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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30
by 우정호

가수 인생 50년,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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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4-30작성자  by  우정호 

본문



 

 

(2부에서 이어집니다.)

 

 

- 김민기 씨를 ‘우상으로 생각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들이 그랬는지 알고 싶습니다.

 

양희은 : 나는 천재라고 봤어요. 특히 말과 멜로디를 붙이는 데 있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많이 살린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훌륭한 곡들을 만들고, 30대 넘어가면서는 ‘공장의 불빛’ 등등 여러 가지 작업들을 또 했잖아요.

 

- 김민기 씨 곡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어떤 노래인가요?

 

양희은 : 다 좋죠. 뭐, 1972년 음반에 실려 있는 노래는 저는 다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백구’라는 노래. 우리 집에 살던 어린 시절의 강아지 얘기인데 저희 막냇동생이 초등학교 때 글짓기 한 거거든요. 그걸 바탕으로 김민기 씨가 노래를 만들었죠. 제 동생 이름이 작사로 올라가 있진 않지만 제 동생이 썼어요. 재동 국민학교 글짓기 대회에서 뽑혀서 원고지가 이렇게 교실에 꽂혀있었거든요. 그 백구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었고, 저도 또 개를 쭉 기르다 보니까... 

 

‘백구’가 좋은 이유는 노랫말 속에 어린 날의 우리 집 풍경이, 아버지 살아계실 때 그 모든 게 다 들어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그 노래를 부를 때 우리 가회동 집의 아버지와 또 백구와... 우리 집에 개가 너무 많았거든요. 개집에 사람이 사는 것 같았어요. (웃음) 사람 집에 개가 사는 게 아니라. 그 시절, 내 어린 날의 아무 걱정 없던 시절의 그 모든 게 떠올라서 애잔하죠. 그래서 좋아해요. 제 얘기, 우리 집의 얘기. 막냇동생의 얘기니까. 

 

- 시간이 흘러 90년대 초 김민기 씨가 만든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도 공연하신 적 있나요? 

 

양희은 : 했어요. 객석이 아니라 대기실에 오수 냄새가 너무 끔찍해서. 하수구 냄새가 거꾸로 올라오는데 진짜 수체에다가 얼굴을 처박고 있는 것 같은 두통과 그 공기 소통이 안 돼가지고 너무 괴로웠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안 가봤죠. 무대 뒤로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할 때는 하여튼 그랬어요. 

 

- 김민기 씨와 인연을 생각했을 때 학전에서 양희은 씨도 공연을 많이 했을 거라고 추측이 됐습니다.

 

양희은 : 김광석 씨가 엄청 많이 했죠. 제 공연하고 항상 겹쳤어요. 김광석 씨가 장기 공연하고 그러니까 제가 할 기회가 나지를 않았어요. 그럼 저는 다른 데서 하고. 그럴 수밖에 없죠. 

 

- 그럼 학전 이외에 다른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하셨나요?

 

양희은 : 뭐 동숭아트홀도 했고, 라이브 라이브 소극장이라는 데서도 했고 또 어디서 했을까? 어디서 했지? 

 

- 90년대는 소극장 공연 전성기로 알고 있습니다.

 

양희은 : 그 당시에 대학로에서는 참 활발했어요. 그게 어떤 그리움이 있었죠. 20년 전의 그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 그런 만남이. 확성 시키지 않을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확성은 불가피하고요. 무대가 이렇게 밑에 있고, 객석이 이렇게 올라가는 그런 것도 참 좋았고. 무대에서 객석을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무대에서 객석을 이렇게 올려다보는 거 저는 참 좋아해요. 

 

- 공연자와 관객의 거리도 매우 가깝고요.

 

양희은 : 그게 ‘청개구리’ 시절의 향수일 수도 있어요. 제가 처음 시작한 무대가 마이크 없이 관객 바로 앞에서 했으니까 그럴 때 그 소통하는 소극장에서 관객과 또 나와 어떤 소통되고 만나는 지점, 그 기분은 꼭 연애하는 것 같달까? 뭔가 하여튼 남다른 게 있죠. 대극장하고는 다른 게 있어요. 

