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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by 최승원

인디 신에 등장한 새로운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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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5작성자  by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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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의 젊은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새로움’이었다. PC 통신과 대학로, 홍대입구 등지에서는 즉각적으로 이러한 반향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등장한 밴드가 바로 델리스파이스다. 실험적이고 감성적인 얼터너티브 록 음악을 선보였던 델리스파이스는 당시 젊은이들의 요구하는 음악과 맞아떨어졌을 뿐 아니라, 이윽고 한국 인디 신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한 팀이었으며, 인디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남긴 밴드다.

(아카이브 K는 델리스파이스 김민규와 2020년 8월 인터뷰했다.)
 

- 음악은 언제 시작하신 거에요? 
 

김민규 : 제가 영화 <백 투더 퓨처>를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영화에서 배우 마이클 제임스가 기타를 신나게 쳤던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고 기타라는 악기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기타를 쳤어요.

 

- 음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도 하셨나요?
 

김민규 : 음악을 직업을 한다는 생각은 저와는 다른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감히 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못 했고, 그저 사람들이 하는 것을 흉내 내고, 새로 나온 앨범 있으면 찾아 듣고 소비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제가 음악을 직접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 어릴 때 주로 어떤 음악을 들으셨나요?

 

김민규 : 빌보드차트 위주로 음악을 들었죠. 레코드숍에 가면 그 주에 ‘핫100 차트’라고 그래서 요즘 많이 회자되는... (웃음) 그때는 그 차트에 오른 음악들을 찾아서 듣는 게 되게 재미였던 것 같아요. 또 AFKN (에이에프케이엔, 주한미군방송)에서는 유명했던 DJ가 있는데, 그분이 차트에 오른 곡들을 방송해 주기도 하고, 그런 음악들을 비롯해서 매주 새로운 음악을 듣는 것이 저의 재미 중 하나였어요.

- 주로 좋아하셨던 가수는 어떤 가수였나요?

 

김민규 : 주로 대중적인 팝 음악을 듣다가, 나이가 든 큰애들이 “그런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냐. 메탈을 들어야지.” (웃음) 이런 말을 하면서, 저도 집에서 빌보드 음악을 듣다가도, 친구들 만나면 “야, 나도 메탈 좀 들었어”라고 말한 적도 있죠. 대외적으로는 메탈을 좋아했지만, 집에 가서는 ‘아하(A-ha)’, ‘듀란듀란(Duran Duran)’도 좋아했죠. 그런데 당시 메탈리카와 같은 과격하고 빠르고, 으르렁거리는 음악일수록 학생들한테 더 어필됐던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 그러니까 1980년대는 메인 스트림이 팝이라면, 서브 컬쳐들은 헤비메탈이었어요. 지금은 주류 음악을 좀 피해서 다른 걸 듣고 싶어 하는 애들이 헤비메탈 음악을 많이 좋아했죠. 

 

- 음악을 듣다가도 적극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신 적이 있나요?

 

김민규 : 가장 적극적인 활동이라면 앨범을 사러 가는 거였죠. 동네 레코드점에 가고 그랬는데, 불행하게도 금지된 음반들이 많았어요. 특히 헤비메탈은 금지된 앨범이 많았죠. 발매가 안 된 음반들이 많아서, 청계천에 가면 해적판 LP를 파는 곳이 있었는데, 그런데 가서 정식으로 구할 수 없는 음반을 찾아서 듣는 것이 “내가 엄청 나쁜 짓을 하는 건가?” (웃음) 라는 어떤 두근거림과 함께 음악을 들었던 것 같아요. 
 

- 델리스파이스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김민규 : 90년대는 미국에서 얼터너티브 록 주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록의 어떤 주류가 헤비메탈이라면, 소리가 막 커야 하고, 목소리가 높이 올라가야 하고, 연주가 빨라야 하고 잘해야 하는 것이 록 음악의 어떤 하나의 틀이 됐어요. 그런 틀로부터 자유로운 음악들이 미국에서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흐름으로 생겼죠. 그런 음악을 접하고, 꼭 연주를 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조금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렇다고 꼭 쉽다는 것이 아니라, 가사가 주는 울림이나, 멜로디 선율의 아름다움이라든가, 그런 점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아요. 

