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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2
by 우정호

‘동아기획’의 싱어송라이터 김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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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3-12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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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부터 자작곡 테이프를 만들어 일부 지역에서 매진 행렬을 일으킨 김현철은 데뷔 이전부터 준비된 싱어송라이터였다. ‘어떤날’ 조동익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그토록 선망했던 동아기획에서 작곡가, 가수로 데뷔한 그는 ‘춘천 가는 기차’, ‘달의 몰락’, ‘그대 안의 블루’를 비록 당대의 히트곡을 남기며 대한민국의 추앙받는 싱어송라이터 반열에 올랐다. 

 

‘자신의 음악적 뿌리는 동아기획’이라고 단언하는 김현철은 2010년대 후반 시티 팝 열풍 속에 ‘한국 시티 팝 1세대 가수’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동아기획에서 발매한 데뷔 앨범 [김현철 Vol. 1]과 함께.

 

 

(아카이브 K는 김현철과 2020년 3월 인터뷰했다.)  

 

 

- 정식 데뷔는 1989년이지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고 들었습니다.

 

김현철 : 밴드는 아니고, 그 당시엔 포크송 부르는 통기타 그룹들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따로 또 같이’같이 싱어송라이터들이 모인 그룹들이요. 그런 영향으로 제가 다니는 교회를 중심으로 다섯 명이 모여서 같이 기타도 치고, 악기도 연주하면서 노래를 했죠.

 

- 그 그룹이 ‘아침 향기’군요.

 

김현철 : 네, 아침 향기. 데뷔 앨범에 ‘아침 향기’라는 노래도 실려 있습니다.

 

- 그때 이미 음반을 제작해 판매하셨다고요.

 

김현철 : 네. (웃음) 86년도인가... 그 당시에만 해도 불법 테이프를 많이들 리어카에다 팔고 그랬어요. ‘길보드 차트’라는 게 생긴 것도 그 당시인데. 우리가 만나서 “나 이런 노래 작곡했어”, “어 좋다. 내가 애드립 넣어볼게”하면서 말도 안 되게 애드립 넣고 그러면 누가 “어 내가 베이스 쳐볼게”이러면서 맨날 하다가 보니까 이거를 발표를 못 한다는 게 대단히 불행한 거예요. 발표를 하고 싶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공연을 한 번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소극장을 하나 빌려서 그날 공연 2회를 했어요. 티켓은 다 팔았는데 팔면서 선생님들한테 많이 혼났죠. 여자 학교 앞에 가서도 팔고. 

 

공연이 끝나고 나니까 되게 허탈하고 그런 와중에 친구 하나가 “야 우리가 녹음 한 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공연하려고 빌려 놓은 악기를 갖고 있을 때 카세트테이프 콘덴서 마이크에 대고 녹음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믹싱이라는 게 따로 있을 턱이 없잖아요. 그래서 “야, 기타 더 뒤로 가”, “베이스 앰프 갖고 저 방으로 들어가” 그렇게 해보면서 녹음을 해서 우리끼리 나눠 갖고.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했으니까 음질이야 뭐 어떻겠습니까. 그랬더니 옆에 친구가 자기도 복사해달라 그러고 다른 친구도 또 복사해 달라고 그러고. 그러니까 테이프 복사하느라고 이제 다른 일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럴 거면 테이프 복사하는데 가서 복사해서 팔자는 생각이 들어서 한남동에 있는 카세트테이프 복사하는 델 물어물어 갔어요. 와 거기는 한 번 딱 넣으면 50개가 쫙 나오더라고요, 고속 복사니까. 그래 가지고 멤버들 다섯 명 당 100개는 있어야 되겠거니 해서 500개를 복사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판타지아 레코드라고 우리 아파트 앞에 자주 다니는 아저씨한테 좀 나눠 주려고 했는데, 그 아저씨가 ‘이건 팔아야지’하시면서 나중에 귀중하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도 맞는 생각 같아서 팔기로 했더니 한 달 만에 500개가 다 나가고 다시 500개를 더 찍었어요. 그런데 오우, 다 나갔어요. 그랬더니 내가 거만해 진거지... 이번에는 1000장을 더 찍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었어요. 우리가 판 테이프를 산 사람들이 그걸 또다시 복사해서 나눠 갖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엔 안 팔려서 다 나눠 갖고 그랬죠. 

