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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우정호

1960s 키보이스 (Key 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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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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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이스(Key Boys)는 국내 최초의 로큰롤 밴드다. ‘보컬 그룹’, ‘그룹사운드’, ‘록 그룹’이라는 단어가 혼용되던 1960년대, 신중현의 애드 훠와 함께 록 밴드라는 개념을 인지시켰다. 동시대를 대표했던 비치보이스와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서프 뮤직과 로큰롤을 국내에 도입했다.

 

195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를 뒤흔든 ‘Rock And Roll Music’에서 척 베리는 ‘당신이 나와 춤추길 원한다면, 그게 바로 로큰롤’이라고 노래했다. 금주법 시대 시카고를 주 무대로 활동하던 마피아들은 그들의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Let’s rock and rol.(해치워 버려)”이라는 대사를 날려댔다. 그런가 하면, 대중음악계 최고의 영예 중 하나로 꼽히는 명예의 전당의 이름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다.

 

‘로큰롤(Rock And Roll)’이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195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흑인 특유의 리듬 앤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 음악 요소를 곁들인 강한 비트의 열광적인 대중음악’이다. ‘록 음악’의 동의어로 쓰거나 ‘격렬하다’는 관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로큰롤은 분명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다. 적어도 키보이스가 1964년 대중음악계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키보이스는 데뷔 앨범 커버에 스스로 ‘한국의 비틀즈’라고 명시했을 정도로 로큰롤의 문법을 철저히 따랐다. 비틀즈의 로큰롤 넘버들과 ‘로큰롤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을 번안해 노래했으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내 최초 로큰롤 창작곡인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중음악사에 최초로 ‘로큰롤’이라는 단어를 명시했다.

 

이들은 또한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주요 레퍼토리인 서프 뮤직을 보급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1기 키보이스’가 비치 보이스의 곡들을 무대에서 커버하며 서프 뮤직을 국내에 알렸고, ‘2기 키보이스’는 ‘해변으로 가요’를 대히트시키며 키보이스를 여름 음악의 대명사로 올려놓았다. 1기와 2기 키보이스는 멤버가 서로 다르지만 적어도 ‘바다 사운드’로 표적이 향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또한 키보이스는 신중현의 애드 훠(Add 4), 미 8군 무대의 스타 코끼리 브라더스와 더불어 한국 그룹사운드 태동의 주요한 역할을 했다. 세간은 ‘한국 최초의 대중적인 록 그룹’을 신중현의 ‘애드 훠’가 아닌 키보이스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최초 로큰롤 밴드의 탄생

 

한국전쟁 휴전 이후, 국내 주둔하게 된 미 8군 위문공연인 ‘미 8군 쇼’는 196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미군만을 대상으로 한 이 쇼를 위해 20여 개의 소속 쇼단과 40여 개의 밴드들이 구성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히키 신’이라고 불린 기타의 ‘신’ 신중현이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이름을 떨쳤고, 미 8군 장교클럽 하우스 밴드로 활동했던 코끼리 브라더스 역시 각광 받았다. 그리고, 싱어 송영란과 함께 락 앤 키(Lock And Key)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키보이스 역시 미군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이끌었다.

 

키보이스는 1950년 대 후반, 보컬리스트 유희백과 드러머 윤항기를 주축으로 결성됐다. 윤항기가 키보디스트 옥성빈을, 유희백이 당시 미 8군에서 젊은 싱어로 인기를 누리던 차도균을 베이시스트로 영입했고, 인천 지역에서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김홍탁을 스카웃했다. 이후 유희백이 나가고 차도균의 사촌 동생 차중락이 보컬 자리를 대신해 5인조 라인업이 확정됐다.

 

이들은 당시 미국에서 서프 뮤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비치보이스(The Beach Boys)에 크게 영향받아 이름을 키 보이스(Key Boys)로 지었다. 록밴드라기보다는 악기를 연주하는 중창에 가까운 편성으로 출발했다.

