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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3
by 우정호

'대학로 소극장 전성시대' 추억하는 강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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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13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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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 강산에 씨 이외에 라이브 활동 위주로 공연하던 가수들이 또 있었나요?

 

강산에 : 제가 데뷔하고 나서 라이브를 하고 있던 가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제가 기억하는 정도는 그러니까 이승환 씨, 그리고 전인권 선배님, 들국화죠. 그리고 김광석. 손에 꼽을 정도예요, 이렇게. 그러니까 그 당시 라이브 활동 위주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요.

 

- 대학로 소극장에 관객들이 다 못 들어갈 정도로 매진 사례가 이어진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산에 : 그렇죠. 그러니까 큰 데 매진되는 것도 재미있는데 소극장은 당시에 일주일 내내 공연하거든요. 당시에는 또 주말은 2회 공연이에요. 타산이 맞아야 되니까. 저는 또 고집이 있어가지고 ‘1일 1회 아니면 안 한다’그러는데 이제 타협점을 좀 찾아야 되니까. ‘OK, 알았다. 그럼 주말은 내가 2회 할게’그랬죠. 그래서 일주일 공연하면 토, 일은 2회 공연, 그리고 나머지 요일도 공연하는데 이게 다 매진 아닙니까? 사람들 막 줄 서 있고 이런 게 기분이 너무 막... 와, 이게 굳이 이러고. 그러니까 힘든지도 모르고 열심히 하죠. 그런데 당시에는 앵콜 공연을 현장에 오는 사람들 통해서 그냥 얘기하는 거예요. ‘앵콜 공연 3일 연장’ 이렇게. (웃음) 그래서 원래 일주일 공연이었는데 3일 더 연장하기도 했고. 그랬던 기억이 있네요. 

 

- 소극장에서 가장 관객이 많았을 땐 어떤 분위기였나요?

 

강산에 : 다 그냥 코앞에 있는 거죠, 뭐 이렇게. 그냥 침 튀기고. (웃음) 그래도 뭐 좋다고 하니까. 나도 뭐 당시에는 그 세계에 빠져 있을 때니까. 또 겁도 없을 때고 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웃음) 

 

- 그 당시 방송에서 가장 반향이 컸던 서태지와 아이들도 안 부러울 정도였겠군요.

 

강산에 : 아, 몰라요. 관심 없었어요. 저는 남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웃음) 나는 그냥 나. 뭐 예를 들어서 내가 나의 기분 좋음, 나의 행복함, 혹은 나의 괴로움 이런데 관심이 있었지. 나중에 세상, 사회에 대한 관심도 가지게 되니까 그럴수록 자꾸 화만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데뷔 앨범을 ‘볼륨 0’(‘강산에 Vol.0’ - 편집자 주) 이렇게 했던 것도 그게 어디에서 온 건지 모르겠으나 앨범 내는 뮤지션들 보면 ‘볼륨 1’ 이렇게 하잖아요. 저도 따라 했죠. 그래서 ‘아, 이게 처음 내는 게 ’볼륨 1‘인가 보다’그랬는데 저는 그렇게 안 했어요. 데뷔할 때 나름대로 생각한 게 왜 세상은 시작을 왜 1부터 시작할까? 왜 ‘1, 2, 3, 4’ 하지? 아무것도 없이 원래 시작하는 거 아닌가? (웃음) 왜 0부터는 왜 안 할까. ‘0, 1, 2, 3, 4’ 안 하고. 그런 맨날 쓸데없는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시작은 0부터 했어요. 뭐 빈손으로 나와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런 의미도 있고 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의미도 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로. 그리고 또 나는 뭐 독특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볼륨 제로(Vol.0’’라고 했어요. 그런데 앨범 타이틀은 뭘로 할까? 생각이 안 나. 그래서 일단 볼륨 제로 끝. 그다음 이제 2집이 되면 ‘볼륨 1’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앨범은 ‘볼륨 1’로 했고, 제목은 ‘나는 사춘기’였어요. 아니, 그때는 제가 30대 중반인데 그 나이에 내가 무슨 사춘기를 겪겠어. 그러니까 스스로 사회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규제... 기성세대들에 대한, 왜 이런 환경 속에 우리를 살게 만드노. (웃음) 막 뭔가 이렇게 일어나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더 심해지면서 3집은 ‘삐따기’ (웃음) 나는 막 그냥 삐뚤어지고 말 테야, 이런 반항심으로. 그게 ‘볼륨 2’죠. 

