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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우정호

사운드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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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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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들의 뮤지션’과 같은 상투적인 언어로 윤상을 수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랏빛 향기’의 상큼함과 ‘이별의 그늘’의 흐린 음색, 세련된 21세기 신스팝과 물음표 가득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가 공존하는 음악 세계관을 펼치는 이 뮤지션을. ‘음악이 주는 위로’에 초점을 맞춘 곡을 통해 인류애적 감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결벽적으로 완벽한 사운드를 추구하며 냉철함을 드러내는 뮤지션. 그가 바로 윤상이다. 

 

(아카이브 K는 2021년 6월 윤상과 인터뷰했다.)

 

 

- 처음 음악인을 꿈꾸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윤상 : 아주 어려서부터 라디오 듣는 게 유일한 취미였어요. 저는 정말 지금도 취미가 진짜 없는데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저희 친척분 중에 삼촌뻘 되시는 분이 저한테 클래식 기타를 물려주셨어요. 그게 저의 첫 악기였는데 ‘이걸로 평생 음악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 그 기타로 처음 쳤던 곡을 기억하시나요?

 

윤상 : 정말 웃긴 이야기인데요. 제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모든 악기는 튜닝을 해야 되잖아요. 저는 기타가 오면 그냥 그대로 치면 되는 줄 알았어요. 튜닝이 안 돼 있었는데. 그리고, 책에 보면 D코드 이런 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제가 음악을 잘 몰랐어도, 손 모양은 맞는 것 같은데 음이 이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각 동네마다 LP들을 파는 레코드 방이라고 하는 데가 많았거든요. 그중에 기타가 걸려 있는 집을 하나 발견해서 제 기타를 가지고 갔어요. 

 

그랬더니 “넌 어떻게 튜닝도 안 된 기타를 칠 생각을 하냐”그래서 내가 정말 ‘음알못’이었구나 깨달았죠. 거기서 E 스트링, ‘미’ 음을 내주는 피리가 있어요. 조그마한 거. 몇백 원 했던 것 같은데, 이걸 사고, “기타를 ‘미라레솔시미’순으로 튜닝을 한 다음 기타를 치도록 하여라”는 큰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D 코드, G 코드, A 코드 이런 것들을 연습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기타 코드를 잡는다고 처음부터 소리가 잘 나지 않잖아요. 뭐 개방현을 많이 이용하면 몰라도. 그래서 처음엔 노래 위주보단 코드에서 소리가 제대로 날 때까지 그것만 연습한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그때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은희 – 연가) 그런 쉬운 곡들의 코드를 좀 카피해 보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 기타를 잡은 처음부터 사운드 자체를 정확하게 내려는데 중점을 두셨던 거군요.

 

윤상 : 나중에 기타리스트 친구들이 생겼을 때 보니까 보통 기타를 저처럼 백킹부터 연습하는 친구들이 있고, 처음부터 솔로를 연습하는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아, 세상에는 기타라는 이름이 하나지만 이렇게 접근법이 다르구나. 그것도 나중에 고등학교 가서 알았습니다.

 

- 어려서부터 다양한 악기에 관심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윤상 : 지금도 다양한 많은 악기들을 파는 가게를 그렇게 여러 곳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잖아요. 거의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낙원상가라는 곳밖에 없었어요. 그때 ‘음악이 이렇게 멋있구나’ 생각하고, 기타라는 걸 갖게 되고 악기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낙원상가라는 데가 있다고 듣고 친구들 몇 명이랑 같이 갔죠. 

 

갔더니 정말 악기의 천국인 거예요. 정말 낙원이었던 거죠. 거기서 뭘 사진 못하고 그냥 아이쇼핑을 했죠. 그냥 악기들을 보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저게 드럼이다. 얼마지?’하면서 가격대가 엄청나서 또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 중·고등학교 시절 ‘페이퍼 모드’라는 밴드로 활동하셨습니다. 어떻게 결성하셨나요?

