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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김작가

20세기 댄스 클럽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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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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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론은 성공한 댄스 그룹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댄서이자 안무가이기도 했다. 스트리트 댄서에서 출발, 이태원의 전성시대를 함께 했다. 인터뷰 당시 강원래는 한국 댄서들의 성지였던 ‘문나이트’를 운영 중이기도 했다. 그들이 생생하게 1990년대 춤꾼들의 세계와 무대, 그리고 밤의 놀이문화를 증언한다. 

 

(아카이브 K는 2020년 9월 클론을 인터뷰했다.)

 

-지금 문나이트가 원래 있던 문나이트는 아니죠?

 

강: 네, 원래 자리는 여기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어요. 이태원 소방서 뒤쪽이었죠. 이걸 하면서 우리 또래 친구들을 찾고 싶었어요. 통기타 치던 쎄시봉 같은 장소는 없어졌잖아요. 우리 기억에 쎄시봉 하면 ‘아 통기타 치는 분들’ 하지만 그걸 추억할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거예요. 문나이트는 건물은 그대로 있는데 다른 사업장이 들어와 있어서,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해보자 하고 이곳에 하게 됐어요. 바둑판무늬 바닥만 비슷하고 그때와 비슷한 건 별로 없어요.

 

-이태원에서 문나이트 외에 춤꾼들이 모이는 장소가 또 있었나요?

 

강: 없었어요. 다른 곳에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순 있겠죠. 근데 문나이트 만큼은 프로들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구: ‘다이아나’라고 아마추어 중에서도 잘 추는 애들이 모이는 나이트클럽은 있었어요. 화교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새로운 의상이나 춤을 가져와서 놀곤 했죠. 우리도 거기 가서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춤도 배웠어요. ‘락앤롤’ 같은 춤은 그 친구들한테 배웠죠.

강: ‘락’이란 춤은 쉽게 말하면 엘비스 프레슬리가 머리를 다 넘기고 가죽 재킷을 입고 추는 트위스트 같은 춤이에요. 아무튼 문나이트는 당시 ‘MBC 무용단’, ‘SBS 쇼 탤런트’, 밤업소에서 일하는 ‘노 피플’, ‘유니언’ 이런 기라성 같은 프로 댄서들이 놀러 오는 곳이었어요.

 

-당시에 화교들의 유행이 우리보다 빨랐나요?

 

구: 빨랐죠. 일본, 대만, 우리 순서였어요.

 

-두 분이 문나이트에서 최고 전성기였던 시절이 언제인가요?

 

강: 1990년 무렵이에요. 벌써 30년 전이네요.

 

-두 분은 문나이트가 생기기 전에도 계속 춤을 추셨죠?

 

강: 프로로 추는 건 아니고 춤을 좋아했죠. 중,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서 춤을 좋아하고 잘

추던 수준인 거지 직업으로 생각하진 않았죠. 구: 문나이트 다닐 때만 해도 저희가 춤을 직업으로 해서 방송에 나가서 춤을 춰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저희는 꿈이 따로 있었죠. 미대를 다녔으니까 미술로 먹고살아야겠다, 춤은 그냥 취미였어요. 근데 그러다가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고 거기 심사위원들이 발탁해준 덕분에 현진영 씨하고 팀을 이뤄서 프로로 데뷔를 한 거죠.

 

-당시에 춤은 어떻게 배우셨나요?

 

강: 비디오테이프죠. 그때 우리에게 가장 큰 교과서가 된 게 영화 <플래시댄스>, <페임>, <브레이킹>, <비트 스트리트> 이런 거였어요. 근데 그것도 있는 집 애들이나 보는 거였죠. 집에 비디오가 있어야 하니까.

구: 아니면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나오는 뮤직비디오나 미국 텔레비전 쇼를 보고 거기 나오는 랩, 춤을 보고 외웠죠.

강: 예전에 한 친구는 그걸 녹화해서 계속 돌려보면서 외웠어요. 근데 그걸 실제로 볼 수 있는 게 문나이트, 또는 대학로 길거리였던 거죠. 그래서 그걸 보러 주말마다 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문나이트에 모인 거예요. 토요일엔 문나이트에서 댄스경연대회가 있기도 했고요.