 

- 고등학생들이 만든 음반인데 엄청난 인기였네요.

 

김현철 : 우리 동네에서만 그랬어요.

 

- 정식 가수 데뷔는 동아기획에서 하셨습니다.

 

김현철 : 처음으로 동아기획에서 발매한 앨범을 산 건 조동진 씨 앨범이었어요. 동아기획의 ‘코드’라고 해야 하는 음악적인 색깔이 맘에 들었죠. 그 뒤로, 물론 다른 음반 기획사에서 나온 것도 구입했지만, 동아 기획에서 나온 음반은 정말 뭐하나 놓치지 않고 구입하게 됐어요. 그때는 아직 가수의 꿈을 꿀 때가 아니었지만, 제가 언젠가 음악 쪽 일을 하게 된다면 동아기획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아주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동아 기획에서 그 당시 앨범 사면 뒷장에 카탈로그를 만들었는데, 무슨 앨범이 발매됐는지 쫙 나와 있고, 어떤 앨범이 몇 월에 나오는지도 나와 있었어요. 그 카탈로그를 사서 ‘이 앨범이 다음 달에 나오는구나, 다 다음 달엔 이런 앨범이 나오는구나’보면서 기다리는 게 재미있고 보람 있었어요. 또 그게 발매 일정대로 그달에 나오면 그게 너무 고마웠고. 안 나오게 되면 더 기대가 되고. 그런 세월을 거치면서 이제 자라왔으니까 동아기획에서 음반을 내게 된 건 진짜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에요.

 

- 동아 기획에서 나온 앨범은 다른 음반 기획사에서 발매한 앨범과 어떤 점이 달랐나요?

 

김현철 : 그 당시엔 TV에 나오는 가수들이 따로 있었어요. MBC 10대 가수상에 오름직한, 제 기억으론 전영록, 조용필, 나훈아, 정수라, 이은하, 이선희 등등등... 그런 가수들 말고, 요즘 말로 하면 인디음악을 할 수 있는 그런 가수들을 다뤄 음반 내주는 회사로 동아기획이 유일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저희 같은 라디오 세대, 그중에서도 음악을 조금 차별화해서 듣는 사람들한테는 동아기획 밖에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동아기획 가수들이 티브이에도 나오지 않죠, 라디오에도 가끔가다 한두 번 나오죠, 그러면 ‘과연 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라는 환상 같은 게 생길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동아기획 가수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밖에 활동을 못 해서 그런 거였는데. 그게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더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쳤죠. 

 

- 그러니까 동아 기획은 일반적인 음반 제작사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가졌던 거군요.

 

김현철 : 음악 동아리? 동아리 말고, 크루는 너무 세련됐고... 서클도 아닌데. 조합! 동아 기획은 한 마디로 음악 조합과 같았어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음악 색깔을 회사 자체에서 뿌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 색깔이 바로 동아기획의 색깔이 됐으니까. 다른 회사는 사장님이 어떤 음반을 제작하겠다는 생각이 확실해서 그런 음악을 할 가수 오디션을 본다던가 섭외해서 앨범을 내놓게 되는데 동아기획은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에는.. 물론 사장님의 생각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가수들이 가수를 섭외하는 아주 독특한 형태였죠. 저도 선배 가수분한테 소개받아서 가서 음반을 내놓고, 그다음에 이소라 씨도 제가 소개를 해서 동아기획이랑 인연을 맺고. 그런 방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음악 조합과 같다고 표현을 할 수 있겠죠,

 

- 동아기획 소속 가수들 앨범이 많이 팔렸는데 각각 인기도 엄청났을 것 같습니다.

