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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by 우정호

대한민국 ‘블랙 뮤직’ 선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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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30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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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소울, R&B, 펑크(funk) 등으로 대표되는 블랙 뮤직(Black Music)은 미국 흑인들로부터 발상되어 20세기 만들어진 거의 모든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뤘다. 직선적이지 않고 곡선적인 이 흑인 음악이 대한민국 대중음악 신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이현도의 등장과 함께다. 스스로를 ‘듀스의 이현도’라고 소개하는 그는 흑인 음악으로 일관된 음악 세계를 펼쳐온 뮤지션이자, 타고난 송 메이커, 그리고 한국 힙합의 선구자다.

 

(아카이브 K는 이현도와 2020년 6월 인터뷰했다.) 

 

 

- 대중들에게 ‘가수, 프로듀서’로 알려졌지만 음악에 입문하신 계기는 춤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현도 : 한 번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거나 어느 팀에 소속돼 춤을 춰 본 적은 없고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끼가 좀 있었던 건지, 사랑과 평화 선배님들의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냥 막춤을 췄어요. 그러면 부모님, 집안 어른들, 친척분들이 재밌다고 칭찬해 주시시고, 그럼 또 신나서 춤추고. 

 

그렇게 그냥 막 추다가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지... 3~4학년쯤 매체를 통해서 브레이크 댄스를 알게 됐고 거기 빠지게 된 거예요. ‘이게 춤이다’라는 개념보다는 무슨 곡예라든지 기예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구잡이로 한 동작, 한 동작 따라 해 봤어요.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둘러보니까 그런 춤을 추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고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도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독학으로 춤을 익힌 거였죠.

 

- 그 당시 춤을 익히기 위한 교보재는 어떤 것들이었나요?

 

이현도 : 제가 초등학생일 때 곡예를 체조랑 접목시킨 브레이크 댄스가 미국에서 탄생했는데요, 그러니까 저희 세대가 브레이크 댄스 1세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AFKN’이라고 있잖아요? TV 채널 2번. 거기 나오는 미국 쇼 프로그램 같은 데서 한순간 나오는 걸 보고 눈으로 기억한다거나 비디오로 녹화해 돌려보면서 거기 나온 동작들을 집 거울로 보면서 막무가내로 연습했어요.

 

그러다가 허비 행콕이라는 재즈계 큰형님이 계신데, 그분이 시도하셨던 전자음악 중 ‘Rock It’이라는 곡을 접했죠. 브레이크 댄스와 전자음악의 접점을 만든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인데, 뮤직비디오나 공연에서 나오는 브레이크 댄스 퍼포먼스를 보고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어요. 뭔가 너무 멋있고, 제가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신세계를 느낀 거예요. 그 이후로 AFKN에서 브레이크 댄스가 나오는 시간이나, ‘Rock It’ 비디오가 다시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 찾아보고 영향을 받았죠.  

 

중학교 들어갔을 땐 아예 ‘브레이크 댄스’(Breakin‘, 1984년 영화-편집자 주)라는 영화가 나왔어요. 스토리는 청춘 영화인데 결국에는 브레이크 댄스가 주가 되는 그런 영화였고, 그게 우리나라 비보이 1세대들에게는 교과서나 마찬가지였어요. 그 당시 유일한 교과서였고, 한국 브레이크 댄스 1세대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된 거죠. 저한테는 이것들이 가장 영향이 컸어요.

 

- 마이클 잭슨이 팝의 제왕으로 올라선 그 시절이기도 하겠군요.

 

이현도 : 아, 제가 마이클 잭슨 보고 충격받은 건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을 거예요. [Thriller] 앨범이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제가 그렇게 안 생겼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요. 성가대도 하고. 교회 가려고 을지로를 가면 LP 가게 쇼윈도에 마이클 잭슨이 보이고, [Thriller] 앨범이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건 당연히 좋은 노래야. 이 사람이 그냥 최고야‘ 이런 생각 하면서 매일 흥얼거렸어요. 그래미 어워드에서 마이클 잭슨이 한 전설적인 퍼포먼스. 우와, 그거 보고 소름 안 돋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 퍼포먼스 이후에 제가 학교 가서 자랑할 기술에 문워크를 추가하고 정말 양말이 뚫어질 때까지 혼자 연구했어요.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내가 생각했던 개념의 반대구나‘하면서 결국에는 깨닫게 됐죠. 브레이크 댄스가 춤을 알게 해줬고, 마이클 잭슨은 제 인생을 바꿨죠.

