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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
by 우정호

'라이브 공연'의 동의어 강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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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10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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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공연을 하는 것은 뮤지션의 정의와도 같다”는 강산에는 그의 말처럼 데뷔 이전에도, 이후에도, 현재까지도 라이브 공연을 통해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연출이 가미된 방송에서의 모습보다는 라이브 공연에서의 ‘삐딱함’이 어울리는 그는, 첫 라이브 공연 후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크고 작은 라이브 공연에 매진하고 있는 이른바 ‘라이브 중독자’다.

 

 

(아카이브 K는 강산에와 2020년 8월 인터뷰했다.) 

 

 

- 93년 솔로 음반을 발표하기 전인 80년대 중반부터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강산에 : 네, 그때 노래를 했던 곳은 지금 신도시가 된 일산에 있는 간이역, 백마역 근처에 ‘화사랑’이라는 막걸리 주점이었어요. 요즘 청춘들의 메카가 홍대, 신촌인 것처럼 당시 청춘들의 메카는 화사랑 주변 막걸리 타운이었거든요. 80년대 초반, 82년부터 한창 주점 타운이 많이 있었고 장흥 유원지처럼 히트가 됐던 곳. 학생들이 완행열차 타고 오면 바글바글하게 사람들 모이는 동네였죠. 그때는 그런 문화였어요. 주점에서 서빙도 하면서 노래도 하고. 예술가들도 많이 모이고, 작가들도 모이고. 당시에는 워낙 군사독재시절이라 거기 모여서 데모가 부르고. 그렇게 막걸리와 함께 시국 얘기하고. 

 

하나 덧붙이자면 당시에는 이대 앞으로 신촌에 조그마한 카페들이 유행이었죠. 지금은 예를 들어서 인디 뮤직 신이 있고 인디 레이블도 있고 하지만, 당시에는 음악 씬이 다 통기타 씬이거든요. 청바지에 통기타. 한창 저희들 아이돌이 트윈폴리오, 한대수, 양희은 선배님 이런 분들이었죠. 그런 포크 문화가 이어져서 우리 세대 때도 여전히 포크였죠. 

 

그 당시에는 어느 카페든 놀러 가면 꼭 한두 명 꼭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여기 가서 놀다가 저기 가서 친구 되고 옆에 가게 또 놀러가면 와 있고. 광석이(김광석)를 거기서 알게 됐어요. 나는 데뷔 전이었고 광석이는 이미 ‘거리에서’라는 노래로 히트를 알려진 가수였어요. 

 

- 정식 공연장이 아니라면 어떤 시스템으로 공연이 이뤄졌나요? 손님들이 직접 노래를 신청하는 방식인가요?

 

강산에 : 당시에는 내 곡이 없으니까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노래들을 부르면 같이 싱얼롱

같은 식으로 또 다 같이 따라 부르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는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다음에 이 친구 들어오면 이 노래를 불러줘야지’하면서 노래했는데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어? 노래하는 사람으로 되어있는 거예요. 정식 가수는 아닌데 손님들은 “그때 그 사람 어디 갔냐” 하면서 나를 찾는 거였죠. 본의 아니게 어느 날 노래하는 위치가 돼있더라고요. 그게 제가 처음 노래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죠. 

 

- 이후 충무로 ‘피에르’에서 오디션을 보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셨습니다.

 

강산에 : 민생고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 같이 어울려서 놀고 하는 그런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뭘 해야 될지 장래에 대한 건 안개 속이었죠. 87년도에 나름대로 신촌에서 앞날에 대한 막연함과 동시에 그냥 왔다갔다 하던 시절에 지금의 내 와이프를 만나게 됐는데. 그 계기로 89년도에 일본을 가게 돼요. 그게 또 저한테는 큰 문화적인 충격이 되어가지고 당시에 이십 몇 년 동안 보고 자랐던 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죠. ‘이건 뭐야’하면서.

 

- 그때부터 작사 작곡을 하기 시작했나요? 

