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연 > 라이브러리 아카이브K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라이브러리

라이브러리

2023.06.04
by 우정호

1980s 이지연

페이지 정보

작성일 23-06-04작성자  by  우정호 

본문



c065022e8f6cb3c522163113293701f1485a9f0ebfsj.jpg

 

이지연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자, 청순가련형 여성 가수의 원조다. 하이틴 가수로서의 발랄함과 청초한 이미지가 강조됐지만, 담백하면서도 패기 있는 보컬과 때로는 고혹적인 음색을 통해 디바로서의 면모 역시 드러냈다.

 

 

'남학생들의 로망'과 같은 표현은 80년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사장된 언어에 가깝다. '오랜 꿈이나 공상의 대상'을 뜻하는 일본식 영어 '로망'에서 유래된 이 표현은, 이른 바 1980년대  3대 '책받침 여신'으로 불린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브룩 쉴즈, 그리고 이미연, 김혜수, 이상아 같은 이름에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이 표현이 단순히 '미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세계문화유산 급 미모를 보유한 모니카 벨루치나, 조형적으로 완벽한 '컴퓨터 미인' 황신혜가 '남학생들의 로망'으로 불리진 않았으니까. 생기 있고 청순한 눈빛, 긴 생머리, 결정적으로 하이틴 특유의 상큼함을 갖춘 미인이 '로망'의 조건에 부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까다롭지 않은 듯 복합적인 '로망'의 조건을 전부 갖춘 가수가 1980년대 대중가요 신에 등장했다. 바로 이지연이었다.

 

열여덟 살에 데뷔한 이지연은 맑고 깨끗한 얼굴과 긴 생머리, 가냘픈 몸매, 뛰어난 가창력으로 단숨에 로망으로 떠올랐다. 청초한 마스크에 비브라토조차 함부로 넣지 않는 담백한 발성으로 자신만의 보이스 컬러를 만들었다. 하이틴 가수 특유의 발랄함과 청순함을 어필하면서도 때로는 록 밴드 보컬 같은 패기를 보였다.

 

1990년대 등장한 강수지, 하수빈, 2000년대 아이유에 이르는 대한민국 청순 스타일 여성 아이돌 가수의 계보의 시작점이다. 또한,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여고생 가수로서 질투하는 대상이 많아 90년대 이후 불거진 안티팬 문제의 원조격으로 꼽히기도 했다.

 

‘바람아 멈추어 다오’, ‘난 사랑을 아직 몰라’,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Love For Night’과 같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스물두 살에 이미 3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특정한 시대를 떠올리면 그 이름이 함께 떠오르는 뮤지션들이 그러했듯. 3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대한민국 원조 청순 아이돌

 

이지연(본명 이진영)은 197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녀보다 두 시간 일찍 태어난 쌍둥이 언니가 있었으며 이지연은 4남매 중 셋째였다. 유아 시절 서울에서 자랐으나, 유년기엔 가족과 떨어져 대구 봉덕동에서 친할머니와 둘이 지냈다.

 

봉덕국민학교(대구봉덕초등학교) 교내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 정릉으로 옮겨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음악을 사랑했던 어머니 영향을 받아 음악과 더욱 가까워졌다. 특히, 퀸, 아바, 카펜터스, ELO(Electric Light Orchestra),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같은 팝송에 매료됐다.

 

고등학생이 되자 스쿨 밴드 재뉴어리(January)의 보컬로 낙점됐다. 열여덟 살이 된 1987년, 뜻밖에 맞이하게 된 기회는 그녀의 인생을 바꿨다. 당시 인기가 치솟던 헤비메탈 밴드 백두산의 서라벌레코드 연습실엔 수많은 스쿨 밴드들이 견학을 위해 찾아오곤 했다. 이중엔 이지연의 밴드 재뉴어리도 있었다. 백두산 리더 유현상은 에세이 <꿈을 향해 소리쳐>를 통해 이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특히 유난히 반짝거리는 지연이는 마치 얼굴에 빛이 나는 것처럼 아름다워 눈길을 끌었다. 쉬는 시간에 지연이에게 ‘너 노래 한번 해볼래?’하고 물었더니, ‘네’ 하면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지연이는 아주 당당했다. 묘하게 관심이 가는 아이였다.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을 부른다기에 멤버들에게 연주하도록 했다. 청순한 목소리였다. 때가 묻지 않아 예뻤고, 생긴 모습과도 잘 어울렸다.”