 

- 먼저 말씀하신 허비 행콕의 ’Rock It’은 이수만 프로듀서 역시 자신의 인생을 바꾼 노래 중 하나로 꼽기도 했습니다. 유독 프로듀서들에게 영감을 준 노래가 아닌가 싶네요.

 

이현도 : 저는 처음에 허비 행콕이라는 분이 전자음악 하는 분인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니까. 나중에서야 전공이 재즈고, 피아니스트로 엄청 유명한 분이라는 걸 알았는데. 나중에 미국에서 이분 만나서 직접 얘기하기도 했어요. ‘Rock It’을 보고 어렸을 때 엄청나게 충격받았는데 그땐 EDM 하시는 분인 줄 알았다고. (웃음) 이수만 선생님께서는 그 노래가 나왔을 당시 이미 활동 중이셨잖아요. 이미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으신 분이 보시기에도 이게 훌륭하고 혁명적인 시도였을 것 같네요.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보기에도 이건 뭔가 완전히 달랐어요. 생경하기도 하고,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멋있고, 거기 나오는 사운드도 멋있고. 피아노같이 생겼는데 막 불 들어오고. 소리가 무슨 음인지는 알겠는데 피아노 소리가 아니고 너무 멋있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신디사이저였죠. 어린 마음에도 완전히 한 방 맞은 것 같은, 그런 좋은 의미에서의 충격이 있었죠. 

 

- 그 이후, 계속 ‘흑인 음악’을 자신의 음악적 DNA로 삼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현도 : 어린 시절부터 춤과 흑인 음악에 빠졌어요. 그런 음악을 혼자서만 즐겨 듣다가 중학교 진학하고,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하는 시기까지 늘상 그 반복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동네에 저랑 같은 음악이나 장르를 즐기는 사람이 한 명 있을까 말 까였거든요.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서, 강남 8학군에 있는 학교였거든요. 거긴 유학을 갔다 오거나 해외에서 근무하고 오신 분들 자녀들이 꽤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뭔가 얘기가 통하는 애들이 몇 명 생겼죠. 그중 한 친구가 자기 동네에도 너랑 똑같이 이런 음악 좋아하는 형들이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알게 된 게 구준엽, 강원래 형이죠. 그 형들은 대학생이었고 미술 전공하고 있었어요. 디자인과인가? 그랬는데. 그리고 또, 저희 반에 동경 한국인 학교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거든요. 해외 주재원 자녀라는 게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저를 보면서 ‘이야, 성재(고 김성재)라는 애가 전학 올 건데 너랑 되게 잘 어울릴 거야. 죽이 잘 맞을 것 같다’그러길래 기다리고 있었죠. 만나고는 ‘아, 니가 성재구나’하면서 친해지고 제가 흑인 음악으로 물들였죠. 그리고 성재는 일본에서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팝이나 록, 일본 가요들도 저에게 들려주고, 저는 ‘흑인 음악이 진짜 멋있는 거야’ 뭐 이러면서... 미성년자 신분이었는데 같이 나이트 가서 춤도 추고 그러면서 점점점점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 거죠.

 

- 듀스로 함께 활동하신 고 김성재 씨와는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신 거군요.

 

이현도 : 네, 상문고등학교에서 만났어요.

 

- 같이 춤 춤추러 갔다는 ‘나이트’는 이태원 문나이트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어떤 계기로 춤을 추러 다니게 됐나요?