 

또 여기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제가 다섯 번째 앨범이 나왔는데 5집이니까 볼륨은 4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을 많이 헷갈리게 했는데. 앨범 재킷 디자인에 대문자 ‘Vol.4’ 쓰고 그다음에 슬래시하고 5. ‘Vol. 4/5 ZIP’ 볼륨 4에 5집이라는 이야기죠. 나름대로. 디자이너가 그렇게 했는데. 그러고 나서 기자가 인터뷰하러 왔거든요. 그래서 지금 방금처럼 ‘0집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게 5집입니다’ 설명했는데.... 나중에 기사가 ‘4.5집’으로 나온 거예요.

 

- 아직 4집도 안 냈는데 4.5집. (웃음) 

 

강산에 : 네. 이거 누군가가 한번 찾아보면 재미있는 기록일 수 있으니까. ‘쩜 5집’이라는 게 나오기 시작한 건 아마... (웃음) 어쩌면 본의 아니게 저로 인해서 생긴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 개념이 없었는데 그냥 ‘1, 2, 3, 4, 5’집이지 거기에 4.5집이 어디 나와요. 그러니까 이제 보통 아이돌 회사에서 ‘와, 이거 너무 좋은데?’ 그래서 1.5집 나오고 갑자기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 사실은 기자의 실수인데. (웃음)

 

강산에 : 그러니까. 그런데 이제 제가 빌미를 제공한 거죠. (웃음) 원래는 0부터 시작해가지고 사람들이 헷갈리기 시작한 거 아니에요. 

 

- 대학로 시절 학전은 어떤 분위기였나요? 공연도 하셨나요?

 

강산에 : 나도 했지만 광석이가 많이 했었고. 지하인데. (한숨) 하여튼 무지 더웠던가. (웃음) 그리고 무대는 그때그때마다 옮기고 고치니까. 또 당시에는 제가 이렇게 머리가 길었고 패션이 주로 이제 가죽 재킷을 입었을 때였어요. 당시는 뭐 ‘락앤롤!’, ‘록은 이런 거다’ 이럴 때였으니까. 막 더워도 가죽 재킷이었죠. 그러다 보니까 공연을 하면 난리 나죠. 땀에... 어느 정도 공연하다 보면 저는 그 관객들 스탠딩 시켰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너무들 자유로운데 그 당시에는 한국 관객들이, 대중들이 되게 못 놀았어요. 어떻게든 사람들을 놀게 해 주고 싶은데 그럼 내가 놀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미친 듯이 놀았죠. 같이 춤추고 놀고. 그러다 보니 공연 끝나고 옷을 이렇게 짜면 물이 정말 가득 떨어질 정도로 땀을 흘리고. 그래야만 또 공연한 것 같고. 

 

덥고 사람 많이 왔고 미친 듯이 노래했고. 그때는 뭐 그... 뭐라 그럽니까? (웃음) 뭐 그냥 믿을 거는 힘밖에 없었으니까. (웃음) 그래서 힘으로 노래하고 막... ‘다 죽었어!’ 이러고. 

 

- 학전 무대에 선다는 것은 뮤지션들에게 특별한 의미였나요?

 

강산에 : 저는 그때는 잘 몰랐죠. 지금은 아무래도 구심점인 김민기 선생님이 계신다는 거. 아마 그 인물 때문에 상징적일 거고, 물론 김민기 선생님 개인적으로도 원래 연극 연출, 뮤지컬 연출하셨잖아요. 연출 무대 많이 하시고. 아울러서 또 선생님 주변에, 형님 주변에 이렇게 연관되어 있는 또 많은 배우들 혹은 뮤지션들이 모이고. 

