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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우정호

연주자, 작곡가, 프로듀서, 가수, 그리고 ‘신디사이저’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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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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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에서 이어집니다.)

 

 

- 가수로 데뷔하셨을 당시 귀공자 같은 분위기에 팬덤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윤상 : 귀공자는 무슨... 그대 이미 귀공자는 테리우스 신성우가 있었죠. 이덕진 같은 후배도 있었고. 신성우 씨 나왔을 때 저는 ‘이미 게임 끝났구나’ 했습니다.

 

- 그때 친하셨던 분들은 어떤 분들이 있었나요?

 

윤상 : 그때는 다들 꽤 친하게 지냈죠. 신승훈 씨도 그렇고. 같이 방송을 하면서 같은 대기실을 쓰면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다들 친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같이 밴드를 하려고 했던 손무현 씨도 저 다음 해에 가수로 데뷔도 하고. 둘이 활동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 손무현 씨와는 처음에 어떻게 만나셨나요?

 

윤상 : 메탈 기타리스트인데 팝 기타를 너무 잘 친다는 소문을 듣고 제가 외인부대 연습실을 그냥 찾아갔어요. 가서 “나 밴드하는 누구인데 우리 얘기 좀 할까?” 그랬죠. 인터넷이없던 시절에는 그런 게 자연스러웠어요.  손무현 씨는 처음에 제가 좀 무서웠대요.  머리도 길고 강북식 기지바지 스타일에 구두 신고. 그런 차림을 한 10대 후반을 생각해 보세요. 약간 겁나네(웃음). 하얀 양말에... 아마 강남에서 자란 손무현 씨한테는 꽤나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 둘이 나이대가 비슷한가요?

 

윤상 : 동갑이에요. 그래서 더 친해지기 쉬웠죠. 저도 웃긴 게, 멀쩡하게 밴드하는 친구한테 ‘너 그 밴드 나와서 나랑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저 외인부대 다른 선배님한테 ‘너 이런 건 룰이 아니다’라고 혼났어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외아들이라 사회생활을 좀 잘 못한 것 같아 정말 죄송하다고 그렇게 얘기 드리고... 다행히 나중에는 그 팀이 오래 가지 못해서 손무현 씨가 자진 탈퇴하는 그런 그림이 됐죠.

 

- 작곡가 커리어를 이어가다 가수로 데뷔하셨을 땐 기분이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윤상 : 그렇죠. 우선 그렇게까지 성공을 할 줄은 몰랐는데 무엇보다 응원해 주셨던 팬 여러분들한테 지금까지 너무 감사하고... 제가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어요. 그때도 다른 가수들은 그래도 팬들과의 소통을 참 잘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가까이 오면 밀쳐내는 스타일이었어서... 데뷔하고 단독 콘서트를 9년 만에 처음 했으니까. 무대에 오르는 것도 제가 원하던 미래는 아니었고. 

 

가수 데뷔를 어떻게 하게 됐냐 하면요. 그때 제 앨범 제작하신 분이 김민우 씨 앨범 제작한 분인데 제 데모 테이프를 듣고 저한테 가수 제안을 해왔어요. 갑자기 3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제시하더라고요. 몇 달 고민을 하다가 해보겠다 했어요.  그런 큰 금액이면 원하는 악기와 장비를 살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저는 보컬리스트로서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노래를 해도 되나?’ 생각했죠. 근데 당시에 그래도 제가 기억하기에  제 또래 다른 가수들이 지금처럼 가창력이 정말 끝내주는 친구들이 아니었어요. 약간은 캐주얼한 가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욕은 안 먹겠구나 정도의 자신감으로 시작했어요. 그럼에도 라이브를 하면 할수록 제가 못 견디겠는 거예요. 난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계속 가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앨범을 만드는 게 많이 부담이 됐었죠.

 

- 그럼에도 직접 보컬을 하시고 셀프로 프로듀싱을 하시면서 자기 객관화를 거치셨기에 다른 가수들 작업에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윤상 :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그렇게 성장한 것 같습니다.

