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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5
by 우정호

‘싸구려 커피’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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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25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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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수록한 머리와 분방하게 기른 수염, 그리고 뿔테안경.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스타일의 한 청년이 기괴한 동작과 함께 ‘가창’이라는 단어와는 먼 거리에 있는 듯한 읊조림으로 너저분한 일상을 노래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가 뿜어낸 키치함이 ‘센세이셔널’로 바뀌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혹자는 장기하를 두고 ‘88만 원 세대의 대변자‘, ‘인디 신의 새 시대를 연 선구자’라고 수식해대곤 하지만, 정작 그는 직접 목도한 일상들을 음악에 담백하게 담아내고자 했던 수많은 ‘D.I.Y’ 인디 뮤지션 중 한 명이었다.

 

 

(아카이브 K는 장기하와 2020년 11월 인터뷰했다.) 

 

 

-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장기하 : 제가 밴드를 처음 시작한 건 ‘장기하와 얼굴들’이 아니고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밴드 드러머로 시작했어요. 2002년에 결성됐고 첫 공연을 했죠. 

 

- 눈뜨고코베인은 어떤 밴드인가요?

 

장기하 : 글쎄요. 어떤 밴드라고 얘기해야 될까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모법으로 삼는 밴드는 산울림이었고요. 그러면서 그 외에도 영미권 60~70년대 음악을 베이스로 해서, 그러니까 좀 위트 있는 하드록을 하려고 했던 그런 밴드죠.

 

- 이름은 왜 눈뜨고코베인이에요?

 

장기하 : 그건 커트 코베인을 염두에 두고 한 거죠. 그 깜악귀 형이 커트 코베인 기일이었나? 그때 학교 안에서 그를 추모하는 무슨 공연 같은 거를 했어요. 그때 지었던 프로젝트 이름이 눈뜨고코베인이었는데 그게 재미있으니까 밴드 이름으로까지 연결이 됐죠.

 

- 그 밴드는 홍대에서 결성된 건가요?

 

장기하 : 사실 저... 제가 서울대학교를 나왔는데, 그 안에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밴드 뭐 이런 거를 하는 무리가 있었어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아, 우리도 자작곡을 가지고 홍대 클럽에 진출해 보자’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형들이 제가 뭐 과에서 드럼도 치고 하는 걸 어떻게 우연히 보고 같이 좀 해 보자 하고 학교 사람들끼리 결성을 해서, 홍대 근처에 있는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하게 된 거죠. 

 

- 그 시절 홍대 클럽 분위기는 어땠나요?

 

장기하 : 아, 그때는... 글쎄요. 제가 그전 시대를 경험해 보지는 않아서 비교해서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저는 2002년부터 한 2년 동안 거의 매주 잼머스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잼머스는 그때 월요일 빼고 다 공연이 있었어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다 공연이 있는데, 처음 오디션을 봐서 공연할 수 있게 되면 화요일부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화요일 밴드부터 시작했어요. 그런데 화요일 밴드는 거의 사람이 안 오죠. 한 세 팀 정도가 무대에 서는데, 순수 관객보다 공연하러 온 사람들 수가 더 많았고. 

 

그래서 조금씩 반응이 생기면 이제 수요일로 넘어가고, 목요일로 넘어가고, 이런 식으로 해서 토요일에 서는 밴드들이 가장 인기 많은 밴드들이고 이런 식이었어요. 제 기억으로 홍대 근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밴드들이 무슨 방송에 나간다든지 뭐 이런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요. 그와 별개로 월요일 빼고 일주일 동안 계속 공연이 있을 정도로 클럽들은 공연을 많이 하기는 했던 것 같아요. ‘잼머스’를 포함해서 ‘라이브 클럽 빵’이라든지 뭐 ‘클럽 에프에프(FF)’라든지 여러 클럽들이 있었죠.

 

- 토요일 공연까지 진출했나요?