 

이현도 : 학교 친구 소개로 준엽이 형(구준엽)을 알게 되고 친해졌어요. 그러면서 문나이트라는 데를 알게 되고 같이 가기도 하고, 따로 가기도 했죠. 혼자도 다니고. 왜 다녔냐. 그냥 춤 때문이었어요. 음악에 춤을 출 수 있는 곳이었고, 거기 온 사람들 전부가 저같이 음악을 좋아하고 잘 알고 있다는 게, 저한테는 별천지였어요. 지금은 인터넷이 있고, 동호회도 많고, 해외에서도 서로 영상통화하면서 누굴 만날 수 있잖아요. 그때는 컴퓨터도 흑백이고 소위 말하는 초록색 화면이었으니까 동호회를 만들기도 힘들었어요. 심지어 펑키/소울 같은 흑인 음악에 춤을 출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 이런 건 정말 찾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문나이트만 가면 사람들이 완전 하나가 돼 있었어요. 그걸 보고 ‘아, 이거 나만 아는 게 아니구나’하면서 뭔가 안심도 되고 서로 정보도 교환할 수 있고. 또 주한미군으로 온 여러 군인들 중에 뉴욕이나 LA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있었어요. 한참 말썽 피우면서 문화를 즐기던, 소위 말하는 ‘잘나가던’ 흑인 친구들. 미군들 입장에서 한국은 분단국가고, 위험수당까지 나올 만큼 어려운 현장이었을 텐데, 의외로 ‘재미있다’는 얘기를 듣고 온 친구들이 많았어요. 군인이면서도 날고 기는 춤꾼, 래퍼, 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죠. 문나이트에서 친해진 그런 친구들이 MTV나 춤추는 프로를 녹화한 비디오도 주고, 미국에서 한창 ‘핫’한 흑인 음악이나 옷을 갖다주기도 하고. 그렇게 90년대 한국에서 흑인 음악이 부흥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공헌한 주한미군들이 몇몇 있어요. 

 

그중 한 명은 현진영 1집 [야한 여자]가 싱글로 발매됐을 때 랩도 하고 춤도 안무도 짜주고 그랬어요. ‘윌리엄’이라고, ‘윌’이라고 했죠. 자기도 모르게 공헌을 한 거죠. 마치 테크닉스 SP1200 턴테이블이 힙합 신에서 전설이 됐는데, 그걸 개발한 개발자는 ‘어? 그냥 개발한 건데’ 이런 것처럼요. 그 윌은 한국 친구들 사귀고 즐겁게 놀았는데 미국에서 가져온 비디오 보여준 게 정말 큰 도움이 됐죠.

 

- 문나이트에 처음 가신 게 몇 살이었나요?

 

이현도 : 고등학교 1학년 말이었던 거 같아요. 제가 올림픽 개막식을 봤던 게 고 1이었던 것 같으니까, 88년도 말일 거예요. 처음 가보고는 ‘어? 뭐야? 이런 데가 있어? 왜 이렇게 음산해? 이런 조그만 클럽에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네?’이랬어요. 그러면서 낮에는 뭐 하는 사람들일까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다들 진짜로 바지 이렇게 내려 입고 다니고. 저도 그렇게 입고 다니면 지나가시던 모르는 할아버지가 막 야단쳤어요. 경찰도 막 (무전기 소리 흉내) ’훅훅! 거기 옷이 왜 그래?’ 막 이랬어요. 

 

그래도 문나이트 가면 다 옷을 그렇게 입었어요. 서로 멋있는 게 뭔지 아는 거죠. 그러면서 ‘야, 너 그 음악 들어봤어? 보이즈투맨의 모타운필리(Boyz II Men – Motownphilly) 비디오 봤어?’ 그럼 저희 끼리는 알죠. 보이즈투맨 데뷔곡인데 흑인 펑키 댄스예요. 그 음악 나오면 애들 막 거기 나오는 춤 똑같이 추고. 그러다 보니 이 사람들이 낮에는 뭐 할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알고 보니까 그냥 일반인도 있고, 학교 일찍 자퇴하고 댄스팀에서 댄서로 활약하는 댄싱 크루도 있고, 밤무대 쇼에서 공연하는 사람들도 있고, 서울랜드 같은 데서 퍼레이드 하는 분들도 있는데 다들 밤에는 여기서 본성을 드러내고. 그러니까 서로 막 친해지기도 했죠. 연이 닿아서 연예계에 스카우트가 되고 댄스 가수가 된 사람도 많았어요.

 

- 이태원의 다른 클럽들은 문나이트와는 분위기가 달랐나요?

