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 전인권이 회상하는 들국화, 그리고 김민기 > 인터뷰 아카이브K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인터뷰

인터뷰

2023.06.16
by 우정호

‘기인’ 전인권이 회상하는 들국화, 그리고 김민기

페이지 정보

작성일 23-06-16작성자  by  우정호 

본문



 

맑은 영혼의 짐승을 닮은 헤어스타일, 예측 불가능한 언어의 흐름, 속세와 현세를 오가는 각종 기행들... ‘기인’ 전인권의 표상들이다. 이 같은 표면적 이미지와 달리, 그는 데뷔 이전 이미 2,500장의 LP를 ‘공부’한 학구적 뮤지션이었다. 들국화에서 선보인 샤우트 창법으로 시대를 압도했으나, 그의 출발은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 포크의 구심점 김민기를 자신의 우상이라고 했다. 

 

 

- 어떤 계기로 음악을 처음 시작하셨나요?

 

전인권 : 원래는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 ‘잘 자라 우리 아가~’ 이 노래 부르니까 선생님이 잘한다고 얘기하셨어요. 중학교 땐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이거 따라 부르니까 다른 사람은 못 하고 저는 하니까 잘한다는 얘기 또 들었어요. 작은형님이 기타 치고 노래하시는 걸 좋아하셨는데, 제가 노래하는 거 들으시더니 “야, 너 노래해라” 그러고는 “엄마, 잠깐만 와 보세요. 인권이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하시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그냥 시큰둥하셨어요.

 

그 이후로 동네 형님들하고 같이 노래하다가 한 스물다섯 살 때인가? ‘헛사랑’이라는 노래를 듣게 됐어요.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따로 똑같이’라는 보컬 그룹에 들어갔어요. 따로도 하고 같이도 하는 그런 그룹이었죠. ‘헛사랑’은 그 당시 잘 없던 스타일 노래였고. ‘아, 내가 이런 노래도 부를 수 있다면 가수할만하겠네’ 생각했죠. 나중에 텔레비전 나가 ‘명랑운동회’나 ‘가요톱텐’ 같은 순위 프로에도 나오고. 막 “뭐 1등 됐습니다” 그러면 뭐 울기도 하고...

 

어쨌든 지구레코드사라는 데랑 계약했어요. 그때 지구레코드사에서 김만준의 ‘모모’라는 노래가 나왔고,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 나왔고, 다 히트 쳤고 그다음 제 순서였어요.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님께서 특히 저를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가요 심의를 넣었는데 “‘헛사랑’이 왜 헛사랑이야”하면서 노래 제목이 ‘맴도는 얼굴’로 바뀌었어요. ‘헛사랑만 뱅뱅 도는~’ 약간 우울한 듯 가사도 그랬는데, ‘그때 사랑만 맴~’이렇게 바뀌었어요.

 

그때 제가 좋아하던 분이 ‘헛사랑’ 만든 이일호라는 분인데 조각도 하시던 그런 분이셨어요. 그분 영향을 받았고, 같이 다니는 것만 해도 굉장히 좋았고, 그분 가사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아, 이런 가수가 돼야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헛사랑’을 ‘따로 또 같이’가 막 넷이서 몸으로 율동도 맞추고 해가면서 노래하고 그러니까 나와는 안맞았어요. 그래서 그룹에서 나왔죠. 심의도 다 통과시켜서 원래 제목과 가사대로 해 준다고 그랬는데 안 해주고. 지구레코드사를 도망 나왔어요 그냥.

 

도망 나오고 나서 친구 소개로 청계천에 있는 어느 사장님을 만났어요. 헤드폰 만드는 곳(히트 레코드)인데 음반으로 한 번 히트를 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 집 큰 형님이 피디도 하고 그러니까 그 사장님은 제가 음반으로 히트하기 쉽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판을 냈는데, 내 생각하고 너무 다른 거예요. 

