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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by 우정호

조규찬, 음악적 마티에르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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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08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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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脫)인간적일 정도로 미세한 부분을 구현해내는 보컬 역량. 연주, 작곡, 작사, 프로듀싱 등 음악 전반을 아우른 고차원적 음악성. 디렉팅 과정에서 구사하는 단정하면서도 촌철살인과도 같은 어투... 이는 세간이 조규찬을 ‘완벽주의자’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다소 비정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하나음악과 학전, 동아기획의 유재하, 김광석, 김민기, 조동진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적 온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온정한 음악 세계를 창조한 싱어송라이터다.

 

 

(아카이브 K는 조규찬과 2020년 3월 인터뷰했다.) 

 

 

- 가수 데뷔 계기가 알고 싶습니다.

 

조규찬 : 저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1회에 참가했는데요. 그 대회를 통해서 데뷔를 한 거죠. 1989년 10월에 있었던. 1차 예선, 2차 예선 거쳐서 본선까지 갔습니다만. 그 대회를 통해서였죠. 

 

- 어떤 곡으로 참가하셨나요?

 

조규찬 : 제 자작곡 ‘무지개’라는 곡이 있었어요. 그 곡으로 나갔어요. 

 

- 그때 고등학생이었나요?

 

조규찬 :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던 거죠. 고등학교 때 만든 곡이었고요.

 

- 첫 번째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1위를 하신 건가요?

 

조규찬 : 예, 뭐. 최고상이긴 했어요. 금상이 최고상이었는데. 예. 

 

- 참가할 때부터 금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조규찬 : 전혀 못했죠. 겸손, 이런 게 아니라요. 그런 생각을 못 했다기보다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 같아요. 제가 그렇다고 어떤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본선에 가 있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그 기념 음반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고. 그리고 또 그 녹음이 이뤄지고 나고 한참 후긴 했습니다만, 그 대회가 제 음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던 거죠. 

 

- 그런데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는 어떤 계기로 나가게 됐나요?

 

조규찬 : 그게 고등학교 때 제가 미술 전공을 했는데, 미술 전공하는 사람 중에서 기타 치거나,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저도 그중에 하나였고, 그 기간 동안 정말 즐겁게 나만의 노래를 만드는 시간이 있었던 거죠. 그중 한 곡이 ‘무지개’라는 곡이었고, 그 당시 밴드를 하던 제 작은형이 오가면서 옆에서 들었죠. 

 

작은형은 1988년에 서울예대 실용음악과가 생겼을 때, 그 1기로 입학을 했어요. 그 당시에 거기서 신중현 님의 둘째 아들인 신윤철 씨도 만나고, 지금은 가요계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다양한 이들이 거기에 입학을 했거든요. 작은형도 거기서 모여서 막 음악을 하고 있다가 유재하음악경연대회 포스터가 학교에 붙은 걸 보고 전한테 얘기 한 거예요. 

 

“이런 게 있는데, 찬아 한 번 나가볼래?” 그래서 “아, 내가 어떻게 그런 걸 나가”했더니 “그냥 나가봐. 경험 삼아서.” 그래서 당시 예선이 테이프 심사였는데, 카세트에다 녹음하는 거 눌러놓고 그 앞에서 기타 쳐서 녹음해가지고 테이프를 보낸 거죠. 근데 2차 예선에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개봉문화센터였을 거예요, 아마. 

 

거기서 2차 예선이 있었고, 노래를 또 했죠. 근데 본선에 또 선발됐다고 하셔서, 이제 예술의 전당에서 본선이 있었죠. 임백천 선배님이 사회 보시고, 제가 참가자 중에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노래를 했더니 대상을 주셔서. 그런 과정으로 하게 된 거죠. 

 

- 대회 참가 자격이나 조건은 어떻게 됐나요?

 

조규찬 :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작곡이어야 하고요. 반주자가 있으면 안 돼요. 본인이 반주하고 본인이 가창. 연주곡이면 본인이 연주. 근데 그 곡이 본인의 곡이어야 하고 가창의 경우 가사가 있으면 그 가사까지도 본인이 모두 써야 하고. 그게 조건이었죠. 

