에서 통기타 가수 생활을 좀 오래 하셨거든요. 저와 나이 차이가 좀 있으니까, 제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큰 형이 맨날 기타 치면서 연습하시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노래들을 많이 접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겼고요. 

 

그리고 또 당시에 좀 괜찮은 오디오가 집에 있었고, 아무래도 형이 음악을 많이 듣고 부르시니까 LP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해 보고 싶다, 가수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던 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였어요.

 

- 당시 듣던 음악들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조성모 : 일단, 가요들은 발라드 위주였어요. 형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누나들 영향이었을 수도 있고요. 형은 아무래도 통기타 가수이시니까 발라드 위주 노래를 많이 준비하셨고, 누나들은 아무래도 그때 고등학교, 대학교, 한창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이니까 아무래도 발라드 팬이었죠. 그래서 우리나라 거의 모든 발라드 곡들이 제 안에 입력이 돼 있더라고요. 

 

또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 듣게 되는 노래들이 특히, 조용하고 잔잔한 곡들, 발라드 곡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무래도 나중에 제가 가수가 됐을 때, 장르를 선택할 때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고요.

 

- 어린 시절부터 발라드의 DNA가 몸에 배어 있었던 거군요.

 

조성모 :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영향을 계속 받으면서 다른 음악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 같고. 저희 때, 특히 제 나이대에서는 록과 헤비메탈이 굉장히 많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남자들은 정말 당시에... (웃음) 그쪽 음악에 많이 심취되어 있던 중이었는데 저 혼자 학교에서 발라드 들으니까 오히려 “쟤 참 특이한 애다”, “쟤 왜 저래? 뭐 혼자 감수성이야” (웃음) “’갬성‘ 부리고 있어” 그런 욕도 먹었던 것 같아요, 친구들한테.

 

- 그 당시 남학생들 중엔 실제로는 다른 음악들도 들으면서 친구들과 얘기할 때 ’역시, 메탈이지‘하던 케이스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조성모 : 저는 그냥 발라드를 좋아했어요. 다른 음악은 오히려 음악 시작하고 난 다음에 접하면서 ’여러 다양한 음악들이 많구나‘ 느꼈죠.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가수 준비할 때도 언제나 저는 발라드와 함께했던 것 같아요.

 

- 어떤 가수의 노래를 마음속 깊이 새겼던 건가요?

 

조성모 : 가장 자연스럽게 듣게 된 건 이문세 선배님 노래, 가장 많이 들었던 건 변진섭 선배님, 그리고 이승철 선배님, 박광현 선배님, 이선희 선배님도 계시고. 참,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초이스였다기보다는 누나들의... (웃음) 초이스였는데, 들리니까 들어보잖아요. 너무 좋은 거예요. 일단 문세 형님, 진섭이 형님 음악 같은 경우는 저도 누나들 못지않게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어렸을 때 손이 여물지가 않으니까 LP를 만지면 사고 많이 나잖아요. (웃음) LP 판 턴테이블 위에 이렇게 살짝 LP를 놓으면 자동으로 내려가며 재생되는 시스템인데, 어리니까 뭐 아나요? 잘 할 줄 모르니까 LP 판에 기스 내놓고. 상처 내면 막 누나한테 혼나고 그랬던 기억도 있고.

 

- 이문세, 변진섭 음악 들으면서 어떤 점이 특히 끌렸나요?

 

조성모 : 그냥 그 흐르는 감성이 너무 와닿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뭐 사랑을 알면 얼마나 알고, 이별에 대해서 알기나 알았을까요? 그냥 저하고 꼭 맞는 옷 같았어요. 그냥 들으면 좋고, 기분이 몽알몽알 해지고. 뭐랄까요, 그 노래들을 들으면 저의 밤이 늘 행복했어요. 발라드 음악을 듣고 있으면 늘 그냥 평화로웠다고 해야 할까요. 발라드 음악 듣는데 기분이 막 업되지는 않잖아요. 들으면서 좀 촉촉했던 것 같아요. (웃음)

 

음악이 좋으면 그 가수를 알고 싶어지고. 가수가 좋으면 음반을 구입하게 되잖아요. 음반을 구입하게 되면 거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까지 외우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사까지 외우는 건 뭐 당연한 거고요. 그 음악들을 좋아해서 문세 형도, 진섭이 형도 좋아하게 되고 그런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아요.

