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스타’ 장기하 앞에 펼쳐진 페스티벌 풍경 > 인터뷰 아카이브K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인터뷰

인터뷰

2023.09.26
by 우정호

‘록스타’ 장기하 앞에 펼쳐진 페스티벌 풍경

페이지 정보

작성일 23-09-26작성자  by  우정호 

본문



 

(1부에서 이어집니다.)

 

 - 장기하와 얼굴들의 성공에는 가사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요. 장기하 가사의 특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장기하 : 그렇죠. 사실 뭐 제가 만든 음악이 좋다거나 마음에 든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 이야기나 써주시는 글들을 보면 압도적으로 가사에 대해 언급하시는 경우가 많았죠. 그렇기 때문에 가사의 영향이 컸다는 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사의 특징은... 제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저는 하여간에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꼭 음악뿐만이 아니라도 뭐든 어색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진심이 아닌 걸 진심처럼 이야기하거나, 내가 평소에 쓰지 않는 말투를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차용을 한다거나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고. 그래서 그냥, 어떻게 하면 평소에 내가 쓰는 말, 어휘, 말투에 가까운 음악을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서 늘 노력했던 것 같고. 저는 사석에서 처음 만나 뵌 분이랑 얘기를 하면 ‘노래하시는 줄 알았어요’ 이런 얘기를 진짜 많이 듣거든요. 제가 말을 쭉 하는데, 뭐 제가 제 말을 따서 가사를 만들었으니까 당연한 거죠, 그냥 제 말투 같고 ‘저스럽다’는 게 가장 정확한 것 같아요.

 

- 가사를 쓸 시기가 20대였는데, 같은 세대의 공감 점을 파고든 게 아니었을까요?

 

장기하 : 아무래도 좀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만약에 저랑 비슷한 연령대 분들이었다고 한다면 나랑 대충 처지가 비슷한 친구가 ‘나는 노래를 틀었는데 얘기를 해 주고 있네’ 뭐 이런 걸 느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는 좀 드네요. 

 

- 혹자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등장이 ‘인디밴드 2세대의 시작’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기하 : 그런데 그거야 뭐... 저도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어요, 거기에. 왜냐하면 저희가 ‘싸구려 커피’ 내고 공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뭐, 인디밴드가 방송을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게 역사적으로 보면 ‘카우치 사건’ 이후에 방송계가 인디 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로 클럽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은 그냥 거기서 공연하는 거지 방송 나가고 어느 정도 이상 리스너들이 생기고 이런 건 아니었거든요. 매니아들만 듣는 그런 음악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장기하와 얼굴들이 갑자기 뻥뻥뻥 터지기 시작을 했고, ‘이 신에서 뭔가 될 것 같다’고 느꼈는데 분위기가 그때부터 시작이 됐어요. 실제로 그 전보다 인기가 많아진 인디밴드들이 나오고, 방송을 출연하고, 대형 페스티벌 무대에 서게 된 인디 뮤지션들 숫자도 늘어났고, 페스티벌 자체도 규모가 커지고 숫자도 많아지고, 그리고 방송국에서도 인디 뮤지션이 공연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거는 제가 뭐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반대도 아니지만 장기하와 얼굴들 이후에 그렇게 된 것 같아요.

 

- 어떤 평론가는 인디밴드 1세대라고 불리는 크라잉넛, 노브레인, 언니네 이발관, 델리스파이스가 ‘4대 천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장기하 : 4대 천왕. (웃음) 

 

- 평론가가 직접 말했던 내용이에요.

 

장기하 : 뭐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 이 인디신 대형 스타 네 팀 이후로 인디 침체기를 거쳤다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초대형 스타가 탄생하면서 다시 부흥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동의를 하시는 건가요?

 

장기하 : 네. 그건 그냥 일어난 일이니까 뭐 제가 겸연쩍더라도 그렇다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 그 시기 홍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뮤지션 중 생각나는 팀은 어떤 분들인가요?

