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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우정호

‘윤상 사운드’의 본질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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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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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서 이어집니다.)

 

 

- 1999년, 토이 앨범에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객원 보컬로 참여하셨습니다. 계기를 알고 싶습니다.

 

윤상 : 희열 씨가 갑자기 노래 한 곡을 불러달라고 했어요. 토이라는 팀은 객원보컬제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고 좋아하는 후배니까 물론 한다고 했죠. 그 친구가 과연 어떤 곡을 들려줄지 궁금했어요. 미리 안들려주더라고요. 서로 너무 믿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녹음실 가서 당일 개봉을 한 거죠. 

 

그런데 어떤 면으로는 참 감사한 게 보컬리스트로서 저 혼자라면 못 낼 정서가 유희열이라는 프로듀서에 의해서 재발견된 느낌이었어요. 그 노래 부를 때는 ‘이게 나한테 맞는 옷일까’라고 조금 긴가민가 했는데, 몇 년 후에  “희열이가 당신한테 꼭 맞는 옷을 만들어 준 것 같다”는 반응을 들었죠.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자칭 ‘윤상빠’를 자처하는 유희열 씨와 작업하며 생긴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윤상 : 굉장히 집요해서... 저도 디렉팅 할 때 많은 가수들에게 ‘다시 한번 갑시다’ 이런 얘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가수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녹음이었어요. 저는 하면서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눈치를 딱 보는데 “형. 한 번만 더, 거기가 그 ‘아’ 자가…” 이런 식으로... 제가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디렉팅을 받아 본 적이 있었나 싶더라고요. 

 

게다가 이게 제 곡이면 몰라도 유희열 씨의 곡이니까 저도 최선을 다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신인 같은 마음으로 임했죠. 가수로써의 자신감 같은 것도 별로 없었는데 제 보컬의 매력을 정말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 김현철, 신해철, 유희열 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뮤지션, 프로듀서들과 작업을 하셨습니다. 프로듀서로서 그분들과 윤상 씨의 스타일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윤상 : 일단 김현철 씨는 어쿠스틱한 음악, 즉 사람이 직접 연주하는 데서 오는 최고의 결과를 뽑아내는 프로듀서 같아요. 특화돼있죠. 물론 김현철 씨도 2집 같은 경우에 프로그래밍 엄청 사용한 거 아시죠? 2집 [32도 여름] 앨범은 저도 놀랐어요. 얘가 혼자 이렇게 칼을 갈았구나 했죠. 아무튼 지금의 행보로 보면 시티 팝의 아버지이자 리얼 악기 연주를 사용한 세션에는 정말 탁월한 프로듀서인 것 같고요. 

 

신해철 씨는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프로듀서죠. 아주 하드한 록에서부터 정말 멜로우한 발라드까지. 도전만 하면 의미가 없을텐데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싶을 만큼 완성도 면에서도 해내니까 할 말이 없죠. 그리고 유희열 씨는 김현철 씨와 신해철 씨의 어떤 좋은 유전자들을 다 물려받은 느낌이에요. 저희보다는 확실히 뒷세대이긴 한데. 

 

저희는 사실 물려받을 선배들이 부족했어요. 프로듀싱을 하는 가수들이 별로 없던 시기였죠. 거기에서 얻은 이점도 있지만 뭔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단점도 있는데, 희열 씨는 저희의 행보를 아주 잘 참고해서 ‘아, 저렇게 하면 망하는구나’ (웃음) 이런 것까지도 다 학습이 된 굉장히 스마트한 프로듀서라고 생각합니다.

 

- 유독 많은 뮤지션들이 윤상 씨를 사랑한다고 알려졌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윤상 : 그런... 것보다 가끔 저한테 그런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는 말씀을 해주실 때 하나는 자부해요. 그러니까 가요계에 있어서 안 해본 역할은 거의 없는 것 같거든요. 가수부터 연주자,  프로듀서부터 세션맨까지. 그리고 심지어 필요할 때는 엔지니어까지하고. 

