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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3
by 우정호

'월드 스타 비' 만든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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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8-03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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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스타’라는 호칭이 가수 비의 앞자리를 차지할 때면 미묘한 생소함이 고개를 든다. ‘빌보드 1위’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가수로 공인된 방탄소년단(BTS)이나, 전 세계 가수 통틀어 가장 많은 유튜브 구독자를 가진 블랙핑크를 ‘월드 스타’라고 지칭하기 때문에. 그러나 아시아 지역의 폭발적 인기를 바탕으로 아시아 가수 최초 월드 투어에 이어, 매디슨 스퀘어 가든 단독 공연에 오른 비를 ‘국내 한정 스타’로 칭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현재 K-POP을 이끄는 주역 중 하나가 된 JYP엔터테인먼트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게 된 그 시작점이 된 가수가 바로 ‘월드 스타’ 비다.

 

 (아카이브 K는 비와 2020년 12월 인터뷰했다.) 

 

 

- 가수 데뷔가 2002년이라고 알고 있는 팬들이 많은데, 그 이전에 이미 그룹으로 활동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 : 정확히는 ‘비’라는 이름으로 데뷔했을 때가 2002년이에요. 사실, 그전에 그룹으로 데뷔했었는데 그건 98년이고요.

 

- 대중음악과 드라마, 영화 세 분야에서 모두 신인상을 받은 케이스는 비 씨가 대한민국 최초입니다.

 

비 :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박찬욱 감독님 작품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그때 신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드라마 부분에서는 ‘상두야 학교 가자’로 받았고, 가요 부문에선 ‘안녕이란 말 대신’도 있지만, 사실 ‘나쁜 남자’ 때 제가 신인상을 받았던 것 같은데...

 

- 유의미한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소위 ‘리즈’ 시절은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비 : 여러 가지로 저에게 최고의 한 해였던 때는 그래도 2005~2006년이 아닐까 싶네요. 매디슨 스퀘어 가든 단독 공연은 저한테도 의미가 컸고, 한국 남자 솔로 가수로서도 최초였으니까. 그 시점이 한국 음악계도 전반적으로 월드 투어라는 걸 처음 시작할 때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해 마지막에 타임지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뽑혔으니까. ‘오 이건 뭐지? 내가 왜 뽑혔지?’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면서 너무나 많은 일이 있던 때였죠, 저한테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고.

 

- 무섭다는 생각이요? 

 

비 : 네. 불과 한 해 동안 다 이루어졌고, 그 속도가 엄청났어요. 저는 그저 ‘내가 해외 투어를 할 수 있다고? 해외 공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2004년 말쯤 ‘풀하우스’라는 드라마가 잘 되고 어떤 매니저분이 저한테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지훈아, 홍콩 왔는데 니 얼굴이 너무 많아”하셔서 “홍콩에 왜 내 얼굴이, 사진들이 많아?” 그랬더니 홍콩 곳곳에 제가 제품 광고를 하고 있대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홍콩에서 광고 계약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진 한 번 보내봐”했는데 제 사진이 막... 길거리에 붙어있고, 무슨 화장품 제품에도 제 사진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너무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매니저분이 저보고 ‘너 홍콩 가서 공연 좀 해봐’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대표님, 현 JYP 사장님(박진영)한테 “형 나 홍콩에서 인기가 좀 있나 봐. 우리 홍콩에서 공연할까?”이랬는데 그때 아시아 투어가 시작이 됐죠. 

 

그래서 홍콩에 가서 아시아 투어를 할 수 있는 프로모터를 골라서 진행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너무 좋다고. 우리 쪽에 계속 컨택하고 싶었는데 한 번도 되질 않았던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열 몇 개국 정도의 아시아 투어를 처음 해 봤어요. 가는 곳마다 표가 잘 팔리니까 ‘OK. 그럼 월드투어로 진행해 보자’ 그래서 셋업을 시작했죠.

 

- 홍콩 쪽에서 무단으로 초상권을 사용했다는 뜻인가요?

 

비 : 네, 전혀 몰랐고, 다 불법이죠. 아마 그걸로 잃어버린 기회비용들이 엄청나게 많을 거예요. 뭐, 저 말고도 다른 기획사들, 아티스트들도 그런 케이스가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 상황을 놓고 보면 불법 행위들인데, 회사 차원에서 대처해야겠다거나, 불쾌하게 생각되진 않았나요?

