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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김작가

록스타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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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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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집니다.)

 

'바다사나이'로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된 노브레인, 그들이 성공을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명세의 길을 마다하고 드럭을 나와 자체 레이블 '문화사기단'을 설립한 이야기, 그리고 원년멤버 차승우의 탈퇴이후 '넌 내게 반했어'로 대중적 성공을 견인하기까지의 음악 영화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다.

 

- 밴드 이름을 노브레인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성우 : 그때 이름 후보가 정말 후졌어요. ‘냉면 개시’, ‘꿀단지’, ‘고추장’ 이런 게 후보였죠. 중국집에 가면 ‘냉면 개시’ 깃발 있잖아요. 그거 막 흔들면서 ‘냉면 개시 짱이다’ 하면 어떨까... 제가 좀 밀긴 했어요. (웃음) 그러다가 ‘너도 또라이고 나도 또라이고 모두 다 또라이야’ 약간 그런 느낌으로 그때 노브레인이라고 한 거죠.

황현성 : 그 이름에 그때 저희가 만사 다 싫어했던 그런 심리가 들어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할 때는 뭐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다 같이 무뇌 상태가 되어 즐겨보자, 음악을 할 때는 무뇌로, 무대에 있을 때는 무뇌로 즐기는’ 등등. 이런 거 다 뻥이고 사실 그냥 브레인 이런 걸 거부하고 조롱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우리 멍청한데 어쩔 건데? 이런 거였죠.

 

- 노브레인이란 이름으로 처음 공연했던 순간 기억나세요?

 

이성우 : 첫 공연엔 현성이 없었어요. 그때 드럼 멤버가 없어서 크라잉넛 상혁이 도와줬거든요. 첫 공연에 세 곡인가 네 곡을 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뭐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끝나고 되게 얼떨떨했어요. 크라잉넛 친구들이나 주변 동료, 친구들이 ‘잘했어, 잘했어’ 해주고 너무 좋았다고 해줘서 좀 우쭐하고 뭔가 된 기분에 끝나고 맥주 한잔하면서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 그때 어떤 노래 하셨어요? 

 

이성우 : 그때 부른 노래가 섹스 피스톨스의 ‘Anarchy in the U.K.’랑 ‘God Save the Queen’, 그리고 다른 밴드의 노래 한 두 곡 정도였어요. 그땐 자작곡이 없었어요. 다 커버로 시작을 했고, 자작곡을 제대로 시작한 건 현성이 들어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아요. 황현성 : 보통 데뷔 무대를 보면 준비를 많이 하잖아요. 저흰 그런 게 아니었죠. 제가 드럼 자리에 들어가면서 완전체가 됐는데, 그때도 ‘이제 완전체로 연습을 제대로 해서 진짜 첫 무대를 열심히 하자’ 이런 게 아니었고 그냥... 그냥 했어요. (웃음) 그러니까 보통 가수들이랑은 출발이 약간 달랐죠. 무대도 단차가 전혀 없는 클럽에서 하고.

이성우 : 근데 밴드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로컬에서 재밌게... 우리가 처음에 뭔가를 막 해보겠다, 이런 것보단 그냥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의기투합해서 지른 건데, 밴드는 그렇게 하면서 커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완벽하지 않더라도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시작하는 게. 그러면서 커가는 것 같아요. 저흰 처음에 룰이 정말 없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해체도 한 번 했었죠.

 

- 해체한 적이 있어요?

 

이성우 : 해체도 한 번 했어요. 노브레인 시작하고 1년인가, 2년쯤 지나서. ‘그만하자’, ‘그래하지 마’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다 나왔어요. 연락도 안 했는데. (웃음) 저는 어차피 그 장소에 맨날 있는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데 멤버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라고요. ‘미안해’ 그러면서 또 연주하고. (웃음)

 

- 그럼 첫 자작곡은 기억나세요?

 

이성우 : ‘아름다운 세상’이란 노래였던가? 너무 오래돼서... 그 노래가 약간 근본이 없는 노래거든요. 처음부터 박자가 계속 빨라지다가 느려지다가 레게 나왔다가 갑자기 또 빨라지고...

황현성 : ‘I Get Around’랑 ‘아름다운 세상’ 두 곡이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진짜 급조해서 곡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공연을 할 정도로.

 

- 그걸로 공연하신 거예요?

 

황현성 : 네, 하면서 ‘이 부분 재미없지 않냐?’, ‘이 부분 너무 빨라지는 거 아니냐?’ 이러면서 편곡 바꾸고...

이성우 : 그때는 발표하고 편곡했어요. (웃음) 간 보고 편곡하고. 저희는 곡을 발표하고 공연을 한 게 아니라,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한 다음에 한참 이따가 녹음을 다시 하고 그랬거든요. 지금이랑 완전히 반대죠.

 

- 그럼 그때 공연할 때는 팬들이 좀 있었어요?

