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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1
by 우정호

1970s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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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1작성자  by  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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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포크에 국악적 정서를 융합,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창조한 싱어송라이터다. 흔히 '자유와 저항, 낭만의 음악’으로 대변되던 기존의 포크와 달리, 애절함과 쓸쓸함, 그리고 한(恨)에 초점을 맞춘 음악을 지향했다. 그러면서도 내면 깊숙이 호소하는 창법을 통해 대중과 교감했다.

  

 

흔히,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서로 ‘한(恨)’을 꼽는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음악에 담긴 신파적 요소에 유독 한국 대중들이 크게 반응하는 현상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혹자는 한의 정서를 일제강점기, 6.25 전쟁과 같은 국가적 아픔을 겪으며 생겨난 민족적 특질로 해석했다. 8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인들이 ‘한의 민족’이 아니듯,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않았던 나라를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더 힘든데도.

 

게다가, 한(恨)의 정의가 ‘슬픔, 그리움, 분노,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들이 한데 뒤섞인 묵은 감정’이라면 포르투갈에도 이런 정서가 존재한다.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과 무력함과 슬픔, 상실감’을 뜻하는 단어 ‘사우다드(Saudade)’가 그렇다.

 

사우다드를 대변하는 포르투갈 민족 음악 ‘파두(Fado)’는 눈물 흘리는 듯한 기타와 비극에 가까운 노랫말로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노래한다. 파두의 핵심 정서는 탄식하듯 애절하게 ‘님’을 목놓아 부르는 김정호의 목소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김정호는 누구보다도 ‘한(恨)’의 정서를 깊고 입체적으로 표현한 가수다. 민요나 판소리의 전통 선율을 포크에 깊숙하게 녹인 노래를 불렀다. 애절하고 쓸쓸하면서도 깊은 갈망을 담은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같은 대표곡들로 1970년대 대중음악사에 이름을 깊이 새겼다.

 

절규하는 듯, 여운이 긴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했던 김정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님’을 발표한 뒤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한 서린 음악들처럼 김정호의 인생은 파란만장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요절 가수'라는 타이틀조차 그 슬픔을 배가시킨다.

 

한(恨)의 정서 목놓아 부른 싱어송라이터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김정호(본명 조용호)는 외가의 타고난 음악성을 이어받았다. 그의 어머니 박숙자는 국창(國唱)으로 평가받는 소리꾼 김소희와 쌍벽을 이룬 전라도의 명창이다. 김정호의 외할아버지는 판소리 유파 서편제의 큰 줄기를 이룬 명창 박동실이며, 또 다른 외가 친척으로는 국립국악원 아쟁 수석 단원을 역임한 박종선이 있다.

 

국악 명가인 외가 영향을 받은 김정호 역시 여섯 살부터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고된 악극단 생활을 경험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외가를 이어 국악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집 안에 있던 가야금 줄을 모두 끊어버렸고, 국악기를 전부 내다 버렸을 정도로 아들이 음악과 무관한 삶을 살길 바랐다.

 

김정호는 여덟 살에 처음 중병을 앓았다. 광주 수창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뇌염에 걸려 사지를 헤맸다. 후에 이 병이 그의 가수 인생에 있어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줄은 이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병치레 후 금세 활달한 소년으로 돌아온 김정호는 가족이 광주에서 서울 종로구로 이사하면서 서울 교동 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집안의 반대로 억눌렸던 그의 음악적 욕망이 되살아난 건 청소년 시절이었다. 우연히 접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에 매료된 김정호는 고등학생이 되자 본격적으로 기타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성동고등학교 졸업 후엔 기타 하나만 등에 멘 채 집을 나와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비원(창덕궁 후원) 옆 꽃밭에서 노숙 생활을 하거나 허기진 채로 낙원상가 주변을 배회하기도 했다. ‘기타 실력을 늘리는 것’ 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다.

 

김정호의 수련은 계속됐다. 북한산 기슭 우이동에 골방을 얻고는 외출도 마다한 채 그 안에서 하루 종일 기타를 쳤다. 타고난 음악성과 도인에 가까운 노력으로 실력이 쌓이자 미8군 무대에 진출해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김정호는 미8군 무대에서 만난 어니언스 임창제와 긴밀한 음악적 교류를 이어갔다.

