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김현철이 회상하는 두 거장 조동진, 김민기 > 인터뷰 아카이브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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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8
by 우정호

‘막내’ 김현철이 회상하는 두 거장 조동진,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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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3-18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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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 저희가 소장하고 있는 김현철 씨 데뷔 앨범을 가져왔습니다. 속지에 동아기획 카탈로그가 들어있는 점이 인상적이더군요.

 

김현철 : 89년도에... 아, 이때는 진짜 젊었네요. (웃음) 젊었어요. 말씀드렸던 속지가 바로 이거예요. 동아기획 카탈로그... 여기 다 있네요. 최성원, 한영애, 김현식, 작사가 박주연 씨도 계셨네요. 이원재, 박학기, 신촌블루스... 어우 제 이름도 있네요. 다 있네요, 다 있어. 조동익, 함춘호, 손진태, 김현철이 함께한 연주곡 앨범도. ‘야샤’ 앨범이죠.

 

- 회원 가입 신청서 같은 속지도 들어있네요.

 

김현철 : 그때는 인터넷이 없으니까, 이걸 절취해서 동아기획 주소로 보내면 그렇게 각자의 데이터베이스를 컴퓨터로 입력해 정리 해놓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데이터베이스에 사람이 대단히 많았어요.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는 그러한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만 일종의 마케팅이죠. 다음에 나올 앨범을 기대하게 만드는... 그래서 저는 카탈로그를 보고 동아기획에서 앞으로 나올 앨범들을 많이 기대하고 맨날 레코드점 가서 '나왔어요?' 물어보고 그랬습니다.

 

- 동아기획이 '가족이자 조합' 같다고 표현하셨는데, 소속 뮤지션들끼리 협업도 활발했나요?

 

김현철 : 그거는 확실해요, 다른 회사에 있는 가수분들은 아마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인기 있으면 있고, 인기 없으면 없고, 자기 나름대로 활동이었잖아요. 그런데 동아기획은 조합이니까 내가 가면 너를 끌어주고, 네가 가면 나를 끌어주는 그런 식이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앨범을 녹음하는데 소속 뮤지션들이 코러스나, 기타 연주나, 아니면 짐이라도 들어 준다거나, 하여튼 뭐든지 한 번씩은 다 참여를 해요. 그렇게 앨범을 함께 만들고 하니까 정말 가족과 같고, 끈끈해지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일종의 울타리가 쳐졌을 수도 있어요.

 

- 음악 품앗이 같은 개념이군요.

 

김현철 : 네 품앗이... 품앗이지만 내가 이만큼 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대가를 그만큼 바라지는 않는. 어떻게 보면 진짜 진짜 품앗이죠. 역사 시간에 배우잖아요. 향약, 두레, (웃음) 품앗이... 

 

- 그 당시 동아기획 가수들은 어디에서 녹음했나요?

 

김현철 : 참 감사해야 될 일인데 각자 자기가 편한 녹음실에 가서 했어요. 서울 스튜디오가 많았죠. 당시에는 가장 큰 스튜디오였고, 저도 거기에서 주로 녹음했죠. 

 

- 서울 스튜디오에서 주로 녹음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김현철 : 요즘에는 녹음하는 걸 숨깁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갑자기 '빵' 나와야 되니까. 그런데 예전에는 특이한 홍보 방식이 있었어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는 사람들끼리 '옆방에서 녹음는 사람 노래 되게 잘하는데? 쟤 누구래? 야, 쟨 뜨겠다' 하면서 입소문이 퍼지는 거였죠. 서울 스튜디오는 당시 큰 스튜디오였고 방이 많았는데, 거기서 녹음하면 소문도 나고. 그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최 사장님이라고 계셨는데, 아버지, 아들이 다 엔지니어였고 진짜 잘했어요. 동부이촌동, 한강이 보이는 곳에 있었죠.

 

- 지금도 서울 스튜디오가 있나요?

 

김현철 : 있죠, 많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있습니다. 

 

- 최근에도 가보신 적이 있나요?

