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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9
by 우정호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조차 거부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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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1-29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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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 첫 자작곡 ‘친구’를 만드시면서 영향받은 대상들이 있었나요?

 

김민기 : 그런 건 없어요. 그 노래 관련해 조금 웃긴 이야기가 있는데. 71년에 그 노래로 판을 내고 72년이나 73년쯤, 그 당시에는 통금이 있었어요. 집이 수유리 쪽이니까 광화문에서 밤에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타러 갔지요. 지금으로 치면 교보, KT 있는 데서 버스를 타려고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는데 저쪽에서 벽 끝에 장님이 앉아서 노래하면서 기타를 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나가는데 들리는데 ‘친구’를 부르더라고.

 

이 ‘친구’라는 노래가 참 재미없는 노랜데, 거기에 코드가 그 이전까지 한국에서 들어보지 못한 메이저 세븐이 들어가고 마이너 식스가 나와요. 그런데 지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들으니까 두 코드를 놓치더라고. 그래서 내가 옆에 가가지고 기타 잠깐만 빌려달라고 해서 쭉 했어요. 노래도 하고 그러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전 던지고. 다 불러줬더니 그 사람이 ‘김민기 씨냐’고. ‘그렇다’고 하면서 기타 다시 돌려주고 했지요. 내가 처음으로 해본 버스킹인 거지요. 

 

- 메이저 세븐, 마이너 식스 같은 코드는 그 당시 대중음악에서 찾기 힘들었던 거군요.

 

김민기 : 몰라. 그 당시 한국 젊은 음악 하는 사람들은 그 메이저 세븐, 마이너 식스 같은 화음을 처음들은 거였을 거예요, 아마. ‘청개구리’ 사람들이나 창식이 형(송창식) 같은 사람들도 그런 부분에서 쇼크를 먹었을 거예요. 세븐 코드는 흔한 건데, 메이저 세븐하고 마이너 식스를 쓰니까.

 

- 그 당시 뮤지션들이 그 코드를 쓰신 노래를 듣고 ‘강렬했다’는 감상을 많이들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작곡의 어떠한 틀이 깨지면서 곡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게 됐다고. 그런데, 이처럼 코드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셨던 이유는 화성학을 공부했기 때문인가요?

 

김민기 : 아니 그냥... 내가 누나 피아노 악보를 보면서 연습을 했는데. 피아노 악보는 두 손이니까 악보가 두 줄이잖아요? 그런데 기타는 악보로 치면 한 줄 밖에 안되니까 피아노 악보의 두 줄을 한 줄로 옮겨서 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연습해가는 중에 음악적으로 제일 매료됐던 게 바하였는데, 바하의 두 줄짜리 악보를 한 줄로 내가 재편곡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방법이 있긴 있더라고. 그 당시 나로서는 고등학교 1학년이 그 재편곡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미묘한 화성들이 나올 거 아니겠어요. 그런 데서 배우든가 그랬겠지. 피아노 소리를 기타로 전부 다 낼 수는 없는 거니까 ‘압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 포크록 성지 ‘청개구리’가 일 년 만에 문을 닫게 되고는 거기서 노래 부르시던 많은 분들이 명동 오비스캐빈이라던가 여러 공간에서 노래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김민기 선생님께서는 함께 활동하지 않으셨는데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김민기 : 71년에 판 낸 게 압수되고 뭐... 그러고 끌려다니기 시작하면서 내가 무슨 활동을 할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못했죠.

 

- 가수로 정식 활동하실 계획은 있으셨나요?

 

김민기 : 처음에야 뭐... 가수 할 생각 그런 거 없었고. 그냥 희은이(양희은) 기타 반주했던 거죠.

 

- 청개구리에서의 활동도 취미로 하셨던 건가요?

 

김민기 : 당연하죠, 뭐. 희은이 반주해주고.

 

- 그렇다면 앨범을 내신 이유는 뭔가요?

 

김민기 : 몰라... 그러니까 기독교 방송 <영840>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내가 한두 번인가 나갔을 거예요. 그걸 진행하던 최경식 선생님은 청개구리에서 계속 사회를 봤기 때문에 나를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최경식 선생이 주선을 해가지고 얼떨결에 음반을 낸 거죠.

 

- 음반을 내고도 가수를 할 생각은 없으셨어요?

 

김민기 : 당연하죠. 왜냐하면 내가 목소리가 너무 낮아.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목소리가 꼭 높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각자의 음역대에 맞는 표현을 하면 되지 않나요?