 

이성우 : 처음엔 없었죠. 뭐 10명, 20명 오고 거기서 노래 부르고 끝나고 난 다음에 관객들이랑 인사도 일일이 다 하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관객들이 점점 늘어나니까 ‘왜 우리를 보러 오지?’ 그러다가 ‘우리 음악을 제대로 듣긴 한 건가?’ 이런 의문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 공연장에 와서 즐겁지만 말고 가사까지 봐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스케치북에 가사를 써서 무대 위에서 들고 그랬어요. 관객들이 점점 많아지고 하니까 거기에 대한 반발도 약간 있었고...

황현성 : 너무 메이저화 되는 거 아니냐. (웃음)

이성우 : 이거 좀 견제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러다 가수 되는 거 아니냐,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저희끼리 심각한 회의도 많이 했어요. (웃음)

 

- 그렇게 인기가 많아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어요?

 

이성우 : 한 1997년쯤부터... 갑자기 관객 연령대가 훅 내려가는 거예요. 중, 고등학생들이 오고 보보(정민준)가 한창 저희 공연을 보러 올 때죠. 그때 갑자기 연령대가 어려지면서 ‘너희 우리 음악 듣긴 들어? 알아?’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어요. 조금 당황스러웠죠. 그땐 또 트렌드에 민감한 친구들이 많이 왔어요. ‘나 이런 거 좀 알아’ 하면서. 저희는 그게 싫은 거예요. 왜 우리가 거기에 이용당해야 하나. ‘나 이거 좀 알아’ 말고 그냥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해 달라고 그러면서...

정민준 : 만약 지금처럼 이렇게 인터넷으로 알리기 쉬운 환경이었으면 사람 더 많이 왔을 거예요. 해방구가 없던 그 시절엔 그게 자유의 세계로 가는 통로였어요. 너무 행복했죠. 거기가는 게 매일 천국 가는 것 같은, 우리나라에 태어난 게 너무 행복하고 그랬어요.

 

- 그럼 음악만큼이나 그 분위기를 좋아하셨던 거네요. 

 

정민준 : 음악도 좋고 사람도 좋고, 정말 어떠한 압박이나 룰도 없고 자유로움 그 자체였으니까요. 뭘 해도 같이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순수한 영혼들이 다 모여 있었던 것 같아요.

 

- 팬들이 좀 늘 때가 앨범 발표하고 나서인가요?

 

이성우 : ‘바다사나이’ 나오고 난 다음에 팬들이 많이 늘어서 당황했죠. ‘이거 뭐 잘 되겠어?’ 그런 느낌이었는데. (웃음) 엠넷부터 지금은 사라진 KMTV, 채널V에서 저희 뮤직비디오가 재미있다고 많이 틀어주시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도 모르게 엠넷이 드럭 앞에 와서 인터뷰도 하고, 어느 순간 라디오를 다니고 하니까 신기한 거예요. 그러면서 혼란스러워 졌죠.

황현성 : ‘바다사나이’ 뮤직비디오가 뒤에 파란 천이 걸려 있고 저희가 그 앞에서 막 노는 건 데, 원래는 그거 찍은 감독이 그 뒤에 바다 배경에 시원한 걸 넣으려고 블루스크린을 건 거거든요. 근데 감독 형이 “그냥 이 파란 천이 더 간지나지 않냐?” 이러면서 그냥 가게 된 거예요. 

솔직히 그때 그 형이 크로마키에 바다를 합성해봤는지 안 해봤는지는 모르겠는데... 근데 그걸 방송에서 본 사람들은 ‘되게 아무것도 없고 엉망인데 신선하다’ 이렇게 재밌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 그럼 <Our Nation Vol.2>은 누가 발매를 한 건가요?

 

이성우 : 아까 얘기한 드럭 이성문 아저씨. 그 아저씨가 다 발매한 거죠. 어느 날 “야, 우리 CD 내자” 하고 녹음해서 발매한 거예요. 그때도 복잡했어요. 정확한 프로덕션도 아니고 해서... (웃음) 그때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저희가 제대로 된 기획사가 아니다 보니 앨범을 낼 때 허가를 받는 게 까다로웠죠. <Our Nation Vol.2> 낼 때는 조금 완화가 된 상태였지만요. 게다가 또 웃겼던 게, 그땐 라이브클럽이 불법이었거든요.

 

- 불법이요?

