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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최승우

1980s 임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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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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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범은 한국에서 가장 걸출한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1986년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라는 타이틀을 가진 시나위를 통해 데뷔했다. 매력적인 음색과 카리스마, 곡 소화력을 모두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태원 한복판의 까마득하도록 가파른 계단 위, ‘서울 3대 찜질방’ 중 하나로 불리던 이태원랜드가 있었다. 이곳은 외국인들까지 즐겨 찾을 정도로 한때 이름을 떨쳤으나, 코로나19의 타격으로 수입성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2019년 문을 닫았다.

 

이태원랜드가 있던 자리는 대대로 이태원의 명소이기도 했다. 먼 옛날에는 영화배우 신성일이 운영하는 태평극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한국 록 음악의 역사가 묻혀 있는 유적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한국 대중음악의 거목 신중현이 1985년 당시 버려져 있던 태평극장을 개조, 록 음악 전문 공연장인 ‘록 월드’를 만든 것이다.

 

비록 일 년도 안 되어 문을 닫긴 했지만, 신중현의 장남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를 비롯해 많은 뮤지션이 록 월드에서 내공을 갈고 닦았다.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임재범이 자신의 음악적 출발점인 시나위와 인연을 맺은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불세출의 로커,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를 만나다
 

임재범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정보가 확실치는 않다. 예전에는 1966년생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실제로 1966년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다만 임재범 스스로는 범띠(1962년)라고 밝힌 바 있으며, 지금은 대부분의 포털사이트에도 1962년으로 기재돼 있다. 어린 시절 그는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할머니 손에 자라는 등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고, 이때문에 실제 태어난 해와 주민등록증의 나이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재범은 록 월드에 드나들 때까지만 해도 밴드 경력이 없었다. 그 즈음 신대철은 시나위에 어울리는 마땅한 보컬을 찾지 못해 고민 중이었다. 그러던 중 임재범과 음악적으로 뜻이 맞아서 몇 차례 공연을 함께 했고, 시나위의 멤버로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두 사람은 서울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그렇게 활동하던 시나위는 당시 메이저 음반사 중 하나인 킹레코드 대표의 눈에 띄었고, 1986년 3월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된 본격적인 헤비메탈’이라는 기념비적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시나위 1집의 탄생이었다.

 

시나위 1집은 나오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두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부랴부랴 곡 만들고 녹음하느라 지금 기준으로는 허점도 많지만, 한국에서 헤비메탈의 형식미를 본격적으로 갖춘 음악은 그전까지 전무한 것이었다. 특히 신대철의 육중한 기타와 대구를 이루는 임재범의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 독특한 바이브레이션은 어느 록 보컬리스트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임재범은 타이틀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비롯해 5곡에 신대철과 공동 작곡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지금까지도 후대의 밴드들이 무대에 올리는 단골 레퍼토리다.

 

그러나 임재범과 시나위의 인연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임재범이 앨범이 나오자마자 군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신대철은 “녹음 도중에 영장이 나왔는데, 당시에는 그런 황당한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단기사병으로 복무하게 된 임재범은 처음에는 오후 시간을 이용해 합주에 참여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려 했지만, 지방 공연 같은 경우에는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고민 끝에 그는 이 상태로는 밴드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시나위 탈퇴를 결심했다. 임재범이 몸을 담은 밴드는 앨범 한 장을 넘기지 못한다는 징크스의 시작이기도 했다.

 



록 보컬리스트로서의 전성기와 아쉬움
 

임재범은 1988년 부활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지웅, 훗날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유명해진 기타리스트 손무현, 젊은 실력파 드러머 손경호 등과 의기투합해 두 번째 밴드 외인부대를 결성했다. 같은 해 나온 데뷔 앨범에서 임재범은 특유의 묵직한 중저음과 샤우팅, 가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한층 세련된 보컬리스트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이지웅과 손무현의 트윈 기타가 인상적인 ‘Jump On The Top’, 애절한 발라드 ‘줄리’는 힘이 넘치던 20대 시절 임재범을 대표하는 곡이다.

 

그러나 외인부대의 데뷔 앨범은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변변한 활동을 해보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멤버 개개인의 실력은 뛰어났으나 이를 관통하는 응집력은 다소 아쉬웠고, 고유의 색깔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양 날개인 임재범과 손무현이 탈퇴하면서 외인부대는 힘을 잃었고, 이후 2집까지 실패를 맛보며 해체했다.

