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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1
by 우정호

‘김민기 정신’ 투영된 학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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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2-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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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이어집니다.)

 

  

- 학전은 정말이지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분장실 뒤나 무대 곳곳 풍경들 마저요.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이 자리에 그대로 있길 바라고 있을 것 같은데요.

 

김민기 : 그럴 수가 없는 게 돈 앞에 장사 없어요. 언제 쫓겨날지 몰라. 아픈 기억이지만 예전에 ‘그린’(학전 그린 소극장)이라는 게 있었어요. 거기서 <지하철 1호선> 공연을 했는데, 결국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지 뭐. 거기도 집값 올라가니까 팔려서 쫓겨나고. 여기도 이제 언제 쫓겨날지 모르지... 이 건물 처음 지을 때 들어온 거거든요. 이 건물 짓는데 경비가 몇 억밖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백억이에요.

 

- 지으실 때 건물을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김민기 :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 뮤지컬, 아동극, 콘서트 외에도 학전에서 열린 다양한 인문학 강의들 역시 호평받았는데요. 다만 그 높은 퀄리티에 비해 홍보가 못 따라주지 않았나 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민기 : 홍보비가 비싸니까. 그리고 가령, 우리가 하는 아동극 같은 건 인터넷에서 봤는데 ‘믿고 보는 공연’이라면서 엄마들 사이에는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애들은 막 커버리잖아. 그러니가 그 엄마도 그대로 남아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동극은 입장료를 많이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프로그램을 어설프게 할 수는 없고. 그렇게 되면 하면 할수록 적자에요. 계속 빚인데... 앞서 아날로그나 그런 음악을 누군가는 지키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학전 아동극은 한국 사회에선 꼭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돈 계산으로는 학전 프로그램들 어차피 안 돼요. 안되지만 하는 거지. (웃음)

 

- 아동극에 대한 애정이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김민기 : 해야 되기 때문에. 이쪽 영역을 돈 안 된다고 다들 안 하거나, 해도 꼭 돈 계산을 먼저 하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 되지 않나 싶은 생각입니다.

 

- 돈이 안 된다고 해도 돈은 있어야 극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김민기 : 빚더미죠. 처음 오픈할 때부터 ‘곧 문 닫을 거다’ 그랬거든요. 맨날 그랬는데 어떻게 30년 가까이 오게 됐네요. 그래도 이 사람들은 월급이 최저임금 수준이니까 늘 미안하죠. 

 

- 학전의 재정적 고민을 조금 덜 수 있던 김광석 콘서트 같은 히트작이 한 번 더 생긴다면 도움이 될까요?

 

김민기 : 옛날에 <지하철 1호선>이 대박이 났었죠. 그러나 지금 공연하는 <지하철 1호선>은 옛날 것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고, 내용은 낡은 거기 때문에 전처럼 그렇게 안 되죠.

 

- 한편, 90년대 초 가요시장이 변곡점을 맞이한 가운데에도 학전은 꿋꿋이 라이브 공연 가수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습니다.

 

김민기 : 서태지 나온 이후에 다들 찍어서 컴퓨터로 음악 만드는데 그건 음악사적으로, 장기적으로 봐서는 엄청난 손실이에요. 플레이어가 없어지고 머리로만 음악을 만든다면, 그건 음악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고. 플레이어가 있어야 해. 

 

- 컴퓨터로 만든 악기음이 아닌 실제 악기음이 주는 영향력은 분명 다르다는 말씀이시군요.

 

김민기 : 그게 ‘살아있다’라는 거죠. 그래서 지금 학전 아동극에도 보면 꼭 라이브 음악이 들어갑니다. 라이브 음악이라는 건 수많은 실수가 있죠. 그러나 그게 살아있는 음악이라는 거죠. 날씨라고 해도 뭐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비오지 마라’하면 이게 되나? 그래서 학전의 콘서트들에서 많은 상상력들이 나왔고, 그런 거죠.

 

-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대중음악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셨는데 서태지의 등장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김민기 : 미디어가 계속 진화하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럴수록 한쪽 구석에 끈 하나를 놓지 말아야 된다는 거죠. 오리지널 음악 퍼포먼스 연주.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 학전을 거쳐간 수많은 뮤지션 중 가장 특별하게 기억하는 분이 있나요?

 

김민기 : 제일 특별한 게 광석(김광석)이에요. 그래서 광석이가 학전 앞에 대표적으로 서 있는 거고. 

 

- 윤도현 씨는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김민기 : 도현이는 학전에서 지 마누라 만나가지고 결혼했고. <개똥이> 두 주인공.

 

- 학전이 개관했을 당시 무대에 설 수 있는 뮤지션의 기준이 있었나요? 아니면 누구든 설 수 있었나요?

 

김민기 : 그런 거였죠. 온갖 장르를 다 했으니까. 현대무용도, 국극도 했어요. 

 

- 지금 학전의 모습은 개관 당시와 차이가 거의 없나요? 