 

(녹음할 때) 세 시간 반이면 ‘한 프로’라고 그래요. 한 프로에 연주자들이 와서 반주를 다 끝내야 되더라고요. 그다음 두 번째 프로에서 노래를 다 불러야 돼요. 그리고 세 번째 프로에서 믹싱을 다 하는데 녹음 전체를 하루 만에 다 끝내는 거예요. 그 이상 녹음하면 돈이 더 들어가니까. 그래서 힘들었죠. 그러니까 막 노래 잘 안된 녹음본도 집어넣고, 내가 또 싫다고 하니까 거기다 뭐 채우려고 ‘짝사랑’이랑 옛날 노래를 넣고, 칼이나 톱으로 연주하는 소리 그런 거를 집어넣고... 그러면서 거기서 도저히 하기가 싫어졌죠. 지금 어디까지 물어봤죠? (멋쩍은 웃음) 내가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갔나.

 

-음악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어떤 음악들에 영향을 받으셨나요?

 

전인권 : 어릴 때 LP 판이 2,500 장이 있었어요. 우리 작은 형님이 ‘경험을 해라’하신 말씀을 듣고는 닥치는 대로 샀죠. 그 당시 2,500 장이면 거의 다 산 거예요. 재즈고 클래식이고, 비틀즈, 비지스, 빌리 조엘, 6~70년대 판들을. 

 

그러다 보니까 나는 음악 계보를 들으면서 다 알게 된 거예요. 물론 ‘월간 팝송’도 많이 봤지만. 이제 그 록이라는 게 브리티시 록, 팝록, 하드록... 메탈은 아직 나오기 전이죠. 이제 딥 퍼플 나오고 할 때니까. 그거 들으면서 ‘이야, 이 부분은 너무 좋다’ 하면서 그걸 막 따라 부르는 거예요. 그러고 신촌에 모여서 술 마실 때 자랑하고. ‘이런 거 들었다’ 하면서.

 

- 해외 뮤지션들을 멋있다고 생각하신 적도 있나요?

 

전인권 : 그럼요. 내가 딥 퍼플은 싫어했는데 리치 블랙모어가 멋있더라고요. 리치 블랙모어가 아주 ‘양아틱’하면서... 그리고 산타나. 그 사람이 우드스탁에 나와 가지고 자기네 멕시코 음악을 접목시켜서 기타 치는데 아주. ‘Samba Pa Ti’, ‘Europa’ 이런 노래들 다 빌보드에서 크게 히트쳤죠.

 

- 소속되셨던 첫 그룹인 ‘따로 또 같이’ 활동은 1년 정도 하셨나요?

 

전인권 :  1년도 안 했죠. 녹음만 하고 바로 그만뒀으니까요. 크게 싸움을 하고. “나는 이렇게는 못 한다”하면서 혼자 나온 거죠. “봉봉 4중창단은 봉봉 4중창단이고, 우리는 우리 스타일이 있지 않냐. 따로도 하고 또 같이도 하고 그러는 거지”하면서. 갑자기 ‘헛사랑’을 지구레코드사에서 밀어준다고 했다고 꼭 같이 해야 된다는 건 아니다 싶어서 나온 거죠. 임정수 사장님이 저를 만나서 설득하기도 했는데, 아유. 나는 못하겠다고 그랬어요. 그 고집이 계속돼서 들국화가 되고 그렇게 된 거죠.

 

들국화는 어떻게 결성됐나요?

 

전인권 : 그때 매일 신촌에 모여서 술 마시고 음악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리끼리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뭘 꽂아라’ 그런 얘기 하고, ( Scott Mackenzie – San Francisco 가사-편집자 주) 존 레논 애기를 하면서 ‘아, 너무 인간적이다’ 우리끼리 막 판단하고.

 

모이던 사람들 중에 조덕환이라고 있었어요. 술 많이 마시고 그런 친구였는데, 좀 친하게 지내다가 제가 성원(최성원)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됐어요. 같이 겨울밤에 추계예술대학교 담을 넘어 들어가서 강당에서 네 달 동안 연습을 했어요. 성원이가 먼저 들어가고 내가 따라 들어가서. 나중에 우리가 연습하는 거 보고 수위 아저씨도 좋게 잘 대해 주시더라고요.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아라”하시면서. 젊은 애들이 매일같이 열심히 하니까 그분도 기특하신 거죠. 

