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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6
by 최승우

1990s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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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06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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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방준석과 함께 유앤미블루(U&ME BLUE)로 데뷔, 상업적으로는 빛을 보지 못했으나 한국 대중음악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솔로 데뷔 후에도 독창적인 음악 세계와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고 있다.


이승열은 1970년 2월 15일생이며, 고향은 인천이고 어린 시절은 주로 서울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필리핀으로 건너가서 일 년을 살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 학년 아래로 재입학했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환경에 던져진 문화적 충격은 컸다. 두 여동생은 미국 친구도 사귀고 비교적 잘 적응했지만 이승열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럴수록 그가 몰두한 것은 음악이었다. 이승열의 표현에 따르면 “밥은 굶어도 CD는 사 모으던” 시절이었고, 집에서는 부모님이 사주신 어쿠스틱 기타를 튕겼다. 그는 더 큐어(The Cure), 더 스미스(The Smiths), U2, 알이엠(R.E.M.) 등을 즐겨 들으며 자신의 취향을 찾아갔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 속에서 이승열은 공부를 해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로 원래 가고 싶었던 명문고등학교 대신 평범한 학교에 진학했고, 한동안 의욕상실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 1학년 때 학교에서 한 친구를 만났는데, ‘헤비메탈 키드’인 그 친구가 가진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의 ‘천둥소리’는 이승열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이승열은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기타로 처음 본격적으로 연주한 곡은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D’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승열은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었고, 성적도 괜찮아서 아이비리그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떨어지고 뉴욕주립대인 빙햄튼대학에 들어가서 예술사(Art History)를 전공하게 됐다. 그는 ‘내가 음악에 미쳐서 원하는 대학에 못 갔구나’ 하는 죄책감에, 음반들을 박스에 넣어서 창고에 넣고 기타도 한동안 멀리했다고 한다.

 

전설의 이름, 유앤미블루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이승열은 한인 크리스천 모임에 갔다가 한 동갑내기 학생을 만났다. 바로 고(故) 방준석이다. 두 사람은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곧 의기투합했다. 마침 이승열은 농구를 하는 룸메이트가 다른 학교로 가는 바람에 2인 1실 기숙사를 혼자 쓰고 있었는데, 방준석이 짐을 싸들고 이사를 오면서 공부는 뒷전이 되고 기타만 치는 나날이 다시 시작됐다. 둘은 한인 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밴드를 염두에 두고 자작곡을 썼다. 이후 드러머 최철, 방준석의 친동생 방준원이 합류했다. 이제는 전설이 된 유앤미블루(U&ME BLUE)가 만들어졌다.

 

당시 이수만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메릴랜드 동부 한인대학생 가요제가 열렸다. 유앤미블루는 여기에 출전해서 1등을 차지했다. 여기에 고무된 방준석은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에 갔을 때 4트랙 녹음기로 만든 데모를 사방에 돌렸다. 그리고 이를 들은 한 제작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승열이 ‘대장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베이시스트 겸 프로듀서 송홍섭과의 만남이었다. 송홍섭은 데모를 듣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재미있다”며 음반 발매를 제안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열은 계속 음악을 할 것인지를 아직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 생활도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러 나와보니 차를 도둑맞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그 즈음 어머니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결국 이승열은 부모님에게 ‘군대 다녀오는 셈 치고 딱 삼 년만 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1993년 12월 한국행을 결심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한꺼번에 생기다 보니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 온 이승열과 방준석은 송홍섭이 운영하는 송 스튜디오에서 의식주를 전부 해결하다시피 하면서 곧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1994년 유앤미블루의 역사적인 첫 앨범 [Nothing's Good Enough]이 세상에 나왔다. 회색빛 도시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몽롱한 사운드, 블루지하면서 격정적인 보컬 등은 이전까지 한국 대중음악에서 들을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랩, 힙합, 레게 등 다양한 댄스 뮤직이 휩쓸고 있던 한국 음악시장에서, 이들의 음악은 청자들에게는 혹평조차 쉽지 않을 만큼 모호하고 생소했다.

 

게다가 오랜 미국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온 이승열과 방준석 모두 현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그저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 무모하게 덤벼든 시절이었다. 이승열은 “그때는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전체적으로 무계획적이었다. 말하자면 손에 성냥 한 개를 쥐고 이걸 붙태우리라, 하는 막연한 생각만 한 거다. 우리가 무엇과 맞서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두렵지도 않았다”고 돌아봤다.

 

절치부심한 두 사람은 1996년 2집 [Cry... Our Wanna Be Nation!]을 발표했다. 1집이 변해버린 모국을 오랜만에 접한 두 재미교포 청년의 혼란이 투박하게 반영된 것이라면, 2집은 사운드나 정서 면에서 좀 더 정돈된 앨범이었다. 송홍섭도 “이번에는 좀 먹힐 만한 걸 만들어보자”고 방향을 제시했고, 전 멤버 최훈이 작곡한 발라드 ‘지울 수 없는 너’를 머릿곡으로 배치하는 등 나름 전략적인 선택도 했다.

 

유앤미블루의 음악에 애정을 가지고 홍보해줄 매니지먼트 담당자도 만났다. 그 덕분에 라이브클럽에서 공연도 시작했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많은 수는 아니지만 팬이 생기고 라이브클럽에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상업적으로 유의미한 동력을 얻을 정도의 결과는 아니었다. 결국 1997년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독 공연, 1998년 라이브 앨범 발표를 끝으로 유앤미블루는 활동을 중단했다.