 

너무 여러 군데 많이 손을 대서 ‘오히려 좀 이거는 너무하지 않나’ 가끔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제는 그게  저의 운명적인 부분이라 받아들이고 있고요. 한 가지만 열심히 잘해야 하는데 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무튼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 열심히 더 하겠습니다.

 

- 2002년엔 다양한 음악적 실험이 담긴 정규 4집 앨범을 발표하셨습니다. 앨범을 통해 구현하고 싶었던 음악적 방향은 어떤 쪽이었나요?

 

윤상 : 이때 앨범 제목이 [移徙(이사)]에요. 왜냐면 제가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만든 앨범이거든요. 그래서 그 이전까지, 3집 [Clichè] 앨범에선 전자악기를 사용한 모든 욕심을 표현했다면 ‘내가 어쿠스틱을 하면 어떻게 될까?’하고 다시 궁금해져서 4집 앨범에서는 브라질 음악 풍의 사운드를 좀 더 전문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사’라는 곡도 보사노바 스타일의 곡이고. 

 

이전에도 많은 보사노바 스타일의 가요들이 있었지만 직접 브라질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와 함께 녹음한 건 아마 제가 처음인 게 아닐까 싶네요. 물론 진짜 브라질리언들은 아닌데 일본에 있는 브라질 음악 전문 밴드인 발란사(Balança)라는 친구들을 알게 돼서 박창학 씨의 도움으로 그 밴드와 함께 녹음을 했어요. 물론 전자음악을 사용한 곡도 있지만 [이사]라는 4집 앨범은 전반적으로 좀 어쿠스틱한 분위기가 가장 강한 앨범이었어요.

 

- 4집 [移徙(이사)]는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발매하셨지요? 아이돌 기획사로 입지를 굳히던 시점이었는데 의외였어요. 

 

윤상 : 맞습니다. SM에서 발표한 첫 번째 앨범. 당시 2002년엔 음반시장이 다 붕괴되고 있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음반 제작 환경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아낌없는 투자가 있었어요. 그런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뮤지션들과도 작업하고 사운드에도 아낌없이 투자해서 세션들을 고용할 수 있었어요. 

 

그때 제가 SM에서 앨범이 나온다고 하니까 당시에 대중음악에 좀 관심 있으셨던 분들은 많이들 의아해하셨어요. 제가 SM과 맺었던 계약은 앨범 유통 계약이었거든요. 설명을 드리자면, 3집을 발표했던 회사가 IMF 이후에 음반 사업을 더 이상 못하게 돼서 사업을 접었어요. 그랬더니 남은 앨범 선급금을 반환하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미 깨끗하게 다 사용한 후였답니다.(웃음)  

 

다른 회사에서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이 금액을 내가 배상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SM에서 선뜻 나섰어요. ‘당신 음악을 우리는 터지할 마음이 없다. 대신 음반 유통 계약을 할 마음이 있느냐’면서. 저는 너무 감사한 마음이었죠. 심지어 계약할 때,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것 같은데 앨범을 유학 중에 내도 되느냐’ 같은 조건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준 회사가 SM밖에 없었어요. 저한테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선택지였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죠.

 

- 그러한 인연으로 이후에도 SM 엔터테인먼트 뮤지션들 작업에 많은 참여를 하시게 된 건가요?

 

윤상 : 그렇죠. 그런데 제가 유학을 가버리느라 생각보다 많은 참여는 못 했죠. 그래서 5집 앨범 역시 SM에서 발매가 됐지만 제가 그건 미국에 있으면서 만들어서 유학 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발표를 했고요. 이후에 천상지희 같은 경우도 제가 유학 중에 잠깐 3~4일 한국 들어와서 프로듀싱을 하고, 동방신기 같은 경우에는 곡만 보내고 프로듀싱은 아예 작사하신 박창학 씨가 하시고. 이런 식으로 인연이 이어졌던 거죠.

 

- 음악인으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가시던 중 돌연 미국 유학을 결심하신 계기도 궁금합니다.