 

비 :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안 되는 데 왜 기분은 좋았을까요?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생각해 보면 ‘어? 홍콩에 왜 내 사진이 돌아다니지?’ 그런 건데,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불법이긴 하지만 기분은 좋더라고요. 뭐 당시에 만약 저작권법이나 이런 게 더 제대로 돼 있었다면 경제적으로도 아주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드네요.

 

- 드라마 ‘풀하우스’ 성공 이후 해외에서 가장 먼저 큰 호응을 보인 게 홍콩이었나요?

 

비 : 제가 봤을 때 처음은 동남아시아 지역이었던 것 같아요. 태국을 비롯해서 홍콩, 대만, 중국 순으로 퍼진 것 같아요. 중국은 각 지역이 워낙 크니까 지역마다 방송 시스템이라던가 이런 게 달라서 판권 사서 방송 트는 게 굉장히 수월해서 풀하우스를 많이 틀어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 당시 태국에서 풀하우스의 인기는 엄청나 시청률 63%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태국에 진출을 시도한 적은 없었나요?

 

비 : 했었죠, 했어요. 1회 성으로 쇼케이스를 좀 했던 것 같은데 반응이 없었죠. 당시만 해도 동 남아시아에서 공연을 한다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어요. 프로모터들도 공증돼 있지 않은 채로 좀 주먹구구식이었고, 그래서 사고도 많이 생겼고. 그런데 그 시장을 개척해 보자고 시작한 게 박진영 선배님, 제 스승이고요. 

 

- 2004년, 풀하우스 방영 이전에 이미 2집 앨범이 태국에서 5만 장이 팔렸는데, 외국 가수 부문 최다 판매량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 : 네. 그러니까 저는 그때 제 기록이나 판매량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매번 새로운 걸 보여줘야 했고,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 춤을 추고 노래 연습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뭐 얼마 팔았어요? 이번 수익은 얼마죠?’이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요. 그걸 관리하는 팀들이 따로 있었고. 그래서 그런 기록은 잘 모르겠어요.

 

- 풀하우스 방영 이후 태국에서는 어떠한 변화를 체감하셨나요?

 

비 : 제가 첫번째, 두번째 태국에 갔을 때와 드라마 방영되고 앨범 공개가 된 후 제 입지가 너무 천지 차이더라고요. 사실 태국이라는 나라는 저한테 있어서 굉장히 가고 싶고 좋아했던 나라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갔을 때 사람들이 저를 반겨주는 태도들이 너무 좋았어요. 저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냥 한 명의 아티스트로 저를 알게 된 사람들도 굉장히 저한테 잘해줬고, 모든 스탭들이나 공연에 온 팬 여러분들도 너무 기억에 많이 남았고요. 

 

그리고 풀하우스가 방영이 된 이후에 공연하러 갔을 땐 제 앨범이 새로 나오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이미 태국을 포함해 활동 범위가 많이 넓어진 상황이었고요. 일본 진출도 했던 상황이었고, 내부적으로 미국 진출 기획을 하고 있을 단계였고. 그 시점에 태국에선 저를 모두 다 알고 있고, 저를 많이 원하는 곳도 있었고요. 그렇게 공연하러 가고, 광고 촬영차 한번 가고 그랬을 거 같아요.

 

- 그 당시 태국에서 인기가 엄청나 실제로 국빈 대접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 : 갈 때마다 그렇게 해주셔서 태국에 계신 모든 팬분들께 너무 감사드렸죠. 2010년, 2011년쯤 갔을 때 월드 투어 일환으로 태국에 갔어요. 도착했는데 저는 저 말고 어떤 국빈이 오신 줄 알고 뒤돌아봤어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태워주지도 않던 무슨 꽃 달린 카트를 태워주더라고요. 그래서 걸어서 안 가고 그걸 타고 대기실까지 갔어요. 왕실에서 쓰는 대기실을 내주겠다는 거예요. 아시다시피 태국은 왕이 아직 계시고 어떤 예의범절을 갖춰야 되는 그런 분위기라 저는 ‘아, 이건 좀 너무 부담스럽다’생각했죠.  

 

국가 귀빈들이 오면 입국심사하면서 잠시 대기하는 곳으로 안내하더라고요. 거기에서 굉장히 편하게 있었죠. 각종 음식들도 주시고.. ‘왜 이러지?’하면서 나갔는데 VIP 통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쪽으로 나와서 차를 탔는데 교통 신호가 한 번도 안 걸리는 거예요. ‘어? 원래 공항에서 태국 방콕 시내까지 들어가려면 되게 막히고 힘든데. 신호가 다 파란불이네?’ 차도 원래 다닐 때 다인승 승합차 탔는데, 창문에 가려지는 막이 있는 비싼 세단으로 바뀌어있고. 