 

어니언스 임창제는 한 인터뷰에서 “정호는 우리가 다 잠들었다 새벽에 깨어보면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며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실력이 뒤진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라고 회상했다. 또한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부도 많이 못 해 무식한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3년, 임창제와 이수영이 함께한 듀엣 어니언스가 데뷔 앨범을 준비하자 김정호는 임창제를 위해 ‘작은 새’, ‘사랑의 진실’을 비롯한 곡들을 작곡했다. 아직 대중음악계에 정식 데뷔하지 않았던 김정호는 작곡자를 ‘임창제’로 표기하기로 했다. 

 

김정호가 작곡한 곡들은 대히트를 쳤고, 임창제는 방송에서 “이 곡의 실제 창작자는 김정호”라고 밝혔다. ‘어니언스의 히트곡을 만든 숨은 천재 작곡가’라는 이미지와 함께 세상이 김정호의 존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정호는 탈퇴한 멤버 김태풍을 대신해 포크 듀오 4월과 5월 활동을 막 시작한 단계였다. 김정호가 히트곡 작곡가로 대중들 관심이 급증하자, 4월과 5월 소속사인 지구레코드는 가수뿐 아니라 전속 작곡가로 계약을 변경시키려고 했다. 계약 조건에 반발한 김정호는 두 달 만에 팀을 탈퇴했고, 전속 계약 문제를 청산하는 동안 지병인 늑막염이 재발돼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김정호는 DJ 이종환의 소개로 유니버샬레코드와 계약해 솔로 가수로 독립했다.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 그리고 대표곡 된 ‘하얀 나비’의 성공

 

한편, 1973년을 기점으로 음악계에 포크붐이 일었다.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 ’피리 부는 사나이‘, 어니언스 ’편지‘, 김세환 ’사랑하는 마음‘ 4월과 5월의 ’등불‘과 같은 곡들이 쏟아져 나오며 포크의 시대를 알렸다. 포크는 금세 청년 문화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1974년 9월, 김정호가 데뷔 앨범 [보고 싶은 마음/이름 모를 소녀]를 발표하자 언론은 그를 포크의 주류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현악기와 오르간 솔로, 일렉트릭 베이스가 두각을 나타내는 세련된 사운드는 ’통기타‘ 반주가 주류를 이뤘던 기존의 ’포크송‘과는 결이 달랐다. 창(唱)의 구슬픔이 배어있는 가창 역시 기존의 ’포크‘ 문법과는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이었다.

 

타이틀곡 ’이름 모를 소녀‘는 김정호가 총각 시절 아내 이영희를 열렬히 짝사랑하던 감정을 그대로 담았다. 애달픔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목소리로 ’말없이 기다리다 쓸쓸히 돌아서서, 안개 속에 떠나가는 이름 모를 소녀‘라고 절규하듯 쏟아내는 후렴구는 ’절창‘이라는 단어를 절로 떠오르게 했다.

 

앨범에는 록과 포크의 경계에 있는 ’보고 싶은 마음‘, 컨트리 풍 리듬에 한국적 정서를 입힌 ’꿈을 찾아‘, ’외기러기‘, 어니언스의 데뷔 앨범에도 실렸던 자작곡 ’작은 새‘, ’사랑의 진실‘과 같은 노래들이 실렸다. 마지막에 실린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제외한 전곡을 김정호가 작사, 작곡했다.

 

김정호의 절창은 마음을 파고들었지만, 앨범 발표 당시 일각에서 ’곡이 너무 어둡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호가 부른 처절하고 슬픈 노래들에는 강한 중독성이 있었다. 애수 어린 얼굴로 감정을 토해내듯 부르는 김정호는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이름 모를 소녀‘가 대히트하며 김정호는 대중음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 곡은 발표 후 두 달 만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했다. 김수형이 감독한 이 영화에 김정호도 출연했다. 화제의 인물이 된 그는 TBC의 인기 프로그램 ’패티김 스페셜‘에 게스트로 등장했다. 이 때 함께 나온 게스트는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가수왕으로 등극한 조용필이었다.

 

 이듬해인 1975년, 김정호의 인기는 절정을 향했다. 유니버셜레코드가 젊은 층을 겨냥해 제작한 옴니버스 음반 ‘영 패밀리 시리즈(Young Family Series)’의 커버 사진은 김정호의 차지였다. 