 

- 들국화를 비롯해 당시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주로 공연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양희은 :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도 많았고. 언더그라운드는 일단 극장을 빌리고 객석을 채우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렇게 될 수가 없죠. 아, 들국화는 나랑 한번 같이 동숭아트센터에서 같은 시기에 공연을 했는데, 내 공연이 있고, 그 친구들은 덕성여대의 무슨 뮤지컬인가 그 바로 밑에서 했어요. 그래도 장기 공연이었는데 저는 3주 했거든요. 그래서 들국화랑 나란히 공연이 붙었는데, 들국화는 며칠 하다가 링거 꽂고 그냥 뻗었어요. 그래서 제가 ‘예스! 내가 너희들을 물리쳤노라’ 그런 적이 있어요. 들국화의 시작에는 내가 많이 찬조를 했어요. 옛날 신촌에 그랜드백화점 꼭대기 옥상에서 공연을 했거든요. 그때 참 많이 가서 게스트로. 그냥 제가 가서 해 준다고 그러고 같이 했어요. 

 

- 들국화 멤버들과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나요?

 

양희은 : 뭐... 긴 시간을 얘기하고 이런 거보다, 그냥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피차 호감인 사이. 80년대에 들국화는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이 막강했죠. 조동진 선배도 그렇고.

 

- 조동진 씨 역시 김민기 씨와 더불어 한국 포크의 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희은 : 네. 80년대의 조동진 선배가 참... 그동안 지은 노래들을 발표할 길이 있었죠. 70년대에 저한테 불러 달라, 이 노래 부르면 어떨까 하고 가져다주신 노래는 다 심의 부결이었어요.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심의를 통과해야 음반이 나오는데 심의가 부결돼서 부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노래들을 다 동진이 형이 직접 부르시면서 세상에, 또 젊은이들한테 알려졌죠. 

 

- 조동진 씨와도 교류가 많이 있었나요?

 

양희은 : 그냥 조동진 선배 댁에서 많이 만났죠, 주로. 조동진 선배 댁이 다들 집합 장소였어요. 그러나 뭐 나는 결혼해서 떠나고, 또 돌아와서는 라디오 방송 생방송 늘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통기타가 조금 주춤했죠. 주춤했어요. 그러면서 뭐 그냥 오다가다 만나는 거지 이렇게 작정을 하고 볼 수는 없었어요, 저는. 뭐 저는 또 밥하고. (웃음) 방송하고. 그런 일과가 있었으니까요. 

 

- 포크 가수로서 눈여겨보는 후배나 좋다고 느끼는 노래도 있으신가요?

 

양희은 : 있죠. 없을 수가 없죠

 

- 어떤 가수인가요? 

 

양희은 : 그런데 그건 얘기 안 해요, 나는. 

 

- 왜요? 편애할까 봐 그런 건가요?

 

양희은 : 네. 그리고 내가 그 사람하고 알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그 노래가 좋다는 거니까. 어쨌든 요새 통기타 노래는 활발하지는 않아요. 뭐 새 노래가 나와야 그게 뭔가 이렇게 활성화되는 거 아닌가요? 악기로서 통기타를 치는 그런 가수들은 있죠. 기타를 다루는 가수들은. 그렇지만 포크는 어디선가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게 70년대처럼 그렇지는 못한 것 같아요. 요새 젊은이들은 뭐 완연히 장르가 다르잖아요. 어차피 가수들은 다 자기 세대 사람들의 응원을 먹고 크는 거예요. 나는 이미 이제 데뷔 50주년에다 70 바라보는데. (웃음) 뭐 요즘 사람들의 음악이라는 건 정말 전혀 색다르죠. 신선하기도 하고. 

 

- 통기타 가수들 중엔 소극장 공연을 많이 하되 방송 출연은 거의 하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양희은 : 아, 방송 출연을 안 하면 언더그라운드인가요? 공영방송에 나오면 햇빛 아래 있는 거고, 공영방송에 나오지 않으면 그늘에 있는 건가요? 

 

- 그건 아니죠. 

 

양희은 : 글쎄. 나는 그것도 모르겠어.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떤 생각도 하냐면, 언더그라운드의 모든 꿈은 온 더 그라운드 아닌가요? 