 

이현도 : 네, 그러니까 지금 세대로서는 클럽이라고 하겠죠. 저희 때는 나이트고. 그러니까 나이트클럽 가면 모던 토킹(Modern Talking) 같은 거 나오고, 런던 보이즈(London Boys)의 ‘Harlem Desire’ 나오고, 조이(Joy)의 ‘Touch by Touch’, 패션 춤 같은 거 보이고. 그러니까 비트 자체가 백인 클럽 음악 성향이었죠. 하지만 제가 그때 완전히 빠졌던 건 무조건 흑인 음악었어요.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그런 느낌. 그런데 이런 음악을 같이 듣고 얘기가 통하고 춤을 출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건 문나이트가 유일무이했죠. 

 

- 문나이트에 가면 어떤 분들이 있었나요?

 

이현도 : 아, 그러니까 제가 ‘현진영과 와와’ 하기도 전인데요. ‘현진영과 와와’ 1기가 구준엽, 강원래 씨였고, 2기에서 성재랑 저로 교체가 됐거든요. 처음 구준엽, 강원래 형이 ‘와와’ 활동할 때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박남정과 친구들’이라고 해서 양현석 형이랑 R.ef 박철우 형이랑, 또 지영하 형이라고 안무가로 오래 활동하신 분 있어요. 그리고 지금 홍대 힙합 클럽 NB 사장하시는 영완이 형(김영완)이 결성했던 ‘콜라’라는 팀이 있었어요. 라인 음향에서 데뷔했던. 그리고 ‘보이스’라는 팀에서 ‘털기’ 잘하고 이러던 정식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걔가 R.ef 성대현이 됐고. 터보의 정남(김정남) 씨, 그때도 계속 꺾었어요. 덜덜덜덜... 

 

뭐, 많아요. 소방차 거의 해체하기 직전쯤 태형이 형(김태형), 원관이 형(정원관)이 요즘 춤은 어떤 흐름인가 보러 가끔 오셨던 것 같아요. 그냥 쓱 와서 보고 가시는 그런 분들도 있었어요. 그 이후 세대들 중 오던 사람들은 데뷔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들이 거의 많았죠. 그런데 웬만하면 다 데뷔했어요. 전부 잘 된 건 아니지만. 맨날 레게하고(머리 손가락으로 배배 꼬는 제스처) 거기 있던 선풍기 앞에서, ‘현석이 형(양현석)이랑 판을 낸다’느니, 뭐 ‘우리도 준비한다느니’ 이런 얘기도 하고 그랬죠. 특히, 현석이 형은 꼭 그 선풍기 앞에 있었어요. 나도 거기 서서 도란도란 얘기하고... 왜냐면 안이 덥거든요.

 

- 소위 ’흑인 음악 1세대‘로 알려져 있으신데, 실제로 ’직수입‘ 역할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현도 : 네, 맞아요. 1세대예요. 그러니까 정식 수입이 아니고 약간 그 뒤로 들여왔다고 해야 할까요, 거의 보따리 장사 같은. ’미제 아줌마‘들이 미8군에서 치즈 떼어오는 것처럼 저도 TV에서 AFKN 보고, 미국에 있는 친구한테 비디오 좀 보내라고 그러고. 한국에서 개인이 수입해서 파는 LP, 카세트테이프, CD 판매처도 알게 됐고. 그러면서 스스로 하나씩 조금씩 조각조각 찾아 모았죠.

 

- ’직수입‘의 교두보는 이태원이었지요?

 

이현도 : 그렇죠. 이태원이었습니다. 뭐 의정부, 송탄도 있었겠지만 저는 이태원에서 그 모든 걸 취했죠. 음악도 중요하지만, 패션도 중요하잖아요. 당시 이태원엔 소위 ’보세‘가 엄청 많았어요. 이걸 가짜라고 할 수 없는 게, 그냥 처음부터 수량이 좀 남게 만든 거라서 판매하면 안 되는데 판매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퀄리티가 진짜 제품이랑 같아요. 이런 보세가 한창 유행할 때 이 제품들을 한국에서 만들었어요. 예를 들면, NFL 미국 잠바 같은 걸 입는 게 90년대 힙합신에서 완전 유행이었거든요. 그즈음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라는 팀이 특히 NFL에서 뜨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걸 다 입었으니까. 그런데 그 옷들을 보면 퀄리티나 만듦새가 ’진짜‘예요. 