 

김현철 : 근데 그건 조금 달랐어요, 앨범 판매량과 인기가 꼭 비례하지만은 않았거든요. 1985년도부터 95년도까지 그 당시 세대가 그랬어요. 방송활동을 안 해도, 음반은 더 많이 팔릴 수도 있는 그런 세대였거든요. 요즘이랑은 좀 다르죠. 그래서 물론 TV 나가고 방송 활동 열심히 하면 인기는 많아지겠지만, 동아기획 가수들은 방송을 안 해도 음반은 방송 활동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팔리는 경우가 있었죠. 만약에 TV 활동을 하는 가수랑 동아기획 가수랑 음식점 가면 아줌마가 ‘아 누구 오셨네, 누구 왔네’ 하면서 서비스를 많이 줘요. 그런데 동아기획 가수 자리엔 아무 메이드가 없어요. 얘기도 없고. 동아기획 가수들은 수줍음도 많았고 ‘저도 가수예요’라는 얘기를 못 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평가지만 음반 판매량은 어찌 보면 더 많이 팔았을 수도 있다는 거죠.

 

- TV 활동 가수보다 동아기획 가수 음반 판매량이 더 많았다면, 그 이유가 있을까요?

 

김현철 : 음악인 것 같아요. 확실히 그 당시 주류는 TV 활동하는 분들이죠. 그런데 동아기획이라는 것은 그 주류에 편승하고 싶은 가수들이 아니라 아예 다른 음악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굶어죽더라도 우리는 우리 음악 하겠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 음악이 차츰차츰 커가면서 지금은 동아기획이라는 카테고리 가수들을 묶어서 인터뷰할 만큼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처음부터 됐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 음악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보면 될까요?

 

김현철 : 그런 게 있어요. 조용필 씨나 전영록 씨 같은 싱어송라이터들도 있었지만, 기존에 TV 활동을 주로 하는 가수들은 대부분 남의 곡을 받아서 부르는 반면에 동아기획은 싱어송라이터들 집단이었어요. 물론 노래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자기 음악을 하니까 자기 곡의 의미를 알고 전달하기 때문에 더 전달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음악이 밤에 라디오로 듣는 사람들 테이프에 그냥 착착 꼽혔던 거예요. 

 

- 동아기획에 소속되게 된 과정도 궁급합니다.

 

김현철 : 4박 5일을 해도 모자란 얘기긴 하네요. 제가 동아기획이라는 회사에 환상을 갖고 음악을 계속 청취하던 때가 있었어요. 고3 때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나기 전인데 아는 분이 김수철 씨 공연 티켓을 두 장 주셨어요.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공연장이어서 보러 갔죠. 그런데 그 당시에 아주 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날’이라는 그룹이 게스트로 나온 거예요. 기타 치시는 이병우 씨, 베이시스트이자 편곡가, 작곡가인 조동익 씨의 듀오였는데, 그 어디 가서도 만나기 힘든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라이브로 듣는 일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날따라 그 두 분이 나와서 두 곡을 불렀어요. 그 무대가 끝나고 공연 중에 나머지 공연을 보지 않고 나왔는데, 조동익 씨가 집에 가려고 지하철 티켓을 사는 광경을 제가 보게 된 거죠. 그래서 가서 ‘저 누구누구고 어느 고등학교 다니는데 제가 음악 너무 좋아합니다. 이러이러한 음악이 너무 좋고...’ 그러니까 조동익 씨가 저보다도 더 당황을 한 거예요. 평소에도 팬들이야 있지만, 팬이 자기보다도 음악을 너무 잘 아니까. 그러다 기차 오면서 헤어질 때가 됐는데, 자기 집 번호를 알려 주겠다고 해요. 그래서 알려주신 그 전화번호 덕분에 그게 인연이 돼서 서로서로 만났죠. 