 

이성우 : 불법이었어요. 공연하고 춤을 추면 유흥주점, 나이트클럽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저희는 그때 일반 음식점이었고, 일반 음식점 상태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경찰이 신고받고 오면 저희도 조사받고 드럭 아저씨 끌려갔다 오고... 진지하게 그랬어요. ‘경찰이 오면 춤을 멈추자!’ (웃음) 누가 경찰이 왔다고 하면 관객들에게 ‘멈춰! 춤추지 마!’ 하고 저희도 그냥 악기들고만 있고... 그러다 나중에 괜찮아진 거죠. 그땐 그런 일들이 많았어요. 인디 레이블로 앨범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연예기획사로 등록하는 거 자체가 좀 까다로웠던 것 같아요. ‘자유독립’이란 비디오 매거진을 만드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보면 불법으로 만든 거죠. 밴드들 따라다니면서 인터뷰 따고. 지금 생각하면 유튜브에 올리는 거랑 비슷한 거였거든요. 그땐 뭔가를 하려면 이런저런 규제가 너무 많고 풀기엔 복잡하니 그냥 임의대로 내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 여러 상황과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았는데, <Our Nation Vol.2>는 어떻게 나온 거예요?

 

황현성 : 그 앨범을 낼 쯤엔 관객이 매우 많았을 때예요. 관객이 10명 있고 그런 상황이 아니라 이미 노브레인도, 크라잉넛도, 위퍼도 보러오는 관객들이 제법 있었어요. 원래 드럭에서 금, 토, 일요일 하던 공연을 목, 금, 토, 일로 늘렸으니까요. 사장님도 그걸 보면서 키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성우 : 그리고 크라잉넛이 저희보다 먼저 앨범을 냈잖아요. 결성도 그렇고 앨범도 <Our Nation Vol.1>을 냈고. 저희는 한참 뒤에 <Our Nation Vol.2>로 낸 거고. 근데 뮤직비디오는 저희가 ‘바다사나이’로 먼저 찍었거든요. 그 직후에 크라잉넛이 1집 앨범을 내면서 ‘말 달리자’ 비디오를 찍었을 거예요.

황현성 : 그러니까 케이블을 먼저 탄 건 ‘바다사나이’ 뮤직비디오였던 거죠. 아마 그때 아저씨가 <Our Nation Vol.2>는 내고 위퍼랑 노브레인은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방송국에 보내보자, 그런 계획이었던 것 같아요.

 

- <Our Nation Vol.1>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성우 :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인디 앨범이었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어요. 평단의 평가가 너무 좋았죠. 당시 분위기가 글을 쓰고 문화계에 있는 분들이 저희는 까면 안 되는 분위기 였어요. (웃음) 저희도 조금 부담스러웠죠. 어떻게든 좋게좋게 해주시니까,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고맙지만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를 들을 게 있나? 싶을 정도로 평이 너무 좋았어요. 기념비적인 앨범이라고. 이게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다 보니까 그 이후로 인디레이블이 상당히 많이 생겼어요. 수많은 앨범이 나오고, 다른 클럽에서 레이블을 만들고...그런 시발점이 된 거죠.

 

- 아까 <Our Nation Vol.2>를 낼쯤엔 이미 관객이 많았다고 했는데, 앨범을 내고 관객이 많아진 건지, 관객이 많아진 상태에서 앨범이 나온 건지 궁금해요.

 

황현성 : <Our Nation Vol.1> 앨범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노브레인, 위퍼 등 여러 밴드가 생겼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아진 것 같아요.

이성우 : 그땐 몸으로 부딪치는 육박전이었어요. 불러주는 곳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공연을 했죠. 크라잉넛은 고등학교에도 갔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앨범을 가져다가 팔고.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인기를 얻은 것 같아요. 그땐 그거밖에 없었어요.

 

- 처음 자작곡을 냈을 때 팬들 반응은 어땠나요?

 

황현성 : 그게 자작곡인지 아닌지도 몰랐을 것 같은데요. (웃음) 따로 자작곡에 대한 멘트는 안 했던 것 같아요.

이성우 : 맞아요. (웃음) 그땐 멘트도 별로 안 하고 그냥 툭툭 막 했던 것 같아요. 기억도 잘 안 나네요.

 

- 이성우 씨는 당시 별명이 불대갈이었는데, 팬 중에서도 그런 스타일을 한 분들이 있었나요?

 

이성우 : 중학생쯤 되는 친구가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알라딘 구두 같은 걸 신고 정장 같은 걸 입고 옆에 검은 가방을 들고 온 거예요. 제가 그때 알라딘 구두를 정말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아, 정말 싫다. 저런 친구는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일주일 후에 이 친구가 스타일을 확 바꿔서 왔더라고요. 구두도 닥터마틴 같은 부츠를 신고 왔는데, 그걸 보고 뿌듯했죠. 물들여 놓은 것 같아서. (웃음) 그땐 그런 게 정말 행복했어요. 또 다른 우리의 동료를 만들어 간다는 거. 우린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거라고, 문화 운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 다들 자긍심 갖고 공연했죠.

 

- 당시 공연료는 얼마나 받으셨나요?

 

이성우 : 그때 정말 못 벌었어요. 사람이 많은데도 돈은 별로 못 받았고, 그땐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때였죠.