 

또 MC 해머가 신는 신발, ’하이테크‘라고 하는데 그런 것도 이태원에서 팔았고. 그때 이태원에서 샀던 옷들을 한동안 입고 다녔고, 듀스 2집 때까지도 이태원에서 그렇게 즐겨 사 입었던 것 같아요. 또, 정식 수입은 아닌데, 뉴에라 모자도 있었죠. 제가 듀스 때 뉴에라 빨간 모자 거꾸로 썼는데 그게 살짝 유행이 됐거든요. 신시네티 레즈라고, 추신수 선수도 잠깐 뛰었던 팀 모자였는데 저는 그냥 빨간색이 마음에 들어서 썼어요. 듀스 활동하던 중에 어느 날 문나이트에 갔는데, 그 모자를 누가 훔쳐 갔어요. 그래서 이태원 간 김에 사려고 뉴에라 모자 파는 가게에 가니까 조금 과장하면 가게 주인아저씨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자네가 그런(듀스) 사람인 줄 몰랐다고, 그 뉴에라 빨간 모자만 다 나간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저한테 그 빨간 신시네티 레즈 모델 말고 ’다른 모델도 좀 쓰시게‘ 막 이러셔서 ’아, 싫다고. 그 빨간 모자 좀 달라고‘ 하니까 ‘아, 그런 다 팔렸어’ 뭐 이러셔서. 그때 처음으로 광고 홍보 효과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지요.

 

- 이현도 씨한테 문나이트는 어떤 공간이었나요?

 

이현도 : 그 당시 저에겐 그냥 ’생활‘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진짜 원하고 좋아했고, 재미있어할 수 있던 저만의 별천지였죠. 그냥 공부 안 하고 놀고 싶어 가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거기 가고 싶으니까 가야 하고, 가면 재미있고, 그런 당연한 공간이었어요. 혼자 가서도 다들 공감대가 있고, 춤을 추고,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그런 동호회 같은 곳이기도 했고요.

 

- 문나이트 사장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현도 : 아, 카우보이라고 불리셨던 곱슬머리 사장님. 그분께서도 맨 처음부터 문나이트가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진 못하셨을 테지만, 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제공해 주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문나이트를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많이 나왔어요. 우리 세대 음악인들 중에도 홍대에 있든 강남구에 있든 위치를 떠나서 그 공간을 정말 그대로, 타일이나 선풍기 있던 자리까지도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그러다 원래 형이 문나이트를 오픈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가보지는 못해서 똑같은지는 모르겠어요. 

 

- 문나이트에서 활약하신 DJ 야옹 씨도 익숙한 얼굴이시겠군요.

 

이현도 : 네, 정회 형이죠. 허정회. 그 형이 음악을 엄청 잘 틀었어요, 진짜. 우리는 ’야옹이 형‘ 그랬는데 그냥 약간 고양이같이 생겼다고 해서 야옹이 형이라고는 했대요. 그 형이 독보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당시 알기 힘들었던 현지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현지인 친구들을 통해 그대로 구해왔다는 거예요. 빌보드 차트 보고 노래 제목만 보고 문나이트 가면, 그 노래가 그날 나오는 거죠.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혁신적이고 획기적이었어요. 요즘이야 유튜브도 있고, 검색하면 다 알 수 있지만 그땐 해외에서 지금 당장 히트하고 있는 음악에 관한 정보에 닿을 수 있는 창구가 없었어요. 문나이트가 유일했던 거죠. 

 

- 일종의 팝 음악 큐레이터 역할을 했던 거군요.

 

이현도 : 그렇죠. 음악을 틀었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자체를 즐기셨고. 우리가 ’형, 이 노래 뭐예요? 너무 좋다‘, ’어유, 이 노래 벌써 나왔어요?‘ 하기도 하고. 그런 풍류가 있었죠. 그때는 음악의 ’밸류‘가 상당히 높았어요. 하나를 들어도 엄청 소중하고 재미있고 귀하게 들을 수가 있었죠.

 

- 문나이트 외에 다른 클럽에도 가보셨어요?