 

장기하 : 눈뜨고코베인은 토요일에도 선 적은 있어요. 그런데 거의 없어요. 화요일부터 시작해서 토요일을 건너뛰고 일요일로 갔다가 토요일로 오거든요. 그런데 일요일에는 많이 했어요. 일요일 공연이 두 번째로 메인이거든요. 

 

- 2002년 눈뜨고코베인으로 데뷔하신 이후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싱글은 2008년에 나왔는데 중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장기하 : 사실 요약하면 간단한데요. 뭐 2002년부터 한 2~3년 동안 밴드 활동하다가 군대 갔다 왔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바로 장기하와 얼굴들 시작했습니다. 

 

- 군대 제대로 새 밴드를 구성하신 건가요?

 

장기하 : 그렇죠. 사실 제대하고 나서 눈뜨고코베인에도 복귀를 했어요. 그래서 제대 직후에 눈뜨고코베인의 정규 2집도 제가 참여를 해서 발표했었고.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장기하와 얼굴들 시작하는 준비도 해가지고, 비슷한 시기에 싸구려 커피 싱글이 나왔죠. 2008년에.

 

- ‘싸구려 커피’는 장기하 씨를 대표하는 곡이 됐는데, 이전에 하던 음악과는 분위기가 달랐나요?

 

장기하 :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는데. 저는 기본적으로는, 뭐라 그럴까요. 눈뜨고코베인에서 저의 제대로 된 직업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는 뭐 대학 전공을 살려서 진로를 정한 케이스가 아니다 보니까. 내가 꼭 음악을 하면서 배워야 될 것만 눈뜨고코베인에서 다 배웠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산울림이나 송골매 같은 음악들을 눈뜨고코베인 하기 전에는 그렇게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는 실시간으로 유행하는 가요만 들었었고. 우리말 가사, 우리말다운 그런 가사나 뭔가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 보게 됐던 계기도 눈뜨고코베인 활동하면서였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저의 정체성으로 되어 있는 것들은 눈뜨고코베인에서부터 비롯된 게 되게 많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눈코에 빚진 게 되게 많다고 일단 생각을 하고. 

 

그런데 차이점이라고 하면, 거기는 깜악귀라는 양반이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였고, 그분이 자기 이야기를 가사로 쓰는 거니까 그게 이제 눈뜨고코베인의 주된 정체성이고. 저는 제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저의 경험이나 삶을 살면서 느끼는 것들이 가사에 반영이 돼 있는 거니까. 한마디로 노래 만드는 사람이 다르니까 그거는 뭐 이 사람과 이 사람이 다른 만큼 차이가 있는 거죠. 

 

- 싸구려 커피는 어떤 곡인가요? 

 

장기하 : 어떤 곡이냐는... 뭐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약간 구체적으로 질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 당시에 굉장히 파격적이었던 걸로 유명한데, 어떻게 그렇게 그런 곡을 쓰시게 된 거예요? 

 

장기하 : 제가 뭐 ‘파격적인 걸 한번 보여주겠다’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이제 ‘싸구려 커피’를 만들었을 때가 제가 한 스물다섯 살쯤 됐을 때인데 그때 가장 자주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일단 쓴 것 같고요. 군대에서 만들었어요. 

 

이제 뭐 군 생활이 절반 정도 지나간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군사 식당 처마 밑에 앉아가지고 쭈그리고 있는데 날씨가 되게 흐리더라고요. 되게 회색 하늘인데 그거 바라보고 있으니까 ‘아, 저게 하늘이 아니라 낮은 천장같네’하고 느껴지더라고요. 답답하고 (한숨) 아직도 1년이나 남았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정말 기분이 안 좋았고. 그래서 그 당시에 주변에서 보이는 사물들을 죄다 소재로 끌어와서 이제 그 생활관에 앉아가지고... 거기 굴러다니는 통기타가 있었거든요. 