 

- 발라드 가수들에게 특별히 끌렸던 거군요.

 

조성모 :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문세, 변진섭 선배 음반들은 제가 구입했던 건 아니었고, 제가 처음 제 손으로 음반을 사면서까지 좋아한 경우는 신승훈 선배가 처음이었어요. 당시에는 동네 레코드 점에 앨범 릴리즈 되는 첫날 줄 서서 샀어야 됐거든요. 대단했죠. 그 레코드 점 사장님한테 앨범 언제 나오는지 미리 체크하고, 날짜를 알려주면 그날 레코드 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렇게 음반을 구입하고... 그전에는 누나들이 초이스 한 앨범들을 제가 업어 간 거고. (웃음) 제가 음악에 눈 뜨고 돈을 지불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부터인 것 같아요. 그게 신승훈 선배님.

 

- 그런데, 대형 레코드점이 아니라 동네 레코드점에서도 줄을 서서 구매할 정도였나요?

 

조성모 : 그렇죠. 집 앞에 바로 가까운 레코드점. 꽤 많이 섰어요. 한 2~3m 서 있어야 됐어요. 어떨 때는 테이프나 LP, CD 살 때 그것만 주는 게 아니라 포스터도 좀 껴주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거 받고 싶어서. (웃음) 그때, 누구나 다 신승훈이라는 가수를 좋아한다고 휩쓸려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느껴지는 게 있어서 그 가수를 좋아했어요.

 

 이문세 선배님이 진행하시던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방송에서 신승훈 선배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딱 듣는 순가... 모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요. 그날 그 자리에서 처음 공개하는 노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익숙한 곡도 아니었고, 들어봤던 곡도 아닌데 그 가사 내용에 대해 중학교 1학년인 제가 충분한 이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탁 듣는데 그냥 눈물이... 아, 뭔가 심상치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승훈이 형님 스타일이 딱 있으시잖아요. 저는 말하듯 풀어가는데 승훈이 형님은 앞에 탁 잡고 가신단 말이에요. (노래) ’내게 가르쳐 준 큰 사랑~‘ 딱 이게 들어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거예요. 아, 정말 참 좋다. (웃음) 모르겠습니다. 중2병을 앞두고 있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마음에 이제 어떤 위안이 된 것 같아요. 

 

- 신승훈 씨를 동경하고 좋아했던 그 마음이 가수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나요?

 

조성모 : 아, 그렇죠. 어떻게 보면 영향이라기보다 노래를 듣고 나서 생긴 작은 감상이 저를 가수의 길로 이끈게 아닌가 싶어요. 물론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같은 경우는 아마 1번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제가 가사를 다 외우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제 가슴에 탁 하고 들어온 곡은 ’보이지 않는 사랑‘이었어요. 

 

이 곡이 끝나고 저에게 처음 든 생각이 뭐였냐면 ’아, 이분은 참 행복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 노래로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니까 이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그런 생각이 나중에 제가 가수가 되게끔 이끌어준 또 하나의 씨앗이 되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부러웠던 것 같아요. 내가 가진 노래로, 나의 감성으로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또 사랑도 받고. 또 사람들 눈물도 흘리게 해 주고, 기쁘게도 해주는 그런 게. 그런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으니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거죠.

 

- 그렇다면, 그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위한 행보로 나아갔나요?

 

조성모 : 아니요. 바로 제가 뭘 어떻게 한 건 아니고요. 그게 그렇잖아요. 음악에 대한 어떤 환경이 조성돼있지 않으면 기회도 없고. 지금처럼 뭐 오디션 볼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어디서 보는지도 몰랐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에서 예전에 극기훈련 같은 거 가잖아요. (웃음) 고 1 때 갑니다. 