 

그 뒤 유앤미블루는 PC통신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한때는 희귀반이 되어 중고 사이트에서 장당 1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때를 잘못 만난, 흔한 표현으로 ‘저주받은 걸작’이 된 것이다. 지금은 1집과 2집 모두 재발매되어 쉽게 들을 수 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하다

 

유앤미블루 활동 중단 후 방준석은 한국에 남아서 음악을 계속했지만, 이승열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일단 약속한 삼 년이라는 기간이 다 됐기 때문에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려야 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잠시 머물다가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려고 했지만, 서류 문제 등으로 미국에 발이 묶였다고 한다. 원래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던 부모님도 그만 하는 게 어떻겠냐고 강하게 만류했다.

 

이승열은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음악은 꿈도 못 꾸던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정체성의 혼란은 계속됐다. 결국 그는 2000년 송홍섭의 연락을 받고 솔로 앨범을 낼 계획을 굳혔다. 그 뒤 미국과 한국으로 오가며 솔로 앨범을 준비했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일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유앤미블루 앨범의 엔지니어로 참여했던 김병찬 대표가 설립한 플럭서스 뮤직과 계약을 인연을 맺고, 2003년 1집 [이날, 이때, 이즈음에]를 발표했다.

 

[이날, 이때, 이즈음에]는 유앤미블루와 차별화가 되면서도 연결고리를 아예 놓아버리지는 않은, 성공적인 솔로 데뷔작이었다. 특히 그동안 수없이 덧씌워진 기타 톤에 가려 있던 이승열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전면으로 이끌어낸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집은 2004년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남자 가수 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뒀다. 또 수록곡 중 ‘비상’이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에, ‘기다림’이 영화 <…ing>의 삽입곡으로 사랑받으며 대중에게 어느 정도 알려지는데 성공했다.

 

이승열이 솔로로 독립하고 방준석이 영화음악가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유앤미블루의 재결합을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한시적으로 만나 일회성 공연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앨범을 낼 만큼 곡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열은 노력과 열정이 소진됐다는 생각에 “기다린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유앤미블루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2022년 방준석이 세상을 떠나면서 유앤미블루라는 이름은 이제 영원한 향수가 되었다.

 

영원히 경계에 선, 정체되지 않는 아티스트

 

4년이 지나고 나온 [In Exchange]에서 이승열은 전작보다 좀 더 보편적인 설득력이 있는 곡이 더해지고 세련되게 다듬어졌으면서도, 특유의 둔중하고 어슴푸레한 무드를 머금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이 앨범은 그가 유앤미블루의 꼬리표를 떼고 싱어송라이터로 확실하게 안착했다는 것을 알린 작품으로 꼽힌다. 이런 음악적 성과는 이듬해 제5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과 ‘최우수 모던 록 노래’ 등 2개 부문을 수상하는 긍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다시 4년을 보내고, 이승열은 2011년 3집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2년 간격으로 정규 앨범을 내놓았다. 그동안 그는 듣는 사람의 예상을 매번 비켜가는 선택을 했다. 3집 [Why We Fail]이 청자들과의 접점이 가장 선명한 앨범이라면, 4집 [V]은 반대로 온갖 이국적인 요소들을 한데 뒤섞어놓은 앨범이다. 4집은 대부분의 곡을 공연장에서 원테이크로 녹음하는가 하면, 5집 [Syx]은 ‘자신만의 골방’을 전제로 집에서 혼자 작업한 소스로 채워졌다.

 

이승열의 이런 예측불허의 행보는 음악 자체나 그것을 만드는 작업 방식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그는 2012년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기되자 계약금을 받지 않는 새로운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음반 계약구조를 바꾸고 스스로 음악의 통제권을 갖고 싶어서다. 또 6집 [요새드림요새]는 한동안 특정 음악 플랫폼에서만 서비스되기도 했다. 이 역시 유통과 배급에 대한 뮤지션의 자기결정권 행사를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다.

 

공연 때도 ‘새로운 것’에 대한 이승열의 집착은 유명하다. 아무 설명도 없이 알려지지 않은 곡으로 공연의 반을 채우기도 하고, 앨범에 수록된 원곡들의 형태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바꿔서 부르기도 한다. 그와 절친한 신윤철의 말에 따르면 “레코딩을 다시 하는 수준”이다. 이는 이승열의 오랜 팬이라도 좀처럼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함께 공연하는 연주자들도 “공연장에서 아는 곡이 흘러나올 때 따라 부르는 희열을 형도 잘 아시지 않냐”고 타박할 정도다.

 

이승열은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감각, 세상에 대한 이질감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왔다. 스스로를 ‘외로운 작곡가’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그는 “나는 공식 같은 것에 문외한이고, 단지 해프닝에 충실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마약처럼 듣는 사람을 첫술에 배부르게 하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낯섦을 조장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히 있어서 마음 먹으면 혼자서라도 음악을 할 수 있지만, 팬들에 대한 고마움도 놓지 못한다고. 그런 묘한 낯섦 속에서 음악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는 한 자리에 고여 있는 정체(政體)를 견디지 못하고 발 아래의 지반을 끊임없이 흔드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혼란에 가까운 변덕이야말로 뮤지션 이승열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그는 6집 발표 후 “이승열이라는 존재가 이제 어떤 곳에 뿌리를 내렸고, 바람 한 번에 휙 날아가지는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이승열은 그 강박에 가까운 치열함으로 자신의 음악적 세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사진출처=플럭서스 뮤직]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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