 

- 가수로서 첫 앨범은 9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윤상 : 사실 저는 그걸 못 믿겠어요. 그때는 판매량을 추산할 수 있는 근거가 뭐 레코드 회사에서 그걸 제작자들한테 다 밝히지도 않았다고 하는 얘기도 있고, 다 ‘카더라’, ‘그랬다더라’ 그런 시절이었죠. 제작자한테 들었을 때, “조금만 더 했으면 100만 장 넘길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그다음 앨범 푸시를 하는 거죠. 

 

근데 저는 2집은 될 수 있으면 안 만들고 싶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에 제가 거꾸로 역제안을 했어요. 2집을 파트 1, 2로 나눠서 파트 1은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만들고 부르겠다. 대신 파트 2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터치하지 말아달라. 그래서 2집이 파트 1, 2로 나뉘게 돼요. 그러고는 2집 ‘가려진 시간 사이로’라는 곡이 타이틀이 돼서 제작자가 원하던 대로 100만 장 고지를 넘겼어요. 

 

근데 파트 2가 저한테 30만 장 팔렸다고 했는데, 나중에서야 공식화된 자료를 보니까 45만 장이나 나간 거예요. 저한테는 거짓말 한 거고. 웃기지도 않지만 저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면 바로 망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된 것 같아요.

 

- 2집 ‘파트 2’에도 ‘이별 없던 세상’이라는 빅 히트 곡이 수록됐습니다.

 

윤상 : 빅 히트까지는 아니었고요. 뭐 노영심 씨 덕분에 그래도 노래가 많이 알려졌죠. 그때 메탈 듣고 락 듣고 그런 시대긴 했지만 한국에서 좀처럼 듣지 못했던 신디사이저를 쓴 좀 사운드를 담으니까 친구들도 듣고는 “3집 ‘가려진 시간 사이로’보다 이 노래가 더 좋지 않나?”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그렇게 반 밖에 안 팔릴 줄은 몰랐어요. 저도 역시 대중들은 냉정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2집의 ‘파트 2’에서는 객원보컬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윤상 : 그때 김형중 씨가 이오스라는 팀으로 활동을 했는데 너무 목소리가 소년미가 있어서 일부러 그 친구를 염두에 두고 ‘소년’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서 노래를 부탁했어요. 김현철 씨와 저랑 굉장히 많은 부분이 잘 맞아요. ‘김현철 곡을 내가 프로듀싱하면 어떻게 될까?’하는 욕심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3월부터 3월까지’라는 이 친구의 곡을 제 앨범에 가져와서 제가 원하는 대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런 것도 해보고. 그렇게 호사를 누렸죠.

 

- 90년대 초반, 그 당시 젊은 프로듀서로서 김현철 씨도 윤상 씨도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신 프로듀서이자 가수였습니다. 두 분 사이에 경쟁의식 같은 건 없으셨나요?

 

윤상 : 아니요. 오히려 더 친했어요 둘이. 진짜 자주 만났고. 지금보다 더 친했던 것 같은데요. 김현철은 저보다 동생인데 너무 분위기가 좋아서 제가 ‘친구를 해라. 친구. 그냥 야자 해라’ 그랬죠. 이 얘긴 굉장히 지금 인생에 후회하는 몇 가지 일 중에 하나인데…(웃음)그만큼 친했어요. 죽도 잘 맞고. 음악 얘기를 깊게 할 수 있는 또래 중 몇 안 되는 친구였고. 그런 이유로 나이차까지 허물게 된 거죠. 지금도 뭐 방송(‘복면가왕’) 덕분에 약속 없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날 수 있으니까.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파트 2’ 작업에 고교 시절 밴드 페이퍼 모드라는 이름이 다시 소환됩니다. 물론 멤버는 달랐지만. 그런데 각자 세션 연주자가 아니고 전부 프로그래밍으로 참여하셨다고요.