 

김현철 : 네, 가봤죠. 건물 자체는 그대로예요, 그리고, 거기 가면 옛날 악기들이 많아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거기 보관하고 있는 마이크들은 요즘엔 거의 없는 마이크들도 많고. 요즘 스튜디오들이 많이 현대화됐는데 서울 스튜디오 가면 스튜디오만이 갖는 그 냄새가 있어요. 그런 게 아직도 나서... 좋아요. 추억의 장소죠.

 

- 동아기획에서는 어떤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영향을 받았나요?

 

김현철 : 물론 조동익 씨에게 음악적으로 영향 많이 받았고. 그 형님이신 조동진 씨도 물론이고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씨도 음악뿐만 아니라 가사적인 면에서도 많이 영향을 주셨고. 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가수는 들국화의 최성원 씨예요. 작품들을 매일 듣고, 카피하고 그러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최성원 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가수가 영국의 폴 매카트니인데. 그래서 저는 들국화를 볼 때마다 아 정말 비틀즈 같다. 전인권 씨가 활동하는 모습은 뭔가 존 레논과 비슷하고, 폴 매카트니는 최성원 씨랑 참 비슷하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 들국화 노래 중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나요?

 

김현철 : ‘그것만이 내 세상’이 제일 먼저 들어요죠. 어느 공연에선 마이크가 나가를 바람에 그 노래를 생 목소리로 부르시는 것도 들어봤고요. 요즘에는 가수가 되려면 오디션을 보고 음반 내고 나서 활동을 하지만, 예전에는 자기 노래를 갖고 계속 활동해 오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면 그때 음반을 내게 돼요. 들국화가 동아기획이랑 계약하기 전에 많은 라이브 무대를 섰고, 게스트도 많이 했거든요. 그때마다 가서 봤죠.

 

- ‘그것만이 내 세상’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느끼셨나요?

 

김현철 : 그 당시에는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그런 음악이 없었어요.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이야... 4도 메이저 탁 나오고. 최성원 씨가 작곡 한 거거든요. ‘사랑일 뿐이야’, ‘세계로 가는 기차’ 너무너무나 좋아했죠. 그런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래도 ‘그것만이 내 세상’입니다.

 

- 앞서 마이크가 나가는 바람에 전인권 씨가 ‘그것만이 내 세상’을 생 목소리로 불렀다는 그 공연은 어떤 공연이었나요?

 

김현철 : 150석 정도의 유서가 깊은 소극장이죠. 샘터파랑새 극장이라고. 비 오는 날 주말이었어요. 저를 음악의 길로 인도한 이교하라는 친구가 있는데, 들국화를 알려줘서 둘이 가서 보기로 했어요. 아마 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공연장 전원 사용할 때 악기랑 앰프 전원 따로, 조명 전원을 따로 쓰거든요. 왜냐하면 조명이랑 악기랑 같은 전원을 쓰면 파스 때문에 ‘지이이이잉’ 소리가 날 수 있거든요. 근데 그날 따라 조명 전원은 잘 들어오는데, 믹서 전원이 나간 거예요. 이거 공연을 어떻게 하지, 천재지변도 아니고. 하고 있는데 전인권 씨가 다들 조용히 연주하기를 부탁하면서 마이크를 딱 물리시고, 진짜 생 목소리로 불렀어요. 그날 공연을 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느낄 거예요. 평생에, 미래에 듣게 될 노래까지 다 포함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를 들었다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대단했죠,

 

어우 그 당당함 있잖아요. ‘네, 마이크가 나갔는데 어떡하지, 불러도 되나?’ 이런 게 아니에요, ‘마이크 나갔는데 뭐 어떡하라는 겁니까. 제가 쌩으로 불러야죠’ 그 당당함... 들국화를 참 좋아하기는 했습니다.

 

- 조동진 씨에게도 음악적 영향을 받으셨다고요.

