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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2
by 우정호

김민기가 남긴 ‘대한민국 청년문화’라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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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1-22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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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학전은 대중음악, 연극, 뮤지컬, 아동극을 아우르며 대한민국 문화 형성의 지지대 역할을 해왔다. 3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수장은 1970년대 한국 가요사를 풍성하게 만든 청년 포크 문화의 선도자 김민기다. 세월이 흘러 그의 이름 석 자는 학전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그 빛나는 영향력으로 인해 국가가 두려워한 이름이기도 했다. ‘깨져 본 놈들을 위한’ 노래를 부른 상록수 같은 투사였기에.

 

 

(아카이브 K는 김민기와 2019년 12월 인터뷰했다.)  

 

 

- 김민기 선생님께선 1970년대 대중문화를 선도한 ‘대학생 통기타 문화’의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민기 : 음악 중에 클래식은 선수들이 하는 그런 거고, 대중음악이 모두의 음악이라고 봐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어떤 장르가 됐건 하나의 틀이 그렇게 완성이 됐다거나 그런 모습을 갖췄다고 하면 새로운 형식이 탄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60년대 말이라고 하면, 소위 대중음악의 어떤 틀이 ‘이봉조 학당’, ‘길옥윤 학당’처럼 문화 계파들이 갖춰진 완성을 한때란 말이에요. 작사자가 있고, 작곡자가 있고, 밴드 마스터 이봉조 씨는 색소폰을 했고, 길옥윤 씨는 클래식을 하고. 가수가 되려는 사람이 시골에서 땅 팔고 뭐 팔고 해가지고 올라와서 작곡가 선생님, 밴드 마스터한테 돈 드리고 뭐 드리고... 그러면서 산업 형태로 완성이 됐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새로운 형식이 나타난 게 통기타예요. 이전의 완성된 체계와 다르게 새로운 상상력을 가진 젊은 아이들이 통기타라는 것을 통해 작사건 작곡이건 원하는 대로 새로운 포맷을 갖추게 된단 말이에요. 그전에는 가수 밴드라는 거대한 체계로 대중음악이 다 세팅이 돼왔는데, 통기타라는 것이 마치 젊은 애들한텐 개인 화기나 소총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거지요. 그러니까 통기타 하나 가지고 하고 싶은 대로들 쏘다니기 시작한 거죠. 이걸로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한국 대중음악의 판이 바뀌기 시작한 거고. 그래서 그 당시에 청년 문화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우리 대학 다닐 땐 ‘기타 못 치면 간첩이다’ 그런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대중음악의 큰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고, 70년대부터 통기타들이 몇 대가 같이 하면서 지네들끼리도 그룹사운드도 만들고. 그러면서 기존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뭐 그러면서 이제 그런 거에 또 많은 영향을 줬던 게, AFK라는 주한미군방송을 통해서 6, 70년대 팝송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 들어와 있던 뽕짝하고 음악이 완전 부딪히는 거지. 이봉조 씨라던가 주류 음악가들 것도 다 일본에서 내려온 그 연장이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음악 분위기가 딱 바뀌고, 대학생들이 전부 기타를 다 치고 그러면서 자기가 만들고 자가생산하는 거지. 그렇게 60년대 말, 70년대 초 한국 대중음악 분위기는 여러 가지 뽕짝도 존재하고 미국 팝송도 공존했지요.

 

- 대학로 ‘학전’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도 알고 싶습니다.

 

김민기 : 91년에 학전을 열었는데 그 해에 서태지가 나왔어요. 그러면서 미디어들이 많이 발달하다 보니까 음악이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그게 지금 BTS까지 간 거지. 그러면서 그전까지 통기타 또는 지네들끼리 그룹사운드 하면서 자가 생산해냈던 젊은 음악이 하루아침에 쓰나미가 되면서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서태지가 대단한 거지. 그래서 학전 열면서 떨거지들 노래하고 싶으면 여기 와서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통기타 만지고 이런 애들이 이렇게 대거 몰려온 거지. 여기서 좀 주목할 만한 건, 그 이전까지는 일반적인 대중음악이 TV나 미디어에 나오는 거 말고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장이라고는 술집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술집에서 술 먹는 사람들 여흥으로 음악을 들려줬던 거지요. 그래서 그때까지는 술 먹는 사람들 비위를 맞추려고 하니까 딱 거기 취향에 맞게끔 했지요.