 

윤상 : 각자 역할은 있지만 공통된 역할이 프로그래밍이었어요. 그래서 드러머도 드럼을 치지만 프로그래밍도 했고. 그리고 제가 프로듀싱했던 MBC 드라마 ‘파일럿’ OST 앨범에서 노래를 부른 노성원이라는 친구도 보컬이 아니라 프로그래밍으로 참여했어요. 그때 저하고 작업실을 함께 쓰고 있어서 미디 프로그래밍에 능했거든요. 

 

그리고 지금 아스트로 비츠로 활동하고 있는 김범수. 그 친구도 베이시스트인데 프로그래밍도 했고. 그래서 앨범 만들고 혼자 무대에 서는 게 너무 싫어서 ‘파트 2’부터는 제 학교 시절 밴드였던 페이퍼 모드를 다시 재결성을 한 건데 그 해에 제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다시 해산을 하게 됐죠.

 

- 만약 그때 해체하지 않고 활동했다면 한국에도 크라프트베르크 같은 밴드가 생겼을지 모르겠네요.

 

윤상 : 음... 좀 아쉽네요. 물론 아주 오래가지는 못했겠지만, 워낙 개성들이 강한 멤버들이라 한, 두 장 정도 더 결과물을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좀 남습니다.

 

- ‘파트 2’에서 페이퍼 모드와의 공동작업은 어떤 형식이었나요?

 

윤상 : 예를 들면 드럼 치는 친구가 리듬머신을 가지고 한 곡에 해당되는 프로그래밍으로 리듬을 만들어 와요. 그 데이터를 미디로 메인 시퀀스에다 옮기고 거기에다가 다른 더빙을 하는 거죠. 미디 음들과 다른 효과들을 각자 아이디어대로 넣어보고 어울리면 합격. 안 어울리면 서로 다시 얘기를 하고. 그것도 밴드죠. 같이 실제 연주만 안 한다 뿐이지. 서로 아이디어가 이렇게 모이면서 만들어지는 음악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더라고요. 

 

참 번거로운 작업은 맞는 게, 그렇게 해서 시퀀서라는 컴퓨터에 시퀀싱을 다 한 다음에 각자 악기를 들고 다 이사 가듯이 녹음실로 가요. 그러면 그냥 커다란 모니터부터 신디사이저까지  한 대씩 다 꺼내고 그거를 또 멀티레코드에 싱크를 맞춰서 한 트랙씩 플레이백을 해서 멀티로 녹음을 하는 거죠. 길고도 지루한 과정인데 그 사이에 엔지니어 분하고는 굉장히 친해지죠. 얘기를 하고 이런저런 콘솔에 대해서도 배우고. 녹음하면서 공부도 됐죠. 

 

- 심지어 엔지니어 분 조차 그런 방식의 녹음은 처음 해본 게 아니었을까요?

 

윤상 : 거의 그렇죠. 다행히 김국현 엔지니어라고 제 2집 믹스해 주신 분이 미국에서 여러 경험을 많이 하고 오셔서 저한테도 그때 많이 알려주셨죠. 그때는 그게 다 자기 밥줄이고 비밀이라 그러한 정보들은 보통 말 안 해주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흔쾌히 좋은 기술들도 알려주셨어요. 지금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 새로운 방식의 녹음 과정이기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녹음 관계자들도 있었을 것 같네요.

 

윤상 : 그래서 사전에 여러 녹음실을 가보고 엔지니어 분이 나한테 얼마나 우호적인지 알아보고 선호하는 녹음실이 생겼던 것 같아요. 제 1집을 믹스해 주신 분도 훌륭하시지만 무서웠어요. 그래서 제가 고집해서 2집부터는 좀 더 저한테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셨던 김국현 선배가 있는 지구레코드에서 녹음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지구레코드는 당시 조용필 선배님이 녹음하셨던 곳이에요.  ‘A 녹음실’에서 녹음하시는 모습이 저한테는 너무 멋있었죠. 저한테 꿈의 무대는 없었지만 꿈의 녹음실 같은 개념이었죠.