황현성 : 공연 페이 같은 건 나눠본 적 없지만, 대신 드럭이란 장소가 공연장이라기보단 저희의 소속사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공연 대관을 한다거나 식사를 하고 앨범을 내고 이런 것에 대해 부담이 없었죠. 빚을 진다는 생각도 없었고. ‘우리가 공연해서 번 돈인데 왜 돈을 안 주지?’ 그런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나중에 행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받았지만요.

이성우 : 그때 다들 어려웠어요. 돈을 그렇게 많이 벌지도 못했고. 그래서 그런 거에 한도 없어요. 저희가 제대로 돈을 벌기 시작한 건 ‘넌 내게 반했어’ 이후였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만 해도 저희는 얻어먹는 게 익숙했죠. 그래서 어릴 때 ‘내가 얻어먹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걸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제 소박한 꿈이었어요. ‘넌 내게 반했어’ 전에는 일용직도 하고 그러면서 지냈죠.

 

- 노브레인하면 따라다니는 단어가 ‘조선펑크’죠. 이 말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이성우 : 예전에 차승우가 그 단어를 만들었는데 정확한 어원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펑크를 하고 있다는 뜻을 멋스럽게 표현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티셔츠 뒷면에 박아놓고 했

었죠.

 

- 조선펑크란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현성 :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우린 더 클래시도 좋아하고 섹스 피스톨스도 좋아하지만 우린 어쨌든 한국 펑크야 하면서 나온 말이거든요. 재미로 지었겠지만 되게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지 않나 싶어요.

이성우 : 한국펑크하면 별로 멋이 없죠. 조선펑크 하면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 (웃음) 저희가 한국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서 조금 더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외국 펑크를 그냥 가져오는 게 아니라 우리 스타일을 좀 더 넣고 싶고...그러면서 나온 음악이었죠.

정민준 :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조선펑크란 단어가 나오고 그런 음악을 실현할 때쯤의 음악을 들어보면 정말 멜로디, 가사가 한국적인 느낌이 많이 났어요.

이성우 : 멜로디가 특히 그런 것 같아요. ‘뽕끼’라고 해야 할까요. 멜로디에 뽕끼가 많이 섞여서 들어보시면 느낌이 오실 거예요.

 

- 한국어 가사로 노래를 부른 것도 조선펑크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성우 : 그런 면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희가 처음 시작할 당시엔 록 밴드가 한글로 가사를 쓴다는 건 멋이 없다는 인식이 엄청나게 강했어요. 전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굳이 영어 가사를 쓰고 싶지 않아서 무조건 한국어 가사를 쓰려고 했어요. 그게 사람들이 알아듣기도 더 쉽고. 꼭 영어 가사를 써야 한다는 풍조가 못마땅했어요.

정민준 : 제가 고등학생쯤 조선펑크가 유행했어요. 그전에 부모님과 외국 펑크 밴드의 이야기를 하면 공감을 못 하셨어요. 근데 조선펑크는 얘기를 나눌 수가 있었죠. ‘아름다운 세상’이라는데 왜 ‘너는 너대로 잘살고 나는 나대로 잘살지’ 이런 가사가 나오느냐, 뭐 이런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어요. 한참 듣던 전자 기타 소리에 우리말이 나오는 게 너무나 과감해 보였고 매력적이었어요.

 

- 펑크와 트로트의 결합, 뽕끼의 결합 이런 말을 많이 하긴 하더군요.

 

이성우 : 맞아요. 저희가 일부러 그런 쪽으로 몇 개를 조금씩 차용해서 쓸 때도 있었어요. ‘개가 개를 먹는도다’라는 노래가 있는데, 보면 아예 처음엔 그냥 트로트예요. 트로트처럼 노래 부르다가 펑크 비트가 나오는데, 멜로디는 트로트에 거의 붙여서... 한때 그런 쪽에 몰입했던 때도 있었죠.

정민준 : 성우 형이 갖고 있는 멜로디 감성이 약간 트로트 느낌, 전통가요 느낌이 있어요. 형이 노래 부르는데 반주를 붙이면 자연스레 한국적인 펑크 느낌이 나서 조선펑크란 말이 잘 어울리게 되는 효과도 있었죠.

 

- ‘바다사나이’는 정식 앨범은 아니었지만 인기가 대단했죠.

 

이성우 : 텔레비전에 나갈 정도였으니 놀라긴 했어요. 저희는 기대를 안 했는데 공개 후에 저희가 주목을 받아서 당황스러웠죠. 처음엔 신기해하다가 나중엔 멤버들이 많이 지쳤어요.

황현성 : ‘넌 내게 반했어’가 대중적으로 확 알려진 느낌이랑은 좀 다른데요, 저희끼리 재미있자고 만들고 공연장에서 막 하고 이러던 게 갑자기 텔레비전 음악 방송에 나간 거예요. MR도 그때 처음 해보고. 당시엔 MR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이런 거까지 해야 할 정도로 우리가 방송에 나간다고?’하면서 흥분하기도 했죠. 대중의 반응이 컸다기보단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걸 제공하긴 한 것 같아요. 그때 인터뷰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마니아들만 알던 음악이 잡지나 신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죠.