구: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카페도 있었어요. 그런 걸 보면서 패션에 대한 레퍼런스를 얻기도 했었고.

강: 그래피티는 구준엽 씨가 최초예요.

구: 그래피티에 대해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어서 이태원 돌아다니다 보니 서점에서 그래피티에 대한 책을 팔더라고요. 그걸 사서보고 그랬어요. 강: 그래피티가 음반 재킷에 처음으로 들어간 게 듀스일 거예요. 듀스 1집. 그걸 준엽이 그린 거예요. (이)현도네 집 지하실이었죠. 그래피티가 그려진 바지를 입고 나와서 히트를 했던 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멜빵바지였는데, 그것도 준엽이 그린 거였어요.

 

-문나이트를 처음 알게 된 건 언제였나요?

 

강: 그때 우리와 같이 춤추는 무리 중에 삐에로 승민이라고 있어요. 디제이였는데, 그분에게 이태원에 문나이트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죠. 그때가 1989년 여름방학 때, 구준엽 씨가 마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저는 강릉에서 다녔는데, 그때 방학에 이태원에 갔다가 문나이트를 가서 깜짝 놀랐죠.

 

-무엇 때문에 놀라셨어요? 

 

구: 계단 내려가는데 처음 경험하는 설렘이 있었죠. 멀리서 쿵쿵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려가서 문을 딱 열었는데 외국인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당시에는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강: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주 보고 춤춰요. 근데 문나이트에 있던 외국인들은 어떤 사람들은 테이블 위에서, 바에서, 화장실에서도 춤추고, 처음 보는 신기한 춤을 추고, 심지어는 브레이크댄스도 뭔가 웨이브 같고,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바비 브라운(Bobby Brown)의 ‘런닝 맨’ 춤을 추기도 하고... 신기했죠. ‘여긴 뭐 하는 곳인가’ 하고 신기해서 춤도 못 추고 놀라서 구경만 했어요.

 

-어울리기 위해서 춘 춤이 아니었단 얘기네요?

 

강: 자기 춤을 춘 거죠.

구: 예전에 이태원에 미군 부대가 있었잖아요. 원래는 그 사람들 와서 놀라고 클럽을 만들어둔 거예요. 처음엔 한국인을 안 받았어요. 싸움 나고 하니까...

강: 한국 사람이 가면 또 미군이 잘 안 오고 트러블 생길까 봐 그랬죠. 그래서 우리가 갔을 때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거예요.

 

-사장님도 외국인이었나요?

 

구: 한국 분이었어요. 카우보이모자를 항상 쓰고 다니셔서 별명이 ‘카우보이사장님’이었죠.

강: 지금은 고인이 되셨어요. 돌아가신 지 꽤 됐죠.

강: 원래 문나이트를 열기 전에 그 바로 앞에서 ‘솔트레인’이란 클럽을 했었어요. 그전에는 삼각지에서 차돌박이 집을 했었고. 친하게 지내면 입장권 안 내도 그냥 들어갈 수 있으니까 친하게 지냈죠. 지금도 사모님하고 연락하고 지내요.

 

-솔트레인도 가보셨어요?

 

강: 솔트레인은 못 가봤어요. 그때는 우리가 학생이라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림을 열심히 그릴 때니까.

 

-취미로 춤을 추던 시절에 지역구에서 알아주려면 마스터해야 하는 춤이 어떤 거였나요? 일반인 수준이 아닌 춤이랄까요.

 

구: 토끼춤이죠 뭐. 고등학교 때는 브레이크댄스였고 대학교 때는 토끼춤이었어요. 바비 브라운 흉내 내고.

강: 그다음으로 넘어가면 꺾기춤이었고요. 저희는 어떤 춤을 해야겠다 하는 것보다도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춤을 조금씩은 다 알고 있었어요. 춤꾼으로 인정받으려면 음악에 맞게 춤을 춰야 하니까요. 음악은 계속 바뀌는데 춤은 하나만 계속 추면 유행에서 뒤처지는 애, 하나밖에 모르는 애잖아요. 저희는 유행을 빨리 따라가고 싶었어요. 그림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뭔가 세계적으로 유행한다, 누가 뭘 했다고 하면 따라하고 싶고 그랬죠. 저희는 마이클 잭슨 춤, 바비 브라운 춤을 막 따라 하고 있는데 당시 한국 사람들이 가던 나이트클럽에선 그런 춤을 안 췄어요. 모던 토킹(Modern Talking)의 ‘Brother Louie’, 조이(Joy)의 ‘Touch by touch’ 이런 유로 댄스가 나왔죠.