 

- 특유의 작곡법으로 인해 ‘윤상 코드’, ‘윤상 딜레이’, ‘윤상 드럼’과 같은 신조어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윤상 : 저는 그저 너무 운이 좋았던 세대일 뿐이에요. 예를 들어 반젤리스라는 아티스트를 떠올리면 ‘불의 전차’ 사운드트랙에 ‘밤밤밤밤~’ 하면서 약간 브라스도 아니고 스트링도 아닌  묘한 사운드가 있는데,  반젤리스가 그 악기를 제일 처음 사용하면서 자기 브랜드화를 시켰어요. 그래서 남들이 그 소리를 쓰면 ‘이거 반젤리스잖아’ 이렇게 되는 거죠. 시그니처가 되는 건데, 저도 운 좋게 제일 먼저 얼리어댑팅을 해서 그런 소리들을 빨리 사용하다 보니까 그랬을 뿐이죠. 제가 어떤 딜레이를 사용해서 프레이즈를 만들었는데 이전에는 없던 거였으니까. 

 

그 이후에 누가 딜레이를 걸어가지고 그런 소리를 만들면 ‘윤상 같은데?’ 이런 반응이 있게 된거죠. 미안한 마음이고. 드럼은 워낙에 또 그때  이현도 씨도 아주 멋진 프로그래밍된 그루브를 잘 만드셨고 코드 같은 건 저도 유재하 선배님이라든지 그러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후배들한테  먼저 써서 미안하다는 기분이 들죠. 

 

- 1996년, 조금 색다른 EP [Renacimiento(레나시미엔토)]를 발표하셨습니다. 이미 발표된 곡들을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어로 리메이크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윤상 : 그때 제가 거의 2년 반 가까운 군 복무를 하면서 음... 그동안 못 해봤던 걸 하고 싶은 욕심, 그리고 군대 바깥에서 돌아가고 있는 가요계와는 좀 다른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언어의 뉘앙스에 따라 곡의 분위기를 바뀌는 게 너무 궁금했어요.   

 

- 그 EP가 발매된 1996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HOT가 데뷔하던 해였습니다. 가요계가 바야흐로 댄스 뮤직의 격랑으로 빨려들기 시작한 해였는데 당시 흐름과는 안맞았어요.

 

윤상 : (웃음) 이게 군대에 있으면 아무래도 균형감각을 잃게 돼요. 지금이야 내무반에서 뭔가 미디어를 좀 즐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그래서 정말 혼자만의 길을 간 거예요. 그래서 정말, ‘추락’이라고 하죠? 저의 커리어의. 2집 ‘파트 2’는 망한 게 45만 장이었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10만 장까지... 프랑스에서 가수 불러오고, 이태리에서, 미국에서 불러오고, 엔지니어도 외국에서 데려오고. 

 

제작비는 그 어떤 앨범보다 많이 썼어요. 그때가 제일 저의 사치의 끝이었는데 앨범은 한 10만 장 정도… 그때 현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너무 내 욕심만 내도 이렇게 지속 가능성없는 현실을 마주할 수 있겠다는. 제가 군대에서 뭔가 혼자만의 세상을 현실화 시킨 게 이 EP였고, 아마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해외 교류도 힘들었을 텐데. 작업에 참가한 해외 가수들 정보를 어떻게 얻고 섭외하셨나요?

 

윤상 : 그렇죠. 해외전화를 건다고 해봐야 제가 이태리어를 하겠습니까. 군대 가기 전에 ‘윤상의 디스크 쇼’ 라디오 DJ 할 때 해외 음악을 소개해 주시는 칼럼니스트 분이 계셨어요. 김현주 씨라고. 그분이 이탈리아어가 유창하니까 찾아가서 알음알음으로 이탈리아 쪽 제작자를 알게 돼서 컨택하고. 프랑스 가수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제가 크게 상처도 한 번 받았어요. 