 

김민기 : 90년대 초반에는 극장 계단 모습이 달랐어요. 디귿자로 있었고, 관객들이 지하 2층으로 내려가서 들어가야 됐고. 극장 출입구 벽을 뚫은 것도 한참 뒷이야기고. 그러나 벽돌이나 외부 하드웨어는 그대로지요. 밑에 출입구나 객석의 방향은 정반대일 때도 있었고. 광석이가 공연하던 때는 객석이 지금의 반대 방향이었어요. 

 

- 공연을 위한 오디오 시스템도 지속적으로 확충하셨나요?

 

김민기 : 학전 처음 시작하고 학전 그린을 광석이가 죽던 해에 오픈했어요. 거기도 지하 2층까지 뚫었는데. 그 당시에 학전이 갖추고 있던 음향이나 비주얼, 프로젝션 장비들이 다른 대극장들보다도 최첨단이었어요. <지하철 1호선> 공연할 때 맨 처음 오프닝 소리가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였는데, 객석 뒤로해서 이렇게 돌려서 서라운드로 나올 수 있게 구축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최첨단까지는 못 쫓아가는데 장비들이 너무 고가가 되니까... 스피커를 보완하려고 스피커 지존이라는 독일 브랜드 걸 알아보는데 그거 한 개가 중고인데 8백만 원이더라고요. 옛날에는 그냥 아무도 안 쓰는 것들이니까 내가 이렇게 세팅하면서 입체 음향도 하고 그랬는데 이젠 어렵지. 돈이 웬수지. (웃음)

 

- 이 공간의 소중함을 아는 주변 분들이 기증하거나 하진 않나요? 

 

김민기 : 돈은 싹 뒤집어 보면 돈에 정체가 없는 건 없어요. 

 

- 조동진 씨와도 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민기 : 다 친했지, 뭐.

 

- 그 시절에는 뮤지션들끼리 서로 다 친했나요?

 

김민기 : 다 손바닥 안인데 뭐.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강남이나 홍대 앞 같은 게 없었고, 오로지 명동이라는 데 밖에 없어서. YWCA도 명동이었고.

 

- 당시 활동하신 뮤지션 분들 중 ‘김민기 선생님과 조동진 선생님은 되게 다르지만 비슷한 걸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습니다.

 

김민기 : 동진이 형이 워낙 뭐 어디 나와서 뭐 이렇게 하고 그런게 거의 없었어요. 세시봉 형이랑도 가까웠죠.

 

- 세시봉 멤버들 중엔 어떤 분과 가장 가까우셨나요?

 

김민기 : 제일 접촉이 많았던 건 영남이 형(조영남).

 

- 송창식 선생님이 아니라요?

 

김민기 : 창식이 형은 술을 안 먹으니까.

 

- 대중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수많은 뮤지션들이 “우리는 다 김민기에게 빚을 졌다”고 얘기하곤 하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민기 : 내가 돈 꿔준 거 없는데?

 

- 선생님께서 처음 활동하시던 시절 뮤지션 분들도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요. 한국 가요사에서 ‘남의 노래’가 아닌 ‘내 노래’를 부르게 된 기점을 만드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민기 : 다시 얘기하지만 그게 그 지점이 육십 년대 말에서 칠십 년대 초로 넘어갈 때 통기타와 관련된 어떤 지점일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통기타라는 개인 화기를 가지고 창작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 그 지점 때문에 얘길 하는 거 같더라고. ‘싱어송라이터’라는 단어하고도 연관 짓던데 그 이전에 대수 형(한대수)이 있었지요. 대수 형이 잠깐 그걸 보여주고 군대 가고, 미국 가고. 작사, 작곡은 특정한 사람들만 하게 다 세팅되어 있던 시스템에서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된 지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겠지요. 그런 게 젊은 사람들한테 ‘에이 X발 나도 해볼 거야’ 뭐 이런 생각들을 주지 않았나...

 

- 기타만 있으면 자기 노래를 할 수 있게 되니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신 거네요.

 

김민기 : 그렇죠. 통기타라는 소총 하나만 있으면 ‘나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할 수 있게 된 거니까.

 

- ‘김민기는 천재였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활동 당시 국가에서 활동을 막지 않았다면 계속 가수로서 활동하시지 않았을까요?

 

김민기 : 안 했을 거에요. 그래도 만들기만 했을 거예요. 뭐 ‘천재다’ 그렇게 얘길 한 사람들은 작사, 작곡, 연주 이런 걸 다 했었다는 부분이 아마 그 시대의 여러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 읽힌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은 해요. 노래 실력은 안 되고. 뭐 천재 아니냐 그런 건 택도 없는... 가령 정재일이라는 가수 알죠? 재일이가 우리 학전에서 쭉 해오고 있는데 재일이는 타고난 뮤지션이죠.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그 실력이 세계적인 수준이에요.

 

- 요즘도 기타로 연주하시나요?