 

즉석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유현상은 이지연을 가수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같은 해 여름, 백두산 2집 [King Of Rock’N Roll]의 가사가 전부 영어로 쓰였다는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을 당했다. 이에 기타리스트 김도균은 영국으로 떠났고 팀은 와해됐다. 유현상은 제작자의 길을 택했다. 일본 쇼비즈니스와 프로모션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는 이지연의 데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야마구치 모모에,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전설의 아이돌’로 이름을 올린 나카모리 아키나의 무대를 본 유현상은 이지연을 떠올렸다. 청초하고 깨끗한 얼굴에 패기 있는 눈빛을 가진 그녀를.

 

유현상은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백두산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이지연에게 가수를 제의했다. 부모님 반대에 부딪히자 이지연의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유현상은 헤비메탈 로커의 자존심인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사정했다. ‘부모가 원하면 언제든지 가수를 그만두게 한다’는 조건까지 불사했다.

 

여름 내내 혹독한 트레이닝이 계속됐다. 유현상은 “지연이는 가르친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영리하고 똑똑했다. 5개 알려주면 10개를 알아서 했다. 외모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뛰어난 재질을 갖춘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데뷔하자마자 스타덤 오른 하이틴 스타

 

한편, 1987년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지배한 조용필의 기나긴 독주가 막을 내린 해였다. 조용필은 ‘신인들이 주목받아야 하는데 자신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연말 시상식 거부를 선언하고 스스로 왕좌를 내려놓았다.

 

가요계 춘추 전국 시대가 펼쳐졌다. 전영록, 이선희가 새 왕좌를 노렸으며, 김수철, 이문세, 주현미, 정수라, 나미, 윤시내와 같은 가수들 역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두산, 부활, 시나위는 헤비메탈 전성시대를 열었고, 김완선을 필두로 김승진, 박혜성 같은 10대 가수들이 등장했다. 또한, 10대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소방차는 댄스 그룹의 시대를 일찌감치 예고했다. 

 

1987년, 10월 30일. 이지연의 열여덟 번째 생일에 데뷔 앨범 [그때는 어렸나 봐요/안개 모습]이 발표됐다. 동갑 남자 고교생 가수 이진영이 있었기에 본명 대신 예명 ‘이지연’을 썼다.

 

데뷔 앨범은 ’하이틴 가수‘라는 이미지에 어울리는 서정적이고 차분한 발라드와 임팩트 있는 팝 트랙이 주를 이뤘다. 이지연을 데뷔시킨 유현상이 앨범 제작과 작곡, 작사, 프로듀싱을 맡았다.

 

이지연 역시 ‘그때는 어렸나 봐요’, ‘남겨진 슬픔, 사랑’을 작사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당시 시대상에 따라 ‘어린 여고생이 사랑 노래 가사를 쓰는 것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작사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타이틀곡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는 이지연에게 ‘청순가련 아이돌’이라는 이미지를 깊숙하게 새긴 곡으로 불필요한 기교를 가미하지 않는 깨끗한 창법이 인상적인 발라드다. 원곡은 유현상이 프로듀싱한 2인조 쌍둥이 여성 듀오 또 하나가 1985년 발표한 곡이다.

 

타이틀곡이 ‘청순가련’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속곡 ‘난 사랑을 아직 몰라’는 반전이었다. 록킹하면서도 댄서블한 이 곡은 하이틴 가수의 패기를 드러냈다. 청초한 마스크에 감춰진 파워풀하고 보이시한 보컬은 록밴드 싱어를 떠올리게 했다.

 

이 밖에도, 청춘 발라드 스타일의 ‘그때는 어렸나 봐요’, 특유의 맑은 음색이 곡을 이끈 ‘눈물의 편지’, 시티팝의 향기를 풍기는 ‘남겨진 슬픔, 사랑’ 같은 곡들이 앨범에 수록됐다.