 

엘사(Elsa Lunghini)라는 프랑수 가수 있잖아요. 얼음왕국 그 엘사 말고. 그 가수가 저의 [레나시미엔토]에서 노래하는 게 제 목표였어요. 그때 엘사가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저 나름대로 흥행성도 생각했고. 저는 이 친구가 거의 섭외가 된 줄 알고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는데 자기가 알고 있기로는 나하고 식사하는 것까지만 얘기를 들었대요. 중간에 누군가가 장난을 친 거죠.

 

저는 엘사가 나와서 ‘아, 드디어 이 친구랑 녹음을 하는구나’ 그랬는데 ‘뭔 녹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급하게 오디션 비슷한 걸 해서 세실(Cecile)이라는 다른 무명 프랑스 가수를 섭외했어요. 음반 만드는 과정에서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일들이 많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저한테 제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모험이 된 것 같아요.

 

- 제작 과정이 다사다난했던 만큼 앨범 준비 기간도 길었을 것 같습니다.

 

윤상 : 거의 한 1년 걸렸죠. 가수 섭외만 한 3, 4개월 걸렸던 것 같아요. 그때 이탈리아에서 섭외된 가수는 엔리꼬 루게리(Enrico Ruggeri)라는 가수인데 그분이 산레모 가요제 그랑프리 수상자였거든요. 그 당시 산레모 가요제는 우라나라에서도 방송해 주고 그랬으니까. 저 정도 라인업이면 좀 잘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관심이... (웃음) 

 

그때가 말씀하신 대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하고, HOT 데뷔하던 그런 시댄데  저는 흐름을 전혀 의식도 못하고 그냥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니 내가 음악 열심히 하면 되지’라는 생각에. 그러니까 제작자도 참 답답했을 거예요. 저를 볼 때.

 

- 이른바 ‘장인의 시대’가 저물어 가던 시대가 아니었을까요.

 

윤상 : 맞아요. 그래서 아마 신해철 씨랑 했던 노땐스도 둘 다 약간 그런 부분에서 ‘세상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네’라는 어떤 그런 마음 때문에 팀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 신해철 씨와는 어떤 계기로 같이 작업을 하게 됐나요?

 

윤상 : 제가 군생활 할 때 휴가 나오면 가장 많이 만났던 친구가 신해철 씨였어요. 가장 술을 잘 사줬던 친구였죠. 그러다 보니까 같이 뭔가를 꾸미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리고 나중에 해철 씨의 행보를 보니까  노땐스 이후로도 넥스트를 거의 해체하다시피 하면서 자기 밴드 모노크롬을 만들고.. 이런 것에서 아마 이전부터 마음속에 전자음악에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그런 니즈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누가 먼저다 할 것 없이 그런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볼 땐 또 록 음악에서 그 정도까지 퀄리티를 끌어낸 프로듀서도 몇 없잖아요. 근데 그런 친구가 또 1인 밴드로 전자음악 셀프 프로듀싱을 한다는 것도 좀 놀라웠던 것 같아요. 아마 나인 인치 네일스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나인 인치 네일스)트렌트 레즈너도 결국 지금 영화음악가가 돼 있는데, 신해철씨가 굉장히 좋아했었어요. 

 

- 노땐스가 결성된 96년은 케미컬 브라더스나 나인 인치 네일스가 음악 신을 한 번 휩쓸었고, 언더월드 같은 전자 음악 팀도 나왔을 시절입니다. 그런데 노 땐스 앨범은 그 또한 당시 트렌디한 전자음악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었지요.

 

윤상 : 그때 저희가 어떤 장르를 정해놓은 건 아니에요. 이 앨범의 컨셉은 무조건 전자악기로만 가는 거다. 세션은 기타 정도만 쓴다. 그런 개념으로 앨범을 만들자는 정도였지, 딱히 일렉트로닉으로 간다고 얘기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언더월드를 레퍼런스로 잘못 잡으면 좀 조악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고. 우리는 ‘가요를 하는 대중음악인으로 최대한 전자악기를 활용하는 컨셉으로 가자’하는 앨범이 노땐스였던 거죠. ‘달리기’라는 곡도 거기 실려 있는데 이건 오히려 레퍼런스가 에이스 오브 베이스였어요.