 

윤상 : 존경하는 선배 김광민이라는 피아니스트가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다녀오셨어요. 버클리 1세대시죠. 그런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는 다 가서 배우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점점 나이는 먹고…. 그때 결정적으로 김동률 씨가 저보다 2년 먼저 유학을 간 거예요. 거기서 가끔 전화로 얘기를 하는데 이건 뭐 염장도 아니고. 너무 부러운 환경인거에요. 와. 버클리 수업 얘기 듣고 이러는데 ‘이건 진짜 가야 되는데’ 싶은거죠. 

 

2002년, 마침 지금 와이프하고 연애가 꽤 많이 무르익었을 무렵이고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신혼을 시작하면 유학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와이프하고 상의한 끝에 ‘그러면 아예 결혼과 동시에 미국을 가 보자’하고 2002년 5월 결혼식 직후에 바로 보스턴으로 떠나게 됐어요.

 

- 김동률 씨에게 전해 들은 미국 유학 내용 중 어떤 내용들이 가장 끌렸나요?

 

윤상 :조금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요. 김동률 씨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커리큘럼이 너무나 다양하데요. 같은 전공을 듣는 학생들끼리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정도라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지 싶었어요. 똑같은 작곡 전공이라도 내가 전자음악 쪽에 더 가까우면 그쪽 수업만을 들을 수 있고, 물론 공통된 교양이나 전공 수업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전공조차 커리큘럼이 너무 다양하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도 지금 전공을 뭘 정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동률 씨는 결국 필름 스코어링 쪽으로 했는데 그게 아마 2년 다닌 후에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도대체 대중음악으로 이렇게까지 세분화된 커리큘럼을 가진 학교라면 가봐야겠다 했죠. 마침 음반시장이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붕괴가 되고 있던 상황에서 어떻게 보면 어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지도 모르죠.

 

 

- 내적 외적 요인들이 맞아떨어져 유학을 결심하신 거군요. 만약 그 시점에 음반시장이 여전히 호황이었어도 유학을 결정하셨을까요?

 

윤상 : 이미 저는 앨범 100만 장 가수 배열에서는 가장 먼저 내려왔기에 아마 그런 쓴맛도 제일 먼저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이변이 없는 한 아마 유학은 떠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 버클리 음대 유학 후 어떤 과를 선택하셨나요?

 

윤상 : 저는 뮤직 신디시스 학과라고 지금은 또 약간 이름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뮤직 테크놀러지 앤 프로덕셔널 테크놀로지 이렇게 바뀌었는데. 저는 ‘전자음악을 동경해서 가수가 된 이상한 케이스니까 끝을 보자’ 그래서 ‘무그(moog,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선구적 브랜드)’의 매뉴얼을 만드신 분이 교수님으로 계신 뮤직 신디시스학을 전공했죠.

 

- 가장 좋아하시는 악기가 무그사의 미니 무그(Mini Moog)라고 들었습니다. 윤상을 대표하는 악기가 될 만큼. 그 악기 매뉴얼 만드신 분께 직접 수업을 들으신 거군요.

 

윤상 : 수업을 가르치신 분이 무그를 발명한 밥 무그는 아니었어도 무그의 매뉴얼을 쓰신 분이니까 영광스러웠죠. 정말 세계는 넓다는 걸 그때 유학 가서 알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 버클리 음대 시절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셨다고 들었어요.

 

윤상 : 그게 얘기가 복잡해요. 저는 약간 오만했죠. 베이시스트 장학금이었어요. 전액 장학금을 주는 시스템이었는데 받기 위해 굉장히 여러 번의 오디션도 거쳐야 했어요. 1차 통과하고 2차... 그런 식으로 스텝이 있었고. 그런데 오디션에서 제가 떨어졌어요. 와이프가 제일 신경 쓰이더라고요. 

 

창피해가지고... 그래서 그때 한인학생회장 했던 친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랬더니, 너무 낙심 마시고 한 학기 수업에서 ’올 A‘를 받으시면 성적장학금이라는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좀 쉬엄쉬엄하려고 했는데 그 장학금을 첫 학기에 놓치는 바람에... 와이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올 A‘를 목표로 그 성적 장학금을 받았지요. 와이프가 아니었으면 졸업을 못 했을 거라는 얘기도 있어요.