 

이지연은 말 그대로 ‘나오자마자’ 스타가 됐다.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의 앳된 분위기와 ‘난 사랑을 아직 몰라’의 당찬 아우라에 대중이 열광했다. 특히 10대, 20대 남성 팬들에게 확실한 주목을 받았다. 하이틴 가수, 빼어난 미모라는 공통점으로 1년 먼저 데뷔한 김완선과 데뷔 직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가 먼저 라디오와 모든 차트를 점령했고, 이듬해인 1988년, 후속곡 ‘난 사랑을 아직 몰라’ 역시 히트했다. ‘남겨진 슬픔, 사랑’, ‘그때는 어렸나 봐요’ 역시 인기를 이어가는 가교가 됐다.

 

이지연은 같은 해 NHK ‘가요퍼레이드 88’에 출연해 일본에도 얼굴을 알렸으며, 미국의 틴팝 아이돌 티파니(Tiffany) 내한 때 합동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푸른 계절>, <한 지붕 세 가족> 등 드라마와 출연을 비롯해 식음료, 전자제품을 넘나들며 그 해의 ‘CF 요정’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인기 상승 곡선을 달리던 그녀는 1988년 KBS 가요대상에서 강변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이상은, ‘청순 디바’ 양수경 등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여자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며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을 이지연의 해로 만들었다.

 

이지연 대표곡 된 ‘바람아 멈추어 다오’

 

하이틴 스타로 자리매김한 이지연은 이듬해인 1989년, 성인이 되자마자 2집 [슬픈 안녕/그 후론/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발표했다. 당시 가수로도 활동했던 배우 김희애가 부른 ‘나를 잊지 말아요’를 듣고 감화된 유현상이 작곡자 전영록에게 앨범 참여를 요청했다. 전영록은 ‘바람아 멈추어 다오’와 ‘그 후론’을 작사, 작곡했다.

 

‘슬픈 안녕’, ‘서툰 이별’, ‘차가운 미소만이’, ‘사랑은’, ‘그대’는 유현상이 작곡, 이지연이 작사했다. 1집과 마찬가지로 이지연은 작사한 곡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타이틀곡 ‘바람아 멈추어다오’는 ‘이지연’이라는 이름을 대중음악사에 뚜렷하게 새겼다. 신디사운드가 이끄는 틴 팝스타일 곡임에도 대중가요 메가 히트곡들이 가졌다는 ‘뽕끼’를 탑재했다. 이 곡에서 이지연은 시원한 가창과 세밀한 보컬 스킬을 드러내며 ‘청순 아이돌’이라는 단어로만은 수식 불가능한, 디바로서의 능력을 증명했다.

 

앨범에는 전영록의 또 다른 곡 ‘그 후론’, 펑키(funky)한 록 넘버 ’그대‘, 발라드 가수로서 역량이 드러난 ’슬픈 안녕‘, 졸업을 앞두고 실제 이지연의 학우들과 담임선생이 녹음에 참여해 현장감을 살린 ’졸업‘과 같은 곡들이 수록됐다.

 

‘그 후론’이 먼저 전파를 탔지만 ‘바람아 멈추어다오’가 1989년 KBS ‘가요톱텐’에서 3월 마지막 주부터 4월 넷째 주까지 5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히트했다. 조용필, 전영록, 정수라, 이선희, 김완선, 소방차 등 역사적인 가수들을 제치고 이뤄낸 성과였다. 이어 마이너 코드의 발라드곡 ‘슬픈 안녕’이 TOP 5에 올랐으며 ‘졸업’이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지연의 인기는 겉잡을 수 없었다. 일본 NHK에서는 나카모리 아키나와 이지연을 한무대에 세우고 싶다고 제안해왔고, 조인트 공연이 이뤄졌다. 나카모리 아키나는 일본에 처음 건너간 유현상이 이지연을 한국의 아이돌 가수로 만들도록 결심하게 만든 바로 그 가수였다.

 

같은 해 10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5회 ABU(아시아태평양방송연합)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Love For Night’으로 3위에 올랐다. 이 곡은 당시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음에도 MBC 가요순위 프로그램 ‘쇼 네트워크’ TOP 10안에 들기도 했다.

 

그해 이지연은 198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10대 가수상, 1989년 KBS 가요대상 본상을 차지하며 정점을 찍었다.