 

그래서 ‘희한하다’하면서 창문 밖으로 봤더니 경찰분들이 에스코트를 해주시면서 신호를 다 바꿔 주시더라고요. 빨간색에서 파란 불로. 차 앞뒤로 경호하시는 분들 있고. 그러고 갔어요, 호텔까지. 호텔 갔더니 또 다 나와 계시더라고요. 거기서 꽃다발 받고, 사진 찍고. 그래서 기억이 나요. 

 

- 호텔에 ‘비’의 이름을 딴 룸도 생겼을 정도라고요.

 

비 : 그 호텔에 ‘Rain’이라는 스위트룸이 생겼어요. 문에 그렇게 새겨져 있는데, 방도 너무 넓은 거예요. 그래서 ‘이야, 참 살다 보니까 별일이 다 생기는구나’했죠. 그러니까 경찰분들이 에워싸서 어디를 가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또, 저 수영하고 싶다고 수영장에 갔는데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뭐야? 사람이 하나도 없지?’그랬더니 그 층을 다 비운 거예요. 너무 부담되니까 제가 무슨 마이클 잭슨도 아니고 이럴 이유는 전혀 없다고 그랬죠.

 

- 그러한 국빈 대접이 어떤 연유로 이뤄진 건지 알고 계셨나요?

 

비 : 프로모터가 했는지 아니면 혹시 사고가 날까 봐 그렇게 예우를 해 준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랬었죠. 그러고 어쩌다 보니까 공연장에서 태국의 공주님을 만났었죠. 공주님이 오셨더라고요, 제 공연에. 그래서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추억, 기억이었고 너무 감사한 기억들이에요. 그게 1회 성으로 끝난 게 아니라 태국에 계속 갈 때마다 막 비밀리에 그렇게 정리를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뒤에 어떤 세력이 있나...

 

- 소속사에서도 어떤 상황인지 몰랐던 건가요? 

 

비 : JYP 사무실에서도 되게 당황했어요. 저희 사장님이랑. 오죽하면 진영이 형도 ‘얘가 왜... 얘가 이 정도야?’, ‘야, 너 뭐야?’ 이럴 정도였으니까. JYP 사내 룰 자체가 ‘누구한테 폐 끼치지 말자’가 1번이었거든요, 인성 교육. 그러니까 절대로 불법적인 일이나, 도덕적으로 금이 가는 일을 피하는 게 실력보다도 1순위였거든요. 회사에 아티스트가 저 혼자였을 때도 그게 첫 번째였어요. 

 

그래서 제가 어디를 가더라도 먼저 인사하러 다니고, 해외 어디를 가도 남한테 폐 끼치는 건 일부러 안 하려고 했고. 그래서 막 수영장, 음식점, 뭐 이런 데를 다 비워주는데도 어딜 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가면 민폐니까.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해야 될 걸 못 하니까 욕먹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거의 뭐 투어 나가면 움직이지를 않았던 것 같아요.

 

- JYP 아티스트 중엔 닉쿤이 태국의 국민 아이돌인데요. 한국 아이돌 그룹에서 외국인 멤버가 생소하던 그 시절 닉쿤을 JYP에서 봤을 때 어떠셨나요?

 

비 : 닉쿤 군에 대한 첫 기억은 태국 이전에 뉴욕이었어요. 영어를 너무 잘하고, 태국말도 하는 와중에 한국말을 조금 조금씩 배우는 게 너무 귀여운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의 쿤과 그때의 쿤은 또 달라요. 그땐 저도 어렸고 스물넷, 많아야 다섯이었으니까. 그런데 쿤 같은 경우는 열일곱, 열여덟이었겠죠. 그러니까 너무 아기였거든요. 그랬던 쿤이 벌써 저랑 키가 비슷하네요. (웃음) 

 

그 당시 쿤 군을 봤을 때 '어? 정말 K-POP을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제 노래는 너무 좋아해 주는구나. 그래서 너무 고맙기도 한데, '이 친구가 과연 한국 아이돌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을까? 굉장히 힘든데'하는 생각도 들었죠. 한국 아이돌 시스템은 그러니까 전 세계 1등이라고 보셔야 돼요. 전 세계 문화 중심이라고 하는 미국, 할리우드조차 이런 시스템이 없어요. 그러니까 한 건물 안에 연습실이 있고, A&R 팀이 있고, 홍보팀, 매니지먼트팀이 있고, 그리고 각종 해외 비즈니스 업무 보는 팀들이 있고, 그다음에 작곡, 작사 팀들이 포진해 있는 게 한국 아이돌 시스템이죠. 