 

: 그전에 나름 대학가요제 해볼까 도전도 해보고 나름 곡도 써봤지만 습작 수준이었어요. 두세 곡 해 보긴 해 봤는데 그 자체가 꼭 ‘그래 나는 뮤지션 해야겠다’ 이런 차원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일본 가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게 되고 삶에 대한, 라이프 스타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걸 보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식의 내가 참고할 만한 경험들이 많았어요. 흑백에서 컬러로 차원 이동하는 것 같은 충격이랄까요. 

 

그 당시 일본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대국이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받아들였죠. 세계 여러 아티스트들이 거기서 공연하고 이럴 때였는데 그런 경험이 없다가 거기 가서.‘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결심을 했고. ‘그럼 나도 내 얘기가 있어야 되겠네’하는 사고를 하게 되고 ‘그럼 내가 내 노래를 만들어야겠네’해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죠. 

 

때마침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 형이 음반유통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너 언제 오냐 나 좀 보자’하더라고요. 그러다 그 회사에서 음반을 제작했는데 ‘라구요’를 포함한 곡들이 들어간 제 데뷔 앨범이었지요. 

 

- 데뷔 후 ‘방송을 못 하게 돼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을 이어갔다’는 오해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뮤직 비즈니스에 대한 세상을 모르니까 ‘나는 공연 위주로 하는 뮤지션이 될 거야’라고 회사에 내 스타일을 얘기했죠. 그러니깐 뭐 그래서 라이브 위주로 하게 됐는데 당시에는 아무래도 라이브 공연 문화가 별로 없었어요. 대부분 방송위주지. 그 당시에 라이브를 하던 사람들이 대표적으로는 이승환, 전인권이 있었고요. 나는 ‘뮤지션은 라이브를 해야 돼’라고 생각해서 라이브를 고집했죠. 그러면서 대학로에 있는 여러 소극장 라이브를 고집하면서 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이름도 이상하고 룩스도 이상하고. 긴 머리에... 

 

대학교 축제 같은데도 가서 처음에는 내 이름이 별로 안 알려져 있으니까 그냥 앨범 가지고 무조건 갔어요. 초대 안 해줬지마는, 오픈 무대 두세 곡만 부르게 해달라. 음반 줄게. 이런 식으로 몇 번 돌았는데. 그게 알려지게 되고. 특이하니까 소문 소문에 방송국에서 찾아오게 됐어요. 당시 <인간시대>라는 프로였는데 처음에는 포맷이 너무 인간승리 같은 개념이라 ‘난 이런 거 싫다. 칙칙한 거 싫다’ 해서 한 번 거절했는데. 이 사람들이 이제 포맷을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첫 회에 최진실이 나갔다고 나를 그런 식으로 꼬시는 거죠. 

 

그래서 무조건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카메라만 일주일 쫓아다니게 해달라 그래서 뭐 나중에는 알았다고 오케이 했는데.  그게 나가고 나서 대중에게 폭발적으로 알려지게 된 거예요. 비닐하우스에 살고 노래도 희한하고 하니까. 우리 엄마 얘기 ‘라구요’라는 노래가 있다는 걸 알고 그걸 건드린 거지요. 엄마에 대한 얘기를 묻는데 나도 모르게 엄마 생각하니까 북받쳐가지고 했는데 그걸 다 찍은 거예요. 그게 내가 아마 동정표를 받았나 봐요. 

 

- 라이브 무대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강산에 : 당시에는 사실 이념적이었죠. 라이브의 매력이라는 자체를 느낄 겨를도 없었죠. ‘뮤지션’의 정의지. ‘민주주의’를 정의 내리듯이. 그래야 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지요. 그런 걸로 나의 자존감을 느끼고. 자의식이 그런 쪽에 강한 사람이었죠. 