 

그걸 가지고 남들 안 들리게 틈틈이 만들었던 곡인데 비단 군 생활의 막막함, 답답함에 대해서만 썼던 건 아닌 것 같고, 그날 느꼈던 그 답답함과 막막함이 저는 20살 될 때부터는 좀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익숙한 감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야, 이런 거 진짜 수만 번 느껴본 것 같다’ 어떤 느낌이냐면, 나라는 인간이 알맹이가 전혀 없는 것 같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전혀 모르겠다는, 너무 이렇게 끝없는 막막함이 주기적으로 이렇게 막 찾아왔었거든요. 그게 그날도 찾아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곡을 만들었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종류의 감정은, 지금도 인생이라는 건 막막하지만 20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런 똑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냥 저의 20대에 느꼈던 대표적인 감정이 아닌가 싶어요. 

 

- ‘싸구려 커피’ 이외에도 주변의 것들을 곡에 투영한 예가 있을까요?

 

장기하 : 사실 ‘싸구려 커피’ 가사 같은 경우에는 거의 전부 제 직접 경험에 의존한 소재들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일단 첫 줄부터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서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라고 했는데, 커피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뭐 상관들이 커피 타라 그러니까, 제 것도 타라 그러니까 억지로 먹는데 속 쓰리더라고요. 

 

이런 거부터 시작해서, 저희 생활관이 되게 낡은 생활관이어서 노란 옛날 장판이 깔려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름 되면 너무 습하고. 진짜 막 쩍쩍 소리도 나고. 벽장에다가 물 먹는 하마를 하나씩 넣어 놓는데 여름에는 너무 빨리 차니까 ‘이게 벌써 이렇게 꽉 찼나?’이런 생각도 들고. 화장실 청소하려고 가면 누가 모기를 잡았는데 피가 번져 있고. 이런 매일매일 그냥 보는 것들을 다 끌어다가 썼는데, 너무 내 감정이 다 투영이 되는 거예요. 막 너무 이렇게 답답한 그 마음이. 

 

그리고 뭐 예를 들어 ‘콜라를 마셨는데 담배꽁초가 들어였다’이런 가사는 군대에서 있었던 일은 아닌데 대학교 때 실제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냥 과방 같은 데 막 널브러 놓잖아요. 새거랑 헌 거가 혼재돼 있는데 대충 마셨더니 꽁초가 ‘빡’ 들어가 있어 가지고. 그건 안 해 보신 분들은 모르는데, 해 보실 필요도 없지만 아무리 뱉으려고 그래도 그 담배 가루가, 담뱃재가... 그런 생각도 나고 그랬죠. 

 

- ‘88만 원 세대의 송가’라고 불릴 정도로 세대를 대변해 주는 노래로 알려졌는데, 군대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하네요.

 

장기하 : 일단 저는 88만 원 세대라는 용어 자체를 싸구려 커피와 관련된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고요. 이런 말이 있구나. 나는 알지도 못했던 그런 어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평가받고 있구나. 되게 신기했죠. 그리고 사실 뭐 지금까지도 그 곡을 군대에서 만들었다 그러면 놀라시는데, 사실 그 당시 했던 모든 인터뷰에서 다 했던 얘기예요. 그런데 언론이라는 건 그렇더라고요.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내고 싶은 얘기만 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 자취를 안 해 봤어?’ 모든 인터뷰에서 제가 다 얘기했거든요. 이 말도 이번에도 안 나가겠죠. 10년 후에 또 물어보겠죠. ‘어? 또 자취를 안 해 봤어?’ 