 

- 맞습니다. 

 

양희은 : 뭐 땅 밑에 있다든지 좀 그런 의미로 쓰인다면 그것에서 벗어나서 양명하게 드러나고, 여기저기서 자기네 노래들을 연주해 주고 들려주는 것이 그것이 언더그라운드의 틀을 벗어난 건지. 그것이 소망하는 바인지. 아니면 언제나 나는 그늘 아래 있겠어. 그늘 아래 있으면서 양명한 곳에 있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또는 뭐 그 상업적으로 좀 타협하는 친구들을 향해서 손가락 질을 하면서 날카로운 비평을 날리겠어. 이게 언더그라운드인지. 그건 참 모르겠어요. 그러면 철저하게 언더그라운드인 사람들이 있나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죠. 마니아들만 몇 있다가 어느 날 정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비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잖아요. 언더그라운드에만 진짜 이렇게 그늘로, 양지로 못 나오는 것만 계속 바라는 사람들은 없을걸요? 뭐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모르겠어요. 자신 못 하네. (웃음) 

 

- 스스로 ‘주류’가 되고자 했던 적은 없었나요?

 

양희은 : ‘주류가 되면 좋겠다’하는 바람이 있냐고요? 출발부터가 아니에요. 

 

- 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양희은 : 네. 

 

-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주류가 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양희은 : 두고 봐야 알 것 같은데. (웃음) 나는 내가 주류라고 생각 안 해요. 그게 통기타 정신이에요. 메인 스트림은 아니죠. 가수가 무서운 건 그거죠. 죽고 나서도 이 허공에 전파를 타고 자기 노래가 나오는 거죠. 그런데 노래는 취입하고 나면 늘 창피하거든요.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해서 OK를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아, 저렇게 푸는 게 아닌데' 뭐 이런 생각을 하고. 또는 그 시절의 치기나 인생을 보는 그 좁은 시각 같은 것도 거기 노랫말에 다 들어 있다고요. 자기가 마치 사진 찍으면 그 시절 자기가 이렇게 읽히듯이. 그런데 가수는 죽고 나서도 그 목소리와 그 시절 자기가 갖고 있었던 얘기가 그 생각들이 그대로 나가잖아요. 부끄러운 노래도 많잖아요. 그러니 참 그런 업보가 없어요, 죽고 나서 부끄러운... (웃음) 그때는 왜 저걸 잘 했다고 생각하고 OK가 났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렇게 울려퍼지니까. 진짜... 어깨가 가벼운 일은 아니에요. 

 

- 90년대는 특히 한국 대중음악의 부흥기라 댄스, 발라드, 록을 비롯해 각종 장르 가수들이 TV에 나와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는데요. TV가 아닌 대학로 무대에서의 공연도 흥했다는 점이 놀랍긴 합니다.

 

양희은 : 뭔가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갈급함이. (한숨) 나는 이런 기억이 나네. ‘우리 여자들은 언제나 모든 걸 놓치고 살죠’라는 문구의 편지가 있었어요. ‘내가 콘서트 표를 사 놓으면 남편이 느닷없이 회사 동료들을 끌고 온다든지, 시댁의 제삿날이든지, 애가 아프든지, 그래서 나는 늘 놓치고 살았어요. 그러나 오늘 나는 애들을 챙겨 입히고 나오면서 내가 오늘을 놓치면 나는 다시는 내가 원하는 공연이나 이런 걸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대학로에 왔다’고 써있더라고요. 

 

이 사연을 알게 된 이유가 있어요. 공연 때 언제나 앙케트 지를 돌렸어요. ‘이 공연에 오게 된 이유’, ‘무슨 노래를 못 들어서 섭섭한가’, ‘누구의 권유로 왔나’같은 걸 물어보는 거죠. 그러면 관객 중 10% 정도만 그 대답을 써서 주고 가요. 이게 현장에서 음반이 팔리는 거랑 똑같아요. 콘서트 할 때 CD를 놓고 팔잖아요. 정확하게 10% 나와요. 그런데 내가 노래를 잘하고 그날 공연이 기가 막혔다. 그러면 25%, 30%까지 나와요. 극히 드물어요. 그런데 그날 어느 여자가 쓴 앙케트지 사연을 읽은 거예요. ‘애들을 아주 결연히 씻기고 부산을 떨며 자기가 대학로에 왔는데, 나는 니 노래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다. 노래를 들으려면 CD로 듣지, 집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을 보러 왔다. 그 눈빛을 잘 보고 갔다 생각한다’ 그렇게 써 있더라고요.