 

자극을 주었던 음악들은 뭐가 있을까요? 

 

김민규 : 그때는 U2나 R.E.M 같은 음악들이었죠. ‘퀄리티록’ 이라고... 주류에 반대되는 느낌과 포크 음악과의 결합 등 새로운 시도가 많이 행해지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펑크 록도 있었고 굉장히 다양했지만, 특히 U2나 R.E.M에 빠진 이유는 좀 쿨해보였다고 할까요. 남들이 잘 듣지 않는 어떤 나만의 밴드, 나만이 즐기는 왠지 모를 뿌듯한 같은 것이 있었어요.

 

델리스파이스 결성 동기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김민규 : 당시 PC통신 하이텔에서 ‘메탈동’이라는 그런 모임이 있었고요. 그래서 거기에 자주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올리는 글도 보고, 새로운 음반에 대한 정보도 얻고 그 안에 또 모던록 소모임이라는 게 있어서 거기에서 찾아가다 보니까, “나만 이런 걸 또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죠. 사실 저는 되게 외로웠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가니까 나보다 더 외로움을 느꼈겠다 싶은 사람도 많이 있고. (웃음) 뭐 내가 모르는 음악을 이렇게 올려서 이렇게 글로 리드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것들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러다가 거기 구인 광고란이 있었는데, 왜 음악 모임에 그런 게시판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웃음) 거기서 멤버를 구하기도 하고, 어떤 음악 소모임의 회원을 모집하기도 했고,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게시판이었어요. 그 게시판에 내가 직접 글을 올렸죠.

 

리스너에서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으로서 활동하고 싶으셨군요? 

 

김민규 : 기타를 혼자 치다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 하다가, 여기라면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 한번 글을 올려봤어요. 생각보다 너무 없었고요. (웃음) 딱 한 명 찾아왔는데, 그때 베이스 치는 윤준호 씨가 연락을 줬죠. 드럼, 키보드, 베이스도 구하고 있었는데, 베이스 윤준호 씨만 먼저 연락이 왔죠. 이후에 의기투합해서 또다시 글을 올려서 드럼에 오인록 씨 를 만나게 됐죠. 

 

세 분이 만나셔서 이름을 바로 정하신 건가요? 

 

김민규 : 그때는 이름이 없었어요. 다들 회사나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직장인 밴드 같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그냥 합주실에서는 윤준호 씨 이름으로 ‘윤준호 밴드’ 이런 식으로 예약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홍대 클럽에서 공연하게 됐죠. 바로 ‘드럭’이었는데요. 그때 밴드 이름을 빨리 정했어야 해서 한창 회의 끝에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나오게 됐죠. 

 

왜 델리스파이스에요?

 

김민규 : 모르겠어요. 수없이 많은 이름이 있었는데, 다 어색하고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윤준호 씨가 ‘델리스파이스’ 어떠냐고 했는데, 그게 좀 괜찮게 들렸어요. 그래서 델리스파이스로 정했죠. 윤준호 씨 말에 의하면, 그냥 (웃음), 그 단어가 먼저 떠올랐대요. 이후에 나중에 사람들이 자주 물어봐서 그냥 맛있는 양념, “한국 음악계의 양념이 되겠다.” 이런 말이 나오기도 했죠. (웃음) 그러니까 단어가 먼저 떠오르고, 설명은 나중에 붙이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 처음에 모이셨을 때 어떠셨나요? 

 

김민규 : 연습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시간을 정해서 각자 좋아하는 곡을 몇 곡 정해서 각자 개인 연습실에서 연습한 후 합주실에 모여서 맞춰 보는 것이 너무 재밌었어요. 유일한 행복이었고, 그걸로 우연히 공연도 하게 됐죠. 

 

- 드럭 공연은 어떻게 하신거예요? 

 

김민규 : 드럭에 몇 번 놀러 갔었는데, 새롭고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요. 객석에 있던 친구가 올라와서 공연도 하고, “뭐 이런 공간이 다 있나?” 싶었죠. 홍대에서 특이한 친구들은 드럭에 다 왔나. (웃음). 그랬었죠. 그러다가 사장님한테 저희도 공연하고 싶다고 했더니, 쿨하게 한번 하라고 해서, 저희고 공연 준비를 열심히 하게 됐죠. (웃음)

 

- 언제쯤이었나요?