 

- 인기를 끈 계기는 뮤직비디오인가요?

 

황현성 : 제 생각엔 뮤직비디오가 큰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뮤직비디오가 없었고. 그 직후에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뮤직비디오가 나오긴 했지만, ‘바다사나이’는 ‘말 달리자’보다 더 엉망이었거든요. 근데 지금 봐도 재밌고 신선한 느낌이에요.

정민준 : 그땐 제가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뮤직비디오가 저에겐 희망이고 감사함이었어요. 밴드 뮤직비디오인데 기타는 안 치고 빗자루로 하는 게 뮤직비디오에 나오고, 드럼 심벌 대신 스티로폼 걸어 놓고 있고. 고등학교 청소 시간에 그거 따라 하면서 좋다고 뒹굴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뮤지션 하면 저 높이 있는 다른 레벨의 어떤 존재로 느껴지던 그 틀을 깨줬어요.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거죠.

 

- ‘바다사나이’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나요? 기사를 보니 KBS <가요 톱텐> 30위 안에 들었다고 하던데요.

 

이성우 : 예전엔 저희 음악이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차트 위에 올라가 있고, 아니면 갑자기 금지곡이 되어 있고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KBS <가요 톱텐> 30위 소식은 지금 처음 듣네요. 몰랐어요.

황현성 : 저도 몰랐어요. 그런 척도가 저희에게 필요한 때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정민준 : 기타 줄 두 개밖에 안 감았는데 공연하고 이런 시절이라 그런 건 아예 관심이 없었을 거예요.

이성우 : 그리고 ‘바다사나이’가 인기를 얻으면서 멤버들 사이에선 그 노래를 싫어하는 경향도 생겼거든요. 우리는 조선펑크 로커인데 왜 우리를 이렇게 보지? 하면서 대책 회의도 많이 했어요. 가끔 연주할 때 “저희 이 노래 그렇게 안 좋아하는데 여러분이 좋아하니까 한 번 할게요” 이러면서 ‘바다사나이’ 연주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황현성 : 지금 생각하면 진짜 멍청하다.(웃음)

이성우 : 한때 방송국을 많이 돌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스케줄 잡는 매니저랑 ‘저희는 더 이상 이런 거 안 하고 싶습니다’하고 싸우고 싹 접었죠. 온 스케줄 자체를 다 시켜버린 적도 있어요.

 

- 그게 드럭을 나온 결정적 이유였나요?

 

이성우 : 약간은 그랬죠. 노선의 차이랄까요. 드럭에선 뭔가 더 많이 해보고 싶어 했고, 저희는 ‘바다사나이’로 인해서 저희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게... 모르겠어요. 무서웠던 건지 싫었던 건지. 저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좀 싫었던 것 같아요. 우리를 펑크 로커로 안 보고 그냥 재미있는 애들, 골 때리는 애들. 그렇게 보는 게 싫었죠.

정우용 : 전 그때 어렸으니까 형들을 보는 입장에서 ‘노브레인이 방송에도 나오고 멋있는 걸 해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 얘기를 들어보면 생각했던 거랑은 또 다르구나 싶어요. 그 당시엔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밴드가 없었잖아요.

 

- 결국은 그 후에 드럭을 나왔죠.

 

이성우 : 저희 내부적으로 이런 식으로 음악 하고 싶진 않다, 좀 더 진지하게 하고 싶다는 목소리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당시 매니저와 엄청 싸우고, 점점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고, 반발심이 생겼죠. 결국 나와서 ‘문화사기단’이란 레이블을 만들고 <청춘98>이란 EP를 낸 거예요. 우리가 주축이 되어 우리만의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었어요.

 

- 제작은 어떻게 하셨어요?

 

이성우 : 그땐 돈이 없으니까 매니저 누나들 만나서 같이 했죠. 연습실을 만들어줘서 연습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지내고, 앨범도 발매하고. 거기가 사무실인 거예요. 사무실 겸 합주실 겸 제가 먹고 자고 지내는 곳. 신촌 쪽 산울림 소극장 옆쪽에 장소를 만들었어요.

 

- 녹음은 어떻게 하셨어요?

 

이성우 : 화곡동 쪽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했는데, 주인이 록 녹음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어요. 그래도 해보자 하다가 저희 음악에 빠지신 거죠. 그래서 이런저런 효과를 어마어마하게 막 주시면서 불타오르셨어요. 이건 다른 얘기인데, 나중에 ‘넌 내게 반했어’ 녹음하러 갔는데 그 장소인 거예요. 주인은 바뀌었지만 정말 우연이었죠. (웃음)

 

- 록 녹음을 해본 적도 없는 화곡동 스튜디오를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성우 : 별로 안 비쌌어요. (웃음) 예전에 녹음할 땐 녹음비가 엄청 비쌌거든요.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한다는 거 자체가 돈 많은 사람이나 하는 거였어요. 저흰 돈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그래서 한 프로당 얼마, 이게 아니라 앨범 한 장 녹음하는 값을 계산해서 녹음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별로 안 걸렸죠.