 

강당이 되게 큰데요, 나는 저쪽 끝에 있고, 성원이는 무대 쪽에서 피아노 치고, 그럼 나는 저~ 끝에서 노래하고. 서로 소리가 들려야 된다 그러면서 그런 연습도 하고.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미국 친구들, 서방 친구들은 진짜 소리도 크고 피아노도 서로 잘 들리게, 그래서 반주가 아닌 연주가 되게 하는데 우리나라 TV에서 누가 나오면 전부 노래에 반주하는 정도 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나도 그렇고 성원이도 그렇고 그런 걸 싫어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이제 돈을 벌어야 되니까 나이트클럽 팔레스 등등 여러 군데서 연주했죠. 여의도에 있는 맨하탄이라는 호텔 나이트에서 하다 또 쫓겨나기도 하고. 그 즈음에 결혼했는데 작은 형님이 방을 만들어줬어요. 근데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고 싶어 가지고 그 방 다 팔아서 악기 사가지고 강릉으로 갔어요. 밴드 멤버로는 백두산에 한춘근이라고 있어요. 말은 잘 안 통했는데 드럼만큼은 정말 잘 쳐요.  그리고 조덕환. 그때 신촌은 이미 언더그라운드처럼 조성이 돼 있었죠. 주류로 나갈 사람들이 아닌 그런 사람들 다 데리고 강릉에 간 거죠.

 

그렇게 가서 업소에서 노래하는데, 우리는 길들여지기가 싫은 거예요. 특히 저 같은 경우는. 그래서 사장하고 싸우고 못 하겠다고 그러고 쫓겨나고. 그런 걸 반복하다가 이제 들국화를 하게 된 거죠. 우리는 그냥 왕따였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 음악이 좋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김)수철이도 오고, 유현상(헤비 메탈 밴드 백두산의 보컬이자 트로트 가수로도 활동-편집자 주)씨도 오고, 또 뭐 많이 왔죠. 저희가 일하는 업소로.

 

- 강릉 업소에서 공연하실 때, 이미 자작곡들로 레퍼토리를 채우셨나요?

 

전인권 : 자작곡도 했죠. 그러니까 거의 뭐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던가 우리 노래를 하면 이해를 못... 안 했어요 사람들이. 그때 흐름의 가요가 ‘오동잎 한 잎, 두 잎~’(최헌-오동잎) 뭐 그런 거였는데 ‘그것만이 내 세상’ 했다가는... (웃음) 

 

자메이카라는 스탠드바가 있었는데, 어떤 여자애들이 새벽에 와서도 그 노래 신청하고, 아침에 오더니 신청하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 노래 또 하고. 그 친구들이 PR을 많이 해줬어요. 저 팀은 이상한 팀이라고. 저 팀은 정말 좋다고. 희한하다고 하면서. 그때 막 우리는 머리 이렇게 기르고 장발에다가... 그때 노사연, 유익종(1980년대 포크 듀오 해바라기 멤버-편집자 주) 다 놀러 왔었죠.

 

- 들국화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나요?

 

전인권 : 원래는 ‘전인권 트리오’라고 그냥 썼어요. 왜냐면 귀찮고 이래가지고. 그러다 조동진 형님 공연 무대에 올라야 되는데. 성원이(최성원), 성욱이(허성욱)랑 모여서 “야, 우리 이름 필요하지 않냐”그래서 “야, 코스모스 어떠냐”, “야, 그건 좀 그런 것 같아. 뭐, 들장미 어떠냐?”하니까 “야, 그건 좀...” 그러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들국화 어떠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뒤돌아보면서 “야, 그거 좋다” 그랬어요. 그때 마침 성욱이가 껌을 가지고 있었는데 ‘들국화’ 껌이어 가지고... (웃음)

 

- 처음 들국화가 무대에 오르셨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공연은 주로 어디서 하셨나요?