 

김현철 : 조동진 씨도 있고, 최성원 씨도 있고. 아... 조동진 선배는요. ‘행간’이라는 걸 알려주신 그런 아주 위대하신 분이에요. 예를 들어서, ‘오늘 길을 걸었다’, ‘내일은 무얼 먹을까’ 이 아무 뜻 없는 두 문장 안에 하루 일과가 다 들어 있거나, 하루 동안의 생각이 다 들어있거나를 표현하시는. 그런 행간을 남겨주신 분 같아요. 행간이 넓으면 넓을수록 여유가 있으면 있을수록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니까요.

 

- 조동진 씨의 ‘진눈깨비’라는 곡을 김현철 씨가 리메이크하기도 했습니다.

 

김현철 : 네, 되게 후회했어요, 

 

- 왜요?

 

김현철 : 제가 3집 앨범에서 그 노래를 리메이크했는데, 그렇게 리메이크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고 요즘에 와서 다시 느끼죠. 좋은 노래는요, 그 당시에 들어도 좋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들으면 그 의미가 계속 바뀌거든요. 내가 스물세 살, 네 살쯤에는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리메이크를 하고, ‘아 리메이크 잘했어’ 이렇게 얘기도 했는데. 아, 역시. 그 노래 분위기, 색깔, 가사가 주는 느낌이 그게 아니었구나. 이건 내가 생각했던 이 노래의 되게 조그마한 부분이었구나 생각되고. 창피합니다.

 

- 조동진 곡들 중 ‘진눈깨비’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현철 : 제가 고2 때인가, 겨울에 워크맨을 들으면서 고가도로 밑을 걷다가 본 장면이 너무너무 생각이 나요. 워크맨을 들을 때 노래 한 곡 끝나고 나면 공백이 있잖아요. 그런데, 차가 쭉 지나가는데 제 쪽으로 좀 위험하게 지나갔어요. 그러면서 자동으로 스톱을 누르고 ‘어우, 다행이다. 와 죽을 뻔했네’이러고 나서 다시 재생을 눌렀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이건 잊어먹을래야 잊어먹을 수가 없죠. 그런 감동이 있는데...

 

저는 이 노래가 진짜, 누군가에게 어떤 상황일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을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낸 거예요. 어쨌든 진눈깨비라는 노래는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듣고 하진 못했을지 몰라도, 저한테는 최고의 노래죠. 사실 그날이 진눈깨비는 아니었고, 눈이 막 내리기 시작할 때지만 아주 그 장면이 생각나요. 아파트 굴뚝 위에 하얀 연기가 막 올라가고... 그랬던 생각이 납니다.

 

- 동아기획 소속 가수들의 정신적 지주는 어떤 분이었나요?

 

김현철 : 그렇게 ‘내가 정신적 지주야’ 하신 분들은 안 계시죠, 하지만. 조동진 씨가 그 역할을 해오셨던 거 같아요. 결국에 조동진 씨는 자신을 따르는 후배 뮤지션들을 데리고 하나음악이라는 것을 나중에 차리셨죠. 한동준 씨, 장필순 씨, 낯선 사람들, 다 그런 그 멤버들이 있었어요.

 

- 조동진 씨를 후배들이 유독 따르고, 존경했던 이유가 있을까요?

 

김현철 : 음... 아까도 계속 얘기했지만 ‘행간’ 때문인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이런 부분에서 잘못했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분 같아요, 제가 봤을 때는. 그래서 일을 어떻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지도 않으시고요. 그렇지만 결국엔 그분이 뜻하신 대로 흘러가요. 아무도 ‘야, 조동진 형님이 무슨 말씀 하셨지?’, ‘몰라...’ 그러는데 일이 돼가는 걸 보면 조동진 형님이 뜻하신 대로 되어가는 것 같거든요. 그런 게 바로 그 ‘행간’이라는 거겠죠.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 앞서 김현철 씨는 ‘그 시대적인 생각과 요구에 맞춰가다 보면 방송활동도 하게 된다’고 하셨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 오버그라운드 가수였나요? 아니면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나요?

