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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by 우정호

싱어송라이터의 산실 동아기획과 하나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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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2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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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이어집니다.)

  

 

-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1회 최고 수상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해오셨습니다. 대중음악사에서 흔히 말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출발점은 언제였을까요?

 

조규찬 : 음, 대답을 위해 사실 가요사를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계속 더 거슬러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거든요. 60년대 초중반에 커버곡 위주 포크 음악이 우리 가요계에 소개가 됐죠. 그러다 한대수 님께서 한국에 들어오시면서 한국 음악에서도 창작곡이라는 걸 시작하게 됐고, 그렇게 60년대 말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시봉이라든지 송창식 선배님 같은 분들이 창작으로서의 포크 개념을 시작하신 거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함께 하는 음악적인 마음이 통하는 그런 많은 이들이 모이기 시작한 거예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장소에서. 

 

사실 그 장소도 중요하지만 그게 어떤 장소였건 그분들에 의해서 선택됐다면, 아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유명한 장소로써 추억이 될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장소 자체보다도 그 장소를 선택한 주체가 되는 그 뮤지션들이 중요하단 생각을 해요. 그러한 분들이 양희은 선배님이기도 하고, 당연히 김민기 선배님. 조동진 선배님도 계시고, 윤형주 선배님도 계시고, 송창식 선배님도 계시고. 그분들이 음악 하시는 모습을 또 그 후배가 된 김광석 선배님이라든지, 박학기 선배님이라든지, 뭐 장필순 선배님도 그렇고 다 보면서 자라셨겠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곳의 향기는 잊지 않는 거잖아요. 연어가 마치 회귀하듯 그 뮤지션들도 나의 음악을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음악적 향기를 따라가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발현되는 게 결국 표현이었을 테고요. 그게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대학로라는 어떤 장소, 소극장 공연의 메카에서 일정 기간 이뤄졌던 음악적인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작용을 했을 거고요. 그리고 또 그걸 보고 자랐던 저 같은 세대는 비록 포크 음악만 하는 세대는 아닙니다만, 분명 기타 기반의 무대 퍼포먼스를 관객 여러분께 많이 선보였던 것도 사실이었거든요. 

 

저는 록을 좋아했고 팝을 좋아했지만, 제 공연을 소극장 와서 보신 어떤 분들은 제가 기타를 치면서 많이 노래했기 때문에, 피아노도 물론 많이 쳤습니다만, 포크 음악으로서의 면모라던가 그런 분위기를 많이 느끼셨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론적으로 재단해서 어떤 시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그것들이 오버랩되면서 서로 섞이고 정반합이 이뤄지면서 그렇게 뻗어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60년대 처음 포크 음악에서 창작곡을 발표하신 한대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8, 90년대 대학로 포크 음악 존재하지 않았을지 몰랐겠군요.

 

조규찬 : 네. 뭐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쓰일 수 있겠죠. 저는 어떤 식으로든 만나야 할 건 만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음악이라는 건 만드는 이도 중요하지만 결국 어떤 음악을 원하느냐.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음악을 원하느냐를 무시할 수 없거든요. 포크 음악은 어떤 시대적인 배경이라든지 근간 없이 뚝 떨어진 그런 음악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포크 음악이라는 음악 자체가 가지는 특성 그 자체가 분명히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시대를 반영하고 또 그 시대에 대한 어떤 프리즘을 들이댄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치 문제일 수도 있고, 사회 문제일 수도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변화의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발현됐을 거예요. 

 

다만 우리 후배들에게는 앞서 그런 분들이 계셨다는 게 행운에 해당되는 거죠. 왜냐하면 70년대는 척박한 시대였고, 음악적으로도 여러모로 쉽지 않았던 시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만만치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그분들이 계셨던 거죠. 그 자리에서 ‘내가 엄청나게 큰 불꽃을 일으킬 거야’는 아니었지만 ‘나는 이 모닥불을 꺼트리지 않고 계속 모닥불을 때고 있을 거야. 이 모닥불이 필요한 이들은 와서 불을 쬐세요’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신 거죠. 그래서 그 온기를 경험한 후배들이 다른 곳에서 또 모닥불을 피우게 됐고, 그렇게 연결이 된 거기 때문에. 질문 주셨던 대로 그때 그분들이 안 계셨으면 포크 음악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의 역사도 그렇고. 그건 진짜 엄연한 사실이에요. 그분들이 하신 게 굉장한 거죠. 