 

뭐, 사후적으로 생각했죠. 아, 왜 이렇게 88만 원 세대의 송가라고까지 얘기를 하는 건가. 그런데 사실 군인이라는 사람들은 뭐 다른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군인이 학생이었다가 군인이었다가 취준생이 되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만해도 사실 소위 말해서 명문대를 가기는 갔지만, 공부에 너무 이제 흥미가 생기지를 않았고, 모르겠어요. 공부할 에너지라는 걸 입시 때 다 써버려서 그런지 몰라도. 음악밖에 하고 싶은 게 없었는데 솔직히 눈뜨고코베인을 하면서는 뭐 그게 대중적인 뚜렷한 성취를 얻었던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막막하기는 했거든요, 사실. 뭐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저랑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까 어떤 진로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냐를 떠나서 대충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나이로 지내는 사람들은 비슷한 걸 느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뭐 그렇게 저는 추측을 한 거죠. 

 

-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거군요.

 

장기하 : 그렇죠. 없을 수가 없죠. 뭐 뾰족한 수가 없는데. (웃음) 하고 싶은 건 음악밖에 없는데 나는 차트에 있는 음악은 좋아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 즐겨 듣는 음악은 다 옛날 음악이고 요새 음악도 막 되게 마이너한 거밖에 없는데 음악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저는 진짜 없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지금도 사실 직업이 된 게 좀 신기하다고 여기는 건 뭐 변함이 없고. 뭔가... 그러니까, 지금은 이 서울대라는 학벌이 되게 큰 자산이구나하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때는 딱히 그런 것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활용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를 못 했던 것 같고. 막막하기는 했죠, 사실.

 

- 학교에서 같이 지내던 주변 사람들이 자리를 찾아가는 걸 보면서 조급한 생각이 들진 않았나요?

 

장기하 : 글쎄요. 뭐 지금 보면 그때 정말 술만 먹고 막 전혀 가능성이 안 보이던 사람들도 무슨 법관이 돼 있고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데 제가 장기하와 얼굴들 준비할 때만 해도 다들 지지부진했어요. 동기들이나 주변 사람 중에 뭐 네이버 간 친구 한 명 있었는데, 그 외에는 다 지지부진하게 고시공부하고 뭐 그랬기 때문에 뭐... 쟤네나 나나 크게 차이 없다는 생각을 했죠. 

 

- (웃음) 알겠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가 첫 음반이었나요?

 

장기하 : 그러니까 제가 낸 첫 음반은 아니고요. 말씀드렸듯이 눈뜨고코베인에서 세 장을 냈고요. 그런데 거기에는 메인 싱어송라이터가 있었지만 제가 쓴 자작곡도 두 개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외에도 그 당시에 ‘청년실업’이라는 이름의 포크 트리오를 했어요. 세 명이었는데 3분의 1씩 곡을 쓰는 거죠. 청년실업 음반에 제 노래가 네 곡인가 다섯 곡이 들어갔고. 그런데 제가 단독 싱어송라이터로서 처음으로 낸 건 ‘싸구려 커피’ 싱글이죠. 

 

- 그런데 그 시절에는 회사에 소속돼 있지 않았어도 음반을 내는 게 당연했나요?

 

장기하 : 세상에 당연한 건 없죠. 그냥, 제 입장에서는 당연했던 것 같아요. 군대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래가 만들어졌어요. ‘싸구려 커피도 그렇고 ‘달이 차오른다, 가자’도 그렇고. 1집에 있는 ‘느리게 걷자’,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 뭐 이런 곡들은 다 군대에서 만들어진 곡인데, 제대 날짜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당연히 나는 새로운 밴드를 하지’라는 식으로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그게 뭐 대중적인 성공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학해서 바로 졸업을 하면서 SBS에서 알바를 하면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했죠.

 

- SBS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다고요? 

 

장기하 : 2008년도 쯤 제가 보도국에서 두어 달 정도 일을 했었는데, 외신 모니터링 요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있을 거예요. 그게 이제 파트타임으로 24시간 돌아가야 되는 그런 건데, 그 당시 저의 목표는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돈을 벌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을 확보해서 음악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음악으로는 돈이 안 벌리니까. 그 생각으로 그렇게 이제 시작을 한 거죠. 