 

- 연주자, 작곡가, 프로듀서, 가수, 엔지니어... 그 많은 역할을 전부 독학으로 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학문으로서 음악을 접하셨을 때 가장 많은 것을 얻게 된 과목이 있을까요?

 

윤상 : 아무래도 제일 재밌게 들었던 건 전자악기 관련된 수업들이었죠. 샘플러라는 게 처음 태동할 당시부터 있던 ’커즈와일‘의 샘플러를 디자인하신 분이 교수님이셨어요. 제가 욕심을 더 내서 버클리 졸업하고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 갔어요. 거기선 뮤직테크놀로지 학과를 전공했어요. 전자음악의 끝을 보려고 간거죠. 

 

근데 코딩 수업이 있는 거예요. 버클리에서 제가 굉장히 높은 학점으로 졸업했는데 대학원 가서 처음으로 C를 받은 거예요. 그게 코딩 수업이었어요.  그럼 재수강해야하거든요. 여기서 저의 한계를 본 거죠. 아, 내가 아무리 전자음악을 좋아해도 끝까지 가려면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결국 코딩을 해내야 되는 거구나.

 

- 전자음악 작곡가가 시대에 맞게 진화하려면 코딩을 익혀야 하는 건가요?

 

윤상 : 네, 결국에는. ’네가 쓰고 싶은 악기를 네가 만들렴‘ 하는 거죠. 이게 학교의 힘이죠. 결국 억지로 억지로 그 수업을 패스를 하고 정말 힘들게 졸업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코딩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 지금도 코딩을 하시나요?

 

윤상 : 지금은 안 하죠. 매틀랩(MATLAB)이라고 정말 진짜 찐 전문가들이 쓰는 걸 가지고 했어요. 그게 전공필수였으면 저는 안 갔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입학할 때만 해도 전공필수가 아니었는데 입학하고 나서 바뀌었죠. 학과도 계속 변하잖아요. 시간에 따라서. 세대에 따라서. 이제 코딩이 음악 전공자의 필수가 되는 시대가 된 거죠. 거기서 저의 끝을 본 거죠.

 

-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남들이 만들어 주는 악기를 쓰다가 직접 악기를 만들어 써라. 이런 느낌인 거죠?

 

윤상 : 네. ’경험은 해야 되지 않겠니‘ 이건데. 전공 선택이면 피해 갈 수 있는데 이걸 패스를 못하면 졸업을 못 하니까. 그래서 결국 그 수업 두 번 들었어요.

 

- 이과도 아닌 사람이, 게다가 음악을 배우러 가서 대학원 수준의 코딩을 패스한 거군요.

 

윤상 : 네. 좀 야속했어요. 그때가 아마 정말 과도기였던 게. 전자음악이 음악가들의 영역에서  정말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의 영역으로 바뀔 때였어요. 들어오는 학생들의 학부 전공이 수학과고 그러니까 학교 입장에서도 코딩은 필수로 할 수밖에 없었죠. 대학원은 학생들이 많지도 않거든요. 여기 맞추다 보니까 저 같은 사람까지 코딩을 시키게 됐고. 그래서 이제 저도 끝을 본 거죠. 여기까지구나 하는.

 

- MOT의 이이언 씨라던가 015B 정석원 씨처럼 컴퓨터공학 전공하신 분들이 음악 잘하기에 유리한 시대가 되는 건가요?

 

윤상 : 근데 또 지금은 또 바뀌었어요. 제가 볼 때 대학 교육은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수많은 콘텐츠가 인터넷에 있으니까. 자기가 그 맵만 잘 따라가면 보통 대학 전공자 이상의 것은 학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2008년 활동하셨던 모텟(mo:tet)은 프로그래밍에 능한 전자음악 전문가들이 모여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이었습니다.