 

- ‘달리기’는 SES가 리메이크했고, ‘수능 전날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노래’로도 알려졌습니다.

 

윤상 :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이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을걸요. 아무래도 ‘끝난 뒤에는 지겨울 만큼 쉴 수 있으니까’라는 대목 때문에 그러지 않으실까. 박창학 씨 가사죠.

 

- 같은 앨범 수록된 ‘질주’는 당시 한국 음악에서 들을 수 없던 ‘드럼 앤 베이스’ 장르였습니다.

 

윤상 : 드럼 앤 베이스에 그렇게 멜로디를 구겨 넣는 음악도 없었을 거예요. 그게 아까 말씀드린 ‘가요지만 최대한 어떤 일렉음악의 아이템들을 가져와서 만들자’는 취지를 살린 거니까요.

 

- 그러면서도 같은 앨범에서 신해철 씨는 인더스트리얼 장르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윤상 : 맞아요. 둘이 색깔이 또 이렇게 나뉘는 것도 알 수 있고. 생각보다 같이 만든 곡이 많은데 나오고 나니까 일단 작곡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서 색깔이 확 갈리긴 하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월광’이라는 곡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노래도 같이 했고.

 

- 노땐스 시절엔 두 분이 두 달 동안 같이 합숙하며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윤상 : 같이 하기로 하고 몇 번을 만나서 했는데 결과물이 없어요. 뭔가 이게 헛돌고.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죠. 같이 살자. 합숙을 하자. 그래서 곡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나가지 않기로. 그래서 작업실을 빌려서... 요즘같이 에어비앤비 뭐 그런 건 없었고요. 당시에 제가 굉장히 현실감각이 동떨어지고 말씀드렸듯 사치란 사치는 다 하던 시절이라.  엄청 넓은 호텔 스위트룸을  거의 두 달 동안 썼던 것 같아요. 얼마가 들었는지 하는 개념도 없었던 것 같아요. ‘돈 들면 드는 거지 뭐. 그냥. 음악이 중요한 거 아니야?’ 이러면서.

 

- 제작자가 없이 ‘셀프 제작’을 하셨던 거군요.

 

윤상 : 거의 셀프였어요. 그래도 누군가의 명의가 있어야 돼서 신해철 씨의 제작자였던 분 명의로 나왔지만, 결국 노땐스는 저와 신해철 씨가 제작을 한 거죠. 근데 이제 그 앨범이 저한테는 좀 안타까운 게, 처음 앨범이 출고되고 한 달 뒤에 목표치가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저희에게 투자한 회사에서 한 몇 천만 원을 반환하라고 해서... 바로 반환했죠. 뭐 빚지고는 못 사니까. 

 

지금 와서 보면 계산으로 따졌을 때 저희가 앨범 내고 가져가는 포션이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제작자 입장에서는 잃을 건 없었을 것 같아요. 그렇치만 그때는 정말 레코드 회사의 힘이 엄청났던 시대라서 달라니까 줬죠. 내가 손해를 끼쳤다면 물어내는 게 당연하지만, 그 사람들 돈을 우리가 탕진한 건 아니고 충분히 기본적인 제작비는 건진 것 같았는데도 달라니까 줬어요.

 

- 96년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미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땐스의 작업에도 적용이 됐나요?

 

윤상 : 노땐스 할 때까지만 해도 소프트웨어 신스가 개발 안 됐어요. 그게 96년에서 97년이었는데, 그래서 큰 작업실을 빌릴 수밖에 없었어요. 서로 갖고 있는 악기는 전부 다 갖고 가니까 그 스위트룸이 악기로 다 가득 차 있어요. 거의 이사 수준이었죠. 하드웨어 신디사이저를 가지고 아예 그냥  캠프를 꾸려놓고 작업을 하고. 그대로 그걸 녹음실에 갖고 가서 다시 멀티에다 녹음을 하는 식이었어요. 

