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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최승우

1990s 조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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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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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찬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이지만,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를 받아온 뮤지션이다. 그는 탁월한 보컬을 앞세운 싱어송라이터이며, 팝, 재즈, 포크, 리듬앤블루스, 훵크 등 광범위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지닌 올라운더이기도 하다. 또 코러스 연출, 보컬 디렉터, 프로듀서로도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음악에 둘러싸인 집안에서 태어난 막내
 

태생부터 음악이 흐르는 DNA를 타고난 사람이 있다면, 조규찬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조규찬은 1971년 1월 13일 서울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나화랑(본명 조광환)은 ‘무너진 사랑탑’, ‘열아홉 순정’, ‘닐리리 맘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유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어머니 유성희도 ‘내 고향’, ‘눈길’ 등을 부른 가수로 활동했다. 큰아버지 고려성(본명 조경환)도 작사가, 가요 제작자였다.

 

조규찬은 “성적표 나오면 도장 받는 게 어렵지 않았고, 너무 놀아서 더러워지면 어머니가 ‘찬아, 좀 씻어라’ 정도의 잔소리만 하는 부모님” 덕분에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첫째 조규천과 둘째 조규만은 음악을 하기보다 은행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막내아들에게는 음악을 직접 가르치려 했는데, 정작 조규찬은 도망 다녔다고 한다. 그는 암사동 집 근처의 냇가를 쏘다니며 개구리를 잡고 물고기를 쫓아다니는 걸 더 좋아했다. 어릴 적 꿈에 ‘양어장 주인’이라고 쓸 정도였고, 지금도 낚시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의 집안은 그 자체로 모든 게 음악적이었다. 조규찬은 어린 시절의 집안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매일 상을 펴 놓고 흥얼거리면서 펜으로 악보를 그리셨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만화를 그리다가, 그 상 밑에 들어가 누워서 잉크가 찰랑거리는 소리와 사각거리는 펜소리를 들으면서 나른하게 잠드는 걸 좋아했다. 때로 거실에서 클래식 음악을 하는 학생들의 레슨도 하셨다.” 이런 걸 보면 조규찬은 삼형제 중에서 아버지와 음악적 교감이 가장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규찬이 음악보다 먼저 빠진 것은 미술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시간에 사과를 그렸는데, 데생을 안 배운 상태에서 담채와 식으로 색을 넣는 걸 본 담임선생님이 “너는 꼭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고 진지하게 권유한 게 계기였다. 어린 마음에 ‘아, 그림이 내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한 그는 매일 휴대용 이젤을 들고 학교 뒷산에 올라갔고, ‘스스로 예술가인 양’ 추운 바람 맞으면서  소보루 빵 한 개로 허기를 메우며 종일 그림을 그렸다. 지금도 그는 앨범의 표지나 에세이집의 삽화 등을 손수 그린다.

 

음악을 아카데믹하게 배우지는 않았지만, 조규찬은 늘 음악적인 요소에 둘러싸여 지냈다. 선화예고에 입학해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음악과 건물을 자주 찾았고, 새벽 5시쯤 아무도 없는 피아노 연습실을 독차지하고 겨울의 추운 공기를 몸에 묻힌 채 피아노를 치곤 했다. 조규찬은 “오히려 이런 시간들이 음악을 전공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서정성을 키운 것 같다. 일단 프로가 되고 나면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분위기에 매료되는 시간은 아티스트에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규찬이 처음 작곡을 시작한 건 중학교 때다.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는 그에게 큰 아픔과 상실이 되었다. 조규찬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작곡에 쓰던 기타를 서툴게 튕기며 순간순간의 주체 못할 감정을 담아 습작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 중 하나가 음악가 조규찬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무지개’다. 그는 “당시 미술은 내 삶이었지만, 음악은 그것과 같거나 혹은 더 큰 무게감으로 늘 곁에 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규찬은 동국대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서울예전 캠퍼스가 남산에 있던 시절 동국대에서 가깝기도 했고, 형 조규만이 서율예전 실용음악과 재학 중이라 매일 놀러가다시피 했는데, 워낙 자주 가다 보니 조규찬도 서울예전 실용음악과 출신인 걸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 그리고 천재의 등장
 

1987년 유재하가 단 한 장의 전설적인 앨범을 남기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족들은 앨범의 수익금으로 장학회를 세우고 1989년부터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뮤지션 조규찬을 세상에 등장시킨 유재하음악경연대회의 시작이었다. 그때만 해도 음악과 접점이 없었던 그는 둘째 형의 권유로 ‘무지개’를 들고 제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 참가했다. 결과는 금상 수상이었다. 지금의 대상에 해당하는 최고상이다.