 

그 뒤 임재범은 한국 록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또 하나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89년에 록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 앨범 [Rock In Korea]로, 김종서, 김도균, 강기영, 오태호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뭉친 올스타급 프로젝트였다. 임재범은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파트너를 이루어 두 곡에 참여, 폭발력과 표현력 양면에서 절정에 다다른 노래를 선보였다. 묵직한 김도균의 기타 리프와 완벽한 호흡을 과시한 ‘The Same Old Story’는 그의 경력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명곡이다. 실제로 이 시기를 임재범의 전성기로 보는 팬들이 적지 않다.

 

이후 솔로 데뷔를 생각하던 임재범에게, 본토 음악을 체험해보겠다며 영국으로 떠났던 김도균에게서 연락이 왔다. “록으로 세계를 정복해보자!”는 김도균의 말에 도전 의식이 생긴 임재범은 모두 털어버리고 영국으로 향했다. 그가 가진 건 이태원에서 맞춘 가죽점퍼, 항공권, 단돈 200달러뿐이었다.

 

두 사람은 런던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맛없는 일본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현지인 연주자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해 라이브클럽 공연을 했다. 그러다가 BBC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 해외에 나가니 애국심이 발동해서 한복을 입고 노래한 적도 있다고 한다. 비록 공연 개런티도 받지 못했지만, 임재범은 그 시절을 “잊을 수 없는 첫사랑 같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임재범과 김도균은 6개월 만에 귀국했다. 훗날 김도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임재범의 향수병이 큰 원인이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멤버를 모았고, 그렇게 해서 김영진(베이스), 유상원(드럼)과 함께 한 슈퍼밴드 아시아나가 결성됐다. 이들은 해외 유명 밴드들에게 뒤지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내자는 데 뜻을 같이 하고 1990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20여 일간 영국의 매트릭스(Matrix) 스튜디오에서 1집 수록곡의 녹음을 마치고 귀국했다. 녹음의 지휘는 전문 

프로듀서 케니 존스(Kenny Jones)가 맡았다.

 

그러나 야심차게 내놓은 아시아나의 첫 앨범은 데뷔 앨범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먼저 시기가 문제였다. 록 밴드들이 공중파 방송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었다. 해외에서도 너바나가 이끄는 새로운 흐름이 헤비메탈의 위상을 위협했다. 영국까지 가서 공을 들인 것 치고는 조악한 음질, 해외 진출을 의식한 영어 가사도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음악 외적으로도 체계적인 매니지먼트라는 게 전무했던 시절이었다.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같은 본격적인 브리티시 메탈을 추구하는 밴드는 이미 입지를 잃고 있었다.

 

결국 임재범의 밴드 징크스는 계속됐고, 아시아나는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짧은 활동 끝에 해체됐다. 엄청난 호흡과 날카로운 금속성이 돋보이는 임재범의 무시무시한 전성기 목소리를 생각하면 아쉬운 앨범이 아닐 수 없다. 임재범은 “진짜로 음악에 미쳐 있었던 건 아시아나 때가 마지막”이라고 돌아보기도 했다.



 

성공적인 솔로 데뷔, 잇단 기행과 잠적
 

1990년을 기점으로 한국 록의 부흥기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암약하던 록 뮤지션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다른 길을 모색했고, 이승철과 김종서 등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은 하나둘 솔로로 독립해 자리를 잡았다. 이 때문에 음악계에서 “장발의 로커들 머리 잘라서 솔로 데뷔시키면 대박 난다”는 속설이 돌 정도였다.

 

임재범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고, 1991년 팝 발라드 색깔이 짙은 첫 앨범 [On The Turning Away]를 발표하며 솔로로 전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마이클 볼튼을 연상시키는 타이틀곡 ‘이 밤이 지나면’이 단숨에 히트했고, 임재범은 그야말로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이 앨범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록인 60만 장이 팔렸다. 물론 이때가 앨범의 판매량이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던 시절이긴 했으나,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성공이었다.