 

또 IMF 때 제 공연 이름이 ‘우리는 지금 한계령을 넘는다’였어요. 그다음에 ‘아줌마, 대학로에서 길을 잃다’, ‘지금은 아줌마 시대’ 뭐 이런 식인 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한 사람이 자살을 결심하고 자기는 중소기업 오너인데 지금 낭떠러지 끝에 있어서 죽는 거밖에는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이 콘서트 티켓값도 나한테는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아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내가 마지막 선물로 아내와 함께 여기 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몇십 년을 바쳐 일을 한 끝이 이거인가. 끝내자 했는데 내가 공연을 다 보고 나가면서 다시 시작하자 그러고 나간다. 고맙다. 그런 사연도 있고. 그래서... 참 그런 게 끔찍하죠. 그런 사연을 보면 아, 노래라는 게 이렇게 가볍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잘해야 되겠다는 게 사실 어떤 의미에서 저한테 부담이고 압박감이죠. 좀 가볍게 날아갈 듯이 좀 하고 싶어요. (웃음) 날아갈 듯이 좀 가볍게. 흥겹게. 그런데 또 그렇게 안 되기도 하고. 

 

- 노래를 즐기면서 부르고 있지는 않다는 말씀인가요?

 

양희은 : 못 해요, 아직 못 즐겨요. 내가 언제 즐기면서 할까? 죽고 나서야 되려나? 못 즐겨요. 2시간 20분 정도를 혼자 공연하면서 즐긴다? 참 그거는 대단한 거죠. 나는 무대공포증이 심했지만 요새는 그래도 그 텀이 좀 짧아졌어요. 한 1시간쯤 지나야 긴장이 좀 풀리고는 했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조금 그게 짧아져서 굳어 있는 게 좀 이렇게, 이렇게 풀리는 게 시간이 좀 짧아졌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래요. 

 

- 소극장 공연에는 TV에서 가수를 보는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공연자와 관객 간의 호흡이라는 게 존재했던 거군요.

 

양희은 : 제 공연에 온 어떤 여자는 애를 그 천에다 업고 왔는데 문이 닫히니까 문을 막 발로 차요. ‘내가 결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하루를 말미를 얻어서 왔는데 나 들어가게 해 달라’고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무대에다 앉힌 적도 있어요. 그게 소극장이기 때문에 소방법 같은 게 있잖아요. 의자가 부족하다고 낚시 의자도 못 깔아요. 큰일나요. 그러니까 기획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소극장은 몇 달을 해도 손익분기점이 안 떨어져요. 그러니까 이거는 정말 공연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거지 오붓한 그런 시간을 즐기려고. 그 갈급함이... 저는 저밖에 모르니까. 제 이름을 걸고 티켓을 판 게 처음이니까요. 94년도에. 그러니까 저를 이렇게 마주 대하고 노래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그런 갈증도 있겠고, 또 얘기 콘티가 짜여 있지를 않아요, 저는. 노래가 너무 진지하게 좀 웃기고요. 뭐 유행하는 재미난 얘기도 하고요. 또 재미난 얘기를 또 거꾸로 물어봐서 엄마들의 대답을 듣고 또 이쪽에서 대답하면 저쪽에서 대답하면서 돌아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 그러한 즉흥성 또한 소극장에 사람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너무나 큰 매력이었을 것 같습니다.