 

김민규 : 아마 1995년도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U2의 ‘Fly’, ‘Pride’ 같은 곡 같은 카피곡들을 많이 했죠. 

 

- 반응이 좀 있었나요?

 

김민규 : 그때는 무슨 노래를 하건 간에 (웃음) 주류 음악이 아닌 거면 다 뭔가 허용이 되는 그런 분위기였었어요. 약간 반항 기질이 있었는지, 주류에 나오는 음악이 아니라면 다들 같이 좋아해 주는 분위기.

 

- 그 뒤로 계속 드럭에서 공연하셨나요?

 

김민규 : 드럭에서 몇 번 공연하고, 또 우후죽순처럼 클럽이 주변에 많이 생겼어요. “다른 클럽에서도 좀 해 볼까?” 싶어서, 다른 곳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재머스’라는 클럽도 있었고 ‘프리버드’라는 클럽도 있었고 뭐 ‘블루데빌’이라는 클럽도 있었고. 한 몇 번씩은 다 했던 것 같아요.

 

- 다른 클럽은 어떻게 해서 갔어요?

 

김민규 : 오디션을 봤죠. 사장님한테 이야기하면, 사장님 앞에서 하고, OK 하면, 공연 시간을 알려주셨어요. 토요일에 공연을 하긴 했는데, 그때는 딱히 토요일도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웃음) 늘 가봐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던 시절이었죠. 나중에 홍대 클럽을 찾는 사람이 있고 나서 금, 토, 일 공연과 같은 레벨이 생긴 거죠. 

 

- 관객 분들은 좀 있었나요?

 

김민규 : 글쎄요. 한 10명 미만인 경우도 너무 많았고요. 그런데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어요. 우리 같은 팀도 이렇게 할 수 있는 데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던 시절이었죠. 

 

- 델리스파이스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건 언제쯤인가요?

 

김민규 : 저희는 시작하면서 저희 노래도 같이하려고 했었거든요. 거의 주마다 뭐 새로운 곡을 하자는 목표를 정하기도 했고, 새로 무대 할 때는 신곡을 꼭 하나씩 해보자는 목표로 저희 노래를 많이 해서 나중에는 저희 노래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었어요. 그러면서 데모 테이프도 만들고 그거를 온라인으로 신청받아서 판매도 했죠. 

 

- 데모 테이프를요?

 

김민규 : 네. PC 통신 구인 광고란 외에 판매란도 있었어요. (웃음) 온라인 장터처럼. 거기에 저희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서 얼마에 판다고 글을 올리면, 저희 계좌로 돈을 받아서 테이프를 보내줬죠. 당시에 더블 데크라고 있잖아요. 카세트테이프 두 개 들어가는 거, 그래서 그것을 한쪽에서 재생하고 한 쪽은 녹음 후 복사를 해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죠. 

 

- 데모 테이프를 만드려면 녹음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셨어요?

 

김민규 : 포트랙 녹음기가 있었어요. 거기에 드럼, 베이스, 기타, 노래 순으로 녹음해서 나중에 믹스다운 한 뒤 하나의 음악으로 만든 거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최종 결과물을 만들었어요. 

 

- PC 통신에서 판매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네요. (웃음)

 

김민규 : 요즘의 온라인 판매랑 똑같은 개념이겠죠. 당시에 그래도 테이프가 꽤 잘 팔렸어요. 그래서 부지런히 복사해야 했어요. 

 

- 그때 데모 테이프에 수록된 곡이 나중에 정규 앨범에 실린 건가요?

 

김민규 : 거의 실렸죠. 저희 노래 중 ‘귀향’, ‘노 캐리어’라는 노래도 있었고. ‘차우차우’는 그 이후에 수록됐죠. 

 

- 자작곡을 만들어서 공연을 하셨던 거네요?

 

김민규 : 그렇죠. 그때는 결성 후 몇 달 지나서부터 우리도 한번 곡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테이프를 레코드사에 보내보자고 했죠. 실제로 여러 기획사에 직접 찾아가서 음반 담당자분들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음악은 좋은데 나중에 한 번 더 갖고 오라는 정중한 거절이 많았어요. 