 

범상치 않게 음악계에 데뷔한 조규찬은 일 년 뒤 기타리스트 이준, 베이시스트 김정렬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새바람이 오는 그늘’을 결성, 동명의 앨범을 발표했다. 서정적인 재즈 팝이 주가 된 앨범에서 ‘당신을 닮은 인형 하나 사러 갔지’라는 유명한 가사로 시작하는 ‘좋은 날’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곡이다. 다만 상업적으로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는데, 조규찬은 “새바람이 오는 그늘이 가요계를 뒤집을 줄 알았는데 판만 뒤집혔다”는 농담을 요즘도 종종 한다.

 

3년이 지나고 1990년 조규찬은 전곡을 작사/곡하고 셀프 프로듀싱을 한 솔로 데뷔 앨범 [Since 1993]을 발표했다. 이 앨범으로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천재성(본인은 천재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젊은 시절 조규찬의 쭉쭉 뻗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추억 #1’, 타이틀곡 ‘따뜻했던 커피조차도’, 이소라의 듀엣곡 ‘난 그댈 보면서’와 ‘그대 내게’ 등의 도회적이고 세련된 사운드는 신선했다. 그것은 당시 주목받던 동년배의 젊은 뮤지션 김현철이나 유희열 등과도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스타일과 매력이었다.

 

이후 조규찬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2집 [아담과 이브는 사과를 깨물었다], 3집 [The 3rd Season], 4집 [The 4th Wind]를 연달아 내놓았다. 그가 댄스, 록, 소울, 리듬앤블루스, 훵크, 일레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적 욕심을 한창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3집의 ‘말해줄게’, 4집의 ‘믿어지지 않는 얘기’와 ‘서울하늘’처럼 영미권 팝에서는 나오기 힘든 서정을 담은 곡들도 있다. 실제로 많은 팬이 이들을 조규찬 최고의 명곡으로 꼽는다.

 

그 뒤에도 조규찬은 해를 거르지 않고 앨범을 발표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1998년 조규천, 조규만과 함께 한 조트리오 1집 [첫 만찬]에서는 실험보다는 세 사람의 호흡이 돋보이는 차분한 팝을 들려줬다면, 이듬해의 5집 [V]는 그와 반대 지점에 있었다. 이 앨범에서 조규찬은 절정에 달한 작/편곡, 오토튠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가공할 보컬 능력을 차고 넘치도록 보여주었다. 블랙스트릿과 마이클 잭슨의 오마주로 보이는 ‘어느 수집광의 편지(그림자를 판 소년에게)’, ‘포유류’, 재즈 넘버 ‘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5집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종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기억되는 앨범이기도 하다. 머릿곡 ‘상어’에서 그는 날카로운 기타 리프, 냉소적인 가사를 통해 유명인이 된 후 자신을 따라다닌 수많은 이미지와 오해에 대한 상처를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실제로 조규찬은 5집에 대해 “가장 시니컬한 상태에 있을 때 만든 앨범”이라고 나중에 밝힌 바 있다.

 

정점을 찍고 원숙해지다
 

2000년 조트리오 2집 [Real Life]를 거쳐, 조규찬은 이듬해 여섯 번째 정규앨범 [해빙]을 발표했다. [해빙]은 그가 그동안 쌓아온 장르적 실험과 독창적인 스타일, 완성도가 집대성된 작품이었다. 리듬앤블루스와 발라드, 재즈, 힙합, 라틴 리듬까지 넘나들면서도 산만함 없이 일관적인 세련미가 돋보이는, 조규찬의 최고작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대만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데이비드 타오(陶喆, David Tao)의 ‘Airport in 10:30’을 번안한 ‘Baby Baby’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조규찬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2002년과 2003년에도 조규찬은 쉬지 않고 베스트 앨범 ‘무지개’와 7집 ‘Single Note’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중 베스트 앨범은 ‘팬의 베스트’와 ‘찬의 베스트’로 나뉘어 총 두 장의 음반에 24곡을 눌러 담았는데,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그는 아예 새로운 앨범을 만드는 수준으로 모든 곡을 다시 편곡해서 재녹음하는, 양보 없는 작가의식을 드러냈다.

 

7집 ‘Single Note’에서 조규찬은 멜로디를 만들고 가사를 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먼저 이야기를 짜고 어울리는 소리를 구현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그 결과 스케일 큰 판타지 소설, 또는 소박한 우화를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담긴 앨범이 되었다. 타이틀곡 ‘마지막 돈키호테’는 2017년 JTBC 음악 경연 프로그램 <팬텀싱어>의 첫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Forte di Quattro)가 불러서 다시 알려지기도 했다.