 

- 장기하와 얼굴들 앨범을 준비하던 때였나요?

 

장기하 : 준비할 때는 아직 뭐 학생이고 그래가지고 뭐 어떻게 좀 ‘삐대고’ 있다가, 졸업과 동시에 ‘이제는 내가 돈 벌어야 된다’ 해서 외신 모니터 요원을 했죠.

 

- ‘싸구려 커피’ 활동 당시에도 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나요?

 

장기하 : 그렇죠. 제가 쌈지사운드페스티벌 이런 걸로 화제가 됐었는데, 그거 나갈 때도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 방송국인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았나요?

 

장기하 : 그래서 뭐 그 당시 보도국장님이랑 술도 한잔하고 했어요. 이런 친구가 지금 여기 보도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하시면서. 

 

- (웃음) 외신 모니터 요원이면 영어 실력은 필수였겠군요.

 

장기하 : 이제 뭐... 음악으로는 돈을 벌 수가 없다. 그럼 뭘로 돈을 벌 거냐. 음악 외에는 그나마 관심 있는 게 영어밖에 없었어요. 그 외에 경제학이라든지 이런 건 아예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영어는 배워 두면 어디서든 써먹겠다 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군대도 사실 어학병으로 갔다 왔어요. 영어 필요할 때 가끔 시키고 그런 건데 물론 그냥 일반 보직이에요. 그래서 토익 하나는 높은 점수를 만들어 놨었어요. 그거 이력서에 내고, 나 어학병 근무 경력 있다. 그 두 개로 딱... 했죠.

 

- 아무래도, 어학 능력이 필수였으니 시급은 높은 편이었겠네요.

 

장기하 : 그래도 같은 파트타임 중에서는 낮은 편은 아니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석 달 월급이 88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파트타임으로 88만 원이니까 높은 거죠. 

 

- 일반적인 업무는 아니었겠군요.

 

장기하 : 지금도 하고 계세요, 보도국에서. 왜냐하면 24시간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 외신이 나오면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체크하나 했는데 그게 파트타임 업무였군요.

 

장기하 : 그렇죠. 모든 걸 거의 제목 정도만 번역해서 넘기면 그중에서 기자님들이 보시는 거예요. 

 

- 신기하네요. 앨범 내실 때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합니다.

 

장기하 : 그 당시에 제가 붕가붕가레코드라는 회사에 있었는데, 여긴 사무실이 없었어요. ‘곰사장’이라고 저희 학교 동기인데 그 친구가 사장이고. 제가 제대할 때쯤 곰사장이 ‘혼자 녹음이랑 믹싱 공부했는데 잘하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랑 한번 작업을 해 봐라’해서 소개해 준 게 지금 ‘술탄오브더디스코’라는 팀 리더로 있는 ‘나잠 수’라는 친구예요. 그 친구 소개받아서 그때 당시 나잠 수의 원룸 오피스텔에서 ‘싸구려 커피’ 모든 작업을 했어요.

 

- 녹음도 전부 거기서 하신 건가요?

 

장기하 : 네, 거기 마이크 되고 작업은 컴퓨터로 다 했으니까. 앰프 소리 같은 게 다 소프트웨어가 있거든요. 사실, 컴퓨터와 마이크,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 주는 인터페이스. 이 3개만 있으면 홈 레코딩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때 그 방에서 모든 걸 끝냈죠. 연주도 뭐 제가 다 하고.

 

- 악기 연주도 전부 혼자서 녹음했다고요?

 

장기하 : ‘싸구려 커피’ 싱글은 제가 혼자 다 연주를 했어요. 세 곡이 들어 있었거든요. 사실 편성 자체가 그냥 통기타랑 최소한의 타악기. 그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프로그래밍도 약간 들어갔어요. 없을 것 같지만. 베이스 같은 건 그냥 녹음했던 것 같고. 세트 드럼은 들어가 있지 않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뭐 할 수 있었죠. 