 

짧은 3집 활동, 그리고 안티팬들로 인한 충격의 미국행

 

1, 2집의 연이은 성공으로 후속 앨범에 대한 기대는 무한대에 가까웠다. 1990년 여름, 이지연은 3집 [娟(연)]을 발표했다. 앳되고 당찬 하이틴 가수에게서 ‘성숙’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음악적으로도, 풍모도 그랬다.

 

단순하고 질주감 있는 록킹한 곡들은 다양한 미디 사운드가 조합된 신스팝 스타일로 대체됐고, 직선적이고 패기 있는 보컬 스타일에 트로트 창법이 서리기 시작했다. 1, 20대의 마음을 대변했던 발라드 곡들은 성인 취향으로 대체됐다. ‘하이틴 스타’의 상징과 같던 긴 생머리는 성숙한 숏커트로, 청초한 눈빛은 고혹적으로, 발랄하고 자유롭던 패션은 어른스런 정장 스타일로 바뀌었다.

 

이 앨범에 이르러 이지연은 본명인 이진영으로 작사가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 당신도 하나’, ‘내 마음 나도 몰라’, ‘그대는 변덕장이’를 작사했다.

 

타이틀곡은 1989년 부터 인기를 얻은 ‘Love For Night’이었다. 유현상이 작사, 작곡한 이 곡은 1집의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를 잇는 록킹하고 댄서블한 곡으로 파워풀한 중저음 보컬의 강점을 살렸다.

 

후속곡 ‘늦지 않았어요’는 80년대 특유의 펑키한 베이스와 메탈 스타일 기타 프레이즈가 트로트적 창법과 조화를 이룬 곡이다. 또한 앨범에는 질주감 있는 ‘하지만’, 듀란듀란을 떠올리게 하는 ‘그대는 변덕장이’, 미디사운드의 다양한 활용이 돋보이는 팝 넘버 ‘내 마음 나도 몰라’를 비롯한 곡들이 실렸다.

 

이미 검증된 타이틀곡 ‘Love For Night’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성인 취향이 가미된 ’늦지 않았어요‘가 KBS ’가요톱텐‘에서 5위를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늦지 않았어요‘ 활동 당시 자르고 나온 숏커트 헤어스타일과 어딘가 모르게 바뀐 분위기에 팬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터질 게 터졌다. 데뷔하자마자 ’청순가련형 아이돌‘, ’하이틴 스타‘로 주목 받으며 10대, 20대 남성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이지연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가수 팬들의 표적이 됐다. 특히, 전영록, 박남정, 김승진, 박혜성 같은 남자 가수 팬들, 그리고 이지연과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이상은의 여성 팬들이 안티 세력으로 굳어지며 괴로움을 겪었다. 뛰어난 외모를 못마땅해하던 또래 여학생들까지 모두 안티로 돌아서면서 테러에 가까운 행위들이 발생하곤 했다.

 

팬인 척 ’사인해달라‘며 다가와서는 긴 머리에 껌을 붙이고 달아나는 ’껌 테러‘는 그중 일부에 불과했다. 이지연은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던 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휘발유로 머리에 붙은 껌을 지워보기도 했으나 거듭되는 행위에 속수무책이었다. 울면서 머리를 잘라야 했다.

 

안티 행위는 악성 루머로까지 번졌다. 그녀가 라디오 생방송에서 욕을 했다거나, 동갑내기였던 이상은의 뺨을 때렸다거나, 셀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뜬 소문들이 생성됐다. 근거는 없었다. 보다 못한 루머 당사자들이 나서 “그런 일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거짓의 파급력이 진실을 압도했다. 방송 무대 객석에선 여성 팬들의 야유가 들렸고, 행사장에선 수근거리는 소리가 돌았다. 무대가 지옥이 돼버린 이지연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는 대인기피증으로 번졌다.

 

여름이 채 끝나지 않은 1990년 9월, 스포츠 신문들은 ’이지연 잠적, 증발‘을 헤드라인으로 내걸었다. 인기 정상에 선 가수가 돌연 미국으로 잠적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히파이브(김홍탁이 이끌던 히식스의 전신 ‘히파이브’와는 다른 팀)의 보컬로 알려진 열한 살 연상의 정국진과 함께 미국행을 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언론은 ‘사랑의 도피’라며 대서특필했다.