 

윤상 : 중3 때 저희 반에 김학인이라는 드럼 치는 친구가 있었어요. 아직도 재즈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어요. 이 친구랑 저랑 항상 지각을 해서 그 중학교 가는 언덕길에서 항상 만났어요. 알고 봤더니 드럼 학원을 다닌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밴드를 하자. 너는 드러머니까 나랑 꼭 밴드를 해야 돼. 나는 기타를 열심히 연습할게.’하면서 서로 집에 놀러 가서 좋아하는 음악들 듣고 했죠. 

 

제가 짝을 잘 만났던 것 같은 게, 그 친구도 당시 유행하던 록 보다는 뉴웨이브라던가 저랑 취향이 잘 맞았어요. ‘아 얘랑 같은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 참 좋겠다. 얘는 잃고 싶지 않다’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간 거예요. 

 

그래서 고1 때 그 친구와 나머지 파트 멤버들을 찾아서 페이퍼 모드라는 밴드를 만들고 처음 합주실이라는 데를 갔어요. 이름은 제가 지었는데 뭐, 아주 독창성은 있진 않아요. ‘디페시 모드’라는 밴드가 있었고, 그 당시 양장점들이 ‘무슨 무슨 모드’라며 이름 짓는 게 유행이기도 했어요. ‘페이퍼’가 악보라는 뜻이 있잖아요. 그걸 결합시켜 지으면 괜찮지 않나. 그래서 페이퍼 모드라고 지었는데, 아쉽게도 이 밴드로 그렇게 큰 결과물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 80년대 중반 스쿨밴드들은 남성적인 메탈 밴드 스타일 이름을 추구하곤 했는데, ‘페이퍼 모드’는 꽤 스타일리시한 이름이네요. 게다가 딥 퍼플이나 레드제플린이 아니라 듀란듀란 같은 음악을 추구하셨다고요?

 

윤상 : 저희가 첫 번째 연습했던 곡이 듀란듀란의 ‘Girl's on film’이라는 곡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진짜 안 맞았어요. (웃음) 스튜디오에서 많이 가공된 그런 사운드로 연주를 해야 어울리는 건데 그냥 들고 있는 악기로 쳤으니까요. 그래서 ‘이거 뭐지? 왜 저런 사운드가 안 나오지?’하면서 프로듀서의 마음으로 ‘도대체 왜 우리가 연주하면 그 소리가 안 나?’ 이런 걸 고민했던 것 같아요.

 

- 기타를 처음 쳤을 때처럼 밴드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도 사운드에 대한 탐구에 중점을 두셨던 거네요?

 

윤상 : 네. 합주했을 때 우리가 연주하면서 즐거워야 되는데 하면서 괴로운 거예요. ‘왜 이렇게 뭐가 이상하냐’ 그러면서 거기에서부터 좀 깨달아서 ‘건아들’의 노래라든지, 좀 쉬운 곡들, 우리가 접근 가능한 곡들을 찾아갔던 것도 훈련의 과정이 됐던 것 같습니다.

 

- 기타리스트였지만 베이스 기타로 포지션이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윤상 : 네, 충암고에 올라가서 밴드를 만들려고 각 반을 찾아가 물어봤어요. “야 너네 반에 기타 치는 애 있냐?”그러면 애들이 점심시간에 밥 먹다 “얘 치는데?” 이런 식이었어요. 반이 16개인가 있었는데 거기를 다 돌아다녔는데 베이스가 한 명도 없어요. 기타는 3명을 구했는데 합주할 때 베이스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합주실 갔는데 아무도 베이스를 안 치겠다는 거예요. 