 

봄날이었을 거예요. 5, 6월쯤 날씨 참 좋을 때였는데, 그때 학교 무대에 서게 됐어요. 극기훈련 마지막 날 촛불도 이렇게 켜고, 뭐 엄마, 아빠도 한번 불러보자고 하고, 노래도 같이 하고, 장기자랑도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 서게 된 거예요. 제가 서게 된 이유가 뭐냐면, MR이라고 하죠. 예전 테이프에 보면 마지막 트랙에 인스트루먼트 버전 트랙을 하나씩 껴 줬거든요. 그 반주 트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웃음)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때 저희 반에 뭐 특별히 장기가 있는 친구들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야, 혹시 나 이거 반주가 테이프에 있으니까 이 노래 아는 사람 있으면 갖고 나가서 해” 이렇게 때우라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그 노래를 때마침 아무도 아는 친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니가 그냥 대충 때우고 나오래‘ 하면서 저한테 그러길래 “그래, 뭐.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러마”했지요. 형님이 가수 하시는 걸 보면서 또 본 건 있으니까요. 그래서 “알았어. 그럼 내가 대충 어떻게 우리 반의 명예까진 아니지만 책임을 하고 올게. 다른 반도 다들 나가는 거니까” 그래서 장기 자랑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이게 어떻게 보면 가수를 해야 되겠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거 같아요.

 

- 어떤 노래를 불렀나요?

 

조성모 : 박광현 선배님의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 어떻게 보면 누나 취향이죠. (웃음) 누나가 산 앨범을 듣다가 그 노래가 참 좋더라고요. 그 노래를 하게 됐는데, 참 모든 게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날씨, 바람... 극기훈련이라는 건 많이 지치게 되잖아요. 그런 와중에 어떤 고즈넉해지는 밤이 됐고 그때 노래를 하게 됐죠. 저희 학교가 남녀공학이었거든요. 근데 막 친구들이 우는 거예요. 제가 노래를 했더니. 뭐 여자인 친구들은 감수성이 좀 예민할 수 있는데, 남자애들까지 울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어요. 노래 끝나고 나니까 박수도 좀 크게 받고요, 의외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거죠, 그 자리에서. 그때 ‘아, 나는 공부를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니었고, 운동을 너무 잘해서 특기생인 것도 아니었고, 언어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 재능이라는 걸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노래를 하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인정을 해주네. 내가 가수가 되려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그 노래를 본 친구들이 가수 해 보라고 또 부추길 뿐만 아니라 관계자분들을 소개까지 이어준 거예요. 거기 또 라디오 피디 선생님 아들이 있었거든요. 거기서부터 알음알음해가지고 작곡가도 소개해 주고, 오디션 한번 가서 보라고 하고. 그러다 작곡가 이경섭 씨까지 만나게 된 거죠. (웃음) 참 희한하죠? 극기훈련 장기 자랑에서 시작됐다는 게. 

 

- 그 시절에도 노래방에서 서로 노래를 들어볼 수 있지 않았나요?

 

조성모 : 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노래방 다니면 이제... (웃음) 노는 친구 축에 끼는 거라 좀 조심스럽기는 했죠. 

 

- 그 이전까지는 누구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평가받아 볼 경험이 없었나요? 

 

조성모 : 그렇죠. 친구들 앞에서 노래할 기회도 없었고. 그래서 그 우연한 자리에서 노래 한 번 한 이후로 학교에서 조금은 인기가 있는 축이 됐고, 다른 학교에도 좀 소문이 났어요. 저 친구 가수 될 거라고. 그러면서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이 좀 바라봐 주고 하니까 어린 마음에 좀 신이 나잖아요. 

 

그래서 오디션도 더 적극적으로 보고, 연습도 본격적으로 하고. 그렇다고 그때 트레이너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나 교육 시스템도 없었기 때문에, 노래를 그냥 따라 하는 거였죠. 연습이라는 게. 카피해 보고, 따라하고. 이전에는 신승훈 선배님 노래를 만약 연습한다고 하면, 그냥 듣고 가사 외우고, 필(feel)대로 부르는 건데, 이제는 정말 프로가 되고 싶어졌잖아요. 그러니가 호흡을 어디에서 쉬었는지, 몇 번을 쉬었는지 찾아보고. 나중엔 그런 것도 다 들려요. 울먹이면서 노래하는 그 순간도 다 들리게 돼요. 그런 것까지 딱 아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좀 더 본격적으로 가수 준비를 해 간 것 같아요.

 

- 가수 준비부터 데뷔까지는 어떤 여정이 있었나요?