 

윤상 : 모텟은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프로젝트였는데요. 저 말고 나머지 두 멤버는 저보다 12살도 더 어린 친구들이었어요. 한 친구는 컴퓨터도 자기가 만들어 쓰는 수준의 컴퓨터 전공자였고 또 한 친구는 영국에서 오케스트레 이션 공부하고 있던 친구고. 군대 있을 때 [레나시미엔토]라는, 세상 흐름과 정말 상관없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듯이 학생 신분이 되니까 ’이런 실험이 학생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보다 훨씬 더 이과적인 머리를 가진 친구들을 만났죠.  ’한 사람은 런던에 있고, 한 사람은 베를린에 있고, 나는 뉴저지에 있지만 우리 한 번 앨범 내보자.‘ 그렇게 됐죠. 그냥 대중성은 처음부터 신경 안 쓰고 딱 천장만 찍자고 구상한 앨범입니다. 제가 그쪽에 얼만큼 빠져있었는지 설명이 되는 그런 앨범이네요.

 

- 통속적으로 모텟의 앨범은 IDM이라는 장르로 설명했는데, IDM을 뛰어넘는 익스페리멘탈 록에 가까운 장르가 아니었을까요?

 

윤상 : 네. 근데 저도 좀 팬분들한테는 너무 혼란스럽게 해드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별의 그늘‘ 윤상이 뭐 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 앨범을 사셨던 분이 있다면 ’뭐냐 이거‘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대신 제가 그만큼 간극이 큰일들을 해왔구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실제로 그 앨범을 들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제가 신혼때 한창 그런 일렉트로닉 IDM, EDM. 이런 음악들을 차에서 듣고 있으면 저희 와이프가 실제로 구토를 했어요.  나는 좋다고 듣고 있는데 누군가한테는 멀미를 일으킬 수 있구나, 굉장히 정서가 다르구나 하는 걸 알았죠.

 

- 모텟 앨범과 6집 [그땐 몰랐던 일들]은 비슷한 시기에 발매됐습니다. 학생으로서 윤상, 대중음악가로서 윤상을 분리하는 작업을 동시에 하셨던 걸로 보입니다.

 

윤상 : 그렇죠. 저도 모텟 같은 프로젝트는 제 팬들에게 아주 큰 혼란을 드릴 것 같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런 쪽 음악에 대한 욕구는 모텟이라는 프로젝트로 표현을 하고, 그리고 마침 제가 그때 ’누들로드‘라고 하는 다큐멘터리 음악감독을 하고 있다 보니까 실험적인 요소는 그런 식으로 다 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6집 앨범은 가능하면 편안하게 들으실 수 있도록 작업했어요. 거의 6, 7년 만에 나오는 앨범이었으니 정재일 씨 도움도 많이 받았죠. 거의 공동 프로듀서 역할을 해주셨어요. ‘가수 윤상’으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건가 6집에서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 그럼에도 6집 앨범 작업은 시간이 굉장히 급박했다고요.

 

윤상 :아, 정말 제가 시간에 쫓겨서 일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6집 앨범처럼 시간에 쫓기면서 일을 했던 것도 드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유학이 끝나기 전에 제가 방학을 이용해서 들어온 상태에서 만들고 돌아갔어야 했거든요. 한 학기가 남았는데 거기에 비자 문제가 겹쳐 굉장히 복잡해졌거든요. 

 

그래서 두 달 안에 거의 모든 것을 여기서 끝냈던 것 같아요. 물론 그전에 구상했던 곡들 갖고 와서 제가 기본적인  스케치를 해놓고 정재일 씨하고 붙어서 같이 곡을 완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 정재일 씨를 비롯해 재능 있는 후배 뮤지션들과도 거리감 없이 작업하시는 편이신 것 같습니다.

 

윤상 : 저는 이렇게 재능 있는 분들이 있으면 제가 찾아가는 것 같아요. 정재일 씨 같은 경우도 먼저 제가 찾아가서 말 걸었고. 그런 게 좋아요. 제가 선배들이 너무 어려웠는데 그게 좀 서글프더라고요. 저분들은 저렇게 신비주의에 갇혀서 계실까. 