 

- 지금의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도 같은 조건인가요?

 

조규찬 : 중간중간 약간 변동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형식에 있어서는. 예컨대 1회 대회 때는 혼자 반주하면서 자기 자작곡을 공연하는 그런 형태가 정해져 있던 건데. 나중에 제가 심사도 가고, 초대받아서 여러 계기로 간 바가 있는데, 이제는 반주자 따로 있고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둘 다 연주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기존의 틀을 이제는 벗어나서 다양한 표현들을 다 끌어안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 아무래도 ‘싱어송라이터 유재하’를 기리기 위한 경연대회기 때문에 특정한 참가 조건이 있던 게 아닐까요?

 

조규찬 : 그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유재하라는 아티스트를 기리며 만들어진 대회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없을 수 없죠. ‘싱어송라이터’라는 대전제가 반드시 거기엔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가요제마다 다양한 기준이 있겠죠. 대학가요제에도 있었을 거고요. 강변 가요제에도 있었을 거고, 그 외에 또 각 지역 크고 작은 가요제들도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 기준이 다 다를 수밖에 없고요. 

 

당시로써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라는 게 처음 시작된 것이었고, 어떤 대중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별로 없었잖아요. 이미지나 평가도 없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유재하라는 뮤지션을, 싱어송라이터를 기리는 취지에 걸맞게 시작해서 그것이 정착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런 엄격한 기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대회 참가 이전에도 유재하 씨 음악을 좋아했나요?

 

조규찬 : 네. 마르고 닳도록 들었죠. 유재하 선배님의 음반에 대해서는 정말 그 표현이 딱 맞아요. 자기 전 가장 많이 들었던 음반이 들국화, 유재하. 뭐 최성원 선배님 솔로 앨범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시인과 촌장도 많이 들었고. 한영애 선배님도 많이 들었고. 유재하 님의 음반은 머리맡에 카세트테이프 두고 이어폰 끼고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또 엘피도 있었거든요. 엘피 가지고 같이 음악하던 형 집에 놀러 가서 같이 듣기도 하고. 물론, 그 집에도 유재하 음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등학교 동창 친구 집에 시험공부하러 가면 먼저 공부하기 전에 둘이 라면을 끓여먹는데, 라면 끓여먹고 나서 소화되기 전까지 우리가 늘 하던 일은 턴테이블에다 엘피를 올려놓는 것이었는데요. 그때 제일 많이 턴테이블에 올라갔던 것이 유재하 음반이었던 걸로 기억을 해요. 

 

- 유재하 음반의 어떤 점이 그렇게 지참해 다니며 들을 정도로 달랐던 건가요?

 

조규찬 : 일단은 그런 세련된 음악이 없었던 거 같아요. 물론 이 세련된 음악이 없었다는 표현이 자칫 잘못하면 그전의 음악을 비하하거나 상대평가하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는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좀 다릅니다. 음악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죠. 그 다양한 아름다운 음악들은 계속 존재해 왔지만, 유재하 음반에는 그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과 그전에는 그렇게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러한 세련된 면모가 있는 음반이었다는 거죠. 그런 측면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 듣자마자 놀라움에 사로잡힐 정도의 곡들도 있었나요?

 

조규찬 : 다 놀랐는데요. 진짜 다 놀랐어요. 모든 트랙을 들을 때마다 다 놀랐고.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지금도 그 한 곡, 한 곡을 들을 때, 그 순간들이 제 삶에서 있다는 게 감사하단 생각이 들죠. 만약에 내가 그 음반이 나왔을 때, 그 음악을 듣을 수 있는 세대가 아니고 그 전 세대였거나 그 음반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면, 그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생각이 들 정도라는 거죠. 그 정도로 한 트랙, 한 트랙이 저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었고, 그리고 음악을 하면서 계속 가슴에 담아둔 추억들로 알알이 새겨지는 그런 과정이었던 거죠. 