 

- 홈 레코딩 작업 중 가장 여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장기하 : 사실 홈 레코딩이라고 하면 되게 열악한 환경이고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홈레코딩이 더 쉬워요. 간단하죠, 사실. 그러니까 홈 레코딩으로 스튜디오 녹음 같은 사운드를 내겠다고 목표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어려워지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진짜 쉽죠. 집에서 다 하는데. 오히려 저는 나중에 밴드가 좀 지명도가 생기고 난 다음에 정식 스튜디오에 가서 제대로 된 장비로 녹음할 때가 훨씬 더 어려웠고요. 홈 레코딩 할 때는 어렵다는 생각 ‘1’도 없었어요. 그냥 다 재미있는 작업밖에 없었어요. 

 

- 일반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낼 수 없는 홈 레코딩만의 느낌이 있다고들 하던데.

 

장기하 : 처음 홈 레코딩 할 당시에는 정식 스튜디오 녹음을 안 해 봤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안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 말이 너무 맞는 얘기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떤 음악의 느낌이라는 걸 결정짓는 요소는 되게 많잖아요. 그런데 음악을 시작할 때는 그 많은 요소들을 다 몰라요. 그러니까 나 자신의 실력과 장비의 질 정도만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모든 게 다 영향을 미치거든요. 

 

지금 내가 뭘 보면서 녹음을 하고 있나, 여기 온도가 어떻고 습도가 어떻고, 얼마나 편한 환경에서 하고 있는가 등등이 다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식 스튜디오에 가면 무조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죠. 그래서 그냥 정말 지저분한 원룸이었는데, 편안했죠. 그게 되게 좋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내가 좋은 환경에서 녹음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불편한 마음이라고는 없고. 그리고 단둘이서 계속 작업을 하니까 뭐 금세 친해져서 맨날 같이 술 먹고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진짜 편했죠.

 

- 아무래도 홈 레코딩을 하면 편안하니까 작업과정에서 즉흥성이 더 발현되기도 하나요?

 

장기하 : 아, 즉흥성은 좀 다른 문제죠. 저는 초기 장기하와 얼굴들 음악에서는 뭘 즉흥적으로 녹음한 건 별로 없어요. 작사, 작곡, 편곡, 연습을 모든 준비를 해서 녹음실, 그러니까 원룸이죠. 나잠 수 집. 그 친구 집에 가서 정해진 걸 잘 해낸다. 이런 식으로 했던 것 같아요. 이게 얼핏 들으면 되게 대충 한 것 같은 음악이지만 저 되게 열심히 했어요, 그 당시에. 정교하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취해야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 앨범 제작도 직접 하셨다고요.

 

장기하 : 그렇죠. 녹음이 완료가 된 음원을 갖다가 CD를 굽는다고 하죠. 요새는 CD라는 매개체에 관심들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CD를 컴퓨터로 굽잖아요. CD-R을 사가지고 구워다가 이제 라벨을 스티커로 만들어서 손으로 붙이고. 또 박스도 무지 박스가 있어요. 그걸 사다가 또 스티커를 붙여서 넣고 비닐 포장을 하는 거죠.

 

- 절차가 복잡하군요.

 

장기하 : 네. 그러니까 공기를 싹 빨아들여서 비닐로 싹 포장하는 기계가 있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좀 반응이 와서 주문량이 많아질 때는 저희가 그걸 샀죠. 그리고 나중에는 CD-R을 7장을 동시에 굽는 기계가 있어서 그것도 샀죠. 처음에는 그냥 보통 컴퓨터에서 한 장씩 구웠어요.

 

- CD 한 장 만드는데 시간도 많이 소요되겠군요.