 

조성모 :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나와 살게 됐어요. 작곡가 이경섭 씨께 연습생으로 발탁이 됐거든요. 당시 이경섭 씨가 작곡한 노래들이 ‘슬픈 언약식’, ‘나만의 슬픔’, 맨발의 청춘‘, 비비의 ’하늘 땅 별 땅‘, 그리고 김경호 선배님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아, 정말 제가 뽑혔다는 것 만으로 어디 가서 친구들에게 정말 많은 기대를 받았던 때였죠. 

 

앨범도 금방 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4년이 걸리더라고요. (웃음) 4년을 기다렸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경섭 씨 밑에 들어가서 심부름도 하고, 녹음하는 것도 참관하고, 진행도 보고. 필요하면 대신 악기도 다루고. 그런 생활들이었죠. 지금처럼 연습실 내주고, 방 하나 주면서 트레이너도 붙여주고, 춤도, 연기도, 외국어도 가르쳐 주고 그런 시스템은 전혀 없었어요. (웃음) 그래서 작곡가 형님 녹음하시면 녹음실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다가 오늘 가수 녹음이 없고 연주 녹음이나 믹싱하는 날이면 몰래 녹음실 들어가 문 닫고 피아노 치면서 연습하고, 기타 치면서 연습하고. (웃음) 눈치였어요. 

 

그마저 연습할 데도 없으면 형 차 키 가지고 나가서, 차 안에서 문 닫고 노래 연습하고. 여름 되면 에어컨이라도 틀면 좋은데 그러면 또 기름값 나가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뜨거운 차 안에서 연습하고. 그랬던 시절이에요. (웃음) 그렇게 연습을 4년 했어요. 중간에 앨범 반 정도 만들다 아직 부족하다고 해서 엎어지기도 하고. 그런 앨범이 둘 있었어요. 

 

- 연습생 시절을 4년이나 보냈던 거군요.

 

조성모 : 그렇죠. 작곡가 이경섭 씨, 경섭이 형 밑에 들어가 연습생 하는 게 어땠냐면요, 저희 때는 조금 시스템이 달랐거든요. 요즘에는 기획사에 연습생이 들어가잖아요. 기획사에서 연습생 뽑고, 키우는데 저희 때는 프로듀서가 연습생을 키워요. 그렇게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지내기도 하고. 뭐 동고동락하는 거죠. 그러면서 가수를 만들고 그다음에 기획사로 데리고 들어가요. 그러면서 연습생을 키운 프로듀서가 헤드 프로듀서를 하면서 앨범을 만드는 거죠. 그런 형식의 앨범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 가수들도 많았고. 

 

저도 어떻게 보면 그런 중 한 명이었던 건데, 그러니까 작곡가 이경섭 씨 밑에서 있다 여기저기 회사에 들어가게 된 거죠. 이 회사에서도 하다가 일이 잘 안돼서 나오게 되면 저기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 그런 식으로 4년의 세월을 보내고, 마지막 ’투 헤븐‘을 내게 된 회사에 들어갈 오디션을 보게 된 거죠. 

 

제가 그때 딱 스물둘이었고, 영장을 받아 놓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앨범을 못 내게 되면 군대 가야 되는 상황이었고, 이전 4년간 앨범도 많이 엎어지기도 했어서 다녀오면 더 이상 가수를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거든요. 또 그 당시가 IMF 때였잖아요. 집도 굉장히 좀 많이 어려운 시점이었고. 그래서 제 꿈만 좇을 수는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군대 가게 되면 얼른 갔다 와서 집에 좀 보탬이 돼야지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오디션이라고 생각하고 본 거였어요. 

 

어떻게 보면 붙으려고 본 게 아니라, 4년 동안 그래도 해 온 게 있으니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어서 그냥. ‘이대로 끝내기엔 조금 아쉽고, 안되면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군대 갔다 오자’하는 마음으로 봤는데, 그 오디션에 붙은 거예요. 제가 나중에 사장님께 왜 나를 뽑았냐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딱 두 가지를 말씀하시더라고요. 하나는 ’눈빛이 너무 살아 있었다‘, 또 하나는 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이라는데. 그런 말을 했던 게 저도 기억이 안 나거든요.

 

오디션 마지막에 “다 들었으니까 이제 가 봐라”그랬더니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제가 돌아서 “저기, 혹시 제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들려 드려도 될까요?” 그러더래요. 그걸 보고 사장님이 쨰는 뭘 해도 하겠구나 생각을 하셨대요. (웃음) 그게 아니라 군대 가기 전에 아쉬워서 그런 건데... 해석이 좀 다르게 됐는데. 정말 아쉬웠거든요. ’아, 이대로 나의 음악 생활, 가수가 되고 싶었던 꿈은 접어야 되는 거구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봤기 때문에 붙었던 것도 같아요.