 

- 이를테면 유재하 앨범에서는 획기적인 코드 진행이 등장했다거나 그런 차이도 있었나요?

 

조규찬 : 코드 진행으로 말씀드리면 쉽게 느끼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예컨대 ‘우울한 편지’라는 곡을 예로 들면 이 곡은 보사노바잖아요. 근데 보사노바라는 음악을 우리가 들을 때, 그 음악 스타일이 가지고 있는 아주 그 전형적인 화음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있어요, 나름대로. 그게 재즈 스타일에 맞다 이거죠.

 

조금 더 좁혀서 말씀드리면 어떤 하나의 곡이 시작돼서 끝날 때까지, 우리가 그 화음의 흐름을 보면 ‘조’라고도 하고 ‘키’라고도 하는 음의 높이,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이 구현되는 높이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음들이 구사가 되는 거거든요. 나중에 전조가 되는 고조가 되면서 전조가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어떤 한 곡 안에서 이 조로 갔다가 저 조로 갔다가 다시 저 저로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런 변화무쌍한 그걸 ‘키 센터’라고 하는데, 조성이 그렇게 바뀌는 과정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코드 진행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진 않았어요. 음악 이론적으로 이런 자체가 중요한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자연스럽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내가 그 변화를 어색하지 않게 느낄 수 있게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중요한 거거든요. 그것까지 완벽하게 이뤄져 있는 거죠. 

 

‘우울한 편지’를 예를 들어서 본다면, 그 곡의 후렴이 그렇거든요. 음악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음악 이론가가 아니더라도 그 분위기의 변화무쌍함을 느끼는 거죠. 그리고 음악적으로 굉장히 정서적으로 재밌다는 느낌을 느끼게 돼요. ‘재밌다’는 표현보다는 ‘흥미롭다’. ‘어, 이런 분위기가 갑자기 이렇게 바뀌네’하면서. 후각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새로운 공기가 있는 어떤 공간, 새로운 향기가 나는 숲이 계속 바뀌어 가며 연달아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그러다가 원래 내가 출발했던 숲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거죠. 그런 변화무쌍함이 너무나도 유려하게 잘 엮여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시간이 흐른 지금도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론 공부를 하고, 그걸 토대로 해석해 보면 더욱 놀라운 거죠. 그게 보사노바에서 통용되고 있는 어법, 음악적인 말투라는 게 있는데, 그 당시에 벌써 그 정통의 말투가 우리 가요에 소개가 된 거죠. 너무나도 세련된 표현으로. 그래서 그 곡이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음악적으로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내 가슴을 울린다는 거죠. 

 

- 그러한 획기적인 변화를 만든 유재하 씨의 등장이 현대 한국 발라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조규찬 : 그건 좀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질문을 하시는 입장이 음악을 하시는 입장이 아니시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그런 거라서 이제 그렇게 주시는 거라고 믿지만. 기대되는 대답을 드리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왜냐면 과연 한국적이라는 게 뭔가. 이런 질문부터 들어가야 되거든요.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음악은 서양음악이잖아요. 국악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한국 발라드’라는 표현을 해야 한다면, 그전에 가요에서 나왔던 발라드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 발라드들이 어느 시대에, 어떤 음악 스타일을 차용해왔느냐, 아니면 영향을 받았느냐, 융화를 시켰느냐를 또 우리가 바라보고 들여다봐야 돼요. 

 

다만 유재하라는 그 아티스트, 싱어송라이터로 인해서 한국 발라드가 시작됐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 발라드의 어떤 전형은 뭐냐면 팝 발라드지요. 그렇다면 팝 발라드가 한국에서 언제 시작이 됐느냐라고 보면 유재하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예컨대, 애드나인(add9)이라는 코드가 있어요.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라는 곡 첫 코드가 애드나인으로 시작하거든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삼화음이 있는데, ‘도미솔’로 쌓이는 게 3화음이에요. 근데 ‘도’가 베이스가 있고요, ‘레미솔’로 이렇게 쌓이는 경우가 있어요. 이 ‘레’라는 음이 첫 코드에 첫 박자에 딱 등장을 해요. ‘별 헤는 밤이면~’ 이게 나올 때 딱 그 코드가 등장하거든요. 근데 음악을 좀 많이 좋아하고 듣던, 음악을 하고 싶어 하던 후배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곡을 시작하는 게 처음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지금은 많이 그렇게 쓰기도 하지만. 