 

특별히 누구를 지칭할 수 없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분 들 앨범을 들으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저도 너무 궁금하거든요. 그런 거 물어보면 약간 난처해하시고, ’그런 걸 내가 왜 너한테 알려줘야 되지?‘ 이런 게 저는 조금 서글펐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렇게 좀 약간 매니악한 부분까지 물어봐 주는 후배들이 있으면 반가운 거죠. 캐스커 이준오 씨 같은 경우에 그래서 굉장히 좋아하는 후배에요. 

 

- 국내 무대 복귀 후 왕성한 음악 활동을 이어가시면서 작곡팀 원피스(1Piece)를 결성하셨습니다. 작곡 팀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윤상 : 그 때 이미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이돌 시장으로 바뀌었어요. 저도 계속 음악을 해 나가려면 어떻게든지 그쪽에 합류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마침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울림엔터테인먼트 제작자가 신예 걸그룹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뜻이 통했어요. 그래서 저한테 프로듀싱을 맡기게 됐는데  겁이 났죠.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빨리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혼자는 도저히 사이즈가 나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2010년에 돌아왔을 때 스페이스 카우보이, 다빈크라는 친구들을 만났어요. 다빈크는 신해철 씨하고 같이 비트겐슈타인을 했죠. 그땐 잘 몰랐는데 다빈크의 다른 곡들을 듣고 제가 러브콜을 보낸 거예요. 그 친분들이 쌓여서 이 둘이랑 함께하면 충분히 걸그룹 프로듀싱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러블리즈라는 팀의 프로듀싱을 하면서 만들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원피스 독자적인 싱글들도 몇 개는 냈지만 아무튼 아이돌에 특화된 음악을 하기 위해서 팀을 만들게 됐고요. 올바른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 작곡팀으로서의 작업 활동은 솔로 작업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윤상 : 예를 들면 팀플레이는 이런 거예요. 똑같은 리듬을 정해요. 그러면 벌스를 3명이 따로 써 오는 거죠. 같이 들어봐요. 그러면 서로 느낌이 생기죠. ’여기서는 네가 만든 게 제일 나은데‘ 이러면 ’오케이 벌스 이렇게 가자‘ 그러면 뭐 후렴은 어떻게 갈지. 그럼 거기서부터 설계를 해 나가고. 제가 리더니까 이건 이런 식으로 갔으면 좋겠고 이건 다빈크가 맡았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서 A&R(Artists & Repertoire, 음반/아티스트 기획 담당)의 입장에서 고민을 세 사람이 같이 할 수 있게 되죠. 왜 그러냐면,  현재 음악 프로듀서들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들은 A&R이에요. 이분들의 귀를 간지럽히지 못하면 가수들한테까지 들려지지 않죠.  

- 원피스는 러블리즈와의 작업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 외 어떤 뮤지션들과 작업했나요?

 

윤상 : 원피스라는 이름으로 수지를 포함해서 여러 명과 작업을 했는데  아무래도 타이틀만 알려지다 보니까… 그런 면에서는 조금 더 원피스는 분발해야 되는 팀은 맞아요.

  

- 윤상 씨가 아이돌 음악에 참여하게 됐던 과정에 작사가 김이나 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윤상 : 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죠. 가인의 ’돌이킬 수 없는‘ 작곡에 저와 이민수 씨 콜라보레이션을 성사시켰는데, 어떻게 보면 프로듀서 역할을 하신 거죠. 그 덕분에 저에게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를 알게 됐어요. 원피스를 결성하게 된 단초가 된 거죠. 그런 면에서 김이나 씨는 저를 프로듀싱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2010년 이전까지는 그런 역할을 작사가 박창학 씨가 했다면 유학하고 돌아온 후부터는 김이나 씨가 그 역할을 맡아서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에 혼자는 없어요. 다 어디선가 어떤 에너지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든지, 서로 끌림을 받는지.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언급하신 수많은 음악적 관계들을 보면 항상 먼저 다가가셨기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윤상 : 그만큼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거죠. 저는 항상 목이 말라있더라고요.