 

-그런데 이태원에 오면 달랐던 거군요.

 

강: 그렇죠. 문라이트에 가면 어렸을 때, 고등학교 때 같이 춤췄던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요즘 뭐 하냐고 하면 프로 댄서로 일하고 있다고 하고... 요즘은 인터넷이 있으니까 검색을 통해서 새로운 춤을 알 수 있지만, 그때는 외국에서 수입한 비디오테이프, AFKN을 보거나, 문나이트에서 외국 친구들, 댄서들이 춤추는 걸 보면서 새로운 춤을 배웠어요.

 

-그때까지도 프로 댄서가 될 생각은 안 하셨나요?

 

강: 안 했어요. 나중에 클럽에서 열리는 댄스 대회에서 우리가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으면서 우리가 진짜 잘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춤추길 잘했어요. 드라마 찍는 거 보면 진짜...

구: 얘는 진짜 춤을 너무 잘 췄어요.

강: 내가 얘기하긴 좀 그렇지만, 저는 타고났어요.

구: 진짜 타고난 게 자다 일어나서 춤추라고 해도 너무 잘 췄어요. 저는 노력을 정말 많이 한 거고, 이 친구는 그냥 잘 췄어요. (웃음)

 

-데뷔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구: 당시 이태원 전 나이트클럽에서 디스코 대회가 유행했어요. 어느 날 저희와 친했던 김성재, 이현도 씨가 이태원에 놀러 왔다가 나이트클럽 ‘여인도시’에서 디스코 대회가 열려서 갔는데 자기들이 하기엔 버거웠나봐요. 저희에게 전화해서 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랑 제가 가죽 재킷을 딱 입고 대회에 나갔는데 상을 탔어요. 그때 이수만 사장님 아래 있던 최진열 씨가 심사를 봤는데, 끝나고 저희를 불렀어요. 우리가 지금 데뷔시킬 가수 중에 현진영이라고 있는데, 저희와 같이하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요. 저희는 군대에 가려고 휴학계를 내고 올라온 상태라서 군대 가기 전에 한 번 해보고 가자, 그렇게 하게 된 거예요.

 

-클론 1집은 디제이였던 김창환 씨와 함께하셨죠.

 

강: 클럽에서 만난 창환 형이 제게 나중에 가수 제작할 건데 너 군대 다녀오면 할 거니까 꼭 찾아오라고, 가수 시켜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구: 그때는 디제이가 프로듀싱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강: 그리고 나서 군대에 갔는데 훈련소에서 ‘미소 속에 비친 그대’(신승훈)가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노이즈가 나오고 김건모가 나오는 거죠. 그걸 창환 형이 자기가 다 제작했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얘기한다고 했는데. 그 이후에 박미경 씨 댄서로 활동하다가 우리가 스물여덟 살에 ‘꿍따리 샤바라’라는 곡으로 창환 형과 의기투합한 거죠.

구: 그것도 창환 형이 해준다고 해서 우리가 가수를 한 거지, 우린 노래가 안 되니까 가수를 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요. 근데 창환 형이 음악 해준다고 하니까 이분 음악이면 해봐도 되겠다 한 거죠.

강: 그때 그래서 클론 노래 못한다, 랩도 못 한다 이래도 기분 안 나빴어요. 우린 댄서였으니까. 저는 그냥 노래 못 해도 막 불렀어요. 그랬는데 그때 가수왕을 받은 거예요.

 

-김창환 씨 음악이면 할 만하겠다고 했던 이유는 뭐예요?

 

구: 음악을 너무 잘 만드시니까요.

강: 우리를 잘 아니까. 그때 신승훈 씨, 김건모 씨, 박미경 씨는 녹음실 들어가서 노래 한 곡을 갖고 몇 시간 고생하는 걸 봤어요. 나흘 동안 노래 한 곡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는 하루면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대치가 낮았으니까. 그만큼 우리를 잘 알아서 노래 부를 때도 안 힘들었어요. 지금 불러도 음반하고 똑같이 부를 수 있어요.