 

김민기 : 그런데 그 당시까지 보통 통기타 노래 분위기는 청중들하고 싱어롱을 하는 걸 기본으로 생각들을 했어요. 같이 떼로 따라 부르고. 그런데 내 목소리로는 방법이 없어요. 따라 못 부른다고. 같이 어울려서 내가 따라 부르는 게 가능하지도 않고, 내 노래를 가르칠 수도 없고. 아예 가수 할 생각이 없었지.

 

- 목소리가 더 높았다면 가수하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김민기 : 아니요. 애당초부터 없었어 그냥. 노래 만들게 된 계기도... 대학을 들어갔는데 내가 중학교 때 다 했던 그런 과제들만 계속 주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옛날엔 서울대 미대 정도면 오히려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많이 받았어요. 미대 출신 여학생들이 시집가는데 아주 메리트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걔네들은 고3 돼가지고 미대 결정을 해가지고 급하게 미술 한다고 들어온 애들이니까 학교 과제가 걔네들 수준 맞추려면 너무 저급한 거야... 

 

한번은 수업인데 창경원 가서 그림을 그려서 내가 신경질 나가지고 캔버스를 나이프로 막 긋다 보니까 캔버스 찢어진 사이로 나무가 보이는 거예요. '내가 왜 이 지랄을 하고 있어'하고 때려치웠지요, 그림을. '그딴 그림 안 한다'하면서. 그땐 물감 값도 너무 비싸고 그래가지고 세차장에서 알바도 하고 그럴 정도였거든요. 그 당시 세상에 막 '트윈 폴리오'도 나와서 많이 들리고 하니까 나를 찾아와가지고 같이 '도비도'를 하게 된 거죠.

 

- 그때는 있는 집 자식들이 록 음악을 할 수 있었나요?

 

김민기 : 그렇죠. 전기기타가 얼마나 비싼데.

 

- 청개구리가 사라진 뒤 72년부터는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에서 열린 노래운동 '맷돌 공연'에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민기 : 맷돌은 지속적인 활동들이 아니고. 나중에 참여한 거였지요. 그런데 옛날에는 오디오 시스템이 요새처럼 그렇게 안 됐어요. 그러면 사람들 앞에 가서 내가 목소리도 낮고, 목소리도 작은데, 또 거기서 웅얼웅얼하면 그거게 무슨 소린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들어요. 그래서 가수 할 생각을 안 했죠.

 

- 이 공연 제의는 어떻게 받으셨나요?

 

김민기 : 아, 그 사회도 이백천 씨가 봤지. 다 옛날에는 손바닥 안이었으니까요. 이백천 씨, 최경식 씨, 선데이 서울 그 양반, 뭐 다 거기서 거기인데 뭐.

 

- 이 맷돌 공연을 지속 가능하게 한 인물 중 서강대 학생 신창균 씨라는 분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김민기 : 독특한 캐릭터인데. 당시에 중앙정보부장의 아들이었어요.

 

- 그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나요?

 

김민기 : 알았죠. 알 수밖에 없죠. 학전 열고 나서 한번 여기 찾아왔었는데 일찍 죽었죠.

 

- 그분은 어떻게 함께하시게 된 건 가요?

 

김민기 : 자기도 뭐 기타 치고 그러니까 이렇게들 다들 알게 된 거지요.

 

- 선생님과 신창균 씨의 기타 듀엣을 본 사람들이 '두 천재가 기타를 치는구나'하면서 깜짝 놀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민기 : 그런데 내가 훨씬 잘 쳤지.

 

 

- 좀 더 정확히는 '김민는 천재고, 신창균은 미국에서 제대로 배워 온 스타일인데, 둘 다 기가 막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1972년이면 쫓겨 다니기 전이었나요? 중앙정보부장 아들과 함께 활동을 했다는 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 같습니다.

 

김민기 : 걔네 집도 가봤어요.

 

-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셨군요.

 

김민기 : 공연까지 그렇게 같이 했다고 할 순 없고. 뭐 해봤자 한두 곡 같이 했을 텐데. 지가 날 쫓아와서 그렇게 했지. 같이 하자고.

 

- 다시 정리해 보면, 음악을 만들고 부르고, 공연도 하시고, 학전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못자리가 되어 주시고. 대중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치시는데 가수 활동을 원하지는 않으셨던 거군요.