 

- 80, 90년대 대학로 포크 신은 양희은, 김민기 선생님이 활동하셨던 70년대 대학생들의 문화공간인 ‘청개구리’를 계승했다고 봐도 괜찮을까요?

 

조규찬 : 아주 정확하게 보셨다고 생각해요. 뭐냐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물론 장소 자체는 기억이 돼야 하죠. 회자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 추억하고 있는 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였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가 똑같은 무게감으로 우리에게 추억될 수 있다는 거죠. 결국 핵심은 누구에 의해서 선택되었느냐라는 생각을 해요. 그분들이 어느 곳을 선택하셨건 그곳은 분명 포크 음악의 메카로써 추억이 됐을 것이기 때문에, 그 한 분 한 분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분들이 남겨놓으신 이야기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그런 것들이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 만약 학전을 기리는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 한 곡을 노래하게 된다면, 어떤 곡을 듣고 싶으신가요?

 

조규찬 : 저는 지금 고인이 되셨지만 일단 조동진 선배님의 ‘행복한 사람’이라는 곡을 꼭 듣고 싶어요. 그 가사가 나를 끌어안아주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요. 조동진 선배님의 가사를 보면, 글쎄요. 김민기 선배님도 그러시고 조동진 선배님도 그러시고 더 나아가서는 조동익 선배님도 그러시지만 그분들의 가사가 저는 참 좋거든요. 왜 좋냐면, 강요하지 않아요. 듣는 이에게 ‘슬퍼하세요, 기뻐하세요, 용기를 내세요, 좌절하세요, 세상이 문제예요’ 이런 걸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거죠. 

 

그냥 어느 정도의 공간을 두시고 ‘당신은 울고 있나요’ 그렇게 질문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당신이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식으로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혹은 ‘내가 지금 당신한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상황이니까 당신은 어찌 되었건 힘을 내야 됩니다 다 잘 될 거야’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그냥 ‘울고 있나요, 당신은. 그렇지만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냥 우리가 생각할 때 현실적으로 나의 삶에 현실적인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느냐 따져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고갤 들어 고개 드는 나뭇잎들, 그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나뭇잎에 이는 바람, 그런 것들의 아름다움을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그런 식의 표현이 있거든요. 

 

그건 여백을 주는 거거든요. 공간을 주는 것이고. 듣는 이가 나를 한번 더 들여다볼 수 있고 물러나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여지를 주는, 옆에서 이렇게 말없이 있어주는 친구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곡이 저에겐 음악인으로서의 삶에 큰 위안을 받을 거 같네요.

 

- 김민기 선생님의 곡 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는 노래는 어떤 곡인가요?

 

조규찬 : ‘백구’라는 곡이 있어요. 양희은 선배님도 부르셨고. 그 백구라는 곡을 굉장히 좋아해요. ‘백구’는 하얀 강아지의 이야기거든요. 그 노래는 가사가 엄청나게 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요즘에 흔히 만날 수 있는 벌스가 있고 프리쿼런스가 있고 코러스가 있고. 코러스는 후렴이죠. 그것이 1절이 있고, 2절이 반복되고, 마지막으로 후렴 반복돼서 끝나는 식의 그런 어떤 정형의 틀에 갖춰있는 가사가 아니에요. 시작되면 끝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거예요. 이 노래에 멜로디와 악기 연주가 없다고 해도, 그냥 활자로만 가사를 봐도 그건 너무나도 훌륭한 하나의 이야기예요. 