 

- 데모 테이프를 만드신 것도 음반사 계약도 염두에 두신 것인지?

 

김민규 : 그때는 외국 음악 잡지들 보면 대부분 그런 스토리예요. 클럽에서 공연하고 데모 테이프를 어떤 음반사에 보내서, 음반을 내게 되는. 그래서 저희도 그렇게 하는 줄 알았죠. (웃음) 그래서 공연도 하고 테이프도 만들고. 그러다가 나중에 클럽에서 공연을 보셨던 당시 사장님이 저희를 픽업하시게 됐죠. 그래서 앨범 계약도 하게 됐어요. 

 

- 어떤 회사인지 여쭤봐도 돼요?

 

김민규 : ‘뮤직디자인’이라는 회사에요. 저희를 좋게 보셨어요. 아마 공연장이 프리버드였던 것 같은데, 관객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희를 좋게 보시고 명함을 주시고 가셨죠. 

 

- 홍대 클럽에 대해 조금만 더 여쭤볼게요. 1995년도 즈음 홍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김민규 : 왜 홍대에 그렇게 클럽이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홍대 가면 늘 썰렁하고, 저쪽 기찻길 쪽 가면 뭐가 있고. (웃음) 조금 옛날스러운 그런 모습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아마 미술 하시던 분들이 음악도 많이 좋아하시고 그래서 그런지, 그런 클럽들이 언젠가부터는 생기더라고요 그 지하에. 그리고 그때는 약간 DIY (Do It Yourself) 듀잇 유어 셀프라고 해서 “네가 좋아하면 한번 해 봐.” 정신이 있을 때였는데, 이렇게 좀 못해도 흉이 좀 되지 않았어요. 직접 해보는 것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시기이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처럼 막 오디션을 통해서 못 하면 “너 왜 못해?” 이게 아니라 “네가 좋아하면 네가 못해도 한번 해 봐.” 이게 더 가치가 있었던 시절이지 않았나. 그래서 저희도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그때 당시 공연할 수 있는 곳이 다른 곳도 있었는데, 굳이 홍대를 가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김민규 : 그렇죠. 그러니까 그때 주류에서 음악을 하시던 분들은 대학로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희도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웃음) 대학로에서 공연하면 뭔가 성공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고, 홍대는 악기도 맨날 안 좋고, 마이크도 꺼지고 기타 엠프도 나가고 사정이 좋지 않은 느낌이었죠. 그런데 처음에는 즐겁다가도, 나중에는 이런 점이 불만이었어요. 어떤 시스템적인 불만. 그래도 분위기는 좋았어요. 아마 그런 점이 대학로와 홍대가 대비되는 이미지이지 않았나.

 

- 비주류의 끝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민규 : 그렇죠. 대신 어떤 것도 다 받아줄 수 있는 용광로 같은 느낌이 홍대만의 장점이었겠죠. 주류는 당시 발라드와 댄스로 양분되는 분위기였는데, 록이라 할지라도 헤비메탈, 록 발라드 그런 것이 주류였죠. 그런 장르가 아닌 거라면 다 비주류죠. 

 

- 혹시 공연 페이는 얼마 받으셨어요? (웃음)

 

김민규 : 페이는 사장님이 김치볶음밥 해주시거나, 맥주 마음껏 마시게 해주고, 그러다가도 관객이 많이 오면, 사장님이 어느 정도 배분해 주셨어요. 제일 많이 받았을 때는 행복하게 그 돈으로 CD를 샀던 것 같은데. 20년 전 물가로 치면 당시 CD도 되게 비싼 거죠. 

 

- 당시 공연하시면서, 지금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세요? 홍대 클럽에서. 

 

김민규 : 글쎄요. 크게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 않고. (웃음) 비교적 순탄하게 한 것 같아요. 

 

- 당시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은 누가 계셨어요?

 

김민규 : 당시 크라잉넛, 노브레인은 유명했었고 이미 스타의 길을 걷고 있었죠. (웃음) 그리고 언니네이발관도 있고, 저희랑 같이 거의 열심히 하던 시절이었죠. 조금 앞서서 갔던 노이즈가든이라는 팀이 있었고요. 주로 활동하던 클럽의 간판 같은 밴드였어요. 예를 들면 드럭에는 크라잉넛, 노브레인. 스팽글이라는 클럽은 코코, 엘로우키친 같은 밴드. 저는 프리버드에서 많이 했던 것 같아요. 