 

김민기 : 음악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나도 그 수준이에요. 원래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그런 건지, 얘기했던 것처럼 뭐 술 먹는 놈들 비위 맞춰주려고 무슨 사랑 노래 만들고 그런 건 안 해봤고. 그림쟁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어디 가다 뭐가 딱 꽂히면 그걸 그려야 한다고.  그런 식으로 노래를 만들었던 거 같아요. 특별히 어디 뭐 비위 맞추겠다, 군가를 만든다, 뭐 이런 게 아니고. 그냥 보이는 것을 이렇게 흥얼 만들어 본 것뿐이지. 뭐 그런 정도죠. 

 

- 선생님의 행적을 보고 선생님 이후 세대에선 '김민기는 투사’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김민기 : 나 투사 아니에요. 근데 뭐 '공장의 불빛'은 나중에 들어 보니까 세더라고. (웃음)

 

- '봉우리'라는 곡은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남겼습니다.

 

김민기 : 그거 마이크가 좋아서 녹음이 그렇게 된 거죠, 뭐.

 

- 청개구리 시절의 자작곡으로서의 포크,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못자리가 되어준 학전. 대중음악사의 터닝 포인트들을 만드시고도 '스스로 음악인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건 아이러니합니다.

 

김민기 :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없고. 학전을 해 나가는 이유는... 아까 왜 서태지가 나오면서 음악이 '보는 음악'으로 바뀌었다고 애기했잖아요? 그리고 아까 창경궁에서 유화 그리다가 찢어져서 집어치웠다고 그랬는데 공통점이 ‘사각형’이에요. 그러니까 서태지가 나오면서 사각형 TV라는 사각형 안 미디어에서 음악을 대하게 됐고, 캔버스를 찢어버린 것도 사각형이란 말이에요. 사각형의 이차원이고, 이차원 면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물론 미디어는 더 발달을 할 거고, 가령 그런 생각도 들어요. 대학 다닐 때, 어렸을 땐 티브이가 컬러로 바뀔 때. 가만 보니까 미디어의 발달이 앞으로는 홀로그램으로 갈 것 같더라고. 그래서 대학 때 어떤 생각을 했냐면, 여의도 광장에 여름에 홀로그램으로 눈이 막 쏟아지는데, 그 눈 한 송이 한 송이에서 소리가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뭐 그런 생각들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생각만 했지 그걸 뭐 구체화시킬 순 없고. 아직도 그렇게까진 기술이 그렇게 까진 못 갔을 거예요. 그래도 미디어는 막 진화를 하더라도 어느 한쪽 구석에서 케케묵은 할아버지 노땅 하나는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만나는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김민기 : 아동극을 지금까지 쭉 해오고 있어요. 요즘에는 뭐 뽀로로도 있고, 게임도 있고 많이들 있지만 ‘모유가 우유보다 더 좋은 거 아니냐’는 그런 정도로 소박한 생각에... 이어폰이나 스피커를 통해 소리가 스테레오로 두 쪽으로 쪼개진 게 아니고 가까이서 직접 연주하는 걸 듣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직접 하는 공연 중에서도 라이브 콘서트라면 그 형태가 뭐 대규모인 것도 있겠지만, 작은 공간일 땐 더 밀착돼서 이렇게 들을 수 있는 거고요. 아기가 모유를 먹을 때는 엄마 젖의 촉감도 느끼게 되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아날로그라는 건 오래전에 에릭 클랩튼도 언플러그드 공연을 해왔고. 물론 요즘에는 이게 돈은 안 되겠지만, 그러나 어느 한쪽 구석에서는 늘 지키고 있는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어요. 

 

- 학전에서 공연했던 가수들 중 몇몇은 ‘소극장에서 같이 호흡했던 관객들은 꼭 다시 온다’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김민기 : 이적이라는 애가 광석이(김광석)가 공연할 때 바로 코앞에서 앉아서 봤대요. 침 튀는 거 다 맞으면서... 그런 맛이 있는 거죠. 그런 맛... 오리지널, 아날로그, 모유 같은 것. 그런 맛을 학전이 좀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해서 시작된 거니까 계속 그렇게...

 

- 소극장 공연이라는 건 단지 40분짜리 스테이지가 아니라 ‘나’에 대해 공부하고, 무엇을 보여줄지 고민을 해야 되는 상황이 온 거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김민기 :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업소에선 심각한 노래 못 부르잖아요. 그냥 그걸로 지나가 버리니까. 그런데 여기서 콘서트가 시작이 되면서 자기가 전체 구성을 해보는 거죠.