 

이현도 : 그 근처 다 가봤어요. 그런데 뭔가 스타일이 달라요. 내가 좋아하고, 같이 춤추면 재밌고 잘 추는 사람들이 사실 거의 70%, 80%는 문나이트에 계속 있거든요. 뭐 사람들이 클럽 투어하듯이 돌면서 다른 데 가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여기로 와요. 왜인지 모르겠어요. 문나이트는 그냥 조그맣고 그런데. 서빙하는 웨이트리스 누나라든지, DJ 형, 사장님, 다들 식구 같은 느낌이었어요. 하도 오니까. ’어, 왔냐? 들어가‘ 뭐 이러고. 하여튼 그래서 되게 정감 있었다고 할까. 그런 게 있었어요. 

 

몇 년 전에 사장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장례식장 갔는데 원래 형(강원래)이 계시더라고요. 오실 줄 알았어요. 또, 제가 문나이트 다닐 때 코 찔찔 흘리던 ’형, 우리반 애가 형 안대‘ 뭐 그러던 꼬마애를 거기서 만났는데 경호 업체 사장이 돼 있더라고요. 세월이 그렇게 후딱 지나간 거죠.

 

- 문나이트는 당시 ’춤꾼들의 성지‘로 알려져 있어 춤 대회도 많이 열렸다던데, 출전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이현도 : 처음 문나이트에 갔을 시점에는 그런 대회가 많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좀 끝물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유, 잘 추는 사람들 많은데, 뭐’하면서 그냥 괜히 부끄러운 거예요. 게다가 어려서는 반골 기질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어서, ‘우리가 대회 뭐 하러 나가’ 그런 생각이 좀 있었어요. 대회가 가끔 열리면 사람들 춤추는 걸 그냥 본 적은 있죠. 

 

- 새벽 시간쯤 되면 자연스럽게 ’쇼다운‘도 펼쳐졌다고 하는데. 거기에서는 춤을 추셨나요?

 

이현도 : 아니요. 이유가 있었어요. 문나이트가 평소처럼 분위기 좋을 땐 그냥 춤추고 그랬는데, 무드가 좀 다를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땐 형들이나 선배들이 ’좀 나댄다‘, ’왜 이렇게 나대?‘ 그런 시선으로 본 적이 있었거든요. 나는 그냥 즐거워서, 또 친한 형들이니까 형들도 추고, 나도 추고, 그런 분위기라 췄는데 분위기가 좀 썰렁하더라고요. 그냥 어린 동생이 와서 까불까불하고 펄떡펄떡 뛰는데. 춤이 좀 늘은 거 같다면 ’어유, 잘 춘다‘ 그러면 되지 괜히 기분 나빠하는 것 같더라고요. 형들이라고 해봤자 스물넷이고, 저 스물이고 그랬는데... 

 

어떤 날은 이주노 형이 출 때도 그냥 같이 추려고 옆에서 평소같이 췄는데 그날따라 ‘이게 뭐 하는 거니?’ (웃음) 그런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듀스가 되고 나서도 춤추러 갔는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소리 하기도 하더라고요. 뭐 잘나간다고 나댄다고. 그런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어요. 그 이후로 ’그런 걸 나댄다고 생각하면 그냥 안 나대마‘하면서 안 췄죠. 조심스러워졌어요.

 

- 다른 사람들의 쇼 다운 무대를 본 적은 있었나요?

 

이현도 : 뭐, 서로 재미로 동그랗게 서서 너 한 번 추고, 나 한 번 추고. 그런 적은 있었어요. 그게 쇼 다운인가요? 다 같이 한 번씩 추고 그냥 들어가는 건데. 그런 건 많이 했죠. 그리고 군무를 추는 음악도 있었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발맞추고 몇 번 돌고 박수 치는 동작이 있는 미국 춤을 추고 그랬어요.

 

- 그 군무 동작도 기억하고 계시나요?

 

이현도 : 아니요. 저는 약간 수줍음이 많아서... 그게 이렇게 (흥얼거리며 춤추는 손동작) 왼쪽으로도... 그걸 사람들은 다 외우고 있더라고요. 저는 ’그런 걸 왜 외워야 되나‘ 그러면서 잘 안 했는데 사람들의 그 무드나 흥은 보기 좋았어요. 다른 사람들 그거 출 때 저는 앉아서 음료수 마시고 땀 좀 식히고 그랬었죠.