 

키보이스는 미 8군 무대에서 김희갑이 이끌던 에이원 쇼에서 윤복희와 함께 투 스커뤌즈(Two Squirrels)라는 듀엣으로 활동했던 가수 송영란과 함께 패키지 쇼를 구성했다. 이 쇼를 위해 락 앤 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한편, 당시 연주자들은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 분기마다 실시되는 철저한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미군들의 취향에 맞는 영미권 음악을 커버해 부르는 것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면서, 연주자들의 생명과도 직결됐기에 연주자들은 모창과 커버 곡에 집중했다.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윤항기가 레이 찰스와 루이 암스트롱, 그리고 차도균이 팻 분의 모창을 했던 락 앤 키는 미 8군 무대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반 대중들을 위한 무대에서도 공연했다. 종로 디쉐네(Die schöne), 무교동 쎄시봉(C'est si bon), 광화문 아카데미 음악 감상실 등에서 무대를 펼쳤다. 이 같은 일반 무대에서 사용한 이름은 ‘키보이스’였다. 당시 사회를 보던 성우 피세영, PD 조용호, DJ 이종환과 같은 음악 관계자들 덕에 키보이스라는 이름은 급속하게 퍼졌다.

'한국의 비틀스 Key Boys' 명시한 데뷔 앨범 [그녀의 입술은 달콤해]

 

키보이스가 대중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1964년은 세계 대중음악사의 패러다임이 바뀐 해였다. 바로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라 불린 비틀즈의 세계적 인기 때문이었다. 그해 2월, 비틀즈가 미국 인기 토크쇼 ‘에드 설리번 쇼’에서 ‘I Wanna Hold Your Hands’를 부르며 팝의 역사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틀즈 신드롬은 대서양을 거쳐 미국으로 확산됐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까지 이르렀다. 국내 그룹사운드들 역시 미 8군에게 큰 인기를 끌던 ‘비틀즈 사운드’ 모방 경쟁이 일었다. 마치 비틀즈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키보이스 기타리스트였던 김홍탁은 후에 한 인터뷰를 통해 “키보이스가 처음 결성됐을 때는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 브라더스 포(The Brothers Four) 같은 포크 록이나 비치 보이스 같은 음악을 했는데, 비틀즈를 접하게 되며 본격 록 사운드에 빠지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1964년 7월 발매한 키보이스의 데뷔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는 비틀즈식 로큰롤의 색채를 드러냈다. 아예 ‘한국의 비틀즈 Key Boys!’라는 문구를 앨범 커버에 새겼다. 이 앨범에는 실제로 비틀즈의 ‘I Wanna Hold Your Hands’를 번안한 ‘그녀 손목 잡고 싶네’가 수록됐다. 국내 최초로 레코딩된 비틀즈 커버 곡이다.

 

작곡가 김영광이 만든 타이틀곡 ‘그녀 입술은 달콤해’는 국내 최초 로큰롤 창작곡이다. 빠른 로큰롤 넘버인 이 곡은 화음, 추임새, 샤우팅마저 초기 비틀즈와 유사했다. ‘사랑이 싹틀 때’, ‘말괄량이 아가씨’ 역시 또 다른 로큰롤 식 창작곡이며, 후에 키보이스 히트곡 중 하나인 ‘정든 배’로 명명된 김영광 작곡 ‘정든 배는 떠난다’가 실렸다.

 

이 밖에도 송영란이 부른 ‘귀여운 내 사랑’, 기타톤 마저 비틀즈와 유사한 ‘나의 보금자리’, 딕 데일 식 서프 록 색채가 묻어난 ‘연애는 O(제로)’가 실렸다. 또한, 롤프 해리스의 ‘Tie Me Kangaroo Down, Sport’를 번안한 ‘캥거루 사냥’, 빌리지 스톰퍼스의 ‘Washington Square’의 번안곡 ‘미소’와 같은 곡들이 실렸다.