 

저는 지금 K-POP이 전 세계 중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아이돌 회사가 하나만 있어도 최강인데 그런 회사들이 모여서 한국 내에서도 1등 경쟁을 치르고 있잖아요. 이를테면, 한국 여자 골프, 여자 양궁, 쇼트트랙은 그냥 한국에서 1등이면 전 세계 1등이듯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어요. 

 

지금은 눈 뜨면 회사 안에 연습실이 있고, 꼭대기에 가면 밥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그러니까 이동 시간도 줄어들었고 그만큼 연습할 수 있는 시간도 더 늘어났고. 예전에는 시스템이라는 게 정말 주먹구구식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도 연습생 때 그랬지만 '아, 왜 나의 개인적인 삶은 없는 거지?', '나는 뭐지?' 이런 생각 하는데 회사 안에 멘탈을 관리해 주느 선생님이 또 계세요. 이야, 이건 뭐 시스템이 어디 가서 질 수가 없지, K-POP이. 그렇지 않으세요? 

 

미국 같은 경우는 시스템이 우리나라하고 완전히 달라요. 자기가 스스로 앨범 제작해서 이를테면, 홍보팀 얼마, 매니지먼트팀 얼마 떼주면서 자기가 구축하는 시스템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회사 들어가면 시스템을 다 만들어 주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가수 하기에는 최적화된 이런 나라가 없어요. 물론 저도 아이돌 그룹 제작을 하고 있지만 싸이퍼 친구들에게 계속 얘기를 해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된다. 두 가지를 가질 수 없다.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아이돌로 성공할 수 있다? 전혀. 단 1%도 없다고 저는 생각이 되거든요. 무조건 하나는 포기해야 돼요. 

 

잠깐 시스템 얘기를 했지만 다시 돌아가면, 어쨌든 쿤을 처음 보고 '저 친구가 과연 우리나라 시스템을 이해하고 해낼 수 있을까?'했어요. 하루 24시간을 쪼개서 노래 연습, 춤 연습, 인성 교육, 어떤 태도 교육, 외국어 교육까지. 그런데 쿤은 너무나 성실하게... 정말 훌륭한 친구더라고요. 한국말 저렇게 못 했거든요. 지금은 저보다 잘할 수도 있어요. 되게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진짜.

 

- 2005년, 태국, 일본, 중국 MTV 어워즈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는데, 이는 미국 진출의 단초가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 : 네, 아시아 3국 MTV 그랜드슬램을 했다는 게 미국에 알려져서 미국 MTV에서 이제 '쟤가 뭔데 시상식을 휩쓸었어?'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진영이 형도 그렇게 깊은 생각은 안 하시다가 '어? 지훈이 미국 한 번 가봐야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월드 투어를 서서히 빌드업 하시게 됐던 것 같고.

 

- 3집 [‘It’s Raining’]의 임팩트가 대단했군요.

 

비 : 네, [It's raining]이 그랜드슬램을 만든 거죠. 그리고 되게 웃긴 게, 이게 타임 매거진에 제 이름이 올라가는 어떤 단초가 돼요. 타임 매거진이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매년 뽑잖아요. 해외에 있는 아티스트들의 경우 예를 들면, 각 지역 언론으로부터 추천받는 시스템 같은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들이 ‘어? 얘가 태국도 탔네? 일본도 탔네?’ 쟤가 뭔데 MTV 상을 받았지?‘ 그러면서 자료를 조사하게 되고 ‘요즘 아시아에서는 얘가 활동을 많이 한다더라’하고 알려지면서 추천을 받게 됐죠. 

 

- 그 시점이 가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변곡점이 됐던 것 같습니다.

 

비 : 네, 그게 빌드업 되어 나가는 과정들이었거든요. ‘얘가 태국에 왜 갔지? 태국에서 어떻게 상을 받았지?’ 하면서 보면 그전에 ‘풀하우스’라는 드라마가 있었고. 그 이전에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노래가 있었고. 그 이전에 제가 태국에 직접 가서 부른 ‘안녕이라는 말 대신’이라는 노래가 있었고. 그런 게 하나하나씩 쌓여 결과가 나타난 것 같아요.

 

 

[사진출처=레인컴퍼니]

(2부에서 계속.)

 

 

인터뷰 : 아카이브 K

편집 :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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