 

애드나인으로 시작하는 게 유재하 곡 이전에도 쓰신 분들이 많이 있으셨겠지만, 그렇게 아주 적재적소에 집중력 있게 그렇게 신선하게 쓰인 경우. 에컨대,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던 거 같아요, 제 기억에는. 그래서 그런 것들, 음악적으로 새로이, 처음이라는 의미로써 작용하는 것들이 그 음반에 많이 담겨있어요. 지금에 와서는 그게 새삼스럽고 새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마치 피카소의 그림이 그걸 흉내 내서 그리는 이라면 어렵지 않은 것인데, 그게 왜 훌륭하냐고 얘기한다면. 그러한 생각을 처음 화폭에 표현해놓을 수 있던 그 ‘처음’이라는 의미, 관념, 콘셉트에 대해 우리가 대답하잖아요. 

 

유재하라는 뮤지션의 음악도 그렇지요. 지금은 그것을 답습한 수많은 후배들에 의해서 그보다 더 하면 더한 표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지난 시간들을 무시하고 지금 음악들과 단순 비교를 하면 그게 왜 새로울까 느낄 수 있지만, 그걸 역으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시발점이 없었다면, 과연 그것들이 계속 가지를 뻗어서 지금의 이 열매까지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그 음악이 그 정도의 파급이 분명히 있었던 거죠.

 

- 데뷔 이후 작곡, 작사 커리어도 많으시지만 수많은 가수들 곡 작업에 코러스로 참여하신 부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조규찬 : 뭐 많이 했죠. 사실은 제가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는데 요즘에 90년대 음악을 많이 틀거든요. 그러다 보면 여기도 내 목소리, 저기도 내 목소리가 나와서 처음에는 재미 삼아 제가 코러스 했단 말씀을 드렸는데, 이제는 아예 그런 멘트를 하지 않거든요. 그 정도로 많이 코러스를 했어요. 여러분이 많이 아시는 곡 중엔, 젊은 분들은 그 곡을 모르실 수 있는데, 박진영 '그녀는 예뻤다', '허니', 그리고 박진영 씨가 프로듀싱 한 god 앨범에서 다수의 곡들. 또 윤종신 '환생'이라는 곡, 이문세 '조조할인'. 박정현 씨 데뷔곡 '나의 하루'라는 곡도 코러스를 했고요. 많이 했어요.

 

- 그토록 많은 뮤지션들이 조규찬 씨에게 러브콜을 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조규찬 : 제가 처음 코러스 했던 곡들, 앞서 예를 들었던 윤종신 선배님 '환생'이라는 곡, 박진영 씨 '그녀는 예뻤다', 이문세 선배님의 '조조할인' 같은 곡들이 대중적으로 굉장히 성공을 했어요. 특히 '그녀는 예뻤다'라는 곡은 엄청난 성공을 했잖아요. 근데 거기에 백그라운드 보컬을, 코러스라고 표현을 하죠. 그 곡 코러스는 양 자체가 굉장히 많았을 뿐 아니라 표현해놓은 게 너무나 많았어요. 보컬 애드립도 전주, 간주, 후주,에 다 해놨고. 거기다 뭐 뒤에서 백킹하는 코러스의 내용도 그렇고. 굉장히 많은 부분을 제가 했던 거죠. 그러고 나니까 조규찬의 코러스가 이런 거라는 일종의 제 데모처럼 됐던 거예요. '환생'이라는 곡에서도 그러했고요. 또 '조조할인'이라는 곡에서도 그러했고. 그게 가요계 제작자들 사이에서 마치 데모처럼 전해졌던 거죠. 