 

그리고 보통 ‘스테이지’라는 말을 썼어요. 술집에서 공연을 하는데 한 팀이 긴 시간을 하면 지루하니까 길어봤자 20~30분씩 하는데 그걸 ‘첫 번째 스테이지, 두 번째 스테이지’ 이런 식으로. 그런데 학전은 극장이잖아요 술집이 아니라. 그래서 한 시간 반, 두 시간 이렇게 자기가 전체 구성을 짜야 하는 거예요. 이전 공연 문화처럼 술 먹는 사람들 비위 맞추는 여흥으로써의 스테이지 무대가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콘서트 문화가 나오기 시작한 거지요. 전체 구성도 자기가 짜야 하고 심각한 노래가 들어갈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대중음악 콘서트의 발원지라고 봐야죠 여기를. 아마 애들이 자꾸 여기가 고향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그런 차이 때문일 거예요. 

 

- 첫 번째 공연에 사물놀이가 펼쳐지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대중음악 가수 중엔 누가 첫 공연을 했나요?

 

김민기 : 학전 개관식 때 김덕수 사물놀이패가 공연했어요. 그땐 온갖 장르들이 다 했으니까 뭐... 대중음악 가수 중에 누가 첫 번째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뭐 오만 놈들이 다 와서 하는데 그러다가 김광석이가 대박이 터진 거지요.

 

- 학전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들의 기준이 있었나요?

 

김민기 : 뭐 기준이 있었겠어요. 오갈 데 없는 놈들 와서 하라고 했지. 그러다가 이제 광석이가 대박이 났는데, 그때는 예매 같은 시스템이 안 되어 있을 때니까 관객들이 여기서부터 대학로 큰 길까지 땡볕에서 줄 서서 기다리곤 했지요. 그리고 극장 문짝 다 뜯어내고 벽에 붙어서 관객들이 보기도 했을 때니까. 들국화 애들도 여기서 여러 번 하고. 그렇게 되니까 학전만 가지고는 공연장이 모자라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쪽에 ‘라이브’라는 소극장이 또 생겼어요.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흐름을 보기로는, 그게 홍대라는 걸로 넘어간 거 같아요. 분위기가.

 

- 김광석 씨와 인연이 닿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요? “광석이는 노래를 참 못했어”라고 하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김민기: 84년인가? 노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그 해에 노래극 ‘개똥이’라는 걸 시작했어요. 그때 광석이를 그 팀에다 끼워 넣은 거죠. 그랬는데 그게 무산이 돼서 ‘노찾사’라는 판을 만들었어요. 

 

- 노래 운동을 하던 청년들이 모여 만들어진 게 ‘노찾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민기 : 그런데 그 이전으로 올라가게 되면 78년에 ‘공장의 불빛’이라는 걸 당시로서는 아주 죽을 각오를 하고 했었지요. 77년에 군대 제대하고 보니까 대학에서 소위 노래 운동하는 파들이 몇 군데가 생겼더라고요. 서울대에 ‘메아리’가 생기고, 이대에 ‘한소리’가 생기고... 보니까 그렇게들 꿍얼꿍얼하면서 맨날 내 노래를 부르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걔네들을 좀 규합할 생각으로 메아리와 경동교회 빛바람 등등 노래패들과 함께 ‘공장의 불빛’을 만들었어요. 그 이후에 나는 농촌으로 내려갔다 집에 불이 나서 서울로 다시 올라왔고. 노래패들을 어떻게 추슬러 보려고 개똥이를 준비했는데, 역시 다 무산되가지고 걔네들을 모아 음반을 제작했죠. 그게 노찾사 1집.

 

- 당시 정권에 의해 ‘개똥이’가 무산됐는데 노찾사 앨범은 발매될 수 있었나요?

 

김민기 : 일부러 제 이름을 숨기고, 노래들 중에서도 약간 좀 마일드한 것들로 넣었죠. 그때 LP로 만드니까 음반 한 장에 들어가 봤자 열 곡 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내가 신청을 70곡인가 했거든요. 10곡이라도 건지려고. 노찾사 1집 앨범 뒷면에 보면 제작자 이름이 ‘민기형’으로 나와 있어요. ‘김민기’라고 할 수 없으니까.

 

- 제작자 이름이 ‘민기형’이라니 굉장한 위트군요.