 

그게 또 다른 면을 보면 한국 문화의 어떤 트렌드가 바뀌는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인물들이 많잖아요. 그게 다 연관성이 있다 보니까. 그래서 아마 학전이라는 곳은 여타의 다른 소극장처럼 그냥 단순한 비즈니스에 의해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장소가 아니고, 문화적으로 지금도 뭔가 상징적인 게 있는 거죠. 그런 상징성으로 의미 있는 장소로 알려지게 된 거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학전의 상징 김민기 씨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시나요?

 

강산에 : 처음 뵀을 때는 학전 공연 때문에 뵌 건 아니고. 예전에 지휘자 정명훈 씨가 있었는데 그 집안의 정명훈 씨 형이 정명근 씨라고 뮤지컬 시장을 처음 붐을 일으킨 사람이에요. 지금은 그 일을 안 하시지만. 정명근 씨가 기획을 해서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어린이를 위한 환경극을 제작을 했는데 그래서 거기에 연출을 김민기 씨한테 맡기고, 지휘자를 정명훈 씨가 하고, 거기 출연 가수들이 한영애, 나 등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때 그 기획공연 때문에 김민기 선생님과 출연자와 연출자로 관계로 처음 인사드리게 된 거죠. 

 

- 당시 김민기 씨는 어떤 존재였나요?

 

강산에 : 당시 저에게는 뭐라 그럴까. 제 청춘의 신화적인 분이라서. 데모하던 친구들, 그중에 행방불명된 친구들, 선배 누구 할 거 없이 전부 다 김민기 노래를 불렀으니까. 그리고 금지곡과 관련된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일종의 신화가 크게 입력돼있는 상태였죠. 그렇게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싶은 사람’을 실제로 만난다? 가문의 영광이었죠.  

 

그러다가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차츰차츰 술자리에서도 뵙게 되고. ‘우리 선생님 아이고 우리 형님’ 하는 사이가 됐죠. 그분이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은 음악으로서 뭐라 그럴까, 그 당시 몸으로 민주화를 위해서 항쟁했던 청춘들에게는 어마어마한 힘을 준 뮤지션이죠. 기둥 같은. 

 

- 김민기 씨가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강산에 : 그러니까 그분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분이 흘러오신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여러 가지들이 개개인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김민기 형님의 음악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아침이슬’은 제 20대를 지탱해준 음악이거든요. 당시에 제 친구들 또한 운동권 애들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 덕분에 또 알게 된 음악이었지만, 그래서 뭐 당시에 김민기 형님을 비롯해서 한대수 선생님... 또 많죠. 여하튼 암울했던 우리 시기에 청춘들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던 그런 인물이시니까, 음악으로써. 우리 세대에서는 되게 상징적인 분이죠. 

 

- 학전에서 김광석 씨와의 추억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강산에 : 친하죠. 친했죠. 그러니까 우리는 당시에는 이대 앞, 신촌 이런 데 카페 문화인데. 그냥 그러니까 여기저기 놀러 다니면 한 번은 만나요, 어디에선가. (웃음) 뭐 술 먹으면서 노래하고. 당시에 이제 김광석 씨는 유명한 사람이었고. (노래) 거리에~ (노래 끝) ‘거리에서’인가? 그게 히트하고 있을 때니까. 저는 뭐 그냥 무명의 그냥 동네 백수고. 그런 공간들에서 만나서 연배도 비슷하니까 뭐 그래서 제가 좀 술을 주로 얻어먹었죠. (웃음) 

 

저는 아마추어였지만 다른 사람 노래 커버하고 이럴 때니까. 서로 한 곡 하면 한 곡 하고 뭐 이러면서 친하게 됐는데, 나중에 가수로 데뷔하게 돼서 더 친하게 됐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고마운 건, 당시 내가 아마추어였지만 힘을 모아서 공연을 하게 되면 게스트 요청을 했는데 유명인이 무명의 공연에 선뜻 서 주고... 그래서 김광석 보러 사람들 공연 많이 왔죠. 그런 친구였죠. 