 

그리고 단순히 ‘훌륭하다’라고 감히 얘기할 수 없는 그 안에 녹아있는 따스함이 있어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혹은 어느 세대는 경험했었지만 이미 망각해버린 그 온기라는 것. 그게 그 가사 안에는 있어요.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강아지와의 이별이거든요. 그 강아지를 추억하는 얘긴데, 결코 그 가사 속에서 화자는 울지 않아요.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그 곡을 듣는 이가 가사를 보는 이가 함께 울어주기를 강요하지 않아요.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를 죽 써 내려가죠. 그리고 추억해요. 근데 그 선연한 감동이 엄청난 거죠. 

 

그래서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그 곡이 다 끝나고 나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이 지나면 더 슬퍼지는. 더 가슴에 사무치고 표현할 수 없는 어느 시절과 어느 대상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들을 마구마구 느낄 수 있게 하는, 그런 것들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백구’라는 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많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 따스함은 깊이 안착한다는 그런 느낌이 나는 곡이라서 좋아해요. 

 

-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대중음악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기획사이자, 하나음악의 전신인 동아기획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기억하시는 동아기획 출신 뮤지션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조규찬 : 일단 첫 번째, 들국화가 있죠. 들국화 앨범은 가난한 소년이었던 저도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엘피 값이 딱 마련된 순간 그걸 들고 바로 레코드숍으로 달려갈 정도로 정말 사랑했던 밴드거든요. 들국화와 함께한 그 겨울밤들은 잊지 못해요. 저의 음악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그리고 또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우리나라 퓨전재즈 선구자들이 있죠. 그 당시에 해외에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이라는 건반 연주자가 있었는데요, 이 연주자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음악 크루가 GRP 레코드라는 레이블이었거든요. 연주자, 작곡가, 보컬리스트 등 뮤지션들이 다양하게 모여있는 크루죠. 그 레이블에서 들을 수 있는 감각적이고 도시적이고 세련된, 그리고 해석을 해보면 정말 공부할 게 많은. 그리고 거기에다가 연주력 자체도 워낙 훌륭한 뛰어난 어떤 음악 스타일이 있었어요. 

 

그걸 퓨전 재즈라고 얘기를 했었는데, 우리나라에 그것이 처음으로 들어오면서 너무나도 세련되게 소개가 됐던 게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였어요. 그 밴드의 1집에 있는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곡은 연주곡이었어요. 근데 연주곡이 타이틀이 된 앨범이 그렇게 대중적인 엄청난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일은 그전에도 그렇게까진 없었던 거 같고, 그 이후로도 그렇게까진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가 또 굉장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요. 

 

신촌블루스도 있죠. 신촌블루스를 통해서 만난 얼마나 만난 아티스트들이 또 있습니까. 한영애라는 걸출한 보컬리스트를 또 우리는 신촌블루스를 통해서 만났잖아요. 엄인호라는 그 기타리스트, 그리고 그 외에도 뭐 많죠. 

 

시인과 촌장. 지금의 젊은 세대는 오히려 리메이크된 버전들을 통해서 시인과 촌장 노래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시인과 촌장의 앨범도 저는 핑크플로이드 못지않은 수작이라는 생각을 늘 하거든요. 앨범을 한번 턴테이블에 올려놨으면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게 하는 그 메시지, A 면과 B 면이 그렇게 일관되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영화를 본듯한,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는 음악의 적절한 표현들. 그런 것이 담겨있는 앨범을 만나는 건 지금도 쉽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로 젊은 세대 중엔 푸른하늘도 있었고요. 또 김현철이라는 아티스트도 아주 도시적이고 세련된 음악으로 선배님들이 해놓으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음악이 들려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지도 몰라요’라는 무언의 이야기를 계속 바통을 이어받아서 하게 된 그런 경우도 있는 거죠.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김의석이라는 싱어송라이터도 있었고요. 코나도 있었네요.

 

- 동아기획은 당시 인기가수들이 몰려있는 기획사라고 보면 되나요?

 

조규찬 : 인기가수들이었죠. 그것도 그냥 인기가수가 아니라 엄청난 인기의 아티스트들, 연주자들도 있었으니까. 그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어요. 한국 가요계에 있어서 정말 메이저리그였어요. 동아기획이라는 곳에서 앨범이 나오는 아티스트는 무조건 믿고 앨범을 사도 되는 정도의 아주 대중으로부터 신뢰받던 그런 레이블인 거죠. 