 

그때 저희가 처음으로 아토 오브 노이즈의 멤버였던 게리 랭건이라는 프로듀서를 엔지니어로 영국에서 또 초빙을 해오고. 여러모로, 그 한 1~2년 동안 들인 돈으로 정말 집 살 수 있었어요.

 

- 아트 오브 노이즈 멤버와 작업하며 많은 노하우를 전수 받으였나요?

 

윤상 : 되게 많지는 않고요. 그래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맞았구나’하는 확신은 들었죠. 아트 오브 노이즈 멤버가 어떤 식으로 믹싱을 하는지 직접 불러다 목격을 한 거니까. 우리가 하는 게 그때만 해도 아주 동떨어진 세상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기간 동안 해철 씨와 제가 전혀 이견이 없었고, 또 그 당시에 해철 씨가 저보다 영어를 훨씬 잘하던 시점이어서 굉장히 제가 질투도 났었고. 그러면서 제가 불이 붙어 나중에 유학도 가게 되는 촉매제 역할도 됐고. 굉장히 여러 영향이 있었죠. 

 

콘솔에서 쓰는 사이드 체인 기법을 저는 처음 게리 랭건을 통해서 전수를 받았어요. 컴프레서와 게이트라고 하는 소리가 일정 데시벨 이상이 되어야만 소리가 들리게 하는 그런 체인을 만드는 건데요. 예를 들어 하이햇 비트를 16으로 쳤으면 그 하이헷의 볼륨에 따라서 뒤에 있는 악기 소리가 잘라지는 그러한 기법들을요. ‘야 이거 하나 건졌다. 형님. 감사합니다’ 그랬죠. 그런 걸 눈앞에서 보면서 ‘와 이게 콘솔로도 가능하다고? 프로그래밍이 아니라?’하면서 감탄했어요. 믹싱 테크닉 중에 하나였죠.

 

- 사실상 국내에선 전자악기를 다룬 선구자 격 아티스트가 아닐까요?

 

윤상 : 물론 1세대에는 속하겠지만 저는 1.5세대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저보다 먼저 신디사이저를 수입하셨던 분들, 사용하신 분들이 분명히 계신데 그분들은 프로그래밍은 안 하셨어요. 신디사이저를 하나의 피아노처럼 직접  연주를 하셨던 거죠. 그러려면 이미 피아노, 피아니스트급 연주 실력이 돼야 하는데 저는 틀리면 지우고 다시 프로그래밍을 하면 됐으니까. 

 

저는 프로그래밍으로는 1세대. 전자악기로는 1.5세대. 이수만 대표님도 신스로 풀 장착한 그런 싱글을 내신 적이 있어요. 유학 갔다 와서 바로 냈던 싱글인가 그럴걸요. 그 노래가 히트가 안 돼서 그렇지 전자음악으로만 보면 국내에서 처음이거나 그 정도로 초창기일 거예요. 저도 얼마 전에 안 사실입니다만, 그 정도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업적을 실현하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정말 선구안이 대단하신 분이라 느낍니다.

 

- 1998년엔 가장 ‘윤상적인 음반’으로 평가받는 EP [Insensible(인센서블)]을 발표하셨습니다.

 

윤상 : 생각해 보면 여러 번 상업적인 실패를 한 다음이잖아요. [레나시미엔토]로 외국에서 돈 쓰고, 노땐스도 결국 경제적으로 망한 그런 앨범이 되다 보니까 약간 아집 같은 게 마지막으로 더 남아서 ‘그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뭘까?’ 생각했죠. 근데 앨범으로 풀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진되어 있었고요. EP로 네 곡만  만들어 보자 해서 만들어진 게 [인센서블]이고요. 

 

결과적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앨범만큼 팬들이 좋아해준 앨범도 없었던 것 같고 나이라는 게 음악에 끼치는 영향이 있구나 생각도 들어요. 에너지라는 게 분명히 있잖아요. 옛날 사진 다시 보듯 내가 이때 이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있었구나 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앨범 같아요.

  

 

(3부에서 이어집니다)

  

[사진출처=오드아이앤씨]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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