 

이 시리즈에는 송창식, 김인순, 어니언스, 이장희, 김세환, 최은옥, 윤형주, 하남석, 박인희, 김상배 같은 당대 가수들의 곡이 함께 수록됐다. 김정호는 ‘하얀 나비’, ‘꽃잎’, ‘하얀 천사의 노래’와 같은 곡들을 실었다.

 

같은 해, 10월  2집 [김정호 Gold Two]를 발매했다. 지난 앨범에 이어 대부분의 곡을 작곡, 작사하고 안건마가 편곡했다. 창(唱)의 영향이 강한 특유의 보컬은 여전히 두각을 나타냈으며, 포크/포크록 사운드와 한국적 정서를 결합하려는 시도 역시 여전히 돋보였다.

 

타이틀곡인 ‘하얀 나비’는 흔히 김정호와 연관해 떠올리는 구슬픈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와 같은 가사는 오히려 위로에 가깝다.

 

곡의 전면에서 분위기를 이끌다 어느새 사라졌다 다시 등장하며 곡을 조율하는 현악기는 마치 나비의 움직임처럼 경쾌하다. 편곡자 안건마의 아내였던 현혜미가 쌓은 코러스 역시 서정성을 배가시켰다. 어쿠스틱 기타 스트링의 묘미를 살린 스트로크로 짓는 곡의 마무리도 영화적이다.

 

작곡가로서의 다양한 시도는 2집에서도 이어졌다. 2집에는 플루트 솔로와 일렉트릭 기타 솔로의 혼용이 인상적인 ‘나를 두고’, 컨트리 장르 포맷에 한국식 정서를 입힌 ‘기다림’, 김정호 특유의 구음 사용이 두각을 나타낸 ‘얼굴’, 스페니시 기타스러운 사운드를 차용한 ‘꽃잎’, 현악에 국악의 구슬픈 정서를 접목한 ‘하얀 천사의 노래’와 같은 곡들이 실렸다.

 

또한, 깁희갑 작곡의 ‘눈동자’, ‘달맞이 꽃’을 통해 트로트 적인 강점도 드러냈다. 이 밖에도 김민기가 작곡하고 양희은이 부른 바 있는 ‘새벽길’을 워킹 베이스가 이끄는 블루스곡으로 편곡해 불렀다.

 

‘대마초 파동’으로 인한 구속, 정상에서 나락으로

 

김정호 2집이 발매된 지 불과 두 달만인 1975년 12월, 언론은 연일 ‘연예계 대마초 파동’ 소식을 뿌려댔다. 이장희·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정훈희, 임창제, 그리고 김정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거론된 연예인들은 대마초 흡연 혐의로 조사받았고, 흡연 여부를 떠나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방송 출연이 정지됐다. 김정호는 12월 불구속 입건됐으나 이듬해 1월 다시 연행됐다. 불구속 입건 이후 추가로 대마초를 흡연했다는 혐의였다.

 

김정호는 말 그대로 추락했다. 활동 정지로 인한 정신적 타격과 지병이 겹치며 완전히 무너졌다. 설 무대가 없어진 데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김정호를 위해 그의 매니저와 지인은 무교동 ‘꽃잎’이라는 라이브 레스토랑을 그에게 맡겼다. 김정호는 어두운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 노래할 수 있었다.

 

고난의 나날들이었으나 김정호의 옆엔 ‘이름 모를 소녀’가 항상 함께였다. 1977년, 교동 국민학교 동창생이자 ‘이름 모를 소녀’의 주인공 이영희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방위로 입대 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단기사병으로 18개월의 군 복무를 마쳤다. 1978년 10월엔 쌍둥이 딸도 낳았다.

 

이듬해인 1979년, 10월 박정희가 피살된 이후 ‘대마초 파동’ 연예인들에 대한 해금이 단행됐다. 활동 기간보다 활동 정지 기간이 더 길었던 김정호 역시 재기의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금 가수들이 방송에 얼굴을 비추거나 음반을 발매했음에도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적설’,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앓던 지병과 군 시절 얻은 독감이 폐결핵으로 발전해 치료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해금으로 인한 5년 만에 복귀

 