 

- 저희도 많은 인디 가수들을 인터뷰했는데, 델리스파이스는 거의 무소속 느낌이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김민규 : 저희는 여기저기 많이 찾아다니면서 했었던 것 같아요. (웃음) 어느 한 곳에 그러니까 나중에는 그 클럽 안에서도 그 색깔이 생기는 바람에 드럭에서 계속하기에는 저희가 멋쩍은 상황이 됐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펑크가 아닌데, 드럭은 어느 순간 펑크의 성지처럼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좋지만, 펑크는 아니라서 하기가 애매해진 거죠. 그래서 저희는 색깔이 약간 회색빛 같아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하지 않았어나 생각이 듭니다.

 

- 초기 델리스파이스에게 클럽이 미친 영향은 뭘까요?

 

김민규 : 좋아하는 것을 해볼 수 있는 무대. 그러니까 무대에 서기까지 벽이 높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연주력이나 이런 것을 떠나서 뭔가 새로운 색깔을 품어줄 수 있는 포용력이 넓었다고 생각해요. 

 

- 뮤직디자인 사장님의 픽업을 받아서 앨범을 내셨는데, 그 앨범이 어떤 앨범이에요?

 

김민규 : 델리스파이스 정규 1집이죠. 타이틀 곡은 ‘가면’이라는 곡이었어요. 타이틀 곡인 ‘가면’은 직접 관객들을 초대해서, 설문을 진행해서 뽑힌 곡이었어요. 저희 내부에서도 이 곡이 좋다고 했고. 뮤직비디오도 찍었죠. 

 

- 소위 인디임에도 뮤직비디오를 찍으셨군요? 

 

김민규 : 나름 저예산으로. (웃음) 그때는 케이블 방송에서 뮤직비디오를 많이 내보냈던 시절이어서 타이틀곡은 뮤직비디오를 찍었었죠. 

 

- 굉장히 활발한 시작을 하셨네요. 

 

김민규 : 그때는 그렇죠. 당시 프로로서 활동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타이틀 곡 ‘가면’은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어요. 

 

- 1집은 어떻게 만드셨나요?

 

김민규 : 연습실에서 새로운 곡으로 연습을 했어요. 연습 후 녹음할만 한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녹음실에가서 하나씩 녹음했죠. 

 

- ‘뮤직디자인’ 이라는 회사가 원래 규모가 큰 회사였나요?

 

김민규 : 규모가 좀 있었죠. 그리고 다행히 그 회사는 녹음실을 가지고 있어서 그 회사에서 녹음실에서 했죠. 녹음실에서 녹음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웃음) 그리고 그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음반 작업을 했었죠.

 

- ‘차우차우’는 어떻게 나오게 된 곡이예요?

김민규 : ‘차우차우’는 저희가 데뷔하기 전에 클럽에서도 열렬히 환영 받던 팀은 아니었는데요. 그 당시 펑크가 대세였고, 저희를 봤을 때 가요도 아니고 메탈도 아닌 음악이라, 어디에 끼지 못했었어요. 또 음악평론가한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에 반감이 있었어요. 아니, 음악도 모르는 애들이 왜 (웃음) 우리를 잘 모를까. 이를테면 어떤 ‘담론’이라는 것에 좀 지쳤었어요. 록을 정의하는 것에 질린 것처럼, 저는 피곤하게 느껴졌고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에 대한 반감이 곡 ‘차우차우’로 나타났죠. 

 

- 그럼 가사가 그런 내용이었군요?

 

김민규 :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무 싫은 거예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때 자려고 생각하면 계속 생각나고, 들리고, 그랬던 괴로운 마음으로 인해 곡을 쓰게 됐었죠.

 

- 원제가 굉장히 긴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민규 : ‘차우차우’가 중국의 못생긴 개잖아요. 그냥 그들이 약간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제 나름대로는 그렇게 생각했죠. (웃음) “이 바보들아.” 이러면서. 그런데 그 차우차우라는 걸 너무 모를거라고 생각했어요. 벌써 30년전 이야기니까. 지금도 차우차우가 그렇게 인기 있는 견종은 아니잖아요. 약간 우리랑도 비슷하고. (웃음) 차우차우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 부제를 뭔가 달아야 사람들이 기억하겠다 싶어서 길게 달게 됐죠.