 

장기하 : 그렇죠. 장기하와 얼굴들 첫 공연 날이 그 음반 발매일이었는데, 2008년 5월 10일. 그날 저희가 딱 100장 가지고 가서 팔았거든요. 그런데 100장은 한두 시간 걸려도 일반 컴퓨터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100장 중 12장이 뻑이 나서... 그것도 여든여덟 장을 갖고 갔어요.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88장을 가지고 가서 한 30장 팔았나 그래요. 왜 그러냐면 그때 온 사람들이 거의 지인 아니면, 지인의 지인 아니면 지인의 지인의 지인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다들 우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샀어요. 그리고 가격이 3,000원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그래도 절반은 안 샀네, 생각해 보니까. 사지, 좀.

 

- (웃음) 이후 본격적으로 반응이 와서 지인들 말고 대중들이 그 음반을 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예요?

 

장기하 : 그런데 사실 지인의 지인의 지인 정도 되면 남이잖아요. 그런데 그분들도 음악이 안 좋았으면 안 샀겠죠. 그래서 첫 공연 끝나고 어쨌건 반응이 좋았어요. 아무리 아는 사람들이 왔다고 하지만 뭔가 우리가 ‘어? 뭔가 되게 좋은 분위기인 것 같다. 서로 너무 재미있었다, 공연이’ 했었고. 노래 듣는 사람들 반응도 좋고 그래서 계속 클럽 공연을 잡았고 그러다 보니까 홍대 바닥에서는 입소문이 퍼져서 클럽들에서 섭외가 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섭외가 와서 공연 가면 갈 때마다 CD를 몇 장씩 만들어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클럽 입구에서 제가 판넬을 들고 서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직접 팔고, 매대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고. 그러면서 많이 팔렸죠.

 

- 판매량이 급격히 늘게 된 순간이 있었을까요?

 

장기하 : 몇 번의 이 변곡점이라고 하죠. 그런 게 딱딱딱 있었는데.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의 숨은 고수로 뽑혀서 나간 거랑, EBS 스페이스 공감 헬로 루키로 나간 게 좀 비슷한 시기였어요. 그 시기에 훅 늘기 시작했고. 그다음에 <윤도현의 러브레터> 후속으로 시작한 <이하나의 페퍼민트> 1회에 저희가 섭외돼서 그 방송이 나간 다음에는 좀 이상할 정도로 많이 팔렸어요. 그리고 매일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했었고. 

 

그다음부터는 앉은 자리에서 1,000장, 2,000장을 만들어야 됐는데 그러다 보니까 연습할 시간도 없고. 이게 정작 더 중요한 일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딱 만 장을 팔고 절판을 시켰어요. 이제 더 이상 안 팝니다. 그리고 그때쯤 돼서는 저희가 뭐 스트리밍 서비스도 시작을 하다 보니까 듣고 싶으신 분들은 들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어쨌건 구운 거니까 또 복사해서 들을 수도 있고. (웃음) 만 장까지 팔고 ‘아, 이제 우리가 공연 준비를 더 잘해야 되니까 그만 만들자’ 했죠.

 

- 지금으로선 ‘싸구려 커피’ 음반이 매우 희귀해졌겠군요.

 

장기하 : 뭐 희귀본이라면 희귀본이죠. 만 장 이후로 그게 정식으로 막 생산을 한 게 아니다 보니까. 

 

- 클럽 공연에서 현장 판매 말고 음반을 다른 방법으로 유통하지는 않았나요?

 

장기하 : 그 당시에 딱 세 개의 매장에서만 판매를 했거든요, 처음에는. 홍대 앞에 있는 미화당레코드, 퍼플레코드 그리고 신촌에 있는 향뮤직 이렇게 세 군데에서 팔았어요. 거기에 제가 직접 CD를 가져갔어요. 지하철을 타고 CD가 담긴 가방을 들고, 제가 갈 때도 있고 저희 사장이 갈 때도 있고. 뭐... 그리고 나잠 수가 한번 가져가다가 지하철에 내려가지고 몇 십장 날린 적도 있고. 지금까지 못 찾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온라인 스트리밍은 아예 없이 그냥 딱 세 군데 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를 했고, 그러다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유통하시는 분들한테 컨택이 오기도 하고. 유통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다 보니까 온라인으로도 들어가고 오프라인 매장 같은 경우에도 대형 매장들에도 입점이 되고 그렇게 했었죠.