 

그러나 인기와 비례해서 임재범이 기인 혹은 괴팍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방송을 펑크내거나 매니저도 행방을 모르는 잠적을 하는가 하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린 적도 있었다. 강원도 오대산에 들어가서 일 년 동안 머무르거나 불교와 이슬람교 등 각종 종교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리고 폭행과 마약 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잠적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긴 공백 후 1997년 두 번째 앨범 [Desire To Fly]으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번에도 몇 차례의 TV 출연을 제외하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앨범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듬해 임재범은 3집 [Return To The Rock]를 발표, 그를 노래 잘하는 발라드 가수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제목 그대로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록으로 회귀하겠다고 작심하고 선언하는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섬찟함마저 느껴지는 웅장한 스케일, 절제하지 않고 휘몰아치는 보컬, 박진감 넘치는 연주, 당대의 기술력으로는 훌륭하게 마무리된 녹음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 없는 앨범에 평단과 록 마니아들은 찬사를 보냈다. 임재범은 솔로로 데뷔한 이후에 록 음악에 부채의식이 있었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애초에 적극적 소비층이 적은 정통파 록 음악에, 전반적으로 암울한 분위기, 어려운 영어가사는 대중성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머릿곡 ‘고해’가 남자들의 노래방 필창곡이 되는 등 유명세를 탔지만, 그 덕분에 한 장의 앨범이 전체적으로 평가받을 기회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 뒤 임재범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간간히 앨범을 발표하거나 OST 등에 보컬로 참여했다. 그러나 정규 4,5집의 경우 예전의 치열함은 느껴지지 않는, 여러 면에서 아쉬움만 남기는 작품들이었다. 그중 몇몇 곡은 드라마와 광고음악으로 쓰이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박정현과의 듀엣 버전으로 뒤늦게 히트한 2집 수록곡 ‘사랑보다 깊은 상처’, 영화 <동감>의 사운드트랙으로 수록된 4집의 ‘너를 위해’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임재범은 곡의 히트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얼굴을 드러냈다가 은둔하기를 반복했다. 다수의 베스트 앨범과 옴니버스 앨범이 나왔지만, 이는 뮤지션 본연의 색깔보다는 판권을 가진 음반사가 전략적으로 짜낸 편집 앨범에 가까웠다. 2004년 5집 발표 후에는 13년 만에 단독공연을 가지기도 했지만, 오래 기다렸던 팬들을 만족시킬 만큼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인 아나운서 고(故) 임택근, 그리고 이복동생인 배우 손지창과의 관계가 알려지며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바빴다.

 

사실 임재범을 둘러싼 무수한 루머 중 어떤 것은 사실이 아니거나 부풀려졌을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방송이나 언론에서 육성을 듣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기에 추측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유가 어쨌든 한참 음악 활동에 몰두했어야 할 시기를 소모한 것은 본인, 그리고 음악계에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훗날 임재범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시스템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고 너무 두려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는 가수다> 출연, 그리고 7년 만에 돌아오기까지
 

임재범이 다시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11년 MBC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면서다. 딸을 위해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힌 그는 여러 장르를 폭넓게 소화하는 음색과 여전한 호소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윤복희의 ‘여러분’은 그의 굴곡진 인생사와 맞물려 청중평가단과 동료 가수, 자문위원들까지 울릴 정도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원곡의 작곡자인 윤항기가 “임재범은 내가 곡을 쓴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며 그의 표현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제3의 전성기를 맞으며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지만, 임재범은 다시 한 번 잠적을 택했다. 그는 2011년 5월에는 팬클럽에 “심신과 영혼이 지쳤다”는 글을 남기고 돌연 해외로 떠났고, 결국 예정돼 있던 공연도 취소됐다. 2015년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아 음원을 발표하고 전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4년 동안 방송 출연이나 앨범 제작은 거의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암 투병 중이던 부인이 향년 45세로 세상을 떠나는 개인적인 아픔까지 겹치면서 그는 기약 없는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2022년 5월, 임재범은 무려 7년의 긴 공백을 끝내고 컴백 소식을 알렸다. 같은 해 여름부터 순차적으로 음원을 공개했고, 9월에는 회고적 성격이 강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이 담긴 정규 7집 [SEVEN]을 선보였다. 과거의 대성일갈하는 카리스마는 이제 사라졌지만, 그 뒤로 방송과 공연을 통해 오랜만에 꾸준한 활동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출처=연합뉴스,한겨레, KBS, SBS]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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