 

이 앨범에서는 중창단의 포맷에서 출발했던 키보이스답게 음색이나 스타일이 맞는 멤버가 보컬을 맡았다. 리드 보컬은 차중락이지만 차도균도 멜로디를 많이 담당했다. 드러머 윤항기 역시 코믹한 스타일의 보컬을 선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이 앨범은 애드 훠의 데뷔 앨범과 더불어 한국 록 음반의 효시로 꼽힌다. 신중현의 에드훠 1집보다 5개월 앞선 1964년 12월 발매돼 한국 최초의 밴드 음반이라는 기록을 얻었다.

 

앨범 발매와 함께  미 8군 무대를 벗어나 한국 대중앞에 나선 키보이스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KBS TV에 출연해 한국에도 밴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 알렸다. 한국 그룹사운드 사상 처음으로 부산 해운대에서 단독 야외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65년,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보컬 차중락은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으로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고, 차도균은 첼로로 베이스를 연주하는 신선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윤항기도 레이 찰스처럼 검은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며 무대에 올라 주목받았다.

 

이듬해인 1966년, 키보이스는 극장 쇼 무대 스타 쟈니리와 스플릿 앨범 [오! 우짤꼬/정든 배는 떠난다]를 발표했다. 키보이스의 반주에 맞춰 쟈니리가 노래한 6곡과 키보이스의 노래 6곡이 수록됐다. 서울 뚝섬 모래사장에서 멤버 전원이 수영복을 입은 가운데 드러머 윤항기가 여성용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파격을 보인 앨범 커버 사진으로 화제를 모았다.

 

키보이스의 타이틀곡 ‘정든 배는 떠난다’는 지난 데뷔 앨범의 동명 곡을 재녹음한 버전이다. 트로트 곡에 가까웠던 전 버전과 달리 기타 편곡에서 세븐스 코드를 넣거나 오르간 연주를 추가하고, 전체적으로 라틴음악의 색채를 가미했다. 창법 역시 비교적 모던하게 바꿨다. 이 앨 범 버전의 곡이 히트하면서 이들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됐다.

 

그밖에는 당시 미국에서 히트친 팝 음악을 번안해 수록했다.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을 ‘외로운 밤’을 번안해 불렀고, 더 쉐임 앤 더 파라오스(Sam The Sham & The Pharaohs)의 ‘Wooly Bully’를 번안한 ‘웃기는 청춘’, 카펜터즈의 ‘Jambalaya’를 번안한 ‘석양에 타는 마음’, 닐 세다카의 ‘Oh! Carol’을 번안한 ‘오! 첫날’과 같은 곡들이다. ‘바람아 너는 아느냐’는 밥 딜런의 ‘Blowing In The Wind’의 번안 곡이다.

 

같은 해, 미 8군 라이브 쇼 레전드 남석훈을 중심으로 만든 옴니버스 음반 [그 밤과 같이]에도 세 곡을 수록했다. 서프록 연주곡인 ‘에코 아스팔트’, 로스 로보스의 ‘라 밤바’ 비틀즈의 ‘Twist And Shout’ 메들리, 그리고 보컬 차중락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실렸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 관련해 차중락의 동생이자 가이즈 앤 돌스의 보컬 차중용은 웹진 ‘이즘’과의 인터뷰를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키보이스의 노래지만 앨범에 차중락의 이름이 크게 표기되는 바람에 ‘차중락의 노래’로 알려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음반이 연달아 히트하며 키보이스는 1966년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출연하기도 했다. 남정임, 트위스트 김, 서영춘, 구봉서 등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키보이스 멤버 전원이 윤항기가 보컬로 나선 ‘Wooly Booly’,를 댄스홀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선보였다.

‘1기 키보이스’의 종장

 

1966년 12월, 키보이스는 독집 앨범 [키보이스 힛트앨범]을 발매했다. 전곡을 영미권 히트 팝송 번안곡들로 전부 채웠다. 앨범 커버에 사용한 키보이스 멤버들의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단복은 비틀즈를 그대로 벤치마킹했으며 비틀즈 번안곡을 5곡이나 수록했다.