 

장기하 : 많이 있죠. 일단 저희 레이블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술탄오브더디스코’, ‘불나방스타소시지클럽’, 그다음에 뭐 ‘생각의 여름’. ‘아마도이제는 밴드’, ‘아침’ 뭐 이런 밴드들이 있었고, 그 외에 다른 레이블이면 이제 ‘국카스텐’이라든지 ‘갤럭시익스프레스’, ‘검정치마’, 뭐 타바코주스... 그렇게 여러 팀들이 있었죠.

 

- ‘옥상달빛’도 그 당시 활동했나요?

 

장기하 : 아, ‘옥상달빛’도 있었죠. 그러니까 ‘10센치’도 있었고. 그러니까 ‘옥상달빛’은 아마 시작하신 게 저희보다는 한 2~3년 정도는 후일 거예요. 10센치는 저희랑 비슷했던 것 같고.

 

- 소위 ‘인디 부흥기’의 분위기는 그 이전과 많이 달랐나요?

 

장기하 : 네. 그러니까 그때는 뭐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모두가 뭔가 될 것 같다는 표정으로 홍대 바닥을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뭔가 되는 거 아니야?’ 되게 희망적인 생각. 그러면서 그런 것도 많았죠. 이제 그 바닥에 투자하는 분들도 많아지고 그래서 ‘아, 이런 인디라는 키워드로 장사를 해 볼까?’라는 움직임도 저는 좀 많이 감지를 했고요. 실제로 그전에 약간씩 반향을 일으키던 밴드들도 조금 더 큰 무대, 조금 더 많은 관객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된 케이스들도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하여간에 뭔가 다들 좀 신나 있었던 것 같아요. 

 

- 그 이전 시기는 실제로 ‘인디 침체기’라고 표현됐을 만큼의 체감이 됐었나요?

 

장기하 : 글쎄요. 그런데 그 침체기라는 걸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은데. 방송을 나가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좀 나오느냐, 이 기준으로 따진다면 침체기가 맞기는 맞았죠.

 

- 그 시기에 홍대 앞의 공연 클럽이나, 리스너들이 줄었다던가...

 

장기하 : 저는 거시적으로 조사를 해 본 건 아니라서. 

 

- 체감상 여쭤보는 거예요. 

 

장기하 : 그 이전 시대에 비해 그때가 어땠는지는 뭐 잘 모르겠지만, 지금과 비교해 보면 그때가 인디의 움직임은 훨씬 활발했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니까 2008년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공연했던 클럽만 해도 화요일부터 내내 공연이 있었으니까. 라이브 클럽이라는 게 그렇게 운영되고 인기가 늘 있든 없든 공연하는 밴드가 있다. 공연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뭐 클럽도 다 운영난 때문에 우는 소리를 늘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5년, 10년씩 이어온 클럽들이 있었고 계속 뭔가 공연을 해 나간다는 분위기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약간 그렇지는 않죠.

 

- 인디 2세대의 부흥과 함께 페스티벌 르네상스가 열렸습니다.

 

장기하 : 그렇죠. 그 시기를 대표하는 페스티벌이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록 페스티벌이라는 게 펜타포트가 그전부터 있었고 그걸 준비하시던 분들이 두 갈래로 갈라지 거잖아요. 한 개만 있던 페스티벌이 왜 두 개가 되어야만 했는가. 어떻게 두 개가 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만큼 페스티벌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무대에 설 수 있는 뮤지션들이 많아졌다는 얘기일 거잖아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건 일정 정도의 관객 몰이를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게 한 10년 안팎으로 이뤄지다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없어졌잖아요. 다시 펜타포트만 남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좀 상징적인 것 같아요. 두 개의 페스티벌이 있을 수 있던 시대가 몇 년이 지속이 됐고, 운이 좋다고 해야 되겠지만 저희 장기하와 얼굴들이 활동했던 대충 그 시기거든요. 그게 뭐 르네상스라고 표현은 하셨지만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이 좀 상징적인 페스티벌인 것 같고, 그 외에도 정말 우후죽순으로 많이 생겨났죠.

 

- 어떤 페스티벌들이 또 생겨났나요?