 

- 지금도 후배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시고 있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윤상 : 아직까지는 좀 미약하죠. 이유가, 일단 제가 만약 레드벨벳의 타이틀곡을 프로듀싱해서 이게 유럽에서 터졌다고 가정해봐요. 그러면 다른 프로듀서를 발굴하기 쉽겠죠. 그런데 원피스가 아직 못 뜨고 있어서… 그래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계속 욕심을 내고 있고요. 그리고 이때 쯤이면 음악적으로 뒤를 돌아봐야 할 시간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10년 동안 이어왔던 대학 강의도 2020년에 다 스톱 했어요. 결과적으로 저의 음악에도 신경을 쓰면서 원피스는 원피스 대로 계속 이어지는 프로젝트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 작업하신 곡들이 마치 가수들마다 제 옷을 찾아 입듯 맞는 것 같습니다. 작곡하실 때 가수가 가진 아우라에 반응해 곡을 작업하시나요?

 

윤상 : 정확하게 그런 경험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사진작가의 일이 가장 멋진 장면을 담는 거라면 ,프로듀서는 가장 좋은 소리와 그 순간을 녹음을 하는 일이니까요. 

 

- ’누들로드‘ 다큐멘터리 음악에 이어 최근에는 영화음악도 작업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상 : 제가 KBS 9시 뉴스 타이틀도 만들어봤을 정도로 다양하게 도전했는데,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르가 딱 하나,영화음악이에요.  ’기도하는 남자‘라는 영화를 보다가 감동을 받아서 그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팠죠. 마침 이 분이 장편을 준비하고 있서 자연스럽게 저한테 음악 의뢰를 해주셨어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분과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생기지 않잖아요. 그래서 작업하게 됐습니다.

 

- 심지어 장르가 공포영화라고 들었습니다.

 

윤상 : 네, ’뒤틀린 집‘이라는 공포물이에요. 서영희 씨가 주연을 하시고. 공포영화라면 왠지 대명사처럼 저한테 떠오르는 분인데 다행히 또 그분이 주인공이라고 하셔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편집자 주: ‘뒤틀린 집’은 2022년 7월 개봉했으며 윤상과 이준오가 함께 음악을 맡았다)

 

- 나인 일치 네일스의 트렌트 레즈너 역시 ’소셜 네트워크‘, ’밀레니엄‘, ’소울‘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 영화음악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윤상 : 다행히 저보다 형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직은 내가 현역으로 있어도 된다는 희망을 줘요.  아카데미 음악 상도 두 번 받았고.  제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게 감사할 뿐입니다.

 

- 다음 솔로 앨범 계획도 있으신가요?

 

윤상 : 사실 4년 전에 미리 자신 있게 “이게 선공개입니다” 그러고 한 곡을 발표했었는데. 아... 제 마음이 약간 유리 같은 부분이 있어서,  받아들이는 분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과연 내 최선인가라는 생각이 들고 나서는 그때 구상했던 프로젝트를 그냥 엎어버렸어요. 그게 벌써 4년 전이라서 이제는 조금 더 집중해서 저의 7번째 앨범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 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학교 강의도 스톱을 하게 된 거고요. 

 

그런데 아직 ’언제까지 발표하겠습니다‘ 이런 얘기 했다가 또 양치기 소년이 되고 싶지 않고요. 그냥 잊은 듯이 기다려 주시면 제가 어느 순간 짠...

 

- 뮤지션 윤상은 어떤 언어로 수식됐으면 좋겠습니까.

 

윤상 : ’음악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 같은 표현이나 수식이 들을 때 가장 좋고 감사하죠. 저는 음악을 들으면  ’신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 보다는 이렇게 신나게 해줘서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이었어요. 

 

실제로 저도 제가 음악을 들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도 위로였고.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저런 기분까지 가봤구나 하는 게 느껴지고, 음악으로 얼마만큼 상처를 받아봤는지도 표현할 수 있잖아요. 나보다 앞서 걸었던 사람들의 감정들을 들을 때 저는 위로가 되니까 기쁘죠. 막 빠르고 비트 있는 음악을 들어도 ‘이런 그루브를 들려줘서 고마워‘ 이런 기쁨이랄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사진출처=POP뮤직]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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