 

- 지하철에 두고 내린 몇 십 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장기하 : 뭐 그냥 버렸겠죠. 그 당시에는 뭐 이게 뭔지도 알 수 없는 음반이니까.

 

- ‘싸구려 커피’ 싱글 발매 후 홍대 공연도 계속 이어졌나요?

 

장기하 : 그렇죠. 싱글을 낸 날이 첫 공연 날이었기 때문에. 

 

- 그 당시 관객은 어느 정도였나요?

 

장기하 : 글쎄요. 그때그때 다른데, 아무래도 저희가 EBS <스페이스 공감> 방송 나간 게 8월이었는데. 제 기억으로 첫 공연한 게 5월이었고, 그 세 달 사이에서는 그래도 100명 넘는 경우는 잘 없었던 것 같아요. 100명 넘는 경우는 조금 더 유명한 뮤지션의 게스트로 섰을 때. 예를 들면 그 당시 저희가 ‘뜨거운 감자’ 콘서트 게스트로 간 적이 있었고, ‘브로콜리너마저’ 게스트로 간 적이 있어요. 그때는 100명 이상이었고. 그 외에는... 100명이 넘는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스페이스 공감> 출연 후엔 관객 수가 얼마나 늘게 된 건가요?

 

장기하 : 출연 이후에는 레이블 공연을 브이홀이라는 데서 했는데, 거기가 꽤 넓어요. 꽉 차면 1,000명 정도까지도 들어가는데, 거기 다 못 들어오고 그랬어요.

 

- 자연스럽게 공연, 방송 섭외 요청도 늘었겠군요. 주변 반응도 많이 달라졌나요?

 

장기하 : 길거리 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당연한 얘기지만 뭐 평생 그런 적이 없잖아요. 길거리 다니다 보면 한 10명이 사진 찍자고 한 적도 있어요. 지금이랑 그때는 또 다르거든요. 지금은 길거리에서 누군가 저를 알아보시면 그냥 이 사람은 원래 연예인이었던 사람이라고 인식을 해요.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다 보니까. 그런데 그때는 연예인이라기보다는 그냥 화제의 인물이에요. 그냥 신기한 사람. 지금은 ‘어? 장기하, 장기하’ 이러는데 그때는 ‘오~! 오~!’ 이러면서 다가와요, TV에 많이 나온 되게 웃기기도 하고 하여간에 희한한 사람이야. 뭐 그런 느낌이죠. 지금도 사진 찍자고 하면 웬만하면 찍지만, 그땐 또 너무 재미있으니까. ‘아, 뭐야. 찍으시죠’ 하면서 막 찍다 보면 한 명, 두 명 다 모여들고 막 단체 사진 찍고 막... 그런 일이 갑자기 벌어지니까 그때는 되게 재미있었어요.

 

- 당시엔 거의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반향이 컸습니다. 대중들이 장기하와 얼굴들을 그렇게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뭐였을까요?

 

장기하 : 저의 얼굴을 좋아한 건 아닌 것 같고. (웃음) 장기하와 얼굴들을 좋아했겠지요. 그런데 그런 질문받을 기회가 많기는 많았어요. ‘인기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화제가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드는 생각이 ‘그냥,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정도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는 점점 더 모르겠어요. 그냥 운이었던 것 같아요. 뭐, 저의 음악에 어떤 매력도 있었겠죠. 어떤 매력이 있다는 자부심은 유명하지 않았을 때부터, 처음부터 늘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매력 있고 자부심을 가진 음악이라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건 아니고, 확실한 답은 모르겠어요.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장기하 SNS]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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