 

‘이별의 새벽길’ (Ticket To Ride), ‘외로운 밤’ (A Hard Day'S Night), ‘그대 손목을 잡고 싶어’ (I Want To Hold Your Hand), ‘내 사랑 주었네’ (And I Love Her), ‘사랑의 찬가’ (All My Loving)와 같은 곡들이 전부 비틀즈 번안곡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번안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를 통해 차중락은 마초적이면서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색을 드러냈다. 레이 찰스 모창으로 유명했던 드럼 윤항기는 레이 찰스 ‘I Cant Stop Loving You’, ‘Take These Chains from My Heart’를 번안한 ‘그대는 내 사랑’과 ‘내 마음의 사슬을 풀어다오’, 그리고 ‘Wooly Booly’를 코믹하게 개사한 ‘바람난 노처녀’를 불렀다. 이 밖에도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Unchained Melody’가 실렸다.

 

[키보이스 힛트앨범]은 ‘키보이스 1기’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됐으며 한국 록의 태동을 이끌었던 이들은 이 음반을 끝으로 해체했다.

 

보컬 차중락과 베이스 차도균은 1967년 키보이스를 떠나 가이스 앤 돌스(Guys and Dolls)를 만들었다. 그러나 키보이스 시절 차중락이 부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 히트하며 솔로 가수로 전향했고, 보컬 자리는 친동생 차중용이 대체했다. 차도균 역시 1968년 솔로로 전향했다.

 

차중락은 1967년, ‘사랑의 종말’ ‘철없는 아내’ 등을 발표하며 MBC 10대 가수 가요제 신인상에 등극했으나, 1968년 뇌수막염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기타리스트 김홍탁 역시 1968년 탈퇴해 히식스(HE6)의 전신 히파이브(HE5)를 결성했다. 당대 최고 인기그룹으로 부상하며 그룹사운드 황금기를 주도했다. 윤항기도 1969년 탈퇴한 뒤 ‘윤항기와 키 브라더스’를 조직해 베트남전 참전 군인을 위한 위문공연단으로 떠났다.

‘2기 키보이스’

 

1969년, 키보디스트 옥성빈만이 남아있던 키보이스는 새로운 멤버들로 자리를 채운 후 새로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리스트 조영조와 박명수, 베이시스트 장영이 합류했다. 이들은 애드 훠, 키보이스와 함께 원주 그룹사운드로 활동했던 코끼리 브라더스 출신들이었다.

 

2기 키보이스는 원년 멤버인 차중락, 김홍탁, 차도균, 윤항기처럼 개성이 뚜렷한 멤버들은 아니었으나 탄탄한 연주력으로 승부했다. 1969년 5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5·16 기념 플레이보이배 쟁탈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차지한 것이다. 국내 첫 ‘밴드 경연대회’인 이 대회의 우수상은 ‘히 파이브’, 구성상은 ‘가이스 앤 돌스’였다. 1기 키보이스 멤버들이 주축인 밴드들이었다. 연주상은 2기 키보이스 기타리스트 조영조가 차지했다.

 

키보이스가 인기 그룹으로 재부상하면서 창단 멤버들인 ‘1기 키보이스’와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이름을 유지한 채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 원년 멤버인 옥성빈 역시 탈퇴 후 새 멤버로 교체되며 오리지널 멤버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후에 락 앤 키(Lock & Key)라는 쇼단을 구성해 월남 위문 공연에 올랐던 윤항기는 1970년 한국에 돌아와 ‘키보이스’라는 이름을 이어가지 못한 채 ‘키 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경연대회 우승에 힘입어 ‘2기 키보이스’는 인기 DJ 이종환이 이끌던 기획사 애플(APPLE)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소울 가수 임희숙과 스플릿 앨범 [Key Boys' Soul & Psychedelic Sound]를 발매했다.