 

양희은 : 그럼요. 짜여 있는 게 없어요. 그게 참 좋아요. 어떤 우스운 얘기가 터질지 모르거든요. 백구를 부르기 전에 “자, 집에서 어린 날 기르던 개 이름 대 보기” 그러면 어떤 사람은 또 막 “음식에 무슨 이름을 붙입니까!” 또 뭐 이런 분도 계시고 별의별 강아지 이름이 다 나오잖아요. 그중에 ‘전두환’이 있었어요. 진짜 모든 사람이 터졌어요. 어쩌면 그렇게 한꺼번에 웃음보따리가 터졌는지. 그런 시간도 있고. 또 우는 시간도 있고. 내가 울린 건 아닌데 그렇게 흑흑흑흑 하면서 좀 퍼지는 그런 것도 있고. 그거는 공연을 이렇게 짜보자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사람들 머리 위에서 내가 이렇게 탁 던지면 아마 반응이 이럴걸? 그거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교만은. 

 

- 무대공포증이 있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공연하는 걸 사랑하시는군요.

 

양희은 : 공연 연습하는 걸 좋아해요. (웃음) 공연 연습할 때 제일 행복해요. 제일 나 같아요, 우리 연주 팀들이 다 오래된 식구들이니까 뭐 이렇게 마주 보면서... 무대에서는 마주 볼 수 없잖아요. 등지고 있죠, 연주 팀하고. 연습할 때는 마주 보잖아요. 참 편안해요. 긴 세월 사실 우리 집에서 밥해 먹이면서 연습해 온 팀워크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이제 좀 몇 명 바뀌었지만 그래도 늘 정말 식구, 같이 밥을 먹는 그런 개념이었어요. 

 

- 데뷔 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노래하셨는데도 무대공포증에 시달리신 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양희은 : 알면 알수록 있어요. 내가 그래서 이 공포를 얼마나 연구했다고. 그래서 ‘공포를 아는 자만이 프로다’라고 누가 그랬는데 (웃음) 나 그걸로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뭐 예를 들면, 마크 트웨인인가 얘기한 것 중에도 공포에 관한 게 있어요. 그 사람은 글 쓰는 공포겠지요? 그래. 공포가 나를 이렇게 그냥 괴롭히는 게 비정상은 아니구나. 마침표 딱 찍으면서, 아, 그래.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도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렇구나 (웃음) 이렇게 생각하죠. 진짜 내가 무대에 떨라고 올라온 것 같아. 어렸을 때는 안 그랬어요. 멋모를 때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요. 나는 두려운 적이 없어. 눈 하나 까딱 안 했어요. 사십 넘으면서부터 모든 게 무서워요. (웃음) 너무 무서워. 

 

- 양희은 씨의 전성기는 70년대라고 볼 수 있을까요?

 

양희은 : 나는 데뷔 연도처럼 전성기에 대한 질문도 싫어. 뭐가 전성기유? 가수가 TV나 라디오같은 매체를 통해 많이 들려질 때. 보여질 때가 전성기인가? 아니면 가수 마음에 일하는 자기가 제일 마음에 들 때가 전성기인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는 흔적을 감췄지만 대중들이 속으로 엄청 원할 때가 전성기인가? (웃음)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유, 양희은 옛날에 70년대 전성기 때’ 그러는데 그때 나는 학비를 못 내서 두 번을 휴학하고 마지막에는 자퇴를 했으며, 다시 재입학을 해서 7년 반 만에 졸업을 했는데 그때가 나의 전성기인가? (웃음) 

 

도대체 무엇을 전성기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저는 전성기가 아직도 안 온 것 같아요. 내 음반이 뭐 라디오나 이런 데서 많이 틀어졌다고 그래도 나는 그냥 한구석에서 조용히 라디오 DJ를 했을 뿐이고. 미친 듯이 바쁘거나 어떤 한 노래를 질리듯이 불러본 적도 없고 뭐 항상 그래요. 

 

‘한계령’도 85년에 나왔는데 1년에 두 번도, 세 번도 못 부르고 넘어가던 해도 있고. 또 1년에 하는 열댓 번 부를 때도 있고 그러니까. (웃음) 무엇을 전성기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나의 전성기라고 할 때 나는 정말 배고프고 힘겹고 등록금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녔는데 뭐 그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나는 진짜 ‘The Best is yet to come'(프랭크 시내트라 노래) 가장 최상의 것은 아직 안 나왔다고 생각을 하지만 모르겠어요. 진짜. 마감하기 전일지 뭘지를 모르겠어. 

 

 

 

[사진출처=양희은 인스타]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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