 

- 학전 개관하실 때, 본래는 극단 연우무대가 들어설 계획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김민기 : 내가 이걸 시작하려는 게 아니었고, 연우 무대가 옮겨올 수 있게 소개를 해줬어요. 보증금이 5천만 원이었는데 연우 측에서 그 돈을 다 못 만들더라고요. 그런데 이 극장 설계부터 내가 다 개입한 상황이었거든요. 게다가 여기가 암반 지대라서 지하를 조금만 파도 억대 공사비가 들어가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집주인이 지하 2층까지 파 준 상황인데도 보증금 때문에 못 들어오게 생겼으니까 어떡해요. 그래서 내가 미안해가지고 부랴부랴...

 

- 그래서 인수금을 위해 김민기 1·2·3·4집 네 장이나 앨범 발매 계약을 하신 거였군요.

 

김민기 : 선금을 오천만 원 받아가지고 학전 인수금을 냈지요. 

 

- 극장으로서 학전을 인수하셨는데 개관 이후 콘서트부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민기 : 아니 오만 것을 다했는데. 이야기했듯이 서태지가 나오면서 통기타 하는 애들이 갈 곳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니들 와서 해’ 한 거죠.

 

- 학전이 개관한 91년부터 94년~95년도까지 라이브 콘서트의 성지로 너무나 유명했는데요. 그렇게 인지도가 큰 데도 돈이 안 됐던 건가요?

 

김민기 : 안 되고 광석이 꺼 하나만 돈이 됐어요. 그걸로 학전이 연명을 했죠. 걔가 대박이 나서 1000회까지 하고, 그 자식 죽고 나서 나중에 동상도 세워주고.

 

-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을 이어오실 정도로 깊은 인연이었습니다.

 

김민기 : 광석이가 96년에 죽었는데, 그전까지 5~6년 했죠? 죽고 나서 걔 추모 음악회다 해가지고 연대 백 주년 기념관 같은 데서 추모 콘서트를 하자고들 했어요. 어차피 광석이가 여기서 쭉 했으니까 학전이 기획을 해가지고 하게 됐지요. 그런데 참가자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2회까진가 했는데, 연대 콘서트홀은 큰 공연장이니까 장비 값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콘서트 수익금이 한 6~7백만 원 정도인가? 명목상으로 추모음악회니까 이 수익금은 광석이 유족한테 줘야 하는데, 당시에 김광석 죽음과 관련한 흉흉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그걸로는 출연자들 출연료도 다 줄 수도 없겠더라고요. 하도 많아서. 그럼 출연료를 쪼개봤자 누구 코에 붙일 거야. 그래서 ‘내가 맡아두고 있겠다’그러고 은행에 묻어놨지요. 장기 적금으로. 그 당시는 이자가 굉장히 높았어요. 유재하 장학회도 내가 처음 만들었는데...

 

- 김광석 추모 공연 수익금으로 추모 사업이 시작된 거군요.

 

김민기 : 그러니까, 광석이 추모 콘서트 수익금을 은행에 묻어 놨는데 어느 날 금융 체계가 바뀌면서 은행에서 연락이 왔어요. 돈을 어떻게 할거냐고. 그래서 열어보니까 1억이 넘는 거예요. 복리의 복리로 계속 올라간 거였지요. 그냥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고 웬 이런 큰돈이냐’ 해 가지고 이걸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광석이 주변에 선후배 이런 애들 다 모아가지고 같이 가칭 추모사업회라는 걸 만들고. 그러면서 동상도 세우면서 추모사업회를 정식으로 만들고. 그 뒤로 광석이 기일날 해가지고 몇 차례 콘서트를 했는데 또 너무들 많이 출연을 하는 거예요. 일주일을 공연하면 맨날 출연자가 다 바뀌는 거지요. 몇십 팀이 나오고. 극장은 조그마한데 어떻게 해요. 관객이 와봤자지. 얘네들 차비도 못 주겠더라고요. 그래서 ‘야 너희들 나가서 해’ 그래 가지고 ‘김광석 다시 부르기’ 뭐 그렇게 해가지고 전국 투어를 열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김광석 다시 부르기’로 얘네들이 전국 투어를 다니면서, 출연료들도 이제 조금씩 받고 해가지고. 거기서 조금씩 모아서 추모사업회에서 기금을 운용하고, 그걸로 장학 재단을 만들자고 한 거였어요. 그런데 장학 재단을 하려면 자본금이 기본이 거의 5억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모자라긴 하지요. 

 

- 김민기 선생님에게 김광석은 어떤 가수인가요?

 

김민기 : 여기서 잘 놀았지 뭘. 어쨌건 천 회 공연까지 한 놈이니까. 그래서 학전에서 동상도 이제 세워주고...

 

 

(3부에서 계속.)

 

[사진출처=한겨레]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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