 

1기 키보이스가 서프 뮤직과 로큰롤 사운드를 구사했다면, 2기 키보이스는 이 앨범을 통해 당시 신중현에 의해 유행했던 한국형 소울,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초점을 맞췄다. 김희갑이 작곡한 ‘바닷가의 추억’은 기타 퍼즈 사운드를 통해 사이키델릭 무드를 조성했다. 또한 이 앨범에는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 기타 인트로와 트로트풍 보컬이 혼합된 ‘멀어져 간 사랑’, 트로트에 가까운 ‘그립다 생각하니’와 같은 곡들이 수록됐다.

여름 대표곡이자 키보이스 대표곡 된 ‘해변으로 가요’

 

1970년, 키보이스는 사실상 2기 키보이스의 첫 정규앨범인 [보칼 No.1 키보이스 특선 2집]을 발매했다. 이 앨범엔 키보이스의 대표곡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해변으로 가요’가 실렸다. ‘바닷가의 추억’, ‘뱃노래’ 등 트로트와 록 반주를 접목시킨 곡들이 실렸고, ‘Ob-La-Di, Ob-La-Da’, ‘Cry Like A Baby’와 같은 번안곡들로 채워졌다.

 

‘해변으로 가요’는 그때까지 최고의 여름 노래로 군림했던 배호의 ‘파도’를 가볍게 넘어섰으며 이 곡의 대히트로 1기 키보이스의 히트곡이었던 ‘정든 배’와 맞물려 키보이스는 단숨에 여름을 대표하는 밴드로 등극했다. 여름 휴가철이면 여전히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은 후에 송골매, DJ DOC, 노브레인을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그러나, ‘해변으로 가요’는 발매 후 수십 년이 흐른 2002년이 돼서 일본곡의 표절로 판명됐다. 원곡은 일본 밴드 더 아스트로 제트(The Astro Jet)의 '浜辺へ行こう(해변에 가자)'이며, 1968년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아시아 그룹사운드 페스티벌’에 더 아스트로 제트가 초청돼 부르기로 예정이 돼 있었다. 당시 일본어 곡을 부르는 게 금지된 국내 실정에 따라, 더 아스트로 제트 멤버이자 작곡자인 교포 가수 이철이 소설가 이호철에게 번역을 의뢰해 한국어로 불렀다.

 

이듬해, 키보이스는 더 아스트로 제트에게 허락을 얻어 이 곡을 음반에 수록했으나 작사, 작곡을 ‘키보이스’로 표기하는 등 원곡 작곡자를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의 저작권 협정이 미미한 탓에 이철은 2003년이 돼서야 저작권 확인 소송을 냈고, 2007년, 대법원은 ‘해변으로 가요’의 원작자가 이철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한편, 키보이스는 1970년, 사이키델릭한 시도와 트로트가 섞인 [키보이스 스테레오 앨범 Vol.3], [Merry Christmas [carol] (1970, 유니버어살 레코드)를 발매했다. 이듬해인 1971년엔 [에보니스 대 키보이스 골든 Pop's]가 발매됐으나, 1기 키보이스의 곡들이 실렸다.

 

2기 키보이스는 1971년 브라스 연주를 가미하며 7인조 밴드로 거듭났다. 1972년에도 임희숙, 나훈아, 펄시스터즈, 차중광, 히식스, 양희은 송창식 등이 참가한 남이섬 송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인기를 이어 나가던 키보이스는 1970년대 중반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키보이스 원년 멤버 중 윤항기는 1971년 결성한 '윤항기와 키 브라더스'에 이어 솔로 활동을 통해 인기를 누리다 1986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다. 2014년, 가수로 복귀했다.

 

키보이스 탈퇴 이후 히파이브와 히식스의 리더로 활동한 기타리스트 김홍탁은 1995년 대중음악교육기관인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솔로 가수로 성공적 커리어를 쌓은 차도균 역시 서울예술전문대학과 추계에술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맡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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