 

-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강산에 씨의 MBC <인간 시대> 출연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산에 :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이런 거죠. 내가 일본에서 89년도부터 일 년 하고 3, 4개월 있었나. 그 정도 남짓해서 있다가 한국 왔는데 내가 이십몇 년을 자랐던 곳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유연하지 못하고 딱딱하고, 굉장히 꽉꽉 막혀있고, 그런 느낌이 드는 거예요. 당시에 치기 어린 마음에 촌스러운 거죠. 

 

그런데 나는 이제 이 또한 이 사람들이 단지 못 보고 못 듣고 몰라서 맛을 못 봤으니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이건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이해하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보는 이상한 눈초리나 시선을 보내도 당당했죠. 초창기 때는 대중교통 이용하니까, 긴 머리에 귀걸이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쳐다보죠. 그런데 그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죠. 그런 거보다는 ‘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하는 것들이 많았고요.

 

한참 3집 ‘태극기’ 부르고 이럴 때 나는 그 가사를 역설적으로 비판을 하는 식으로 썼단 말이에요. 다시는 노태우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사에 비 우(雨) 자를 써 가지고, ‘이 비가 오는데 어쩔 수 없지만 다시는 태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는 삼풍이 불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람이 부는데 어쩔 수 없지만’하는 식으로요.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태극기를 상징적으로 은유해서 가사를 썼거든요.

 

어느 날 그 당시에는 관료들의 세계를 보면, 부패하고 책임감 같은 게 없어서 관공서의 태극기가 꼬질꼬질하고 하얗게 안 꽂혀있고. 그런데 시청 앞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무표정하면서도 그냥 뭔가 세뇌돼서 바쁘고. 이런 사람들을 볼 때 내가 마치 저렇게 삐딱하게 걸린 태극기 같다. 꼭 이 삐딱함이 나랑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든 삐딱이다. 내가 스스로 삐딱한 게 좋으니까. 이런 걸 역설적으로 표현한 건데. 아이러니죠. 

 

그러고 났는데 기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부인이 일본 사람이라면서요. 왜 일본 사람이랑 결혼했어요?’ (웃음) ‘저는 일본이랑 결혼한 게 아니고요. 여자랑 결혼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가 일본인이거든요’ 그렇게 답하고 그랬지요.

 

- 혹시 방송 규제를 직접 받으신 적도 있나요? 

 

강산에 : 그건 제가 좀 알려지게 돼가지고 여러 방송을 나오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에는 옷차림에 대한 것도 규제가 심했어요. 뭐 하다못해 그 당시에는 제가 목걸이, 팔지, 아무튼 화려한 액세서리를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 것까지도 좀 제약이 들어오기도 했었어요. 머리를 묶어라. 뭐 하긴, 그렇죠. 당시에는 앨범을 내게 되면 ‘건전 가요’를 넣어야 됐어요. 

 

- 답답하셨겠군요.

 

강산에 : 네. 그리고 사전 심의가 있는데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죠. (웃음) 창작에서 이런 규율과 규제 속에서 통과를 해야만 낼 수 있다는 게 지금으로는 좀 상상이 안 가는 일이잖아요. 예를 들면, 그게 참 재미있는 게. 저는 당시에 살면서 뭔가 좀 세상이 너무 이렇게 ‘돈, 돈, 돈’ 하는 하지는 말자는 차원에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가사였는데, 심의 위원분들께서 ‘이거는 황금만능주의를 조장한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시고 가사가 심의를 안 낸 거예요. 

 

그래서 ‘이야~ 이게 심의가 안 난다면 이거 어떻게 해?’ 그런데 곡은 없는데 어떻게... 그래서 가사는 안 되고 그냥 그럼 멜로디라도 찍어서 내야 되겠다. 그래서 그냥 누가 이렇게 피아노로 멜로디만 ‘땅땅땅땅’ 그냥 냈어요. (웃음) 그래서 나중에 2집 앨범 때 제목만 바꿔 봤어요. 

 

- 어떻게 바꾸셨어요? 