 

당시 합주실은 (서대문 로타리에 있던)서문악기사였는데 부활의 김태원 씨부터 강북에 있는 밴드들은 아마 거기서 연습 안 한 팀이 한 팀도 없을 거예요. 거기서 가위바위보 했는데 제가 져서 할 수 없이 베이스를 집었던 것 같아요. 그때 처음 잡아봤어요. 합주실에서 빌려준 베이스 기타로. 그래도 그 당시에 귀가 훈련이 돼 있으니까 베이스라인이 어떻게 진행된다는 정도는 얼추 알고 ‘이런 거잖아. 해 봐’ 하면서 드럼이랑 저랑 맞춰보고 그 위에 기타가 들어오고.

 

- 베이스를 칠 때는 기타를 처음 잡으셨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다르셨나요?

 

윤상 : 일단 딱 잡았을 때 줄의 두께가 엄청 달라요. 굵기가 10배는 굵으니까. 손도 적응이 안 되고. 기타는 피크로 치면 되는데 베이스는 일단 손가락 두 개로 줄을 치다 보니까. 손가락이 마르고 닳도록  연습을 하는 거죠. 그래서 열심히 독학으로 피나는 연습을 했죠. 말 그대로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 ‘페이퍼 모드’가 데모 음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일반 스쿨밴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멀티 레코딩’을 시도하셨지요.

 

윤상 : 일단 자작곡을 만들었지만 기록을 안 해놓으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녹음기를 갖고 저희가 합주하는 걸 무조건 녹음을 했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이게 누굴 들려줬을 때 ‘오~’ 이럴 만한 사운드를 얻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마침 그때 카세트 레코더 두 대가 있었어요.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그래서 한 쪽에 기타를 먼저 녹음을 해요. 그리고 그걸 플레이백하면서 베이스가 얹어지는 걸 다른 녹음기에 녹음하고. 잡음은 엄청 심한데 그래도 대충은 알 수 있죠. 

 

거기에 드럼을 직접 녹음하면 소리가 너무 튀어서 다른 악기가 안 들리니까 드러머를 집에 데려와서 베개를 치게 했어요. 베개에다 종이를 놓고 스틱을 치면 약간 리듬이 생기거든요. 그런 식으로 녹음을 해서 노래를 녹음했던 것 같아요

 

- 그렇게 데모를 녹음하던 시절 만든 첫 번째 자작곡이 김현식 씨가 부른 ‘여름밤의 꿈’인가요?

 

윤상 :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치면 첫 번째 완성된 자작곡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좀 그렇지만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 한 번에 끝을 못 내요. 벌스면 벌스, 후렴이면 후렴, 인트로면 인트로. 이런 식으로 조각조각 만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몇 가지 곡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해서 고3 때 처음으로 노랫말까지 완성을 한 곡이 ‘여름밤의 꿈’이라는 곡이었고요. 최초로 ‘나도 곡을 써봐야지’ 해서 시작했던 곡은 황치훈 씨 1집 앨범에 있는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라는 곡이었어요.

 

- ‘페이퍼 모드’ 활동 시절, ‘어느 학교에 누가 음악을 잘 한다더라’하는 식으로 주변에도 입소문이 많이 퍼졌나요?

 

윤상 : 제가 입소문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신대철 씨나 김태원 씨 같은 분들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도 전설이셨어요. 제거 고2 때 두 분이 시나위, 부활로 데뷔하셨으니까. 그 무렵 학생들 사이에 이미 이분들이 입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죠. 그에 비하면 저희는 조그맣게, 아주 조그맣게 ‘월간 팝송’ 같은데 페이퍼 모드 기사가 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외인부대 하시던 손무현 씨가 딱 보고 “얘는 뭐야?” 그랬대요. 뉴웨이브를 지향하는 그런 팀이다. 이렇게 쓰여있으니까. 당시 뉴웨이브를 하는 밴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손무현 씨가 그걸 굉장히 인상 깊게 봤나 봐요.

 

- 당시 학교 내에서도 공연을 많이 하셨나요?