구: 창환 형에게 안 혼난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강: 근데 그만큼 김창환 씨가 시대 흐름을 알았던 거죠. 듣는 시대보다 보는 시대가 오고 있었으니까. 저희는 첫 방송 하고 두 달 스케줄이 쫙 잡혔어요.

구: 리허설 끝나고 기립 박수를 받았죠. 우리도 놀랐어요.

 

-그랬군요. 다시 여인도시로 돌아가서, 여인도시도 이태원에 있던 클럽이에요?

 

강: 네, 그때 빌딩 지하에는 ‘다이아나’, 1층이 ‘쿠시쿠시’, 2층은 기억이 안 나고 3층이 여인도시, 6층이 ‘하니’, 11층이 ‘팬시’ 그러니까 한 건물에 나이트클럽이 6개가 있었던 거예요.

구: 그뿐만 아니라 그 옆 건물에 2개 더 있고, 그 옆에 하나 더 있고 이런 식이었어요. 당시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날라리든 아니든 무조건 나이트를 갔죠. 그래야 좀 약간 트렌디한 젊은이 느낌이었으니까요.

 

-비단 이태원만의 얘기는 아니었죠.

 

구: 이태원에도 있고 강남, 신촌...

강: 명동, 천호동 다 있었죠.

구: 근데 우리 같은 춤을 추기엔 이태원이 제일 좋았어요. 만약 우리가 강남에서 그런 춤을 췄으면 쫓겨났을 거예요.

강: 쫓겨나죠. 다른 손님한테 피해준다고.

 

-이태원의 문나이트와 그 시절 유명했던 다른 클럽들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강: 그게 우리 또래에만 해당하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그때 나이트클럽은 호텔 나이트클럽, 또 젊은이들이 옷 잘 입고 가는 그런 곳.

구: 그때는 테크라고 했어.

강: 홍대 디스코텍. 또 춤 위주의 문나이트 뭐 그렇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때 제일 유명하고 비싼 술 마시는 고급 나이트클럽은 신라호텔의 ‘더 포인트’처럼 톱 호텔에 있었고, 그다음이 강남역의 ‘월드팝스’하고 ‘스튜디오80’이 있었어요. ‘월팝’.

구: 그런 데는 디스코텍이라고 불렀어요. 대학생들이 가는 곳. 호텔 나이트는 나이트클럽. 디스코텍을 졸업하면 호텔 나이트로 가는 거죠.

 

-연령대로 구분했나요?

 

구: 연령대와 영업시간이죠. 강남역은 학생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밤 10시, 11시면 끝나요.

강: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하고 끝. 10시 이후에 거기서 춤추고 있으면 불량청소년이었죠. 그냥 그렇게 깨끗하게 나이트클럽을 즐기는 친구들이 모였던 곳이고, 호텔 나이트는 좀 더 연령이 높아져요 대학도 졸업하고 주로 30대? 20대는 잘 안 갔던 것 같아요. 강남역은 맥주, 호텔 나이트는 양주 이렇게. 그리고 종로도 많았죠.

 

-종로에도 있었어요?

 

강: 종로도 유명했죠. 지금 홍대보다 더 화려했던 곳이 종로예요. 그때는 영화를 보려면 거기로 가야 했어요. 피카디리, 단성사, 대한극장 이런 식으로.

 

-그런 곳하고 문나이트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겠네요?

 

구: 완전히 다른 곳이죠. 문나이트에서는 놀고 있으면 미국 헌병이 한 번씩 와서 돌아요. 미군들이 놀고 있으니까. 사고 칠까 봐 그런 거죠.

강: 그때 미국 헌병이 도는 가게가 잘되는 집이라는 얘기도 있었어요. 장사 안되는 곳은 미국 헌병들도 안 와요.

 

-그럼 그 시절에 춤꾼들 사이에서 춤추기 좋은 음악을 튼다고 평가받는 디제이들도 있었겠어요.