 

강산에 : ‘문제’. ‘이게 문제네. 도저히 문제야’. (웃음) 제목을 돈이라고 했다고 그래서 내가 제목을 문제로 바꾸고 그 다음에 편곡을 했어요. 그러니까 가사는 똑같아요 ‘돈’이 ‘문제’로 바뀌었을 뿐. 통과했어요. (웃음) 문제라는 곡으로 다시 재연을 했죠. 기어코 내가 하고 싶어가지고. 

 

나중에는 그게 우리가... 특히 당시에 음악 칼럼 쓰시고 평론하시는 강헌 씨가 중심이 돼서 정태춘 선배님이랑 또 여러 뮤지션들이 합심해서 사전 심의 철폐 운동을 했었죠. 그러니까 저도 거기에 참여하고. 해냈을 땐 정말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온 것처럼 신났죠. (웃음) 

 

-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하시던 시절 분위기를 알고 싶습니다.

 

강산에 : 저에게 있어서 대학로는 88 올림픽 이전의 대학로라서 뭐랄까, 오픈된 거리도 만들고 새로운 문화들이 막 들어올 때였죠. 그 당시에 군데군데 소극장들이, 특히 연극 위주의 극장들이 많이 생기고 그런 문화 활동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저도 이제 청춘이었으니까 (웃음) 당시에 설레는 그런 마음들이 있었고. 그때는 데뷔 전이었습니다마는 우연찮게 어떤 선배의 도움으로 지금의 동아리와 비슷한 크루들과 공연도 하게 됐고. 쉽게 얘기하면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당시에 대학로 소극장을 중심으로 해서 연극, 그리고 라이브 공연, 요즘 얘기로 버스킹 같은 것들이 확산됐어요. 당시 일본에서는 그런 문화가 대중화 돼 있을 때였거든요. 하라주쿠 같은 데서 젊은이들이 모여 그러한 문화 활동을 했고. 우리나라도 그 시점부터 거리에서 오픈 마이크 무대로 마음껏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시작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 대학로에서 첫 공연을 기억하시나요?

 

강산에 : 그러니까... 대학로에서 했던 첫 공연은 정아트홀이라고, 지금은 그 극장이 없어진 걸로 아는데 뒷쪽 자리는 머리가 닿을 정도로 조그마한 소극장이었어요. (웃음) 그게 93년쯤. 어느 계절인지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 (손뼉 짝) 제가 그 당시 귤을 사가지고 관객들에게 나눠줬으니까 아마 초겨울쯤 됐을 것 같네요. 

 

- 그 공연에 온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요?

 

강산에 : 저는 당시에는 오로지 그냥... (웃음) 밀어붙인다. 아는 건 없고 경험도 없고 그냥 무데뽀였어요. 저는 일본에서 많은 해외 뮤지션들이나 다양한 뮤지션들 공연을 보고 제가 감동받으면서 뮤지션의 길을 결심을 했거든요. 당시에 U2 같은 사람들 공연 보고 저도 꿈을... 그러니까 어떤 판타지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웃음) 

 

뭐 무대 경험도 없는 데다가 뭐 요즘처럼 어렸을 때 스쿨 밴드 해가지고 라이브클럽에서 숙련된 그런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앨범 공연을 하자니까 본 거는 있는데 그거를 소화하기는 좀 힘들고. 관객과의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서툴고. 그러니까 그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서 그냥 뭐 어떻게 해보는데 내가 내 자신한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공기가 싸하잖아요. 

 

그래 가지고 나도 모르게 뭐 이렇게 관객들한테 반말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뭐 많지도 않은 관객 앞에서 이렇게 내가 이렇게 두려워하고 속된 말로 ‘쫄아있는’ 내 모습이 내가 그리고 상상한 그런 뮤지션이 아니라는 말이죠. (웃음) 그러니까 나는 막 그걸 관객들한테 화풀이를 한 거죠. 