 

윤상 : 그게 참 초라하죠. 제가 베이스 치는 게 고등학교 2학년쯤 인정을 받았거든요. 저희 충암고등학교가 야구로 유명했어요. 제가 밴드부는 아닌데 학교에 중요한 야구 경기가 있을 때 밴드부 베이시스트로 특별히 차출돼서 연주를 했고요. 저희 드러머 김학인 씨와 함께.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수학여행 갔을 때, 저희가 처음으로 페이퍼 모드라는 이름으로 학생들 앞에서 공연을 했죠. 그게 아마 학교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 같습니다.

 

- 학교에서의 그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 때는 자작곡을 연주하셨나요?

 

윤상 : 그땐 아무래도 수학여행이니까 학생들이 좀 알만한 곡들. 그때 뭐 건아들의 노래라든지.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그리고 저희 자작곡이라고 해봐야 ‘추억 속의 그대’라는 곡을 그 당시 저희 버전으로 했었던 것 같고. 뭐, 그런데 저희 거 하면 안 좋아하죠. 그리고 그때는 학생들의 기호를 맞춰주기 위해서 딥퍼플의 ‘Smoke On The Water’도 해주고. 뭐 원하는 대로 해줬던 것 같아요. 많이 좋아했죠. “우리 학교에도 이런 밴드가 있다” 하면서.

 

- 1988년, 자작곡 ‘여름밤의 꿈’이 김현식 4집 앨범에 수록되면서 작곡가로 정식 데뷔하셨습니다.

 

윤상 : 스무 살이 됐을 때, 음악을 같이 하던 멤버들이 다들 군대를 갔어요. 학교 진학을 안 하고. 저는 운이 좋게 원하던 대학에 들어는 갔어요. 유약공예라는 과였는데 지금은 도예과로 바뀌었어요. 입학하자마자 휴학을 일단 하고, 페이퍼 모드 곡들과 제가 만든 자작곡도 몇 개 넣어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어요. 그 즈음 신촌블루스 선배들과 면을 트기 시작했어요. 그분들 사무실에 가서 ‘제가 좀 도와드릴 일 없냐’면서 제가 그냥 찾아갔어요. 

 

저도 참 숫기가 없는데 그땐 음악 잘 하시는 분들하고  어떻게든 가까워지는 게 목적이니까 되게 적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봄여름가을겨울 선배님들한테도 연습실 찾아가도 되냐고 들이댔죠. 지금으로 보면 뭐랄까... 피곤한 동생이었죠. 

 

그래서 일면식을 갖게 된 후에 봄여름가을겨울 선배님들 공연하시면 포스터도 붙여드리고, 조명 보조도 좀 해드리고, 안마도 해드리고. 막내로써 그런 역할을 했죠. 최선을 다해서. ‘쟤가 그래도 또라이는 아니구나’ 그런 정도의 인식을 좀 심어드린 후에 조심스럽게 데모를 드렸어요. 혹시 시간 되실 때 제 음악이니까 들어봐 달라고. 

 

그러고 잊어버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갑자기 김현식 선배님이 전화를 하셔가지고 “네 노래 내가 좀 해도 되겠니?”이러시는 거예요. 저는 갑자기 막 손이 떨리면서 현식이 형하고 직접 통화도 처음인데 꿈만 같았죠. 그런데 그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녹음을 하게 되는지 아무런 연락도 안 주셨어요. 그 전화받고 몇 달 있다 레코드점을 갔더니 김현식 4집이 발매가 된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거기 제 이름이 딱 있었어요. 그래서 와 진짜 녹음이 된 거구나.

 

- 녹음 현장에는 계시지 못하신 거였군요.

 

윤상 : 안 부르시더라구요. 아무튼 저는 초대받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뜻하지 않게 꿈이 빨리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 그것도 제가 정말 존경해 마지않는 김현식 선배님이 제 노래를 불러주셨다는 것 자체에 너무 감격했었던 것 같고요. 뭐 그걸 빌미로 이제 더 들이댈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다른 회사들에도 많이 들이대고 다녔던 것 같아요. 