 

- 1집 [To Heaven]에서 사랑받은 ‘불멸의 사랑’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흥미롭습니다. 데뷔 이전에 일반인들에게 들려준 적 있다고요.

 

조성모 : 아, 네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오디션이랑 비슷한 형태였을 수 있는데요. 이경섭 작곡가가 기획사에 저를 데리고 온 상황이었지만, 제작하는 앨범에 이경섭 씨 곡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른 작곡가 곡도 들어가는 거였거든요. 사장님께서 다른 작곡가에게도 저를 오디션 보게 하고 체크해 보시고 싶으셨나 봐요. 

 

그래서 지금은 ’불멸의 사랑‘ 작곡가가 되신 거지만 (웃음) 당시 굉장히 유명한 작곡가신 양정승 씨를 한번 만나 보라고 하셨어요. 같이 가시지도 않고 저 혼자 찾아가서 만나보라고. 아직 오디션이 전부 끝난 게 아니었던 거예요. 마지막 관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당시 서울 스튜디오에 가서 작곡가 양정승 씨를 만났는데, “어, 그래 니가 성모구나? 성모라는 아이구나. 그래, 반갑다. 귀엽게 생겼네” 뭐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웃음) 테이프에 녹음을 하시고는 “너 워크맨 있냐?” 그래서 “네, 있습니다”했더니 조금 이따 테스팅 해볼 테니까 녹음한 곡을 다 외우라는 거예요. 그 곡이 ’불멸의 사랑‘이었어요. 뭐 아는 곡도 아니고... (웃음) 그러니까 가이드 된 그 노래를 그냥 외우라는 거예요. 

 

그런데 참 웃겼던 게 당황스러운 상황이잖아요. 그 자리에서 노래 바로 외워서 녹음하라는 게. 그래도 4년 동안 연습생 하면서 배운 게 얻은 것들이 있더라고요. 녹음실에서 긴장될 일도 저는 없었고. 노래 금방 익혀서 부르는 건 솔직히 많이 해봤던 일이고. 가이드 보컬이라고 그러죠. 연습생 때는 그런 거 좀 하거든요. 저는 가수가 못 되는데 가수가 될 사람들 곡을 가이드하고... (웃음) 이런 경우들을 너무 많이 겪어보니까 안 어려운 거예요. 

 

“알겠습니다”그러고는 노래를 익히기 시작했는데, 이 노래가 왜 이렇게 높아? (웃음) 당시 록발라드 시대가 한창이었거든요.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금지된 사랑‘이 하늘을 찌르고 1등을 하던 시절이라. 저는 발라더인데 이거 완전 록발라드 곡이거든요. 그래도 저는 키가 높은 편이니까, 도전해본다고 예전에 ’쉬즈 곤‘ 불렀던 적도 있고. 그래서 곡 들어보고 빠르게 익혔어요. 녹음 부스 들어가서 불렀는데, 녹음하시면서 별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잘 한다, 못 한다 무슨 얘기도 없고. 

 

그러고는 녹음한 테이프를 가지고 이태원의 어느 바로 저를 데리고 가시더라고요. 아는 단골 가게셨나 봐요. 맥주 한 잔 시켜주시더니, 녹음했던 테이프 주면서 이거 틀어봐 달라고, ’불멸의 사랑‘. 그래서 노래가 나오는데 사람들 반응이 어떤지 본 것 같아요. 그냥 흘러가는 음악처럼 듣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이 노래 뭐지?‘하고 약간의 반응이라도 하는지. 그런데 손님들도 조금 그 노래에 관심을 갖는 느낌이 있었고, 바의 사장님도 “이 노래 누가 부른 거냐고”하시면서 관심도 가지셨고. 노래 좀 높습니까? (웃음) 소리소리를 지르고 하니까 뭔가 조금 더 각인이 빨리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노래 좋다는 얘기가 들리고, 또 이 노래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날 앨범 제작이 결정됐어요. 

 

[사진출처=아프로뮤직]

   

(2부에서 계속.)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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