 

김민기 : 그 당시에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전부다 ‘형’이라고 호칭하곤 했거든요. 그래서 누가 날 부를 때도 ‘민기형’이라고 하니까 이름을 그렇게 써넣었죠. 

 

- 그런데 김광석 씨가 처음 노래하겠다고 김민기 씨를 찾아왔을 땐 왜 ‘노래를 못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셨나요?

 

김민기 : 노래 못해요 걔... 꼭 좀 높은 음 가면 삑사리 나고... 그런데 걔 미덕이 내가 자꾸 했던 이야기들을 듣고 그렇게 하더라고요. 그땐 젊은 애들, 소위 통기타 들고 노래하는 싱어 송 라이터들이 쏟아진 거잖아요. 그런데 다들 지껏만(자작곡) 부르려고 그랬어요. 걔(김광석)도 뭐 지께 여러 곡이 있었지만 ‘그러지 마라. 다른 노래 좋은 거 있으면 가져다 불러라’ 이렇게 얘기했더니 나중에 래퍼토리가 풍부해져가지고. 광석이가 그렇게 대중성을 띨 수가 있었던 거죠.

 

- 그렇게 김광석 씨는 학전에 노래비가 세워질 정도로 큰 아티스트가 됐지요.

 

김민기 : 광석이는 레퍼토리가 풍부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작곡한 좋은 노래를 많이 불렀고. 광석이 대표곡들이 걔 자작곡이 아니에요. 근데 다른 사람들이 쓴 노래 부르는데 자기가 마음을 연 거죠. 이건 뭐 곁다리 이야기인데, 학전 열기 바로 전에 한겨레에서 주최한 노래 공모로 ‘이등병의 편지’가 녹음됐는데 그 앨범에선 전인권이가 불렀어요. 그래서 앨범이 나오고 전국 투어를 가는데 멤버들이 코러스는 광석이하고 이승환, 건반 치는 주자는 김형석이었어요.

 

그런데 인권이가 못 가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투어 가면 음반에 나온 곡을 전부다 해야 되는데. 그래서 코러스 하던 광석이가 ‘이등병의 편지’를 부른 거예요. 그러니까 인권이가 투어를 안 가가지고 그게 광석이 노래가 된 거지요.

 

- 포크의 이미지가 강한 학전에서 록밴드로서 이미지가 강한 전인권 씨와 들국화가 공연했다는 점이 조금 신기하기도 하네요. 

 

김민기 : 아까 말씀드렸듯이 70년대 초반에 통기타가 젊은 애들의 무기가 되면서 들국화도 그런 계기로 결성된 거였지요. 서로 노래도 만들어보고 그러다 한두 놈이 그렇게 만나서 그룹이 되고. 그래서 처음에 통기타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 들국화가 처음부터 록을 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니었군요.

 

김민기 : 그렇죠. 젊은 애들이 그 당시의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창작에 가미하고, 그렇게 서로 그룹이 돼서 만나고 그렇게 된 거죠. 이장희도 마찬가지고. 그 출발이 다 통기타에요.

 

- 학전 이전에 포크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공간이 YWCA의 ‘청개구리’였다고 들었습니다. 해외 곡들을 통기타로 부르던 당시 문화에서 최초로 통기타 음악 자작곡을 내신 게 김민기 선생님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김민기 : 그렇죠. 그렇게 봐야지. 그게 굉장히... 좀 반향이 컸어요. 그전까지 내 노래는 쑥스러워서 안 하고 밥 딜런 노래도 부르고 뭐 그러다가 그때 ‘친구’를 처음 불렀지요.

 

- 자작곡을 부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김민기 : 뭐, (청개구리 홀에서) 이백천 씨가 그랬던 거. 이백천 씨하고 최경수 씨가 사회를 주로 봤었는데 깐족깐족 약 올리더라고. 누가 쓴 걸 봤는데, 그때 이백천 씨가 사회를 보면서 영어를 섞어 쓰니까 내가 ‘야지’를 놨대요. 나도 기억은 안 나는데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가 그쪽에 ‘영어 빼면 말 못 하냐’고 그랬더니 ‘그럼 넌 왜 영어 노래를 하냐’그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다음에 가서 나도 이런 노래 있다고... ‘친구’는 고등학교 때 만들었고, 청개구리에서 그 일화는 대학 시절이었지만. 그 양반 기억으로는 그렇대요.

 

- 고등학교 때부터 작곡을 하신 건가요?