1980년 3월, 김정호는 5년 만에 복귀를 알리는 3집 앨범 [인생]을 발표했다. 타이틀곡 ‘인생’을 비롯해 10곡 이 수록됐으며 편곡은 지난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안건마가 맡았다. 다른 앨범들에 비해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시대의 흐름과 어울리는 곡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앨범 발표 후 폐결핵 증세가 악화됐다. 활동이 불가능했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의사는 1년 이상의 요양과 치료를 권고했으나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왔다. 요양원에선 음악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김정호는 1981년 5월 4집 [김정호 Vol.4]를 발표하며 복귀했다. '달님', '세월 그것은 바람', '한세상에 태어나'와 같은 노래들을 통해 새로운 보컬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앨범은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와 다양한 녹음 기법을 적극 사용하며 새로운 무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온전치 못한 건강 상태로 활동을 이어가던 김정호는 1983년에 접어들며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악화된 건강 탓에 새 앨범 작업 역시 진척이 더뎠다. 한 소절 녹음하고 회복한 뒤 다시 다시 녹음을 이어가는 식으로 진행됐다. 한 곡을 녹음하는 데 5개월이 걸렸다.

 

이 시기의 김정호는 본격적으로 국악과 대중음악을 접목시키길 꿈꾸기도 했다. 부인 이영희 씨는 한 인터뷰에서 “(김정호는) 신보 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1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말했다.

 

1983년 11월, 길고 긴 녹음 과정을 마친 김정호의 5집 [Life]가 발표됐다. 네 곡의 신곡과 기존 앨범에 실렸던 곡들을 사랑과 평화 출신 김명곤이 편곡한 버전이 수록됐다.

 

수록곡 '고독한 미소는 슬퍼'는 김정호가 인천 요양원에서 치료받던 시절, 송도 해변을 걷던 어느 여인에게서 영감받은 곡이다. 몽환적인 신디사이저와 세련된 곡 구성에 김정호 특유의 구슬픈 감성이 융합됐다.

 

타이틀곡 '님'은 소위 '김정호 음악'의 결정체였다. 비장한 전주에 이어 절규하듯 내뱉는 김정호의 보컬, 그리고 울부짖는 블루스 기타는 김정호가 꿈꿨던 가요와 국악의 결합물 그 자체였다. 

 

악화일로를 걷던 건강 상태로 인해, 곡 작업 당시 실제로 그가 죽음을 직감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정호가 애절함의 밑바닥을 담아 ‘간다, 간다, 나를 두고, 정든 님이 떠나간다’며 긴 호흡으로 탄식하듯 내뱉을 때, 그것은 분명 죽음을 앞둔 자의 절규였다.

 

폐결핵으로 인한 사망

 

1985년 8월, 김정호는 'MBC 스타쇼'에 출연했다. 앙상하고 힘겨운 모습이었다. 김정호는 "우리 딸아이가 7살인데요, 지금 TV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아빠도 옛날엔 유명한 가수였다는 사실을 안 믿어요. 그래서 아빠가 오늘 기타 들고 TV에 나가니까 잠 자지 말고 꼭 보라고 하고 나왔어요”라고 했다.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두 곡을 불렀다. 이것이 대중 앞에 선 김정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폐결핵은 점점 악화됐지만 기적은 없었다. 김정호는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1985년 11월 29일, 불과 서른네 살이었다.

 

김정호는 동료 가수들로부터도 압도적인 재능을 인정받던 가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86년, 그를 추모한 헌정 앨범이 발표됐다. 윤형주, 김현식, 윤시내, 하남석, 이정선, 송창식 김수희 등 당대 가수들이 앨범에 참여했다. 한국 가요 사상 최초의 뮤지션 헌정 앨범이기도 했다.

 

김정호의 유작 앨범 제작을 도왔던 김도향은 2022년, 11월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74년쯤인가. 같이 음악을 만들어보자고 한 적이 있었어요. 우이동 산 계곡에 방 하나 얻어서 노래를 만드는 데, 스타일이 저랑 완전 반대더라고요. 정호는 달빛을 보면서 '너무 슬프지 않아요?'하면서 울어요. 그런데 저는 '달빛이 너무 아름답지 않니?'하면서 기쁨을 표현하고 있고요. 정호는 그렇게 모든 대상을 슬프게 보고 거기에 또 푹 빠져있었죠. 돌이켜보니, 아마 곡을 쓸 무렵부터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해요. 노래 가사에도 '나그네', '님' 등 죽음을 달관하는 소재를 많이 썼으니까요."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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