 

이지연은 2005년, 여성조선과 인터뷰를 통해 이 시기에 관해 밝혔다. “심하게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무대에 서면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연예계 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였다”며 “그때 ‘히파이브’의 싱어로 같은 클럽(다운타운)에서 일하던 남편을 알게 됐고, 남편의 따뜻함에 많이 의지하게 됐다”

 

정국진은 무역업을 하던 형이 있던 애틀랜타에서 새 인생을 살고자 했고 이지연이 함께하길 원해 청혼했다.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고, 이지연은 미국 도피를 생각했다. 매니저 유현상 역시 이지연을 달래보려 했으나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유현상은 “역시 넌 지연이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라며 체념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이트 클럽 무명가수와 결혼할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용기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년 반 만의 컴백, 그리고 다시 활동 중단

 

그녀의 잠적에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공격 태세로 돌아섰다. ’이지연이 LA의 한 슈퍼마켓에서 일한다‘는 찌라시가 돌거나, 다양한 시나리오로 ’궁핍하게 산다‘ 식의 악의적 루머들을 기사화했다. 이지연은 캘리포니아주 LA에서 3129km 떨어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살고 있었고, 무역업으로 자리 잡은 남편 덕에 궁핍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작은 해방감을 누리던 이지연이었으나, 그녀의 나이 스물 둘. 은퇴하기엔 아직 일렀다. 이지연은 가수 복귀를 결심했다. 92년 1월, 귀국 후 두 달 뒤 TV에 복귀, 그해 10월 4집 [삶은 한 번 뿐인 걸요]를 발표했다. 2년 만의 앨범이었다.

 

4집은 다섯 손가락 출신 작곡가 박강영, 마로니에의 신윤미, 부활 출신의 이태윤, 그리고 ’명곡 제조기‘ 작사가 박주연이 참여했다. 박강영 작곡하고 박주연이 작사한 타이틀곡 ’삶은 한 번 뿐인 걸요‘는 90년대식 모던한 사운드가 담긴 발라드 곡이었다.

 

반응은 냉담했다. 서서히 인기가 하락한 뒤 은퇴를 선언한 게 아니라 누리던 모든 인기를 뒤로한 채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 이지연을 팬들은 용납하지 못했다. 게다가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댄스 음악 중심으로 천지개벽된 가요계에서 ‘1980년대의 신인은 이미 과거의 인물처럼 여겨졌다. 결국,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못한 채 활동을 중지했다.

 

요리연구가, 외식사업가로 새로운 전성기

 

미국으로 건너간 이지연은 평범하게 주부로 살았다. 남편의 헌신적인 노력과 신앙 덕분에 연예계에서 촉발된, 10년 넘게 시달렸던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음악계를 떠났지만 이지연의 캐릭터와 녹아들었던 노래들은 계속 대중문화계에 소환됐다. 2004년 영화 [어린 신부]를 통해 ‘국민여동생’ 호칭을 얻은 문근영이 ’난 사랑을 아직 몰라‘를 불렀다.  ’바람아 멈추어다오‘를 러브홀릭, 장나라가 리메이크 했고, 2007년 영화 [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김혜수가 부르기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지연은 2006년, 한국으로 귀국해 ’콘서트 7080‘ 등 방송에 잠시 출연했고, 조덕배, 원준희, 김혜림, 최성원을 비롯한 가수들과 '추억의 동창회: 프렌즈 80'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8년 1월,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2’ 첫 방송에 출연해 ‘바람아 멈추어 다오’를 부르며 오랜만에 국내 팬들에게 무대를 선보였다. 

 

같은 해 4월, 미국 CNN은 이지연을 초청해 남북정상회담 만찬 음식으로 화제가 된 평양냉면을 소개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녀가 그간 미국에서 요라사의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20년, 그녀가 운영하는 ‘에어룸 마켓 바베큐’가 미국 음식잡지 '푸드 앤 와인'에서 조지아주 최고의 바베큐 레스토랑에 선정되는 등 성공적인 외식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우정호 아카이브 K 에디터



공유하기

© www.archive-k.com


Total 6 / 1 page
검색 열기 닫기
게시물 검색

라이브러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