 

김현철 :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죠, 사실은. 언더그라운드냐 오버그라운드냐. 별 의미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그런 벽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방송의 규제가 많았거든요. 규제를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 방송을 하고,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못 하거나, 안 하거나. 그런데 동아기획 식구들은 그런 규제에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었을까... 흔한 예로 머리 기르지 말라고 했는데 머리 기른 분이 대부분이었고, 먹지 말라는데 막 먹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니까, 선글라스 쓰고 나오지 말라고 그러면 굳이 쓰고 나가겠다고 그러고. 그러면 방송에는 부적합 한 거죠.

 

- 규제에 반하는 성향의 분들이었군요.

 

김현철 : 그런 것도 있기는 해요. 그 당시에 우리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뭐였을까 생각해 보면, 반대로 하는 거 일 수 있잖아요. 제도권에서 하라는 그 반대로 하는 게 원하는 게 아니었을까.

 

- 김현철 씨에겐 ‘천재’라는 수식어가 종종 붙곤 하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현철 : (웃음) 모차르트한테 천재라고 그러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 데뷔 때부터 이미 앨범을 제작할 때 전곡을 작사, 작곡, 노래했기 때문에 그렇게들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김현철 :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근데 그러는 게 재밌으니까 했겠죠. 제 앨범이니까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다 했을 거예요. 재밌잖아요, 자기 혼자, 자기 멋대로 할 수 있고.

 

- 트랙 리스트가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도록 앨범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건 아닌가요?

 

김현철 : 저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유재하 씨 1집 같은 경우에는 1번부터 끝 곡까지 하나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쭉 흘러가는데. 저는 한 번 도 그랬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앨범을 낼 때, 일 년에 한 장씩 내야 한다, 뭐 2년에 한 장씩 내야 된다. 그런 건 누가 정한 얘기냐. 그게 제 주장이죠. 10년 있다 내든, 몇 년 있다 내든 그간에 있던 이야기를 담아내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 데뷔 초기에 ‘제2의 유재하’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고요.

 

김현철 : 아, 유재하 씨는 한 번도 못 봤어요. 87년도 11월 1일에 돌아가셨는데 제가 89년 8월 데뷔니까 그분은 만나 뵐 수가 없었죠. 유재하 선배는 저한테는 우상이죠. 요즘에는 어떤 가수가 선배 가수를 우상 삼더라도 그 사람과 친해지면 우상보다는 형으로, 선배로 대접하기 마련인데, 유재하 선배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경외하는 존재인 거죠.

 

- 유재하 씨의 어떤 곡이 가장 와닿았나요?

 

김현철 : 제가 유재하 십 주기 앨범을 프로듀싱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많이 들었죠. 하지만 활동하실 당시엔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분 곡들 중에서 이 곡이 가장 아플 때 같거든요. ‘우울한 편지’나 ‘가리워진 길’ 보다도 더 아픈 얘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개인차 같은데, 누구는 밝은 음악, 춤출 수 있는 음악을 좋아하는 반면에 저는 ‘행간’을 좋아하나 봐요, 행간. (웃음)

 

- ‘행간’을 알려주신 조동진 씨가 동아기획을 나와 하나음악을 만드셨을 때 같이 가셨나요? 

 

김현철 : 아니요, 

 

- 이유가 궁금하네요.

 

김현철 : 저도 모르겠어요 하여튼 전 남게 됐어요. 하지만, 하나음악 사무실에는 매일 같이 가서 같이 술 먹고, 형들이랑 얘기하고,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사실은 조동진 씨가 한 번 불러서 ‘너, 와서 음반 내지 않겠냐’고 했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동아기획에 있겠습니다’ 했어요. 이 얘기는 아무도 모르죠. 

 

- 그만큼 동아기획이라는 존재가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현철 : 동아기획이 없었으면 애당초 저는 가수 할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 첫 앨범을 다른 회사가 아니라 동아기획이 내자고 해주신 데 대해 지금도 너무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회사가 조합같이 되어 있다는 게 전 상당히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선배님들한테 음악적으로 배운 거야 너무너무 많죠. ‘음악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배우게 됐어요.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날이.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동아기획은 제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89년, 동아기획의 막내로 데뷔했는데, 어느덧 가요계에서 대선배가 되셨습니다. 선배로서 가요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나요?

