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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우정호

1960s 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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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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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자는 1969년 데뷔해, 1970년대를 풍미한 소울 가수이자, 록 보컬리스트다. 고전적 창법이 주를 이루던 당시 대중음악 신에서, 소울, 록에 한국적 채색을 입힌 독자적인 목소리를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신중현 고유의 음악 세계관이 담긴 ‘신중현 사단’의 초창기 주자다. 

 

 

1970년대에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가 돌았다. 요즘 시각으로 읽어내기에는 다소 난해하다. 담배와 청색을 띤 도자기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며, 노래는 부르는 행위이지, (춤을) 추는 행위가 아니지 않나?

 

‘1969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면 문장 속 이 그로테스크한 단어 조합은 투명한 연관관계를 이룬다. ‘청자’는 그 해 출시된 한국 최초의 고급 담배, ‘추자’는 같은 해 대중음악 신에 모습을 드러낸 김추자다. ‘한국 최초 섹시 소울가수’ 같은 단편적 묘사로는 한없이 부족하다. 김추자는 풍만한 보컬 역량과 본능적인 몸짓으로 국내 비주얼 댄스가수 시대를 열었다.

 

김추자는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봄비’, ‘거짓말이야’ 같은 1960, 70년대 세계를 물들인 소울, 사이키델릭 록 열풍을 한국으로 옮겨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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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앨범 [늦기 전에], 그리고 신중현

 

김추자는 195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다방면적 재능을 표출했다. 춘천여고 시절, 춘천문화방송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춘천 향토제에서 전통 창인 ‘수심가’로 입상하며 음악성을 드러냈다. 또한 강원도 지역 대표 배드민턴,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으며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미술학도이기도 했다.

예체능을 넘나들며 ‘종합예술인’과 같은 타이틀이 목표인가 싶던 그녀가 향한 곳은 연극영화과였다. 김추자는 동국대학교 내 음악 경연에서 입상하며 음악계에 목소리를 알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중 하나가 신중현이다. 1968년,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을 대히트 시키며 정상급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올라선 그였다.

 

신중현은 이미 1964년 자신의 첫 밴드 애드 포(Add4)를 통해 영미권 로큰롤 밴드 사운드를 국내 대중음악계에 도입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서양 록과 구분되는 한국 정서를 입힌 새로운 록 사운드 구현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그 와중 당시 유행하던 트로트 풍이 아닌 ‘현대적’ 감각으로 소울과 록 보컬마저 소화해 내는 김추자를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다.

 

신중현은 “김추자는 두성과 비음 등 전통 창법이 금기시하는 테크닉을 적국 구사했고, 가장 반(反)트로트적인 가수였다”며 “김추자라는 보석을 통해 한국적 록의 가능성을 시험했다”고 자서전 ‘록의 대부 신중현’을 통해 밝혔다.

1969년, 신중현의 곡들을 노래한 김추자의 데뷔 앨범 <늦기 전에>는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강렬한 빨간 원피스와 고전적이면서도 도발적인 표정이 딤긴 커버가 시각을 자극하는 이 앨범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킬 정도였다.

 

일종의 컴필레이션 음반이자, <신중현 작품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앨범은 김추자의 곡 외에도, 후에 김추자의 매니저가 된 가수 소윤석 3곡과 록 밴드 바보스와 샤우터스 출신인 김선의 노래 1곡이 실렸다. 김추자의 노래는 총 6곡. 지미 헨드릭스식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소울 보컬과 판소리 창법을 결합해 한국적 정체성을 창조해낸 완성형 록 넘버 ’늦기 전에‘, 단순하고 향토적인 메시지가 사이키델릭한 반주와 만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파워풀한 보컬 역량을 보인 ‘나뭇잎이 떨어져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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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타입의 디바 출현

 

김추자가 데뷔하기 전의 음악계는 남진, 나훈아, 배호, 이미자 같은 스타일의 창법이 주류였다. 그런 상황에서 소울, 사이키델릭 록을 독자적으로 해석해 한국적 채색을 입힌 김추자의 보컬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희갑과 함께한 [왜 아니올까], 이봉조와 함께한 [무인도] 같은 앨범에서는 트로트, 재즈, 민요를 넘나드는 팔색조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추자는 대중들이 그녀의 음악을 ‘눈’으로 즐기게 했다. 뇌쇄적인 보컬 스타일만큼이나 여성적인 곡선을 충분히 살린 안무는 섹슈얼을 넘어 거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이었다. 몸매의 굴곡을 드러내는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김추자는 외양에서부터 이전 가수들과는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대중들은 큰 몸동작과 무표정한 얼굴로 시원스럽게 노래하는 김추자에 열광했고, 그녀는 더욱 업그레이드된 한국적인 소울, 사이키델릭 록 가요들에서 캐롤, 민요, 트로트까지 그 저변을 넓히며 데뷔 후 불과 2년 동안, 12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이별 노래의 클래식 ‘님은 먼 곳에’, 가사의 강점이 두드러진 ‘봄비’, ‘거짓말이야’라고 다섯 번을 반복하는 강력함이 인상적인 사이키델릭 곡 ‘거짓말이야’, 이스라엘 듀오 헤드바 앤 데이비드의 번안곡인 로큰롤 ‘꿈속의 나오미’같은 노래들은 동시대를 아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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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루머와 구설