 

- 최고의 춤꾼들이 모인 문나이트에서 가장 인정받는 춤꾼은 누구였나요?

 

이현도 : 요즘은 ‘셔플’이라고 부르는, ‘런닝맨’이라는 춤이 있거든요. ‘토끼춤’이라고도 하고. 이 춤을 제일 잘 춘 사람이 영완이 형(김영완). 콜라의 영완이 형이 춤 선, 동작이 되게 멋있었고 똑같은 동작을 해도 제일 그루브가 좋았어요. 저희는 필(feel)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게 가장 좋았고요. 생긴 것도 약간 흑인스러운, 바비 브라운 같은 얼굴이고. 머리도 곱슬이었는데 그래서 다들 그런 건 인정했죠. 그루브도 좋은데 얼굴도 흑인처럼 생겼다고 부럽다고 그랬죠. 흑인 음악 본토가 미국이잖아요. 

 

그래서,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가 아무리 해도 절대 그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수 없다는 그런 묘한 상실감이랄까, 자격지심도 아니고 현실적인 자괴감이 있었어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그리고 여자 중엔 ‘철이와 미애’로 데뷔한 미애 누나가... 원래는 안무가로 유명했는데 외국 사람 같았어요, 진짜. 아직도 그만큼 춤을 파워풀하게 소화하는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없어요. 미애 누나랑 영완이 형이 제일 유명했죠, 문나이트에서. 

 

- 문나이트에서 추던 춤이 듀스 안무로 연결되기도 했나요?

 

이현도 : 아, 그럼요. 그럼요. 뭐 그때 어떤 팀들은 대놓고 일본이나 미국의 댄스팀 안무를 아예 통으로 다 갖고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그땐 인터넷도 없으니까 자기만 알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똑같이 그냥 덩어리째로 가져오거나 하는 건 우리 사이에서도 좀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춤을 쪼개서 안무를 섞고 음악에 맞게 다시 맞추는 게 필요한 거죠. 그러니까 화가들이 물감은 똑같은 회사 거 쓰듯이, 물감까지 다 자기가 만들어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나이트에서 얻은 아이디어도 많았고, 문나이트 가서 안무를 짜 온 적도 있어요. 내가 아는 A 동작, B 동작, C 동작을 문나이트가서 막 해보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A에서 A-2, B에서도 B-2 이런 식으로 느낌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집에 와서 곡 만들면서 해보면 음악에 찰싹 달라붙는 그런 안무가 나오죠.

 

- 듀스 데뷔 후에도 나이트클럽에 다니셨다고 하셨는데, 음악적 소스를 얻기 위한 이유도 있었나요?

 

이현도 : 아니요. 나이트에 음악 들으러 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는데, 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안 들리고 그냥 놀러... 술 먹고, 부킹하고, 가면 당연히 놀죠. 듀스가 어쨌든 연예인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시기에 일탈 같은 건 할 수 없고, 대외적으로 조심하고 하면서 낮부터 스케줄 하면서 힘들게 보냈던 시간의 마지막을 여기서는 ’빵‘하고 우리 마음대로 우리끼리 놀자. 뭐 이런 느낌이 사실 제일 좋았어요. 스트레스 해소랄까? 우리만을 위한 룸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막 편하게 놀고 웃을 수 있고 술 취할 수 있다는 게 좋았겠죠. 

 

거기 가면 또 룰라도 와있고, 서장훈도 와있고, 우지원도 와있고 뭐 다 와있어요. 그러면 스포츠 스타들이랑도 이런 친분이 생기잖아요. 그럼 또 거기서 어울리고. 방송에서보다 그런 데서 어울리는 게 저희한테 진짜 반갑고 즐겁지 않겠어요? 그래서 다녔던 것 같아요.

 

- 가시면 DJ들이 듀스 곡 틀어주지 않았나요?