 

전인권 : 첫 무대는 대학로 파랑새 소극장이었죠. 첫날 7명 오고, 다음날 50명 오더니, 3일째, 4일째 되던 날 그냥 다 찼어요. 저쪽에 조영남 씨도 보이고, 김민기 형님도 보이고, 그럴 정도로. 그때부터 소문이 나서 막 퍼져나갔죠.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옥상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 이대생들도 오고, 학생들도 많이 왔죠. 그때 엄정화도 왔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제천에서도 (공연)하고. 그때는 이제 리사이틀이다 뭐 이런 데서 많이 했고,

 

- ‘학전’ 소극장을 비롯해 대학로에서도 공연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인권 : 대학로에선 ‘샘터 파랑새’, ‘충돌 소극장’, 대학로에선 들국화 해체되고 나서도 아마 내가 계속했을 거예요. 김광석도 거기서 많이 했고. 그리고 종로에 있는 파고다 극장이 공연장을 만들었을 때도 초기에 우리가 공연을 했죠. 관객들이 줄을 쫙~ 서가지고 그러니까, 파고다 주변 깡패들도 다 놀란 거예요. 파고다 공원 근처는 원래 깡패 많기로 소문난 그런 곳이었죠. 학전에서는 내가 만든 들국화(1990년대, 전인권이 민재현, 이건태 등 멤버들을 영입해 들국화란 이름으로 활동했음  - 편집자 주)가 했죠. 

 

굉장히 잘 됐어요. 당시 민기 형님은 가수 그만 두시고 뮤지컬을, 애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변하고 이러는 거를 묘사하는 그런 걸 만들고 계셨어요. (록 오페라) ‘개똥이’ 같은. 그거 듣고 제가 그런 얘기를 해줬어요. “형님, 이 세상이 거대한 똥이 돼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웃음)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고 충격 먹어가지고. 제가 그러니까. “야, ‘개똥이’ 공연 니가 해라.” 그러셔서 내가 “그것만은 못 한다” 그래서 도현이(윤도현)가 했을 거예요.

 

- 김민기 씨와 더불어 조동진 씨와도 교류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전인권 : 나는 김민기 형님, 성원이는 조동진 형을 좋아했고, 친했죠. 동진이 형님은 이제 밤새도록 얘기해야 되는 분이고. 그 형님 집에 많이 갔었죠. 우리 밤업소 할 때 끝내면 4시쯤 됐을 때도... 민기 형님은 학전 10주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축하 공연하시면 축하 가수로 나를 뽑고 그러셨죠. 민기 형님은 갑자기 어느 날 뭐 밤에 집에 찾아도 오시고. 그냥 술 쩔어가지고 뭐 “너는 헛소리 좀 그만해라” 하시면 “헛소리도 예술이에요.” (웃음) 막 이러고.

 

- 김현식 씨하고도 교류가 있으셨나요?

 

전인권 : 네. 현식이가 유일하게 ‘선배님’한 게 나예요. 그 당시에는 서로 나이를 속이고 하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김현식이) 덕환이(조덕환)한테도 ‘덕환아’ 이러고.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저한테 ‘선배님’ 하고... 저하고 소리 내는 법을 서로 얘기도 했었죠. 김현식 씨는 아주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를 제대로 끌어내서 막 부르려고 하는 그런 친구죠. 대단한 친구였죠. 우리나라에서.

 

- 김민기 씨를 두고 ‘오랜 우상이자 콤플렉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전인권 : 그분은 일단 뭐 튜너가 없어도 기타 딱 잡으면 그냥 튜닝이 제대로 다 돼요. ‘라’음이 있다고 치면 그냥 딱 치면 ‘라’ 거기 맞춰서 튜닝이 다 되시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천재죠. 천재 맞아요. 그리고 굉장한 클래식 기타(실력)에. 우리한테 뭐 굉장히 큰 영향력을 주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생각하게 만든 롤 모델이기도 하고. 