 

김민기 : 그냥 뭐 작곡이라고 해서 했겠어요. 그냥 흥얼흥얼 만들어 본 거지. 그런데 내가 69학번인데 71년에 음반을 냈거든요? 그 앨범 첫 곡이 ‘친구’예요. 청개구리 일화는 그보다 더 전이지.

 

- 어떤 계기로 청개구리에 처음 발을 들이시게 됐나요?

 

김민기 : 내가 69년에 대학 막 입학했는데, 그때 내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임문일이라는 친구가 CBS에서 팝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그 당시 젊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죠. 희은이(양희은)는 우리보다 한 학년 아래였는데, 한번은 문일이가 희은이를 데리고 와 가지고 ‘얘가 노래를 잘하는데 이걸로 먹고살아야 한다’그래서 내가 걔 기타 반주를 하기 시작했어요. 

 

- 당시 선생님 기타 실력이 유명했다고 후배 뮤지션 분들께서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김민기 : 그 당시에는 내가 클래식 기타로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한국 일인자였으니까. 그래서 희은이 노래 반주를 해주다 보니까 미국 팝송들을 알게 된 거였고, 그러다 보니 밥 딜런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희은이 노래 반주해주면서 나도 밥 딜런 노래를 부르다가 ‘나도 내 노래 있어’하면서 ‘친구’를 처음으로 해봤던 거죠.

 

- ‘청개구리’ 최고의 스타셨다고 들었습니다. 

 

김민기 : 창작곡을 했으니까... 그랬을 거예요. 대부분 미국 팝송을 불렀으니까.

 

- 그 이후 선생님 영향을 받아 창작곡이 많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송창식 씨도 그때 가수로 활동 중이었는데 ‘친구’를 부르는 걸 보고 영향받아 곡을 쓰기 시작했다고요.

 

김민기 : 창식이 형(송창식)은 나보다 한 학년 위인데, 뭐 그 양반들은 최고 스타였지요. 자기가 작곡하고 그 부인이 작사하고.

 

- 스무 살 정도 나이에 이미 기타로 유명하셨다는데, 어떤 계기로 클래식 기타를 시작했나요?

 

김민기 :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특별활동 반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이것저것 다 하고 싶어가지고 13개인가를 했어요. (웃음)

 

- 그 정도면 수업 시간보다 특별활동 시간이 더 많았을 것 같네요.

 

김민기 : 그러다 나중에는 두 가지 밖에 못하게 됐는데, 미술반하고 보이 스카우트를 했어요. 캠핑가는 게 좋아가지고. 학교에서 비용을 다 대줬거든요. 보이 스카우트 가보니까 우쿨렐레라는 게 있더라고요. 요만한 거... 음악은 늘 집에서 듣고 보이 스카우트 가서 우쿨렐레를 그걸 그냥 깨짝 만지다 보니까 캠핑가면 늘 내가 반주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갔더니 누나가 선물로 기타를 하나 사주더라고요. 내가 네 줄짜리 조그만 걸 치고 있는데 뭐 내가 음악성도 좀 있는 거 같고 하니까. 그런데 그때 일반 통기타가 아니고 삼익에서 처음 시제품으로 생산한 클래식 기타였어요. 쇠줄이 아니고 나일론 줄이고. 그래서 이제 네줄짜리 치다가 여섯 줄로 늘어난 거죠? 그런데 뭐 교본이 있나, 누가 가르쳐 주기를 하나. 그래서 누나 피아노 악보를 가지고 클래식 기타를 쳐본 거죠.

 

- 독학으로 익히신 거군요.

 

김민기 : 독학이죠. 피아노 악보를 기본으로 했고. 그 당시에는 국내에 해외 록 밴드도 많이 알려지고 했지만, ‘피터 폴 앤 마리(Peter Paul and Mary)’라는 미국 그룹이 클래식 기타를 주로 갖고 노래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 노래를 굉장히 많이 따라하게 됐고, 그러면서 이제 밥 딜런도 알게 되고. 

 

- 선생님 초창기 포크 곡들은 그 당시 한국에서 다른 가수들이 많이 부르던 해외의 포크와는 확실히 결이 다른 느낌입니다.

 

김민기 : 다를 수밖에 없죠. 한국 사람이 하는데

 

- 그래도 기타를 독학하거나 곡을 처음 만들 때 외국 곡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달랐습니다.  

 

김민기 : 혈액형이 다른가 보지 뭐.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학전]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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