 

- 김광석 씨는 인간성도 굉장히 훌륭했다고 들었습니다.

 

강산에 : 네. 그러니까 본인의 어떤 내면의 괴로움은 제가 못 알아들어서 미안하지만. 늘 그렇게... 나한테는 좋은 친구였어요. 가끔 다른 얘기는 안 하고 음악에 대한 자기의 고민, 그런 거는 술먹고 한두 번 저한테 얘기했던 걸로. 기억나요. 기억나고, 음악적인 고민은 얘기했던 거 기억나는데 그 외에 이제 괴로움은 일적인 얘기 말고는 항상 ‘흐흐’ 이렇게 웃는 스타일이고, 술로 이렇게 잊어버리는 스타일이지 않았을까. 

 

- 김광석 씨는 학전에서만 공연을 무려 1,000회 하셨다고요. 

 

강산에 : 그러니까요. (웃음) 당시에 ‘1,000회... 뭐야? 어떻게 그걸 해? 이야. 그런데 그게 1,000회를 하는데 사람들이 오나?’ 이랬는데 이 친구가 나를 게스트로 몇 번 불렀거든요. 갔죠. 뒤에서 이제 이렇게 보기도 하고. 객석에 저쪽에 가서 보는데 말도 잘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웃음) 공연이 재미있더라고요. 

 

저는... 물론 당연히 노래는 잘하죠. 노래에 흡입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이게 상당히 많이 나아진 건데. (웃음) 옛날에 제가 말을 못 했거든요, 이 어눌함 때문에. ‘에..’. 알죠? 뭐 이런 스타일이었으니까. 얼마나 관객들이 답답했겠어요. 그런데 광석이 공연을 보고 어떻게 조근조근하게 이야기할 거 다 하는데 사람들이 다 웃고 사람들이 흡입력 있게 사람들이 왔다 갔다하고. 그러니까 1,000회 공연할 수 있는 거죠. 

 

- 한편, 예전 인터뷰에서 강산에 씨는 음악적 감수성에 큰 영향을 미친 노래로 조동진의 ‘제비꽃’을 꼽았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도 알고 싶습니다.

 

강산에 : 제 음악적인 감수성엔 당연히 조동진 씨의 ‘제비꽃’도 포함하는 거죠. 제가 이제 리메이크 앨범을 한번 냈어요. 당시에 선배님들의 음악을 골랐는데 그중에 한 분이시죠. 제가 한대수 선배님, 그리고 김창완 선배님, 그다음에 조동진 선배님, 이정선 선배님. 그다음에 누구 있더라? 전인권 형님.... 기본적으로 울림을 줬던 노래들이고. 그걸 내가 하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맛으로. 이제 거기까지 생각해가지고 고른 곡들이죠. 

 

- 조동진 씨의 ‘제비꽃’은 왜 울림을 줬나요? 

 

강산에 : 노랫말이죠. 멜로디와. 그리고 결국에는 예술이라는 자체가 모든 게 표현의 하나의 결과물이잖아요. 멜로디와 어우러진 그 노랫말이, 표현된 노랫말의 터치. 저를 터치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찡하게 오잖아요. 그게 뭐랄까. 예를 들어서 존레논의 이매진 들으면 뒤통수 한 대 맞은 것 같아요. 그런 식의 큰 충격으로 다가온 거죠. 

 

- 조동진 씨를 후배들이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강산에 : 제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울고 있나요~’(행복한 사람) 하면 진짜 울었어요. (웃음) 그러니까 뭐 음악을 내가 전문적으로 들을 때가 아니고, 아마 뭔가 되게 외로웠었나 보죠. 어렸을 때 그게 위로가 많이 되더라고요. (노래) 울고 있나요~ 당신 울고 있나요~ 행복한 사람~ 아직도~ (노래 끝) 노래에 마음이 있으니까 위로를 받는 거죠. 음악이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거더라고요. 

 

 

[사진 출처=강산에 SNS]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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