 

김현철 : 어후, 그렇게 됐어요, 벌써, 제가 느끼는 제 역할은 아직까지 확실치는 않아요. 이번에 10집 앨범 [돛] 내면서 ‘아 우리가 지켜왔던 이런 음악이 있었어’라는 걸 내비치고 싶은 거죠. 그런 음악을... 누군가 탄탄히 다져서 건물을 지어야 되는데 지금은 건물 지을 사람이 다 흩어진 거예요. 흩어진 한 분 한 분 모셔다가 ‘우리 집 한번 다시 지어 봅시다. 옛날에 형 목수 일 잘했잖아요. 형 타일도 하시잖아요’하면서. 지붕 잘 만드시는 분들도 있고. 그런 분들 다시 모셔다가 한번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집이 아직도 건재하고, 아직도 음악 하는 필드에서, 유용한 집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한번 지어 놓은 집은 무너지지 않고, 그 집을 어떤 용도로 쓰든, 누구나 와서 누구든지 와서 기거할 수 있는 그런 집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학전에 관해서도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김현철 : 저 가수 데뷔한 즈음 세워졌으니까 저랑 나이를 계속 같이 먹고 있는 극장이죠,

 

- 그 무대에서 공연한 적 있나요?

 

김현철 : 네네. 2019년도에 30주년 공연 때 제가 이틀 섰어요, 그것도 이제 평일 날.

 

- 학전에 공연도 많이 보러 가셨나요?

 

김현철 : 그럼요, 옛날에 이소라 씨를 처음 만난 게 그 공연장이죠. 낯선 사람들, 김광석 씨 공연도 봤고, 거기 대학로에 가서 있으면 (웃음) ‘형 소주 한잔해야죠’하면서 여행 스케치도 만나고, 그리고 거기 가면 누군가 한 명은 아는 사람을 만나요. 거기도 말하자면 심플 라이프같이 사랑방 역할을 하는 거죠.

 

- 소극장 공연은 어떤 매력이 있나요?

 

김현철 : 대극장 공연을 하면 솔직히 말해서 ‘나’와 ‘관객’이에요. 관객을 ‘한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소극장에서 하면 관객이 150명 오면 ‘나와 150명’, 200명 오면 ‘나와 200명’이에요. 관객들이 각각 여기까지 온 사연은 모르겠으나 공연장에 왔을 때 그 기분들을 다 알 수 있어요. 시청자들이 TV 보는 모습을 TV 입장에서 본단 말이에요. 그럼 저를 보는 관객들은 자기가 인상 쓰는지, 웃는지 알 수 없죠. 그걸 제 입장에서 보면 관객들의 그런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물론, 또 제가 짓는 표정을 저는 모르지만 관객분들은 다 보시고 계실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나, 너무나 좋아요, 다 보여요. 저 끝에 있는 분 까지...

 

- 학전하면 떠오르는 가수는 누구인가요?

 

김현철 : 김광석 씨가 가장 떠오를 거예요, 그렇지만 저희들은 김광석 씨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가수들이 떠오르죠, 진짜 많은 가수 떠올라요, 

 

- 김광석 씨 공연은 어떤 점이 특별했나요?

 

김현철 : 김광석 씨는 혼자 하잖아요. 광석이 형 노래 부르는 창법도 목이 좀 안 가는 창법이에요. 그렇지만 그거를 막 몇 달 동안 한다는 것은 뭐 외국에도 없는 경우일 거예요. 대단했어요, 혼자. 게스트가 가끔 있어요.

 

- 김광석 곡 중 특별히 감명받으신 곡은 어떤 곡인가요?

 

김현철 : 음... 저는 가장 많이 알려진 ‘서른 즈음에’. 제가 지금 쉰이 넘어 보니까, ‘서른 즈음에’가 서른 즈음에가 아니더라고요. 내가 한 오년 후에 할 수 있는 얘기를 한 거 같아요. 강승원이라는 분이 쓰셨는데, 그분은 서른 살 즈음에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쓸 수 있었을까 싶어요. 듣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라지는 거라서. 저도 언젠가는 한번 리메이크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 학전의 대명사 김민기 씨와도 교류가 있었나요?