 

- ‘차우차우’로 공연도 하신 거예요?

 

김민규 : 네. 약간 서브곡이었는데, 사람들 생각에 가사가 일단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 1집 활동을 하시고 팬덤이 생기셨는데, 언제부터 팬덤이 늘어났다고 느끼셨나요?


김민규 : 제가 1집 활동하고 잠깐 미국여행을 갔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빨리 귀국하라는 전화가 왔어요. 빨리 2집 녹음을 해야 된다. “왜”냐고 그랬더니 라디오에서 ‘차우차우’가 많이 나왔던 모양이에요. 사실 우리는 그냥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약간 실망하고 쉬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신청곡도 많고 사람들이 찾으니까 빨리 와서 다시 해 보라 그래서, 2집은 열심히 제작했죠. 

 

- 그럼 ‘차우차우’가 라디오를 통해서 나오면서 인기도 얻으신 거네요?

 

김민규 : 심야에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밤에 어울리는 노래여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타이틀 곡은 ‘가면’이었지만, 그 곡은 묻히고, 특별한 프로모션 없이 자생적으로 라디오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어서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연락받고 돌아왔을 때도, “이게 뭔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웃음)

- 돌아오셨을 때 인기를 실감하셨나요? 

 

김민규 : 2집을 제작하는 데 조금 더 공들일 수 있는 여건을 회사에서 만들어줬죠. (웃음) 예를 들어서 오케스트레이션도 하게 해 주고, 지금도 굉장히 큰 비용이 들어가지만, 그런 작업도 하게 해 주고, 녹음에 조금 더 투자를 많이 해 주신 것 같아요.

 

- 관객이 늘었다거나, 앨범이 많이 팔렸다든가 하는 일들이 일어났나요? 

 

김민규 : 크게 체험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고. (웃음) 그래도 뭔가 되게 조금씩 조금씩 늘었기 때문에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었어요. 

 

- ‘차우차우’가 특별한 건 이 곡이 영화의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인 것 같습니다. 발매는 1997년 이었지만, 2002년에 영화에 들어갔네요.

 

김민규 : 사실 ‘차우차우’가 라디오에 나와서 알려졌다고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어요. 나중에서야 조금 더 평가를 받은게 아니었나. 

 

- 영화 <후아유>에는 어떻게 삽입된 거예요?

 

김민규 : 영화사에서 연락이 와서 (웃음) 그 곡을 쓰고 싶다 그래서 쓰게 된 거죠. 


- 영화 이후로 체감하실 정도로 밴드에 많은 영향이 있었죠? 

 

김민규 : 네. 저희가 3집, 4집 활동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계속 팬들이 늘어갔던 것 같아요. 좋아해 주시기도 하고. ‘차우차우’ 곡의 제목은 몰라도 “너의 목소리..”는 아시는 것 같아요. 체감을 하게 된 것은 공연장에서 저희 목소리보다 관객분들의 목소리가 더 컸던 그런 노래가 됐죠. 

 

- 당시 대부분의 대중들은 라디오, 영화에 곡이 삽입되는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는데, 4집까지 활동을 하셨잖아요. 그 사이에는 뭘 하셨어요? 

 

김민규 : 공연과 앨범 녹음의 반복이었죠. 페스티벌도 당연히 했고요. 방송은 저희 같은 밴드 입장에서 할 수 있는게 제한적이었어요. 그래서 새 앨범을 발매 할 때, 2번에서 3번 정도 밖에 기회가 없어서 그것만으로는 힘들었어요. 그래서 단독 공연도 해야 하고 저희는 투어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처음으로 대도시 뿐 아니라 작은 도시의 라이브 클럽에도 연락해서 공연하기도 했죠.

 

 

- 언짢은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혹시 수입이 괜찮으셨었나요?

 

김민규 : 다행히 유지할 정도는 됐던 것 같아요. 음악을 계속해도 되겠구나 정도. 아무래도 영화 <후아유> 이후로는 조금 달라졌죠.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사운드네트워크]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최승원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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