 

시대를 관통하는 스타들에게는 소문과 구설이 따른다. 김추자도 마찬가지였다. 1971년, ‘거짓말이야’로 인기 정상을 달리자 허공을 가르는 곡의 독특한 손동작과 안무가 북한과 교신을 의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중앙정보부에서 김추자를 조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김추자는 2007년, 신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결국 안 들어갔다. 왜 오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회고했으며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 노래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70년대 한국은 금지곡의 천국이었다. ’너 때문이야‘라는 후렴구가 정권 탓을 한다며 금지된 이장희의 ’그건 너‘, ’불행한 나라에 살고 있다며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시비가 걸린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당시 대학생들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개사해 불렀다며 금지시킨 신중현의 ‘미인’.

 

이러한 서슬 퍼런 정권에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정권 프로파간다의 정곡을 찌르는 것과 다름없는 언어였다. 독재 정권의 피해 망상적 사고가 절정을 이루던 1975년,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거짓말이야’는 급기야 금지곡이 됐다.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이 밖에도, 김추자는 1971년 여름 부산의 한 극장 쇼 무대에서 피날레를 누가 장식하느냐를 놓고 선배 김세레나와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 공연을 취소하고 떠났다는 루머에 휘말리거나, 살인적인 지방 공연 일정을 소화하다 공연과 방송 스케줄을 일방 취소하기도 했다.

 

김추자는 후에 “당시 공연 기획자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아 공연을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는 경우도 많았다”며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추자는 1971년 여름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방송계의 구태와 관행처럼 내려오는 음악계 적폐를 묵과할 수 없다는 이유다. 가수협회는 그녀에게 1년 방송활동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가 결국 3개월 만에 징계를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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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의 소주병 테러와 컴백, 그리고 잠정 은퇴

 

김추자를 괴롭히던 각종 루머와 사건들은 결국 비극으로 이어졌다. 가수협회 징계 해제 후 컴백 무대를 준비하던 1971년 12월, 당시 매니저였던 소윤석이 구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깨진 소주병을 그녀의 얼굴에 휘둘렀다. 곧바로 응급실에 긴급 후송됐지만 6번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가해자 소윤석은 김추자의 데뷔 앨범 <늦기 전에>에서 3곡을 부른 그 가수이기도 했다.

 

사고가 난 지 4일 만에, 김추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얼굴에 칭칭 감은 채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며 서울시민회관 컴백 무대에 등장했다.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예정된 김추자의 컴백 무대는 신중현 사단의 후발주자 김정미가 대타로 공연했다.

 

한동안 공백기를 보낸 김추자는 1972년 11월, MBC ‘컴백쇼’를 통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후. 1973년부터 이뤄진 전국 순회공연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1973년, TBC에 다시 출연하며 당시 최정상급 프로그램인 ‘쇼쇼쇼’를 통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1974년까지 ‘그럴 수가 있나요’, ‘왜 아니 올까?’ ‘무인도’ 등의 히트곡들을 내놓던 그녀는 1975년 4월 가수 활동 전면 금지 선고를 받았다. 당시 가수들에겐 유행과도 같았던 대마초 소지 혐의였다.

 

이 사건으로 연예협회로부터 무기한 제명 처분을 받은 김추자는 2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 1978년에 대한극장에서 재기 리사이틀을 열기도 했으나, 1981년 당시 동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와 결혼하며 돌연 자취를 감췄다. 이후 1988년 컴백 앨범 ‘세월만 가네’를 발매하고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일회성 무대에 가까웠다.

 

1990년대부터 2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김추자의 컴백설이 돌았고 결국 2014년, 33년 만에 <It’s Not Too Late>를 발표하며 두 차례 컴백 공연을 가졌다. 여전히 ‘록킹’한 무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출처=머니투데이]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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