 

- 소위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와는 조금 개념이 다른 것 같거든요.

 

조규찬 : 그 취지로 질문하신 거예요? 저는 오히려 그 대답에 대해서 '정말 엄청난 인기가수가 있었죠'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생각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누군가의 음악적인 진정성을 우린 알 수 없지만, 만약에 그걸 굳이 진정성으로 표현한다면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면 이건 음악적으로 진정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그렇지 않다는 거죠. 대중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내용으로 사랑을 받았느냐'를 따져봐야 된다는 거죠. 근데 동아기획에서 나왔던 음악들은 '이러이러한 것이어야만 대중으로부터 반응을 얻고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라는 기존에 있는 데이터를 취합해서 만든, 작전대로 만들어낸 어떤 프로덕트가 아니었던 거죠. 그게 큰 차이에요.

 

'저는 이렇게 노래하고 싶어요. 우리 우리 밴드는 이렇게 곡을 만들고 이런 가사를 쓰고 이렇게 연주하고 이렇게 노래하고 싶어요. 그게 우리예요. 혹은 솔로이스트이면 그게 저예요. 들어보시겠어요?'하고 오히려 제시를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제시된 것들이 대중에 의해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거예요. 마치 한 번도 물기가 없었던 곳에 놓여있던 스펀지를 물이 고여있는 곳에 던져졌을 때 빨아들이는 것처럼. 

 

우리의 대중은 그런 음악들을, 그 새로운 접근들을 원하고 있었던 거죠. 근데 충분하지 않았던 거죠. 많은 선배님들이 해오셨지만 그들의 수요를 충족할 만큼의 절대량은 부족했던 거예요. 근데 그 레이블을 통해서 봇물 터지듯이 그런 문화적인 수요를 충족하는 것들이 나왔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들이는 거죠. 그게 성공의 이유라는 생각을 해요.  

 

- 기획사가 계산해서 만든 게 아니라 동아기획 뮤지션들의 만든 음악을 대중들이 원했던 거네요.

 

조규찬 : 그리고 그것도 있는 거 같아요. 음악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긴 한데요. 음악이 가까이에서 쉽게 자주 들리면 더 좋아질 거 같고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해요. 음악이라는 게, 내가 조금 귀찮고, 또 정보도 스스로 찾아봐야 되고, 스스로 움직여서 발품을 팔아서, 그렇게 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어려운 과정들을 뚫고 하나의 음반을 내 손에 쥐었을 때 느끼게 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내가 가만히 있어도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나를 정말 피곤하게 할 정도로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들과 비교했을 때. 정말 많이 들리고 쉽게 접근이 되면 더 많이 사랑할 거 같은데 꼭 그렇진 않더라고요. 

 

그 시대의 음악은 정보와 유통이 많이 제한돼있던 거죠. 음악이라는 것이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창구는 방송이었어요. 특히 라디오. 근데 라디오를 통해서 소개될 수 있는 곡에는 분명히 양 자체가 한정이 되어있었고, 또 매니지먼트라든지 홍보라든지 이런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방송에서의 어떤 또 흐름이라는 게 또 있었던 거죠. 유명한 곡이 만들어지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었던 거예요. 동아기획은 그것으로부터 좀 벗어나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찌 보면, 동아기획의 음악을 대중이 다 알게 됐는지도 신기할 정도로요.

 

대중은 하다못해 레코드숍에 가서 물어보는 거예요. '동아기획에서 새로 나온 음반 있냐' 아니면 친구들끼리 '동아기획에서 어떤 음반이 나왔대. 들국화가 나왔대. 들국화 2집이 나왔대.' 그럼 그거를 듣고 바로 또 레코드숍을 가는 거죠. 그렇게 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회자되고 궁금한 것들은 사람들끼리 이렇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정성을 들여서 음악을 찾는, 그런 수고가 필요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이 더 굉장히 깊고 밀도 있었단 생각을 해요. 그런 어떤 결핍에서 오는, 문화적인 어떤 사랑? 애정? 필요성? 욕구? 그런 것들이 동아기획의 뮤지션들의 음악에 어찌 보면 표현이 된 거죠.