 

무작정 찾아가서 “내가 이 앨범에 있는 ‘여름 밤의 꿈’이라는 곡을 쓴 사람인데 내 곡 한 번 써다오” 이런 느낌으로. 스무 살 때였어요. 그때는 봄여름가을겨울이나 빛과 소금 선배님들의 후광을 많이 받았죠. 내가  이분들하고 친하고…뭐 그런 식으로 자기 PR을 했던 것 같아요.

 

- 동아기획 뮤지션들과도 친했는데 동아기획과의 연은 없으셨나요?

 

윤상 :굉장히 그 부분이. 지금 생각해도 좀 억울하네요. (웃음) 동아기획은 저한테 굉장히 냉정했어요. 그쯤 되면 김현철 씨처럼 저도 앨범 얘기가 나올까 그랬는데. 김영 사장님하고 제가 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 저한테는 앨범 제안 안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난 뭐가 부족할까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 황치훈에게 가수 신인상을 안겨 준 ‘추억 속의 그대’를 통해 완전히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히셨습니다.

 

윤상 : 황치훈 씨가 그 데모를 듣고 불러도 되겠냐고 했을 때 저는 그게 그렇게까지 잘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아역배우 출신에, 그 당시에도 유명인이라 저한테 믿음은 줬죠.  당시 앨범이  중간에 엎어지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이 친구라면 앨범이 완성되겠다 했는데 앨범에 참여하는 라인업이 엄청난 거예요. 

 

김종진 선배부터 함춘호 선배, 당시에 정말 그렇게까지 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한 앨범이 없을 만큼 황치훈 씨 음악적 욕심이 대단했죠. 무려 제 곡이 타이틀이 돼서 그렇게 사랑을 받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사실 김현식 선배에게 드린 곡은 ‘내가 이런 노래를 만들었다’였지만 ‘곡이 히트된다는 건 이런 거구나’하는 건 황치훈 씨 덕분에 알게 된 거죠.

 

- 스무 살에 이미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가 되셨습니다. 곡 작업 요청이 쏟아졌을 것 같은데요.

 

윤상 : 적지 않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던 게 그즈음 같고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작업 성과로 뭔가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든지 그렇지는 못해요. 그 두 곡 만든 수입으로 몇 달 못 살 만큼의 수준이었죠. 그리고 그때는 저작권 협회라는 것도 지금처럼 시스템이 완성되기 이전이었거든요.  그래서 곡을 팔려면 한 달에 한두 곡씩은 팔아야 생활이 되는 거라. 저는 어떻게 하면 음악을 하면서 계속 지속 가능한 음악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손무현 씨하고 밴드를 만들려고 하던 중에 손무현 씨가 갑자기 김완선 씨랑 연이 닿아서 제의를 받은 거에요. 자기가 백 밴드가 필요한데 혹시 기타리스트로서 뭔가 밴드를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그러면서 손무현씨가 저한테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했어요. 월급이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우리가 밴드를 하면 계약 상황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습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아니냐” 하길래 선뜻 받아들였죠. 

 

그래서 김완선 씨가 공연하면 당연히 저희가 연주료 받고. 그때 김완선 씨 열정이 대단해서 힘들게 밤무대를 하시고 나서 우리와 합주를 하는 스케줄을 다 소화하셨어요. 일주일에 한 서너 번을 연습을 했는데. 결국에 저희 밴드 ‘실루엣’과 함께 콘서트도 몇 번 했었죠.

 

- ‘실루엣’ 활동 당시 김완선 씨 앨범에도 참여하셨나요?