 

그전까진 코러스가 그런 식으로 된 게 많지 않았죠. 그전까지는 그냥 부가적인 어떤 역할을 하는 정도였지만, 제가 코러스 했던 곡들은 처음부터 기획의도에 코러스가 굉장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곡들이었어요. 이런 점도 박진영 씨의 프로듀싱 능력이 엄청난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코러스를 딱 알아보고 저를 영입해서 그렇게 적재적소에 사용을 한 거잖아요. 코러스로 제가 많은 걸 했지만 프로듀서인 박진영 씨 능력이었단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윤종신 님 '환생'이라는 곡을 유희열 씨가 프로듀스했는데 그 역시 저를 적재적소에 쓴 프로듀싱 역량이었거든요. 조조할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것들이 프로듀서들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전까지는 코러스가 그런 식으로 유통되지 않았던 거예요. 상당히 부가적이었고, 있어도 되고, 딱히 없어도 큰 문제가 아닌? 그런데 제가 코러스를 작업한 시점에 그게 굉장히 전면에 부각된 상태였던 거죠. 그래서 더 많은 제작자들에게 그게 들리게 됐고. 그래서 우리 음반에도 이런 재밌는 시도를 해보자는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됐던 거죠.

 

- 또한 조규찬 씨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그런 작업에 반영됐던 게 아닐까요? 

 

조규찬 : 가끔 이미지를 그렇게 갖고 계신 분들이 계신데요. 그렇지 않고요. 그냥 뭐 허술하고 그렇습니다. 

 

- 이전에 이소라 씨와 함께하신 앨범 녹음 영상에서, 보컬 디렉팅 중 같은 부분을 수없이 반복해 녹음하도록 지시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이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어서요.

 

조규찬 : 녹음할 때의 모습이 아마 다른 분들에 의해서 얘기가 전해지곤 하니까요. 그러면서 각자 나름 가지고 계신 기준에서 '완벽주의 아닐까?'생각하실 여지가 있었을 거예요. 그게 뭐 아니라고 제가 부정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제 베스트 앨범 녹음할 때도 이소라 씨가 듀엣을 하러 녹음실에 방문을 했는데, 제 파트를 녹음하고 있었어요. 아직 이소라 씨 파트 순서가 아니어서 와있는지 모른 채로 제 파트 녹음을 막 하고 있었고, 제 입장에서는 다시 해야 될 거라고 판단되는 부분을 몇 번을 다시 했어요. 

 

그러고 나왔더니 이소라 씨가 '너 뭐냐고. 지금 부를 때마다 똑같은데 왜 다시 하냐고. 너 문제 있다고.'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니까 객관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저만 아는 어떤 부분을 인정 안 하는 차원에서 보면 '저거 완벽주의자 같애, 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죠. 

 

- 이소라 씨가 듣기엔 조규찬 씨가 부른 해당 파트가 문제없게 들렸는데, 본인이 들었을 땐 그렇지 않았던 거군요. 

 

조규찬 : 네. 제가 생각하는 기준이 따로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보컬리스트는.  이소라 씨의 경우도 앨범 전체 보컬 디렉트하고 편곡하는 보컬 프로듀싱을 제가 계속했었는데요. 이소라 씨도 마찬가지예요. 이소라 씨도 저한테 그렇게 얘기하지만, 이소라 씨도 부를 때마다 완벽하거든요? 이소라 씨는 노래를 부를 때 음정이 틀리거나 박자를 틀리거나 이래서 다시 한 기억은 전 거의 없어요. 그런 건 말이 안 되고요. 어떻게 하면 더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소리가 완성이 될까에 초점을 맞췄고, 저도 거기에 맞춰서 디렉트를 했거든요. 이소라 씨도 사실은 저보다 더하거든요. 그런 모습들이 보컬리스트들은 다 있는 거죠.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레전드 매거진, KBS]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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