 

강: 그렇죠. 문나이트에서는 진수. 진수 형. 그다음에 야옹이라고 우리 또래 친구들인데 그 친구들도 어렸을 때부터 브레이크 댄스를 췄어요. 춤을 좋아했고, 춤추기 좋은 음악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가면 그 사람들이 그런 음악을 틀어줬죠. 그리고 그때 흑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했던 N.W.A(Niggaz Wit Attitudes)라고 있어요. 갱스터 래퍼들인데, 흑인들이 왔을 때 이 팀의 노래를 틀면 흑인들이 전부 합창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신기했죠. ‘이 사람들 뭐 하나’ 했는데, 가사가 다 욕이었어요. 타국에 와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을 보고 ‘되게 잘 즐긴다’ 했어요. 우리도 괜히 따라 하고 알지는 못했지만 영어 욕도 해보고 그랬죠.

 

-한편으로는 생소한 문화를 잘 받아들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강: 그런 문화를 우리가 잘 흡수한 것 같아요. 잘 흡수해서 우리 걸 만들고, 어떻게 보면 역수출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선 말춤의 역사와 비슷해요. 말춤의 시작이 1980년대 중반에 우리가 신촌 나이트클럽을 처음 갈 땐데, 구준엽 씨 얘기처럼 거기서는 그런 과격한 춤을 추면 쫓겨나요. 근데 그때 당시 유학생들, 미국 교포들이 한국에 와서 디제이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유로 댄스 말고 미국 음악 틀어달라고. 그때 유행했던 게 더 타임(The Time)의 ‘The Bird’였어요. ‘새’잖아요. 노래에 맞춰서 새가 날갯짓하듯 춤을 추는데, 그걸 틀면 유학생들이 그 춤을 춰요. 그럼 그걸 보고 여기저기서 따라서 추면서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유행한 게 말춤이에요.

구: 새춤을 보고 따라서 추다가 그게 점점 잘못 퍼지면서 말춤이 된 거죠.

강: 그 말춤이 역수출되어서 나중에 MC 해머(MC Hammer)가 싸이랑 같이 춤을 춘 거예요. 어떻게 보면 문나이트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들어올 땐 약간 저질 문화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우리가 잘 포장해서 역수출해서 지금 케이팝의 성공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해봐요.

구: 그건 너무 멀리 간 것 같은데. (웃음)

 

-그런데 그런 분석이 많더라고요. 흑인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안전하게 필터링이 되고 퀄리티는 올랐다고 이야기하고, 케이팝이 미국으로 갔을 때 미국의 부모들이 안심한다는 거죠. 애들이 들어도 유해하지 않다고 하면서요.

 

강: 갱스터 랩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는 랩에 욕을 못 넣고,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어른들에게 혼나지 않도록 만든 거예요.

구: 한국어로 잘 바꿨죠.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국 노래는 너무 포크, 발라드 이런 것만 많다, 들을 게 없다면서 팝만 들었거든요. 그런데 1990년대 들어오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나오고 하면서 외국 노래만큼의 퀄리티에 한국어가 붙어서 따라 부를 수 있고... 그러면서 한국의 노래가 완전히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럼 가요를 듣기 전에 두 분이 좋아했던 뮤지션은 누구인가요?

 

구: 프린스 좋아했고, 인포메이션 소사이어티(Information Society) 같은 음악을 좋아했죠.

강: 준엽과 저는 음악 취향이 완전히 달라요. 저는 시인과 촌장, 들국화...

구: 얘 그런 음악들 좋아했어요. 저 깜짝 놀랐잖아요.

강: 다섯손가락, 이광조 씨 그런 음악들 좋아했죠. 들국화라든가 그런 음악들이 비틀스 같은 음악을 재해석했다고 생각해요. 팝을 굉장히 한국화해서 만든 것 같았죠. 그래서 저는 가요를 좋아했고, 준엽은 저와 상반된 팝송 ‘When doves cry’, ‘Purple rain’ 이런 노래들.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하고 굉장히 슬픈 노래들 좋아했어요. 얘는 도시락도 미제 아니면 안 썼어요. 저는 김치하고 멸치인데 이 친구는 소시지 아니면 계란 후라이, 스팸 이런 거였어요. 지금도 그래요 구준엽은.

 

 

(2부에서 계속)

 

[사진출처=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김작가 일일공일팔 콘텐츠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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