 

- 그렇게 완성한 앨범은 어떻게 유통하셨어요?

 

이성우 : 인디 레이블을 할 때 가장 취약점 중 하나가 유통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레코드점에가면 저희 CD가 있고 다른 곳에 가면 없고 그랬죠. 저희는 아는 레코드점 통해서 우편 판매를 했던가...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앨범이 3,000장인가, 몇천 장 한정판이어서 우편 판매를 할 수 있게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향 레코드라든가 홍대 쪽에 있던 퍼플 레코드. 그래서 지방에선 좀 구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럼 공연장에 와서 사라고 했죠. 그 당시에 절 알아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알아보면 그땐 무조건 사인이었거든요. 사인을 해주면서 공연장 오라고 했어요. 공연장 오면 우리 CD 살 수 있다고. 그땐 ‘가수 아니에요?’ 하면 되게 발끈했어요. (웃음) 가수 아니라고, 펑크 밴드라고.

 

- 앨범이 한정판이라 대중의 반응을 알기는 어려웠겠네요.

 

이성우 : 근데 그때 순식간에 대 팔고 재판도 들어갔던 것 같아요.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CD를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고 해서 제가 집에서 테이프에 CD를 녹음해서 공연장에 가져갔어요. 가져가서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그랬죠.

 

- 자기 앨범을 자기가 불법으로 퍼뜨렸네요. (웃음)

 

이성우 : (웃음) 그땐 그런 게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어떻게든 친구들이 듣고 싶다고 하는데 그땐 앨범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어떻게든 들어보라고 제가 테이프에 일일이 곡 제목 다 써서 나눠줬어요.

 

- 그 후에 정규 앨범을 내셨잖아요. <청년폭도맹진가>. 이건 한정판이 아니었을 건데, 유통은 기존 방식대로 하신 건가요?

 

이성우 : 이렇게 유통해선 먹고 살기가 힘들구나 이러면서... (웃음) 이제 기존의 유통망을 타게 된 거죠.

황현성 : 1집부턴 저희가 소속사를 갖게 된 거죠. 저희를 관리하는 체계가 있고, 대형 기획사는 아니지만 대표가 있고 팀장이 있는... 그래서 산업망을 이용하기 시작한 단계였어요.

이성우 : 노래 만들어둔 것들을 정리하는데 곡이 너무 많았어요. 근데 차승우가 그걸 다 싣자고 해서 일단 다 녹음해보자 하고 녹음을 쭉 했는데 CD에 다 들어가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더블로 가자고 하고 더블 앨범으로 나온 거였어요. 녹음 다 된 걸 들어보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었구나’ 하고 다들 뿌듯했어요.

 

- 그때 주제가 두 개로 나뉘었잖아요.그게 특이해요. 어떻게 그런 구성을 하신 거예요?

 

이성우 : 시끄러운 노래를 한 곳에 다 몰고, 조금 덜 시끄러운 노래를 다른 한쪽에 몬 거죠. ‘난투 편’, ‘청춘예찬 편’ 해서.

 

- 그 뒤로 쭉 앨범을 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앨범은 어떤 건가요?

 

이성우 : 개인적으론 <청춘98> 녹음할 때가 기억에 남아요. 진짜 앞이 깜깜했어요. 믿을 구석은 저희 넷뿐이었으니까요. 넷밖에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게 정말 큰 도전이고 모험인데, 그걸 우리 네 명의 힘으로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 하나만으로 만든 앨범이었거든요. 그때 다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도 거처가 마땅히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 자니면서 자고 그랬으니까. 그런 상황이 되니 사람이 더 과감해지고 무서울 게 없어지더라고요. 그렇게 만들고 나서 참 뿌듯했죠.

 

- 3.5집 <Stand Up Again!>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그전에도 꽤 많은 사람이 노브레인을 알고는 있었잖아요. 그러다 3.5집을 계기로 더 큰 인지도를 얻었고.

 

이성우 : 어느 순간 공연하면서 사람들이 저희 노래를 따라 부르질 못하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다른 공연에선 다들 따라 부르는 게 약간 부럽더라고요.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고 그러는데, 우리도 그런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뭔가 귀에 박히는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요. 그때 마침 또 보보가 들어오면서 무거운 기타 사운드를 가져와서 저희로선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하면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버렸죠. 이제 사람들이 우리 음악에도 좀 더 춤을 춰줬으면 좋겠고, 우리 노래를 따라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 ‘넌 내게 반했어’가 그렇게 나온 거군요.