 

장기하 : 뭐가 있었지? 서울재즈페스티벌 같은 경우도 그 시기에 점점 자리를 잡아서 지금까지도 지속이 되고 있는 거고,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이 또 굉장히 잘 되던 시기였죠, 그때가. 쌈지사운드페스티벌 같은 경우에는 저희가 숨은 고수로 발탁이 되고 한 2~3년 정도 더 지속되다가 없어졌고. 그다음... 묵직한 페스티벌로는 뭐가 있었을까요? 

 

- 페스티벌 무대 중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이 있을까요?

 

장기하 :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저희가 2011년에 6월에 2집 발표를 했는데 7월 말인가 8월 초에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섰어요. 그때 저희가 타이틀곡으로 냈던 노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곡이었고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뮤직비디오에 손만 등장하는 거였거든요. 손을 클로즈업했다는 컨셉으로. 지산 무대에서 이걸 모두한테 같이하자고 하면 할 것 같아서 제가 ‘합시다’ 했는데. 그때 그걸... 그러니까 모두가 정말 미친 듯이 했어요. 모두가 한 손을 들고 엄청 빨리 흔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뮤직비디오에서는 사실 제가 2분의 1 속도로 해가지고 두 배로 돌린 거거든요. 그래서 이걸 실제 속도로 하면 되게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걸 다들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러니까 그때는 ‘이야, 이 정도면 나는 록스타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웃음) 

 

- 형언할 수 없는 기분 일 것 같군요. 페스티벌 무대에서 그런 광경을 본다는 건.

 

장기하 : 그렇죠. 진짜 너무 기분 좋죠.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진짜 록스타가 되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데 그 페스티벌 시즌은 또 엄청 덥거든요. 그래서 되게 극단적이에요. 한 해 중에 가장 더운 날에 만 명, 2만 명이 빽빽하게 모여서 다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방방 뛰고 소리를 지르고 슬램을 하는 거예요. 그 가운데 연주를 하고 노래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에요. 나와 내 동료들.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표현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일단 그 페스티벌 현장에 도착해서 차에서 딱 내려 그 후끈한 열기를 느끼는 순간 ‘크~ 인생이 괜찮다’ 이런 느낌이 들기 시작하죠. 내 인생, 이번 인생 잘 풀리고 있다 행복한 인생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 수많은 인디밴드 뮤지션들이 해외 록스타들 영상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걸 꿈꾸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장기하 : 저는 꿈도 안 꿨어요. 저는 ‘싸구려 커피’를 낼 때 이미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어요. 큰 무대에 설 수 있다거나, 방송에 나가거나 히트곡을 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포기한 상태였어요. 왜냐하면 눈뜨고코베인 시절에도 내가 제일 좋은, 제일 멋있다고 생각하는 음악은 우리 밴드 음악인데 그런게 뭐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건 아니고. 그리고 음악차트를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한 개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 답이 나왔잖아요. 결론은, 나는 대중성과 거리가 멀다. 허황된 꿈을 꾸어 봤자 불행해질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눈앞에 있는 클럽에 있는 관객만 만족시키겠다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기 때문에 전혀 꿈을 안 꿨어요. 그렇기 때문에 꿈이 이루어졌다라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냥,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거예요. 아예 기대도 안 했던 일이. (웃음) 

 

- 인디밴드에게 페스티벌은 어떤 의미일까요? 

 

장기하 : 뭐 가장 큰 잔치죠. 좀 굵직굵직한 페스티벌은 매년 한 번씩 하니까 그 해의 라인업이 딱 뜨면 ‘아, 어떤 팀들이 새롭게 추가가 됐고 어떤 팀들이 없어졌고. 어떤 팀이 그대로 있고’ 뭐 이런 게 보이잖아요. 그리고 제 입장에서도 뭐 한 해, 한 해 갈수록 조금 더 어두운 시간에 공연을 하게 된 거죠.

 

- 장기하와 얼굴들도 페스티벌 낮 시간에 페스티벌에서 공연했었나요?