 

- 팬과 가수의 짧은 만남인데 집 전화번호까지 받았다는 점이 드라마틱 하네요.

 

김현철 : 예를 들어 이런 거 있잖아요. ‘어 팬이에요, 음악 너무 좋아요’ 이런 얘길 하다 몇 초 동안 둘이 말이 없어질 때가 있잖아요. 그 짧은 시간을 조동익 씨가 더 못 참았나 봐요. 그런데 기차는 오지, 자기는 가야 하는데 이거 어떡하지, 얘랑 조금 더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신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기억해요. ‘420-XXXX’. 그 전화번호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게 된 거죠.

 

- 역삼동에 있던 ‘심플라이프’라는 공간도 그 당시 동아기획 뮤지션들에게 의미있는 장소였다고요.

 

 

김현철 : 네네. 그 당시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동아기획을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메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장희 씨 전 부인 분과 따님이 하시던 카페였어요. 그때는 삐삐도 휴대폰도 없으니까 서로 실시간으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매일 저녁이면 가수들이 거기 모이는 사랑방이었어요. 거기만 가면 누군가 있겠거니 하고. 오늘 안 오면 내일 오겠거니 하고. 만나면 또 술 한잔하고. 어떤 날 2집에 ‘초생달’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아무런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사 내용이 심플라이프에 대한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 장소에서 동아기획 뮤지션들도 많이 만났겠군요.

 

김현철 : 조동익 씨랑 인연이 생기고 나서. ‘너도 음악 하는구나’하시는데 제가 음악을 해봐야 뭘 알겠습니까. 고등학교 갓 졸업한 애가. 그 당시 재수학원도 다닐 때인데. 그러시는 와중에 조동익 씨가 제가 음악을 참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요. 

 

어떤 계기가 또 있었냐면. 조동익 씨 집에 놀러 갔는데 그날따라 조동익 씨가 전날 작업이 늦게 끝나서 주무시느라 못 일어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기다리다 그냥 집으로 온 적이 있어요. 근데 그때 문관철 씨라는 가수의 ‘오페라’라는 앨범에 조동익 씨가 편곡을 할 당시인데, ‘오페라’라는 곡은 보니까 데모 테이프도 있고, 편곡 악보가 이렇게 있어요, 요즘에는 컴퓨터로 하지만 예전에는 악보에 다 기보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제가 보니까, 간주 후에 하프시코드가 나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하프 시코드라는 것도 모르잖아요, 그 느낌만 알지, 그 느낌대로 여덟 마디 간주를 그려놓고, 집에 왔더니 그날 저녁에 조동익 씨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내일 당장 만나자..’ 그렇게 돼서 ‘너도 음악을 하는구나’ 알게 되죠.  그러고 이제 시간이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심플라이프라는 곳에 가게 됐어요, 전 처음 갔죠.

 

- 데뷔 전이신데 이미 편곡 작업을 할 줄 아셨던 거군요.

 

김현철 : 네 데뷔 전이죠, 내가 작곡가로 데뷔를 먼저 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전이예요. 그땐 재수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심플라이프를 처음 갔는데, 그날따라 하덕규 씨도 오고, 나중에 최성원 씨가 오셨어요. 최성원 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저라는 사람을 알더라고요. 동익이 형한테 들었겠죠. 

 

최성원 씨가 오셔서 ‘너 곡 쓴 거 있으면 여기 아무도 없을 동안에 한 번 불러 봐라’ 그래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나와서 두 곡을 불렀던 거 같아요. 두 곡을 불렀는데, 부르고 자리에 앉을 거 아니에요. 앉았더니 “조금 있으면, 박학기라는 가수가 올 텐데 박학기한테 이 곡을 니가 줬으면 좋겠다”그래서 본인이 제작하고 있는 ‘우리 노래 전시회’라는 앨범 3집에 실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게 뭐 무슨 얘기입니까. 저는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서 학원 갔다가 조동익 씨 만나러 카페에 왔더니 작곡가로... 심플라이프는 그럴 정도로 모이는 사람들의 끈끈함이 최고였던 카페예요. 그래서 그 바람에 학력고사 끝난 다음에 녹음을 하게 됐지만, 어쨌든 제가 작곡가로서 처음 의뢰를 받았던 그런 카페예요. 잊어먹지도 않았죠,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라는 곡이었고요. 나중에 박학기 씨 1집 앨범에 실리게 됐죠.