 

김현철 : 그분이 저를 볼 때는 항상 ‘꼬맹이’죠, 항상 꼬맹이 (웃음) 저는 ‘형님’, ‘선배님’.

 

- 처음 만나신 건 언제인가요?

 

김현철 : 제가 그분을 처음 봤을 때, 김민기 선배님은 기억 못 하실 거예요, 1집 내기 전에 조동진 형님 작업실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뵀어요, 

 

- 김민기 씨 노래도 좋아하시겠군요.

 

김현철 : 네, 저는 ‘봉우리’라는 노래를 제일 좋아해요. 근데 그 노래 좋아한다고 그러면 민기 형님이 맨날 뭐라고 그래 가지고. (웃음) “야, 그 노래는 임마, 내가 30분 만에 쓴 거야”그러시거든요. 근데 30분 만에 쓰던, 3분 만에 쓰던, 30초 만에 쓰던, 뭐 어때요. 그 노래가 가지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큰 의미가 있는데. 그게 저한테는 너무 큰 거죠.

 

그리고 그런 게 우리 음악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죠. 내가 이 말을, 이 단어를, 이 문단을, 이 곡절을 썼을 때는 그런 생각 못 하고 썼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이상으로 느낀다면 그대로 되는 거잖아요. 제가 늘 하는 얘기지만 곡은 날 위해 쓰는 게 아니라 듣는 사람들을 위해 쓰는 거죠. 김민기 선배님이 30분 만에 그 곡을 쓴 게 맞겠지만, 제 안에는 이 노래가 아직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예요. 

 

이 노래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봉우리’라는 주제가 아니에요. 봉우리에 올라서 본 그 바다지요. 일절 끝나고 ‘저 바다~’라는 가사 나올 때 그 음색이나 김민기 선배님의 목소리, 그 아우라가 어우... 봉우리는 그냥 그 봉우리일 뿐인데, 봉우리에 가서 바다를 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 김민기 씨는 30분 만에 ‘봉우리’를 쓰신 거군요...

 

김현철 : (웃음) 30분 만에 썼는지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요. 김민기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현철아, 너랑 나랑 음악을 하지만 너는 내가 봉우리를 썼을 때, ‘봉우리 같은 가사를 어떻게 씁니까. 저는 그런 가사를 못 씁니다’라고 얘기하지. 나는 너와 같은 가사를 못 쓴다. 서로 쓰는 게 다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야 문화는 발전한다.” 이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 김민기 씨도, 조동진 씨도 그러한 면모들에 후배 뮤지션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는 것 같네요.

 

김현철 : 존경하죠. 두 분 다 말씀이 다 없으시거든요,

 

- 말씀이 다 없으세요?

 

김현철 : 그 무언가를 표현할 때는 말뿐이 아니잖아요. 눈빛, 행동 그다음에, 침묵도 그 사람이 표현하고자 하는 방편 중의 하나였죠.

 

- 학전은 김현철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김현철 : ‘심플라이프’가 음반을 내기 전에 우리의 활동이나 모색하는 데라면, 학전은 음반을 내놓고 이후 활동을 모색하는 장소인 것 같아요. 그리고 공연예술이라는 것은 음반이랑 또 차원이 다른 거라서. 뭐랄까... 살아있죠. 근데 그 살아있는 학전이라는 극장을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우, 몇 년 못해요. 근데 그걸 30년이 넘게 하시는 분이 계시잖아요, 

 

저는 가면 갈수록 더 느끼거든요. 아, 저분이 몇 년까지 계속하실까. 그런데 더 하실 거 같아요. 그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학전 소극장’으로 명명될 정도로 학전 그 자체이시니까요. 학전은... 단순히 공연장이 아니잖아요, 그 무대 한 번이라도 서 봤던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거지. 학전은 언제까지라도 남아있을 수 있어요

 

 

[사진출처=Fe&Me]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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