 

장기하 : 그럼요. 그럼요. 

 

- 첫 페스티벌 공연은 몇 시에 올랐나요?

 

장기하 : 2009년에 처음 지산 나갔을 때 3시인가 그때 했죠. 사실 그랜드민트페스티벌 2008년도에 처음 나갔을 때는 아예 점심때였어요. 저희 앞에 한 팀 있었는데 그 팀이 지금도 기억이 나요. ‘짙은’이었어요. 작은 무대 중에서 큰 무대였어요. 메인 스테이지 말고. 짙은이 먼저 하고 저희가 했어요. 나중에는 저희가 지산에서 헤드라이너 하지는 않았고, 제가 되게 좋아하는 노엘 갤러거 바로 전 순서에 했었죠, 그때 생각했죠. ‘이번 인생 괜찮다. 노엘 갤러거 말고는 우리가 마지막 순서니까.’

 

- 그런데 ‘싸구려 커피’의 흥행에도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올라간 건 아니었군요.

 

장기하 : 그럼요. 왜냐하면 선배들이 있잖아요. 2009년도에는 제 기억으로 저희 뒤에 언니네이발관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그러니까 지산 같은 경우에는 헤드라이너는 무조건 해외 아티스트였고, 서브 헤드라이너까지도 뭐 해외 아티스트였어요. 

 

- 페스티벌에서 좋은 시간대에 공연하기까지 단계가 있는 거군요?

 

장기하 : 네, 그건 몇 년이 지나야 돼서... 왜냐하면 팬들이 납득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예를 들어 같은 해에 자우림이 있는데 우리보다 먼저 시간대에 공연을 하면 납득을 못 하죠, 사람들이. 그 당시 뭐... 서열 같은 거랄까? (웃음) 

 

- 앞서 언니네이발관을 언급하셨는데, 그들의 음악을 좋아했나요?

 

장기하 : 네. 언니네이발관 같은 경우에는 사실 저는 그 밴드가 시작했을 시점에 큰 관심은 없었어요. 제가 결정적으로 팬이 된 건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제목의 5집 음반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음반은 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 어떤 트렌드를 의식하고 만들었다는 느낌이 제가 느끼기에는 없었고. 되게 슬프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는 않은 되게 경계에 있는 그런 정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음악의 스타일도 좀 군더더기 없이 아주 깔끔하다고 생각을 했고. 되게 시크한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 만든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장기하 : 음악보다 저는 책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 이석원 형이 [가장 보통의 존재 앨범] 낼 때 비슷한 시기에 [보통의 존재]라는 산문집을 냈거든요. 그러니까 음반 때문에 산문집이 더 좋아지고, 산문집 때문에 음반이 더 좋아졌어요. 왜냐하면 결국 두 개를 다 감상을 해 보면 같은 얘기라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걸 음악으로도 표현하고 글로도 표현을 했다는 게 저는 그 당시에 너무 멋지게 느껴졌고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최근에 산문집을 냈는데, 결국 산문집을 내게 되는 데까지 그 결심을 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신해철 씨를 존경한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신해철은 인디 신에서 어떤 존재였나요?

 

장기하 : 제가 너무 감격스러웠던 일화를 말씀드리면, 본인이 진행하시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시간 동안 ‘싸구려 커피’를 세 번을 트시고 그 시간 동안 이 노래가 왜 좋은 노래인지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자,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를 듣겠습니다.”하고 노래 끝나면 “자, 노래 들으셨죠? 이 노래가 왜 좋은 노래인지 말씀드릴게요. 첫 번째,... 두 번째... 자, 그럼 다시 한번 듣겠습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 들으셨죠? 이어서 말씀드릴게요. 네 번째. 한 번 더 듣겠습니다.” 그래서 그걸 제가 저희 부모님과 함께 들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내가 이런 사람인데...’ (웃음) 

 

- 신해철 씨가 진행하던 <고스트스테이션>에도 출연한 적 있나요?