 

이성우: 네, 그 노래가 나오고 사람들이 많이 따라 부르고... 그땐 케이블TV가 인기였던 시절인데, 케이블TV에 노홍철 씨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길거리에서 사람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러던. 노홍철 씨가 처음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죠. 그때 어떤 시민이 노래로 여자친구에게 청혼을 했다고 했나, 고백을 했다고 했나... 그래서 노홍철 씨가 어떤 노래를 불렀냐고 하니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불렀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전 약간 충격받았죠. 사람들이 우릴 이렇게도 생각해주는구나, 하면서. 점점 ‘넌 내게 반했어’가 인기가 많아지는 걸 보면서 신기했어요.

황현성 : 사실 전 입에도 담기 싫을 만큼 없애고 싶은 앨범이 3집 <안녕, Mary Popppins>예요. 물론 사랑하는 앨범이고 그 앨범으로 입문하신 분들도 있어요. 제 주변에도 그 앨범이 좋다고 하신 분들도 있는데, 그게 왜 싫었냐면 3.5집 노선 변경보다 더 급격했거든요. 2집 이후 저희에게 제일 중요했던 멤버인 차승우가 그만두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예요. 잘 곳도 없어서 사무실에서 자고. 사람들이 우린 끝났다고 했었고...

이성우 : 매번 끝났대.

황현성 : (웃음) 그래서 3집을 만들 땐 아무 확신이 없었어요. 멤버들도 그렇고 제작했던 형도 녹음을 받았는데 사운드를 어떻게 잡는지도 모르고 우리도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때 기타로 잠깐 들어왔던 친구가 김민석이란 친구인데, 그 친구도 방향을 못 잡고 있는 상태였죠. 그러니까 아무도 방향성에 대해 확신을 못 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온 앨범인 거예요. 전 그 앨범이 너무 가슴 아픈데, 없어선 안 될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보가 들어오고 3.5집에선 저희가 방향을 선회하는 데 있어서 확신이 생겼죠. 3집처럼 불안하지 않았고.

이성우 : 3집을 내고 팬들이 다 떠나갔거든요.

정민준 : 제가 3.5집부터 같이 활동하면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게 3집이 너무 안 좋았서... (웃음)

이성우 : 그땐 좋았다고 했잖아.

정민준 : 그러니까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거...

황현성 : 마음으로 좋아해 주려고 한 거지.

정민준 : 그래서 ‘와, 이거보단 잘할 수 있겠다’ 하면서 저에겐 아이러니하게 힘이 됐어요. ‘아, 노브레인 형들이 이런 쪽에도 하면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네’ 이러고 3.5집을 넓은 감수성으로 볼 수 있었어요. 사실 3집이 안 좋다고 우리끼린 얘기하는데, 들어보면 정말 사랑과 성의가 엄청 느껴지는 앨범이에요.

이성우 :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 그땐 예전 사운드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각했고, 뭐가 하고 싶은데, 우리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자 해서 만든 게 3집이었어요.

황현성 : 늘 하던 <청춘98>, 1집, 2집에서 전투적인 게 몸에 뱄는데, 차승우도 없는 상태에서 이걸 그대로 다시 할 수도 없고 내심 좀 색다른 것도 해보고 싶고. 그래서 도전을 한 거죠. 힘들었지만 소중해요. (웃음)

정민준 : 어떻게 보면 노브레인은 꾸준히 변화했어요. 짧게 보면 매번 변했는데, 지금 와서 면 다 떠나가고 노브레인으로 다들 남아 있는 걸 보면 좀 뿌듯하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에요. 오히려 안 변했다고 해야 할까요.

 

- 펑크를 하다가 그렇게 변화할 때 거부감은 없으셨어요?

 

이성우 : 거부감이라기보단 어떻게든 살아있단 걸 보여줘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다들 차승우가 나가고 우린 끝났다고 하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고 하고.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저희가 더 과격하게 급진적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것 같아요.

정민준 : 약간 삐쳐있는 앨범 느낌이었어요.

이성우 : 그럴 수도 있어. 어떻게 보면 다들 자신감이 없는 상태이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황현성 : 그땐 만들자 하면 자꾸 1, 2집 같은 게 나오니까

이성우 : 그걸 최대한 철저하게 배제하려고 했어요. 나도 노래 부를 땐 힘 안 주고 부를게, 이렇게까지 선언하고 만든 게 3집이었죠. 아니나 다를까 뭐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웃음) 아프긴 한데 나름 잘 만든 앨범인 것 같아요.

정우용 : 기존 팬들이 거부감을 크게 느꼈을 앨범이니까. 너무 변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그게 노브레인의 정말 색깔일 수도 있는 건데, 1~2집의 색깔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차이가 두드러졌을 거예요.