 

윤상 : 김완선 씨 백밴드인 '실루엣'에서 함께하던 손무현 씨가 전격적으로 프로듀서로 발탁이 됐거든요. 저는 그 당시 ‘실루엣’ 밴드 활동을 하면서 강수지 씨 1집 앨범을 프로듀싱을 했어요. 그걸 보고 김완선 씨의 제작자인 한백희 씨, 그 유명하신 김완선 씨 이모께서 ‘우리 완선이도 젊고 색깔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데리고 앨범을 만들어야겠다’하면서 손무현 씨가 5집 프로듀싱을 맡았는데 대박이 난 거죠. 그게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김완선 씨 4집 때도 제가 연주 세션으로 손무현 씨와 함께 참여는 했지만, 제 곡을 드린 건 아니었거든요. 손무현 씨는 거의 많은 곡을 직접 써서 완선 씨의 5집을 히트시켰고, 저는 그때 강수지 씨 1집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 자연스럽게 갈라지게 된 거예요

 

- 강수지 씨 프로듀싱을 맡게 된 계기도 궁급합니다.

 

윤상 : 제가 작곡가로 데뷔하고 나서  (후일 ‘난타’로 유명해진) 송승환 선배 회사가 아마 신인작곡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선배 중 한 분이 “지금 미국에서 온 노래를 너무 잘하는 그런 여가수가 있는데 한 번 만나서 상의를 해보지 않겠냐” 제의를 하더라고요.  

 

방배동에 있는 카페로 불려갔어요. 갔는데 첫눈에 ‘아, 저 분이 가수겠구나’ 했죠. 그 자리에 송승환 선배는 없었고 그 앨범을 제작하는 프로듀서께서 저한테 약간 “근데 아직 경험이 너무 없는데 뭐 좀 곡을 써볼 수 있겠냐” 그래서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다”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거였죠. 그렇게 작업한 곡이 ‘보랏빛 향기’.

 

- 강수지 씨를 보자마자 곡을 ‘어떤 스타일로 써야겠다’하는 생각이 드셨나요?

 

윤상 : 물론 그렇죠. 그래서 처음 어떤 스타일의 노래를 하면 좋겠는지 상의를 했을 때 ‘뭔가 좀 무겁지 않으면 좋겠다’였고요. 그래서 워낙 아름다우신 분이셨기에 첫인상을 떠올리며 뭔가 이렇게 홀리듯이 그런 악상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 ‘보랏빛 향기’는 당시 레퍼런스조차 예측할 수 없던 신선한 곡이었습니다.

 

윤상 : 강수지 씨를 보고 어떤 앨범을 기준을 잡았냐면, 예쁜 가수의 대명사 시나 이스턴을 떠올렸어요. ‘Modern Girl’ 같은 노래라든지. 혹은 올리비아 뉴튼 존. 근데 시나 이스턴 1집 의 분위기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최대한 그런 사운드를 내보고 싶었어요. 결과는 동떨어졌지만 ‘보랏빛 향기’로 다시 버무려진 거죠.

 

- 강수지 1집 앨범부터 본격적으로 신디사이저와 프로그래밍을 활용하셨지요. 처음 신디사이저에 관심을 가지신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윤상 : 신디사이저가 세상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초등학교 때였어요. 중학교 때 낙원상가에 가보니까 신디사이저를 파는 데가 있긴 있었어요. 제일 싼 게 600만 원 그렇게 붙어 있었어요. 그 당시 가격으로. 집 한 채 값이죠. 저도 이게 악기 한 대 값이... 너무 놀라워서 친구랑 같이 0을 몇 번을 센 거예요. 80만 원도 엄청 큰돈이고, 기타만 해도 100만 원은 넘었던 것 같은데 600만 원, 800만 원 막 이러니까. 그래서 ‘이 건 한참 걸리겠다’ 생각하면서 신디사이저를 갖는 게 꿈이 됐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어머님 도움으로 중고 신디사이저를 하나 마련했어요. 그때부터 독학을 했죠. 영어 매뉴얼 보고 사전 찾아가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굉장히 애를 많이 썼죠. 강수지 씨 앨범을 프로듀싱할 때쯤 악기값이 많이 내려갔어요. 대량생산이 시작됐고 또 이전 보다 사용하기 편해진 장비들도 많이 나왔고. 드럼 머신도 있었고. 이쯤 되면 이제 혼자서도 앨범을 프로듀싱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때 강수지 씨 제작자를 만났을 때 저의 조건은 ‘곡 비는 안 받아도 좋다. 대신 프로듀싱을 내가 할 수 있게 해달라. 마음에 안 들면 녹음 안 하면 되지 않느냐.’ 그게 저의 조건이었어요.