 

- ‘심플라이프’에서는 어떤 식의 교류가 이뤄졌나요?

 

김현철 : 저는 그 카페에 많이 못 드나들었어요. 왜냐하면 곧 학력고사 준비를 해야 됐기 때문에. 근데 거기 가서는 주로 선후배들끼리 술 마시고, 음악 얘기하고, 사는 얘기하고. 그러니까, 그 당시... 수많은 가사들이 몇 개 안 되는 그 테이블에서 나왔던 것 같아요. 우리가 뭐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가지고 얘기를 했잖아요, 논픽션이라면 사람 사는 이야기 네가 사는 이야기, 내가 사는 이야기,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가지고 쓰는 건데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거니까. 그리고 그 당시에는 형들이 젊으니까 아직까지도 사랑 얘기도 나누고 그러니까, 그런 거죠, 

 

- 그게 지금도 있나요.

 

김현철 : 없죠, 지금은 없어졌어요, 

 

- 동아기획에 들어갈 즈음엔 어떤 가수들이 소속돼 있었나요?

 

김현철 : 김현식 씨가 있었고요, 들국화, 시인과 촌장,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장필순 씨, 신촌블루스, 푸른 하늘... 

 

- 성향이 서로 비슷한 뮤지션들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김현철 : 네네. 그게 왜냐면 가수가 가수를 뽑아오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내가 음악을 하고 있는데, 주변에 음악 잘하는 친구가 있으면 이 가수를 동아기획이라는 회사에 소개시켜서 앨범을 내게 해 주고. 그럼 이 가수가 또 자기 아는 가수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가수’라고 표현했지만 싱어송라이터 겸 연주자,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만 어떻게 동아기획에 다들 모이게 됐어요.

 

- 그런데 이 가수들이 그 당시 방송에 많이 노출되진 않았습니다.

 

김현철 : 방송을 많이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안 한 사람도 있죠, 한 번도 TV에 모습을 안 드러내신 분도 많아요,

 

- 그에 비해 김현철 씨는 다른 동아기획 뮤지션들에 비해 방송 활동을 하신 편인 것 같습니다.

 

김현철 : 방송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게 꼭 방송을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 시대적인 생각과 요구에 맞춰가다 보면 이건 자연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고. 제가 동아기획 거의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에 거의 그렇다고 보여요. 그래서 1집, 2집 활동 기간에는 TV 활동을 거의 안 했습니다. 그러고 3집이 나오고 ‘달의 몰락’이 나왔을 때 TV 활동을 조금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 그렇다면 방송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동아기획 안의 다른 뮤지션들이 이질감을 느끼진 않았을까요? 

 

김현철 : 그거는 제가 못 느낀 거니까, 제 입장에서는 없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동아기획에 많은 가수들이 모여 있지만 이 가수들의 울타리는 어느 정도 쳐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울타리 안에 들어와야 동아기획 가수이고, 그 밖에 있으면 ‘글쎄, 너를 동아기획 가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모종의 울타리가 약간 있었던 것 같아요.

 

- 말씀하신 울타리는 ‘가족’의 개념과도 비슷하네요.

 

김현철 : 가족이기도 하고, 공동체이기도 하고, 조합이기도 했죠. 그 안에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식으로 함께 해나가는 건데, 네가 뭐, 다른 방식을 가져간다면 우리들 조합 안에 있는 건 아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해요.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Fe엔터테인먼트]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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