 

- 동아기획의 음악의 진정성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거군요.

 

조규찬 : 음악을 하는 이는 시대를 초월해서 다 진정성을 가지고 한다는 생각을 물론합니다만. 그 진정성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분들이 어떤 마음이셨는지 함부로 그걸 제가 말씀드리긴 어려운 거지만 이렇게 미뤄 짐작할 순 있는 거죠. 적어도 내가 듣고 있는 이 음악이 내가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어떤 결론을 먼저 생각하면서 이렇게 만들면 좋아할지도 몰라라고 해서 생각을 쥐어짜내서 한 음악 같진 않다는 거죠. 그런 것은 사람이 이론가가 아니더라도 음악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느끼게 되어있단 생각을 해요. 

 

음악이 예술의 표현 형태로써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던 것은, 언어로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공감과 시간이 거기 있다는 거죠. 그러한 마음이 있다는 거죠. 듣는 이들이 아마 느꼈을 거예요. 동아기획의 뮤지션들이 만들어 놓은 음악, 그 결과물을 들으면서 분석하진 않았겠지만 느끼는 거죠. 그걸 우리가 굳이 뭐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 이 음악은 참 진정성이 있어 보여' 그렇게 느꼈을 거 같아요. 

 

- 물론 완성도도 높았겠고요.

 

조규찬 : 완성도도 물론 당연히 높았죠. 그리고 함부로 제가 완성도를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제가 감히 완성도를 어떻게 말씀드리겠어요. 다만 제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많다는 건 확실해요. 그러니까 나중에 음악을 하게 된 후배들이 그때 음악들을 다시 꺼내어서 들어본다면 나의 음악 언어로 재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거나 했을 때 정말 재해석이 아주 재미있게 여러 가지로 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어떤 구조적인 탄탄함이 있다는 거죠. 

 

- 동아기획 소속 가수들 곡 중 많이 들었던 노래들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조규찬 : 들국화의 경우는 뭐 다 좋은데요. 저 진짜 다 좋아해요. 모든 곡을 다 좋아하긴 하는데, 그중에서 '매일 그대와'라는 곡을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해요. 제일 좋아하고 또 봄여름가을겨울은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또 김현식 선배님의 '쓸쓸한 오후'도 좋아하고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앨범의 곡들이 다 좋거든요. 또 시인과 촌장 같은 경우는 '고양이'라는 곡 좋아하고요. 또 한영애 선배님 같은 경우는 '코뿔소'라는 곡 좋아하고. 그래요. 

 

- 동아기획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을 '하나음악'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네요. 조규찬 씨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금상 수상 이후 하나음악과 연을 맺으셨습니다.

 

조규찬 : 네. 유재하 장학재단을 꾸려가시는 조원익 님이 조덩진 선배님과 함께 하나음악이라는 걸 만드신 거고요. 그 하나음악이라는 곳의 분위기가 특징이 어땠냐면, 지금 음악을 하는 후배들은 ‘그런 동화 같은 게 정말 현실이었어요?’라고 질문할 수도 있어요. 아티스트와 계약을 막 해서, 막 당장 지금 몇 달 안에 음반을 몇 개를 내야 되고, 이걸 몇 장을 팔아야 되고, 홍보는 어떻게 해야 되고, 기획은 어떻게 해야 돼서 이런 이런 곡과 이런 가사와 여기에는 어떤 연주자들, 어떤 사람들이 투입이 돼야 되고, 여기에는 어떤 작편곡가 붙어야 되고, 어떤 스태프가 있어야 되고, 그 일정은 어떻게 될 것이며, 여기에는 어떤 홍보 전략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그걸 위해서 당신은 우리하고 이런 이런 조건의 계약을 해야 한다는 게 없었어요.