 

조규찬의 8집 [Guitology]는 오랜만에 두 해의 간격을 둔 2008년에 나왔다.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리듬앤블루스와 최신 팝의 트렌드까지 다양하게 담았지만, 한편으로 이전까지의 복잡다단한 장르 확장을 줄이고 오롯이 ‘좋은 노래’에 집중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나는 앨범이기도 했다. ‘잠이 늘었어’, ‘ASAP’, ‘이봐 내 여행의 증인이 되어줘’ 등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섬세한 보컬, 현란한 스캣, 미니멀한 편곡으로 부드럽고 다채로운 매력을 담아낸 [Guitology]는 21세기 들어 조규찬의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그 뒤 2008년 조규찬은 리메이크 앨범 [Remake]를 발표했다. 강수지의 ‘흩어진 나날들’, 이지연의 ‘찬바람이 불면’,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등 1980~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여성 뮤지션들의 노래를 선곡했다. 현실적으로는 정규 앨범보다 리메이크 앨범을 내고 싶다는 소속사의 입장이 좀 더 반영된 앨범이었지만, 조규찬은 “스스로에게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국내 가수의 리메이크인 동시에, 모든 프로그래밍까지 스스로 한 앨범이기도 하다.

 

이듬해 첫 라이브 앨범 ‘달에서 온 편지’에서 재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조규찬은, 2010년 아홉 번째 정규 앨범 [9]을 선보였다. 정형화된 것 같으면서도 예상을 벗어나고, 트릭도 허세도 없는 고급스러운 팝으로 채워진 이 앨범은 20여 년의 원숙함이 고스란히 묻어난 작품이다. 그의 오랜 음악적 동료인 이소라와 아내 해이 뿐만 아니라, 박완규와 박혜경, 정인, 스윗소로우 등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낸 보컬 피처링도 돋보인다.

 

최고의 보컬 디렉터, 코러스 마스터
 

조규찬의 음악적 역량은 매우 넓은 영역에 걸쳐 있지만, 그중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보컬이다. 조규찬은 자신의 보컬 능력에 대해 “마음의 가난에서 나온 것 겉다”고 말했다. 20대에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노트 하나 두고 리듬을 쪼개는 연습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고 한다. 그게 나중에 하나하나 퍼즐이 맞춰지면서 결국 스캣이나 코러스라는 그림이 된 것 같다고. 
 

자기 목소리의 리미트를 정확하게 알고 한계까지 사용하는 섬세한 보컬리스트인 만큼, 그는 뛰어난 보컬 디렉터이기도 하다. 조규찬은 디렉팅에 대해 “호랑이의 야생성과 눈빛의 총기를 잃지 않은 채 동물원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수많은 것을 돕는 작업”이라고 비유했다. 특히 이소라는 조규찬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코러스 연출에서도 조규찬은 국내에서 독보적인 능력자로, 1990년대 중반 이후 그가 코러스로 참여한 곡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이문세의 ‘조조할인’, 이승환의 ‘덩크슛’, 윤종신의 ‘환생’, 015B의 ‘성모의 눈물 For Desperado’, 성시경의 ‘방랑자’ 등이 그의 코러스를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곡이다.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는 조규찬이 스캣 솔로와 모든 코러스 패턴을 설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코러스 마스터로서 그의 능력이 다시 입증되기도 했다.

 

멈추지 않는 조규찬
 

9집 [9]는 2023년 현재까지 조규찬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다. 앨범을 내고 나서 그는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어바나 샴페인 캠퍼스로 유학을 떠나서 재즈 보컬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귀국한 뒤에는 대전 우송정보대학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가끔 공연을 하고, 다른 뮤지션의 앨범 작업에도 종종 참여했으나 한동안 신곡이나 새 앨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조규찬은 작업이 뜸하던 시기에 “내 음악이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버려지는 공허한 외침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만들어 놓은 곡도 있고 앨범 제작에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지만, 현재 국내 음악시장 여건상 청자들에게 충분히 알려질 창구가 없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가 유학 중에 KBS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을 때, 객석의 떨떠름한 호응은 여전히 그가 많은 대중에게는 낯선 존재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증거였다.

 

그 뒤 조규찬은 8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고, 2018년 7월 드디어 새 작업물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앨범이 아닌 싱글 음원이었다. 그리고 2021년 4월까지 34개월 동안 매달 새로운 음원을 발표했다. 어쿠스틱 재즈 ‘비 온 날’, 신스팝 스타일의 ‘뉴 웨이브 도시’, 컨템포러리 팝 ‘편도행’, 시카고(Chicago)의 오마주 ‘Back To You’에 이르는 능수능란한 장르 탐구도 여전했다. 이어 2022년 11월에는 복고풍 디스코의 영향이 짙은 ‘너 내일 뭐해’와 함께, B급 감성의 코믹한 뮤직비디오에 직접 출연도 했다.

 

조규찬은 “애초에 뜬 적이 없는 뮤지션이라 슬럼프가 딱히 있지 않았고 의욕을 잃은 적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조적인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의 경력과 성취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는 늘 한 발 비켜갔다. 그럼에도 오십 대에 접어든 중견 뮤지션이 된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죽지 않은 감각과 창작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의 팬들 뿐만 아니라 음악계 전체에 다행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진출처=GQ 코리아]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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