 

김민기의 ‘친구’라는 노래는 완전히 반항시로 들었어요.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무엇이 산 것이고 뭐... 그게 어떤 게 진실이고 뭐가... 흩날리는 꽃잎..’ 그런 가사가 있는데 나중에는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하면서 끝나죠. 그분 노래 중에 재미있는 게 또 ‘살찐 송아리 한 마리~ 기찻길로 뛰어가요. 늙은 염소를 따라가는 애얘야.’(김민기 - 고무줄 놀이) 맨 마지막에 ‘꽃 따줄 게 이리 와...’ 그 마지막 가사 끝나는 걸 듣고 내가 완전히 어떻게 ‘꽃 따줄게 이리 와’ 이런 생각을 했나.... ‘작은 연못’이 막 히트할 때도, 아유 좋았죠. 어릴 때 들으면 정말 사람이 ‘이야, 이렇게 살아야 되나’ 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 1집 [들국화] 작업하실 때 반응이 폭발적일 것이라고 예상하셨나요?

 

전인권 : 네. 예상했죠, 사실. 우리 길로만 가면 우리가 맞으니까. 우리가 옳다고 항상 생각했으니까. 그때 막 사람들이 ‘이야’ 하면서 감탄했던 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넣어서 소문이 쫙 퍼졌어요. 우리가 하는 행동이 옳다고 생각했던 게 다 들어맞아서. (1980년대 당시 음반 발매를 위해선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했다. 심의 통과를 위해 ‘미풍양속을 저해하지 않고 건전한 문화를 추구하는 노래’인 ‘건전가요’가 수록돼야 했다. 들국화는 1집 [들국화]의 건전가요 트랙 ‘우리의 소원’을 아카펠라 스타일로 소화해 건전가요가 아닌 저항가요에 가까운 이미지를 구현했다. -편집자 주)

 

- 1집 발매 후 수록곡 ‘그것만이 내 세상’이 방송 금지 당했습니다.

 

전인권 : 네. 1집 나오고 나서였죠. 방송 금지였는데 그런 게 오히려 역효과를 막 냈죠. 박민규라는 작가 있잖아요. 그 친구가 얘기해 줬는데, 고등학교 때 애들끼리 모여서 “야, 들국화가, 주찬권이 이태원에서 성남까지 걸어갔대 돈 없어서.” 그런 얘기를 자기들끼리 하면 막 전설이 되는 거예요. 

 

그땐 그런 게 많았어요. 또 우리 집이 굉장히 가난한 판잣집이었는데, 그 사실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런 분위기 때문에 (웃음) 하루에 한 80명씩 진짜 찾아와가지고. 우리 마누라가 밥해주고 그랬죠. 우리는 그냥 문 잠그고 잤거든요 성욱이랑. 그때 항상 동고동락을 했어요.

 

-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에 들국화 1집이 두 번이나 1위로 선정됐지요.

 

전인권 : 처음에는 나도 약간 좀 그랬는데 한 3년 전부터 아, 이래서 그랬구나... 처음으로 나왔던 샤우트 창법을 사람들이 좋아했겠다, 그런 생각 했죠.

 

- 들국화는 ‘리사이틀’이 아닌 ‘콘서트’의 개념을 국내 최초 도입한 그룹이라고 들었습니다.

 

전인권 : 네. 그렇죠. ‘리사이틀’인데 ‘콘서트’라고 우리가 그랬죠. ‘클래식 음악도 콘서트인데 우리 음악들도 콘서트다’ 그런 자부심이 있었죠. 그런 자부심이 없었으면 못 헤쳐나갔죠. 저는 어려서부터 LP 판 2,500장을 공부하고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비틀즈나 다를 게 없다’, 건방진 얘기인지는 몰라도 그런 생각을 가졌었고.

 

- 공연에 제목을 넣어 브랜드화시킨 최초의 팀이기도 하지요?