 

하나음악이라는 곳은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될뿐더러, 아티스트 유재하라는 사람의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고, 그렇게 만난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어떤 장소였던 거예요. 열려있었던 거예요. 소속된 가수들만을 위해 존재했던 게 아니고, 지금으로썬 상상이 안 가는 얘기지만 그땐 분명 그랬어요. 그래서 동아기획에 소속돼있는 아티스트들도 많이 왔어요. 와서 같이 밥도 먹고, 음악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또 갑자기 음악적인 생각이나 영감이 떠올라서 곡을 만들고, 거기서 작업을 하면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들어와서 ‘코러스 해봐’ 하면 코러스도 하고, 연주도 하고 막 그러는 어떤 음악적인 실험의 장소이기도 했고. 

 

또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그런 장소이기도 했던 거죠. 그래서 그 말씀 하신 의도처럼 “소속이 된 거예요?”라고 질문을 하신다면, 그렇게 바로 소속이 된 건 아니었고요.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도 없으셨고, 저도 별로 그런 거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만 이뤄지는 일은 분명히 전속으로써의 모습은 있었던 거죠. 왜냐하면 아무도 강요 안 했지만 유희열 씨와 윤정호 씨가 멤버였던 토이 1집 앨범도 거기에서 오가면서 같이 뚱땅뚱땅 만들어지고 바로 옆에 있던 베이 스튜디오라는 녹음실에서 녹음했고. 

 

실제로 유희열 씨가 저한테 “우리 노래 곡 작업한 거 있는데 아침에 와서 노래 좀 해줘” 하면 제가 가는 거예요. 가서 유희열 씨는 소파에서 그 전날 피곤했는지 잠을 자고 있고, 저는 녹음실에 들어가서 부스에서 노래를 부른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토이 1집의 타이틀곡인 ‘내 마음 속에’라는 곡이에요. 저는 그냥 부르고 나서 “희열아 일어나 봐. 들어봐 봐”하고 그걸 듣더니 “근데 니가 부른 게 더 좋다. 이걸로 하자” 이렇게 된 거죠. 원래는 본인이 부르려고 했던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너무나도 타이트하거나, 너무나도 작전을 짜고, ‘우리는 반드시 상업적으로 성공할 테야’라는 집념으로 모여있는 집단이었다기 보다는, 그냥 어느 정도의 음악적인 결과가 발현되기까지 숙성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서로에게 주고 공간을 주는, 그렇지만 모여서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곳이었던 거죠. 

 

- 서로 도와주고 도움 주는 일종의 ‘음악적 품앗이’ 같은 개념 같네요.

 

조규찬 :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음악을 경영하시는 그 선배님들이 후배들을 잘 챙겨주셨어요.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지원도 아낌없이 해주셨고. 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돼요. 분명히 그분들도 투자를 받으셨을 거고, 그 투자를 받은 만큼 어떤 결과를 내야 되는 압박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근데 적어도 저는 후배로서 그런 걸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고, 그런 걸 표현하신 적도 없거든요.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해요. 근데 그건 아마도 그분들이 정말 음악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 하나음악이라는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라던가 음악적 멘토가 있었나요?

 

조규찬 : 저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그러하셨지만. 일단은 조동진 선배님. 그리고 조동진 선배님과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꿈을 좇고 있는 우리들이 현실에 어느 정도 발을 딛고 있을 수 있게 해준 조원익 님.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조동익 선배님까지. 이렇게 세 분이 정신적 지주가 아니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 조동진 씨와 조동익 씨는 형제인데도 여러 부분에서 스타일이 조금 달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조규찬 : 예. 약간 차이가 있어요. 조동진 선배님은요. 표현 방식이 1부터 10까지 있으면 5나 6까지만 표현하시고 나머지 5나 4는 절제하시는 그런 경우라고, 저는 그렇게 느껴지고요. 조동익 선배님은 1부터 10까지 중에 역시 5나 6만 채우시는데, 근데 그 5나 6을 채우는 밀도를 조금 더 높이신. 그런데 이 나머지 5나 4에서의 표현이 덜하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그걸 어떤 계산을 했단 뜻도 아니고요. 