 

‘야, 내가 뭐 잘하면 얼마나 잘한다고. 그런 잘한 거 들을 거면 CD 사서 들으세요. 같이 놀자!’ 뭐 이렇게 하면서 제가 이게 반항기인가 뭔가... 그때부터 공연에서 반말을 하게 됐어요. 그게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는데 차츰차츰 먹히더라고요. 관객들도 좋아하고. 나중에는 그게 이제 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아, 강산에 공연 가면 강산에가 반말한다’ (웃음) 그리고 이제 해가 거듭될수록, 저의 마니아들이 생기고 나서부터 그때는 다 반말이죠. ‘준비됐나!’, ‘됐다! ’그런 현장이 좋고 제가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어떤 틀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니까. 물론 이제 그 자체를 좀 거북해하고 어색해하는 분들도 더러 계셨지만 차츰차츰 저한테 세뇌가 되기 시작하는 거죠. 

 

- (웃음) 그때 어떤 곡들을 불렀나요?

 

강산에 : 그때는 뭐 제가 데뷔곡이 여덟 곡밖에 없는데요. (웃음) 그래서 커버 곡도 했었죠. 그러니까 제가 2집, 3집 내고 나서야 래퍼토리가... (웃음) 단독 공연을 채울 수 있게 됐을 때부터는 커버를 안 했는데, 데뷔 1집 내고 나서는 뭐 곡을 채워야 되잖아요. 처음 단독 공연하게 되면 14곡에서 한 16곡을 해야 되는데 그 곡을 맞추려면 커버 곡을 하는 거죠. 

 

- 소극장 공연에 집중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강산에 : 특별히 소극장이라는 어떤 차원이 아니었던 것 같고, 당시 공연할 수 있는 장소가 방송국이 아니면 대안이 별로 없었죠. 그런데 방송국이라는 것은 그 공연을 할 수 있는 장소라든가 여러 가지 또 규제도 많았고. 당시에는 이제 문화적인 트렌드가 소극장이 생겨날 즈음이었는데 그런 공간이 내가 필요했던 건였기 때문에 소극장 공연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게 대본에 있는 거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게 라이브 공연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극장 라이브를 고집했던 것 같아요. 

 

- 당시 어떤 공연장에서 많이 공연하셨나요?

 

강산에 : 주로 ‘라이브’ 극장이 아니었나? 라이브가 나중에 2관도 생겼는데 처음에는 라이브 1관이었던 것 같고. 학전에서도 좀 했죠. 학전도 좀 하고 그다음에 하여튼 당시에는 뭐 대학로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소극장에서 많이 했죠. 나중에 제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돼서는 좀 큰 극장에서도 하게 되고 그랬는데, 거기 큰 무대로 옮겨 가기 전까지는 대학로에서 많이 했었죠. 왜냐하면 대학로에 소극장이 많았으니까. 거기가 낙산 소극장. 지금은 없어졌을 거예요. 아! 그 소극장은 제가 왜 기억하냐면 거기서 공연할 때부터 티켓 매진이 되기 시작했을 거예요. (웃음) 그래서 저한테는 기억에 남죠. 

 

- 당시 대학가에서도 입소문이 많이 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강산에 : 당시 제가 라이브를 고집을 하고 그러니까 이제 처음에 대학가를 찾아갔어요. 당연히 이름도 없으니까 초대하지 않았지만. 그냥 LP 들고 대학가 방송국에 일단 그것 좀 드리고 오프닝 무대 두 곡만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이제 본 축제 행사 전에 그냥 무대에 서게 해 준 거였죠 처음에는 그러다가 이후로 이제 뭐 그런 특이함 때문에 저를 기억해 주시고 어느 날 정식으로 초대로 가게 되고. 이런 게 한꺼번에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지고, 또 라이브는 라이브대로 알려지고, 층이 생기고. 너무 제 자랑을 하는 것 같은데. (멋쩍은 웃음) 그러고 나서 어느 날부터 ‘대학교 축제 무조건 0순위’ 이렇게 됐더라고요. 그래서 뭐 저는 대학교 찾아다니는 게 되게 재미있었어요.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강산에 SNS]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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