 

이현도 : 왔다고 틀어주는 게 있어요. 가끔 막 백반집에서도 ’나를 돌아봐‘ 틀어주고, 굳이. 거기에서 그게 왜 나오냐고. 청국장 먹는데 ’나를 돌아봐‘ 나오고. (웃음) 너무 티 나는 그런 게 있었죠. 그런데 한 번씩은 틀어줘요. 

 

- 듀스 데뷔 전 ’현진영과 와와‘ 활동을 하게 된 계기도 문나이트였다고 들었습니다.

 

이현도 : 네. 그러니까 준엽이 형(구준엽), 원래 형(강원래)을 알고 있었고요. 이 형들이 그런데 프로 댄서도 아니었고 그냥 강남 사는 미술, 디자인 전공하는 대학생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옷 입는 거나 이런 게 너무 특별하고, 거기다 춤을 누구보다 잘 추고 대회에서 1등도 하고 그랬어요. 이수만 선생님이 그 소문을 듣고 SM 처음 출범할 때 현진영이랑 같이 분리된 두 팀이 연합이 될 수 있게 ’현진영과 와와‘라는 팀을 만드신 거죠. 외국에도 그런 팀이 있었어요. 헤비 디 앤 더 보이즈(Heavy D & The Boyz) 같은 팀들. 한국에서도 그런 시도를 한번 해보자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사실 그전까진 방송국에서도, 피디분들도 그렇고 댄서들을 되게 무시했거든요. 댄스 뮤직에서 댄스가 정말 중요하잖아요. 무대를 빛내주는 사람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풍‘, ’딱갈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폄하 당하고. 그때 저도 댄서로 시작했고,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백댄서‘라는 단어 되게 싫어했어요. 그런데 ’현진영과 와와‘에서 ’와와‘는 댄스만 맡았는데도 기준이 꽤 있어 보였어요. 실질적으로 와와 형들이 안무도 많이 짜고 하니까 ’와와는 다르다‘ 하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도 ’야, 성재야. 우리도 우리 세대에서는 춤으로 캡인데. 우리도 뭐 할까?‘ 이런 생각을 스멀스멀 하기 시작한 거죠. 저도 성재도 무슨 댄싱팀에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학생이었는데 연습을 해서 춤을 췄어요. 여기저기서 췄는데 잘 추니까 우리도 ’춤으로 이름 좀 떨쳐보자‘, ’사람들한테 보여줘야 되지 않겠어?‘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그런 와중에 ’현진영과 와와‘에서 구준엽, 강원래 형이 군대를 가면서 ’와와‘를 성재한테 물려준 셈이 됐어요. 그때 SM 사람들. 이사, 팀장 같은 분들을 알게 됐죠. 그분들 중 하나가 최진열 씨라고, 코털 형님으로 유명한데, 그 형님이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할 때 일을 보셨고, 그전에는 SM에 계셨어요. 성재는 일단 기럭지도 길고, 뭘 해도 멋있으니까 SM에서도 ’너는 다음에 꼭 우리랑 같이 하자‘ 그러면서 SM이랑 반 정도는 계약하기로 약속된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저도 나중에 ’와와‘에 들어갔는데 마지막까지 대기 멤버 같은 느낌이었어요. 회사 분들도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던 거 같고. ’이걸 어디다 쓰지?‘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오히려 ’나는 음악에 조금 더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그때 이를 좀 악물고 ’당신들이 인정 안 해도 내가 분명 인정받게 하겠다. 내 머릿속에는 음악이 있다‘ 그런 생각이 있었죠. 원망이 아니라 음악을 잘하고 싶은 원동력이 된 거죠. 

 

와와 활동하면서는 고정 팬들도 생겨났어요. ’현진영과 와와‘인데 약간 독특한 입맛으로 ’와와‘만 찾는 팬들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음악적인 욕심이 생겨났어요. ’이런 음악에 이런 안무를 여기서 하면 더 멋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들었죠. 마침 그때, 제가 집에서 악기 두들겨보고, 나와서는 안무 짜고, 현진영과 와와 활동하고. 이렇게 계속 살았거든요.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비트메이커, 트랙메이커의 센스를 하나둘씩 키우게 된 거였죠. 춤을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하나둘 씩 혼자 연습해서 안무 막 짜보면서 늘었듯이, 음악도 그렇게 하나하나 해본 거예요. 

 

 

 

(2부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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