 

- 그 당시는 신디사이저는 아날로그 방식에서  초기 디지털 악기였던 PCM 방식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지요?

 

윤상 : 네, 아날로그 씬스는 필요한 소리를 거의 혼자 다 만들어야 됐어요. PCM은 프리셋이 있어서 번호를 누르면, 1번부터 10번 대까지는 피아노, 20번부터 30번 대까지는 오르간, 30번부터 40번 대까지는 관악기. 이런 식으로 소리가 어느 정도 만들어진 상태죠. 그럼에도 악기 값이 비쌌어요. 그런 악기들이 그 당시 소나타 반 대 값 정도에 팔렸으니까. 열심히 음악 해서 번 돈으로 PCM 신디사이저와 드럼머신과 시퀀서라는 걸 사서 집에서 혼자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죠. 운이 좋았던 게 악기 값이 계속 집 한 채 값이었으면 못했을 거예요.

 

- 새로운 악기와 사운드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셨습니다. 반면에 연주자들 중엔 전통적 방식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거부감을 표하거나 하진 않았나요?

 

윤상 :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건 뭐,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고요. 제가 드럼머신을 마스터해서 녹음 세션에 사용한 적이 있어요. 그때 드러머 선배분한테 좀 혼난 적이 있었죠. 그래서 그 선배님이 오시는 녹음에는 제가 안 갔죠. 아무래도 그러실 수밖에 없잖아요. 특히 인간이 만들어내는 드럼 소리의 어떤 생명력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인데. 그렇게 드럼머신으로 프로그래밍된 리듬을 접하시고는 옛날 유교 학자들이 쇄국하듯이. ‘이게 무슨...’ 하시고. 

 

근데 아무래도 비트가 좀 있는 곡 같은 경우, 직접 칠 때보다 좀 더 맛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제가 드럼 머신으로 여러 곡들에 세션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좀 곱지 않은 시선을 느꼈던 적이 있었죠.

 

- 이 같은 사운드적 실험은 1990년, ‘보랏빛 향기’가 수록된 강수지 씨 앨범, 그리고 ‘입영열차 안에서’가 수록된 김민우 씨 앨범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윤상 : 네, 김민우 씨 ‘입영열차 안에서’는 세션들과 함께 리얼 녹음으로 진행했고, 강수지 씨 보랏빛 향기는 전부 프로그래밍으로 녹음했죠.제작사에서 전폭적 지지를 받는 두 가수의 앨범을 서로 다른 타입으로 녹음해 보면서 어떤 게 더 내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지 저도 궁금했어요. 그것도 실험이었죠.  

- 20대 초반 나이에 이미 사운드 변혁이 일어나는 신구 시대 교차점에 계셨던 거군요.

 

윤상 : 저만 딱 그랬던 건 아니고요. 아까 말씀드린 손무현 씨도 저와 비슷한 식으로 그렇게 활약을 하셨던 걸로 기억하고 015B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신해철 씨도 결국 저처럼 자기가 시퀀서 다 공부하고 신디사이저도 집에다 마련해 놓고. 그렇게 저희들만의 어떤 공감대가 이미 만들어져 있더라고요.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그렇게. 단지 서로 알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욕망의 별자리가 이렇게 형성되고 있었던 거죠.

 

 

 

(2부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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