 

전인권 : 네, 처음으로. ‘안녕하세요, 들국화’, 그리고 앵콜 공연은 ‘고마워요, 들국화’. 뭐 이제 한번 잡혀갔다 오면 ‘미안해요...’ (멋쩍은 웃음) 저는 ‘미안해요, 전인권’ (웃음) 그렇게 이름 붙이고. 부산에 가서는 ‘안녕하세요, 부산’ 그러니까 한마디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죠. 우리 팀에 대한 자랑이에요. 안 좋은 일도 많았지만. 우리 팀에 대한 좋은 점들.

 

- 방송 출연을 꺼렸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인권 : 방송하고 우리는 달라요.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거죠. ‘명랑운동회’, ‘가요톱텐’ 같은. 우리는 ‘가요톱십’으로 불렀어요. ‘톱10’ 이렇게 숫자가 나오잖아요. 텔레비전 보면서 저렇게 사는 거는 좀 그렇다.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죠. 그러니까 그 사회적인 그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옛날에는 방송국 피디실에 이상한 정보부에서 나온 사람 같은 그런 피디가 꼭 있었어요. 막, “야, 이 자식아. 여기가 어딘데 너 머리 기르고. 이리 와봐’ 그러면 내가 귓속말로 “당신도 중국 사람이고 나도 중국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할 거 있냐고.” (웃음) 그러고 그냥 나오고.

 

그리고 남이섬 문화방송 축제. 한마디로 뭐 욕 한 사건이죠. 거기 처음에는 ‘안 나간다, 안 나간다’ 그랬는데 우리 마음껏 공연할 수 있대요. 그래서 나갔는데. 무대 올라서 첫 곡 하려는데 모니터가 안 나오니까 소리가 들리지를 않잖아요. 다른 악기 파트들도 안 들리고. 성원이가 ‘매일 그대와’ 하려고 딱 이제 기타 치면서 했는데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소리가. 그래서 멈췄어요. 그게 두 번째 멈춘 건데 갑자기 카메라맨이 카메라 딱 내려놓더니 “아, 씨X” 그래요. 그 소리가 사람들한테 들릴 정도로. 그래서 마이크를 이렇게 손으로 감싸고는, “아, X발 나가래” 그러니까 관객들이 막 오히려 박수치고. 

 

우리도 빨리 나가야 되는데 안 나가고. 섬에서 배 타고 나가야 차를 탈 수 있는데, 남이섬에서 안 나가고 거기서 자고. 막 폭죽도 어디서 터트려주고 그랬죠. 당시 MBC 장명호 부장님이 우리가 그런 걸 곤란해는 하셨지만 한 편으로는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인권이 이리 와봐” 그러면서 “야, 그래도 참 열심히 하고 그래야 된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 사건도 큰 사건이었어요 사실. (웃음)

 

- 부르신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는 어떤 곡인가요?

 

전인권 : 지금 와서는 다 좋아하죠. 그렇지만 무대에서 옛날 노래들은 꼭 하죠. 다는 못 하더라도 댓 곡씩은 꼭 하죠. 아무래도 뭐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이죠. ‘사노라면’, ‘돌고 돌고 돌고’는 젊은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록 페스티벌 가서 그 노래만 시작하면 ‘ 해가~’만 하면 돼요. 그러면 자기들이 다 따라불러요. 그리고 자기네끼리 이거 뭐 함께 와서 ‘돌고~’ 다시 ‘돌고~’ 그러고. 다른 노래로 넘어가려면 지네들이 또 ‘ 다~시~ 돌...’ 또 그러다가. 넘어가려고 하면 또 해 달라고 하는 게... (웃음) 그래서 한 두어 번, 두세 번 막 하는 거죠. 그러니까 양희은 씨가 ‘쟤네는 돌고 돌고 하면 한 40번 하는 것 같아.’ (웃음) 그런 얘기 했죠.

 

- 들국화는 방송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앨범 발매와 동시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인권 : 그때 사람들도 이미 우리 생각하고 같아서일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다. 그게 대중음악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맞은 거죠.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공유하기

© www.archive-k.com
Total 76 / 5 page
검색 열기 닫기
게시물 검색

인터뷰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