 

김민기 : 전혀. 91년 이후에 학전 하려고 그 당시 ‘마이킹’이라고 그러죠. 음반사에서 5천만 원 받아서 여기 보증금 넣고... 그때도 뜬금없이 곡 작업을 하게 된 거였으니까. 그 훨씬 전에 농사지으러 가면서 기타고 뭐고 다 버렸는데 녹음하려니까 마이킹 받은 걸로 녹음실도 써야 하고 연주자도 써야 하고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받은 돈을 여기 보증금으로 몽땅 다 집어넣었으니까 내가 직접 다시 다 해야 되겠더군요. 그래서 후배 놈들한테 뭐 기타도 빌려오고, 그래 가지고 다시 녹음을 했는데 그게 한 2년 걸리더라고요.

 

- 그땐 얼마 만에 기타를 다시 치신 건가요?

 

김민기 : 한 십오 년? 그 사이에는 이제 노동하고 그러느라고 손도 망가지고.

 

- 앨범 녹음 이후부터 다시 기타를 치진 않으셨나요?

 

김민기 : 딱. 그러니까 시간이 꽤 됐네요. 93년에 음반 냈으니까.

 

- 앨범 작업처럼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악기를 치고 싶은 마음은 없으셨나요?

 

김민기 : 없어요. 먹고사는 게 너무 바빠서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어.

 

- 여전히 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치시는 걸로 보이는데...

 

김민기 : 없어요. 지금 까마득한 옛날 얘기 꺼내서 해보는 거지 뭐. 내가 나이가 몇인데 대중음악을 하겠어요.

 

- 역사를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김민기 :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들이지요. (웃음) 지겨웠으니까.

 

- 음악 활동을 강제로 멈추실 수밖에 없었던 시기 때문에 그러신 거지요? 그런 게 없었다면 달랐을까요?

 

김민기 : 지금 계속 음악 얘기를 하니까. 우리가 보통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가령 뭐 미학적으로 얘기한다면 큰 카테고리가 한 옥타브, 그러니까 천 이백 사이클 한 옥타브 위아래를 같은 음이라고 느끼잖아요. 천 이백 사이클을 황금분할도 하고 쪼개고 그런 건데. 이 행위를 어떻게 음악으로 느끼느냐는 감수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인간의 감수성이 아니고 철저하게 물리적인 조건이에요. 지구의 중력하고도 관계가 있다고. 예를 들어서 지구를 벗어나서 저쪽 은하계 다른 쪽으로 가면 중력 조건이 달라지잖아요. 그렇게 되면 맥놀이가 달라지게 되어 있다고 그래서 한 옥타브라는 개념이 천오백 사이클로 벌어질 수도 있고, 육백 사이클로 좁혀질 수도 있어요. 가령 그렇게 되면 지금 음악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달라지게 된다는 거지요. 

 

- 음악의 조건이 바뀌겠죠.

 

김민기 : 다 바뀐다고.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금까지 있어 왔던 음악에 대한 어떤 인식들이 전혀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가령 현대음악에서 예전에 슈베르트 같은 사람들이 그걸 파괴했고, 그런 마당에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음악에 대한 멜로디 화성에 대한 인식이 영원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 선생님 창작행위는 전반적으로 ‘낮은 곳’을 향해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기 : 미술 대학에 들어가니까 과제들이 너무 식상했다고 그랬는데 그런 것하고 연관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들어가서 미술반에 처음 들어갔는데, 그때 선배들이 참 고맙게 느껴지는 게 미술실에서 뻔한 거 그리는 게 아니라 무조건 밖에 나가서 그리게 내모는 거예요. 학교 수업 끝나면 화판 들고나가도록. 그래서 남대문 시장 가서 좌판 북적북적한 데서 화판 놓고 그걸 그렸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되다 보니까 가령 미술 경시대회하면 경복궁 같은 데서 정돈이 잘 된 것들 그리게 하는 데 너무 재미없더라고요. 이미 다 정돈된 거면 내가 굳이 그걸 그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 뭔가 일그러진 거, 때묻은 거... 이런 것들이 그릴 대상으로 눈에 보이는 거지요. 어려서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봐도 거기서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걸 보고 자꾸 그리게 되고. 그래야 그릴 맛이 날 거 아니에요.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고 그러다 보니까 노래를 만들었을 때 소재들도 아무래도 자꾸 찌그러지고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뭐 뻔하게 술 마시는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사랑 노래 만들고 그런 데 관심이 없죠. 그런 걸 앞에서 불러주고 싶은 생각도 없고. 우선 재미가 없으니까. 뭐 어쩔 수 없이 당시 정권에서 활동을 할 수 없게 했지만, 어차피 먹고살아야 된다면 재미없는 걸 택할 거냐, 굶어죽더라도 자꾸 눈에 보이는 걸 택할거냐. 굶어죽더라도 자꾸 눈에 보이는 걸 쫓아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공장으로도 가고, 탄광촌에도 가고. 사북 사태... 그런 일도 있었고. 자꾸 사람들은 나를 무슨 투사 같은 걸로 생각을 하는데, 탄광 생활하면서 내 눈에 보이는 건 그런 노사분규나 그런 게 아니고 조그마한 애들이더라고... 그런 식으로 쭉 살아왔던 거 같아요. 그게 상품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했겠어요? 그게 무슨 상품이 되겠어.

 

 

(4부에서 계속.)

 

 

[사진출처=<학림다방 30주년> 이충열]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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