이성우 : 3집은 약간 쉼표 한 번 찍고 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 ‘넌 내게 반했어’는 영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이성우 : <라디오스타>에 저희가 출연을 했죠. 영화에 출연할 줄은 몰랐거든요. 제의가 와서 이게 뭔 말인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운명의 장난처럼 크라잉넛에게도 제의가 갔더라고요. 저희는 몰랐는데 감독님이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셨더군요. 근데 저희가 선택되어 영화에 출연을 하게 되고 감초 역할도 하고 연기도 얼렁뚱땅 재밌게 하고, 거기다 ‘넌 내게 반했어’란 노래가 극장에서 빵빵한 소리로 관객들에게 울려 퍼진 거예요. 영화가 인기도 많았고 그 큰 스크린에서 저희를 보면서 음악을 들으니 사람들이 싫어할 수가 없죠. 저희도 덩달아 일이 더 바빠지고, 그때부터 돈을 좀 많이 벌게 된 것 같아요. 먹고살 만하게.

 

- ‘넌 내게 반했어’가 요즘으로 치면 역주행이라고 하는데, 그전에는 ‘넌 내게 반했어’ 반응이

어땠나요?

 

이성우 : 처음 앨범 냈을 당시엔 반응이 없었는데 얼마 후엔 인기가 많아졌죠. 영화 찍기 전

에.

황현성 : 뮤직비디오가 한몫을 했던 것 같아요. 뮤직비디오가 약간 B급인데 뮤직비디오에서 ‘넌 내게 반했어’하는 춤이 있거든요. 사람들이 길에서 저희를 마주치면 그걸 하면서 지나가 는 거예요. 그래서 노선을 잘 바꿨고 3집처럼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1, 2집을 그 리워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잘 가고 있다고...

이성우 : 처음엔 반응이 없었죠. <청춘98>을 내고 EP를 또 해보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청춘98>을 내고 우리가 욕을 먹었던 게 당시엔 EP 앨범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격 책정하는 게 애매했죠. 곡도 적은데 일반 CD 가격이랑 똑같다고 한다든지, 싸봐야 1, 2천 원 싸고. 그래서 욕을 많이 먹었거든요. 근데 또 그렇게 내려고 하니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다섯 곡으로 내는 건 정말 아니라고. 너희 이런 식으로 하면 진짜 끝난다는 얘기도 듣고. 그래도 저희는 밀어붙였는데, 처음엔 반응이 너무 없었어요. 주변에서 타이틀곡 ‘넌 내게 반했어’ 하는 것도 진짜 아니라고 했는데 그걸 고집해서 나왔더니 썰렁해서 당황했죠.

정민준 : 딱 1년 정도 지난 다음부터 인기가 많아졌어요. 영화가 나온 건 이제 어느 정도 알려졌을 때죠. 영화가 완전히 하이라이트를 비춰줬고.

이성우 : 그때 저희가 공연을 엄청 많이 했어요 여기저기. 돈도 많이 안 받고 우리 음악을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엄청나게 다녔는데, 그렇게 하다가 케이블TV 방송에 돌면서 사람들이 관 심을 가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렇게 됐어요. 저희 음악은 마니악한 음악이라고 생각했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러면서 공연장에 사 람들이 북적거리게 되고 재미있는 공연도 많이 하고 그러던 찰나에 <라디오스타>를 찍은 거 예요. 대박난 거죠. 벼락부자라고 친구들한테 욕먹고. 얻어먹기만 하다가 이제 친구들에게 고기 사준다고 부를 수도 있게 됐고. 신세를 갚을 수 있게 된 거죠.

 

- 노브레인은 이전에도 무명은 아니었는데 영화를 찍을 때가 되어서야 신세를 갚았다고 하는 게 신기하네요.

 

황현성 : 저희가 알려진 거에 비해 수입이 변변하진 않았어요.

이성우 : 한 번씩 돈 없으면 일용직을 나갔거든요.

 

- 1, 2집 할 때도요?

이성우 : 네, 근데 거기서 어떤 분이 얼굴을 알아보시고... (웃음) “왜 여기서 일하세요?” “네, 가끔 일하러 옵니다” 그러고 지냈어요. (웃음)

정민준 : 저희 건물 많이 지었습니다. (웃음)

이성우 : 목동 현대백화점 (웃음)

정민준 : 신촌 전철역 투썸플레이스도 저희가 지었습니다. (웃음)

 

-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랬다는 게 놀라운데요.

 

이성우 : 전 그게 별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돈이 없으면 일하고 그러면서 먹고 살고 하는 게 그땐 재밌었어요.

 

- 수익 배분 이런 문제 때문에 돈이 없으셨던 거예요?

 

이성우 : 수익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공연이 많지도 않았고.

황현성 : 3.5집이 나오기 전까진 다들 아르바이트를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죠. 행사도 별로 없었고. 그러다 3.5집이 나오고 가히 효자 앨범이 된 거예요.

이성우 : 그러면서 매번 갖고 있던 작업복을 버리게 되더라고요. (웃음)

 

 

 

(3부에서 계속) 

 

[사진출처=록스타뮤직앤라이브]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김작가 일일공일팔 콘텐츠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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