 

그냥 인간적으로 그 두 분을 뵀던 경험도 그렇거든요.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돼. 너는 음악을 이렇게 해야 돼. 너는 이런 가사를 써야 돼. 이런 연주를 해야 되지 않겠니? 이런 생활을 해야하지 않겠니?’라는 말씀을 제 기억엔 단 한 번도 안 하신 거 같아요. 주로 제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신 거 같아요. 두 분 다. 그리고 끄덕여주시고. 거기까지였거든요. 그것만 해주셨어요. 

 

근데 그 어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저한테는 큰 위안이 되고 많은 걸 가르치셨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대하는 그분들의 그런 마음과 태도가 음악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단 생각을 해요. 여유를, 쉴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거죠. 그래서 소리를 빽빽하게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좋아하게 만들 테야’라는 마음이 없는 거예요, 거기에는. 그 비워진 부분이 제가 말씀드린 4나 5에 해당되는 거고. 

 

- ‘같이’ 음악 하자고 이끌어가신 거군요.

 

조규찬 : 그렇죠. 그리고 그게 당시 그 장소를 제공해 주시고 뒷받침해 주시고. 그 당시에 우리 후배들이 혜택을 받은 것들.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거기에 모여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혹은 오히려 많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셔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여지를 줬던. 그러한 온기를 끌어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혜택을 받은 그 사람들이 각자의 음악 인생을 쭉 꾸준히 펼쳐나갈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게 또 음악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것들을 후배들이 듣게 되고. 그렇게 또 가지가 뻗어나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하나음악이라는 장소와 시간은 그 시대에만 국한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알게 모르게 계속 뻗어나가고 계속 열매 맺게 하는 그런 것이었던 거죠. 

 

- 대중들은 김민기, 조동진 씨를 포크계의 거목으로 인식하곤 합니다. 아울러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존경을 표하는 분들이기도 한데요. 이분들의 어떤 점 때문에 그런 걸까요?

 

조규찬 : 음악을 하다 보면요, 대중음악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와요. 그게 뭐냐면 현실이냐, 아니면 이상이냐. 현실과 이상을 다 끌어안고 다 획득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지만. 어떤 모멘텀이 찾아오는 그런 행운아들도 가끔 있어요. 근데 그건 정말 행운이라고 전 생각을 해요. 그 외에는 대다수는 그걸 경험하지 못하죠. 그렇다면 나의 음악적인 행복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일이 음악인이자 생활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점점 어려워지고 멀어지는 현실이 있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계속 타협을 해야 돼요. 그리고 욕심도 내야 되고. 

 

조동진 선배님과 김민기 선배님을 우리 후배들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부분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분들은 그런 존경을 받고 말고를, 그 조차도 생각 안 하신 분들 같아요. 제가 감히 짐작하기에는. 그분들은 원래 그렇게, 그런 그 모습이신 거예요. 그냥 ‘나뭇잎 사이로’를 불러서 녹음해놓고 발표해놓고는, 잔잔하게, 산속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그 작은 불빛처럼 그냥 그곳에 있는 거예요. 대도시에서 그 작은 불빛을 많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누군가는 그 산길에서 길을 잃어서 그 불빛이 보고 안도하고, 거기에서 온기를 얻어서 다시 생존할 수 있을, 그런 존재로서 거기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게 계산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만약 그런 게 계산됐다면 대도시에서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홍보되고 있는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을 거예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게 계산된 게 아니었고, 그분들의 삶을 통해서 그냥 그걸 보여주신 거죠.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마음으로, 이런 철학을 가지고, 이런 음악을 했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렴’ 혹은 ‘당신들이 나의 그런 의도를 알아야 돼요’라고 어디에서도 설명하거나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그냥 누가 알든 모르든 그분들의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있는 거죠. 그 삶이 바로 음악에 다 담겨져서 고스란히, 꾸준히 계속 그냥 우리 곁에, 늘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분들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 후배들이 존경할 수밖에 없죠. 우리 후배들은 그렇게 살기 쉽지 않거든요.

 

 

[사진출처=아카이브 K]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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