 

장기하 : 저는 눈뜨고코베인 때 출연했어요. 눈뜨고코베인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그중에서도 지금 기억에 남는 게, ‘어색한 관계’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를 되게 좋아하셔서 여러 번 선곡도 하시고, 사실 그 당시에 방송국에서 저희 밴드를 부르는 일은 잘 없었거든요. 그런데 신해철 형님 라디오에는 저희가 나갔었죠. 그때는 그게 되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만해도 되게 이기적이었어서 후배를 챙겨야 된다는 생각을 잘 못해요. 어떤 신에 내가 영향력을 행사해야 된다거나, 어떤 후진들을 이끌어 줘야 된다는 생각을 솔직히 저는 평소에 많이 하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그 형님 같은 경우에는 본인한테 어떤 의무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하셨던 행보들을 돌이켜 보면. ‘피터팬컴플렉스’라든지 몇몇 팀들은 제작도 하셨잖아요. 그런 정도로...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 세대 다른 선배님들은 그렇게 하신 분이 없잖아요. 대단하셨던 선배라는 생각이 들어요. 

 

- 혹시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나요? 

 

장기하 : 거의 뵙지를 못했어요, 안타깝게도. 돌아가시고 나니까 사실 그게 더 안타깝기는 한데. 그때 그렇게 라디오 프로에서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시고 난 다음에도, 희한하게 다른 선배님들은 만나 뵐 기회가 많았는데 그 형님은 뵙지를 못하다가 나중에 제가 뭐 음반 한두 개 더 낸 다음에 어디 공개 방송 대기실에서 만났어요.  그때 기억에 남는 게, 대기실에 썬 배드를 갖다 놓고 선글라스를 끼고 누워 계셨어요. 실내인데. 그래서 제가 거기 “아유, (꾸벅) 형님,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드리고, 드리면서 그때 너무 말씀 잘해 주셔가지고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제야 인사를 드린다고 말씀드렸더니 “자네 이제 완전, 완전 슈퍼스타가 됐던데? 껄껄껄” 그러고 끝이에요. 그러고 나서 언젠가 또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인디 뮤지션들에게 ‘홍대 앞’은 어떤 의미인가요?

 

장기하 : 솔직히 지금이나 앞으로는 어떤 의미일지 저는 잘 모르겠고요. 이게 저한테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고향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나 대학교 같은 것보다도 그 씬의 그 몇 년을 그렇게 막 돌아다니면서 생활을 했다는 게 되게 학창 시절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뭐 예를 들어 국카스텐의 하현우 씨라든지 갤럭시익스프레스 박종현 씨, 검정치마 조휴일 씨 이런 분들... 그러니까 지금 뭐 제가 자주 만나고 친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어디 매체에서 계속 이렇게 뭐 얼굴 보면 동창생들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 그러니까 지금은 어떻게 보면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그때 클럽에서 같이 공연을 하면서 뭐라 그럴까. 추억을 많이 쌓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렇죠. 학창 시절 학교 같은 느낌, 어떻게 보면.

 

- 요즘 주목하고 있는 인디 뮤지션은 누가 있나요? 

 

장기하 : 저는 가장 최근에 가장 좋게 들었던 음반이 ‘놀이도감’. 놀이도감은 이제 ‘실리카겔’이라는 밴드의 멤버인 김민수 군의 솔로 프로젝트인데. 정규 음반이 나왔어요. 그 음반을 되게 좋게 들었습니다. 

 

- 장기하 씨가 생각하는 인디란 무엇일까요? 

 

장기하 : 어차피 워낙 어려운 질문이니까 결국은 누구나 마음대로 대답하면 되는 것 같아요. 사실은 원래 의미는 경제적인 의미이긴 하죠. 이제 대자본의 투자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제가 생각하고 싶은 인디는, 남의 눈치를 좀 최대한 안 보고 자신의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실 늘 인디이고자 노력을 해 왔고 딱히 인디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고요.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고요. 

 

 

 

[사진=두루두루컴퍼니]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공유하기

© www.archive-k.com
Total 76 / 3 page
검색 열기 닫기
게시물 검색

인터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