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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by 최승우

1980s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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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12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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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를 수상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연예계 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유학을 떠났고, 이후 독자적인 세계와 스타일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다. 음악 외에도 미술가, 시인, 라디오 진행자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강변가요제와 ‘담다디’의 충격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신해철이 이끄는 무한궤도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로 대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무대에 올랐다. 동물원이 잔잔하지만 여운이 긴 충격파를 던진 것도 이 해다. 그리고 같은 해 변진섭의 데뷔 앨범 [홀로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억과 정서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음악들이 1988년에 대거 등장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MBC 강변가요제에서 이상은의 등장은 말 그대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짧은 머리에 껑충한 키, 긴 다리를 휘청이면서 탬버린을 흔들고 ‘담다디’라는 여음구를 흥얼거리고, 대상을 받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기는커녕 실실 웃으며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들먹이는 모습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상은은 1970년 3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대해 “맨날 공상에 빠져 있고, 혼자 엉뚱한 짓을 잘 하던 아이였다. 애들은 나를 재미있는 아이라고 생각해서 친해지고 싶어하고 나도 애들하고 잘 어울렸지만, 늘 외로웠다”고 돌아봤다. 

 

이상은의 예술적인 기질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건축 일을 했던 아버지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또 세상의 부를 일부에서 장악하고 있는 걸 증오하는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외동딸의 새해 선물로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준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꿈을 잘 꾸고, 영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상상력을 키우는 예술은 이상은에게는 가장 좋은 놀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종이라는 종이는 모조리 꺼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취미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시간에 사람을 그리면 다른 아이들은 전부 ‘오징어처럼’ 그렸지만, 이상은은 투시도법을 사용해서 그렸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부와 미술부, 합창부까지 혼자 서너 개의 클럽 활동을 했다. 연극부를 직접 만들어서 공연도 하고,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당시 유행하던 마돈나, 티나 터너의 노래를 서툴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중에서 이상은은 미술에 먼저 뜻을 두었고, 서울대 미대 입학을 목표로 화실에 다녔다. 그런데 넉넉했던 집안 사정이 고3 때 갑자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대학 갈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갑갑했다. 그래서 실기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예체능계를 알아봤고, 입학 원서를 쓰기 한 달 전 과감하게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바꿨다. 

 

대학에 가니 무대만 보면 가슴이 설레는 습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상은은 강변가요제에 나갈 생각으로 준비를 하던 중에 한 선배를 만났는데, 그 선배는 자신이 쓴 대여섯 곡 중에서 마지막 남은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상은은 예선 통과라도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했다. ‘그대는 정말’이라는 제목도 막판에 가서야 ‘담다디’로 바꿨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 없이 나간 가요제는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충격적으로 데뷔한 이후 이상은은 갑자기 바빠졌다. 신문과 방송에서 쉴 틈도 없이 불러댔고, 길을 걷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여러 편의 광고에 나왔고, 두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TV 예능 프로그램과 라디오 진행자로도 발탁됐다. 한마디로 아이돌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즐거웠지만, 곧 그런 생활이 불안해졌다. 스케줄에 쫓기다 보니 정작 음악을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인기를 버리고 도망치듯 떠난 유학 시절

 

이상은의 정규 1집은 이듬해인 1989년 1월에 나왔다. 이 앨범은 거의 모든 곡이 프로듀서를 맡은 강인원의 곡으로 채워졌기에, 뮤지션으로서 이상은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같은 해 연말 나온 2집에서는 빠른 템포의 ‘사랑할 거야’가 순위 프로그램 1위 후보까지 오르는 등 인기를 끌었지만, 이 곡이 1993년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표절 판정을 받으면서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1990년 가을, 이상은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학교까지 휴학한 뒤 유학길에 올랐다. 자신을 숨 막히게 하는 연예계 시스템에 계속 휘둘리느니 과감하게 버리고 떠난 것이다. 이상은은 “이 시절을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다”며 “한국 연예계 아저씨들이 술 먹고 돈 봉투 주고받고 하는 게 너무 싫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상은이 처음 유학지로 택한 곳은 일본이었다. 그 뒤 1991년 뉴욕 브루클린으로 건너가서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그녀의 소울 메이트가 된 황보령을 만난 것도 이 시기다.

 

물론 유학 중에도 음악을 놓지는 않았다. 1991년 이상은은 자신이 모든 곡을 만들고 프로듀싱을 한 3집 [더딘 하루]를 발표했다. 재즈와 클래식이 기반이 된 이 앨범은 이전까지의 이상은을 기억하던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이어 1992년에는 뉴욕에서 양희은의 소개로 만난 프로듀서 김홍순과 공동으로 작업한 4집 [Begin]을 발표했다. 작업은 김홍순이 리듬을 만들면 이상은이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얹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뒤 방학 때 귀국해서 ‘너와 함께 있는 이유’를 타이틀곡으로 잠시 방송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하우스, 힙합 장르를 이른 시기에 실험한 앨범으로 뒤늦게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3년 나온 5집 [언젠가는]은 이상은의 세계가 오르게 된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깊은 감정을 간결하면서도 다채롭게 풀어낸 이 앨범에는, ‘달’이나 ‘벽’, ‘이 어둔 밤’ 등의 걸출한 곡이 수록됐다. 그중에서도 타이틀곡 ‘언젠가는’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리는 영원한 청춘의 송가가 되었다. 또 3,4집 때와 달리 학교를 휴학하고 방송과 공연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럼에도 연예계는 여전히 그녀를 보이시하고 활달한 이미지로만 소비하려고 했다. 이상은은 “한국에 왔더니 매니저 기다리고 있고 코디네이터 붙어 있고, 모든 게 세팅돼 있었다. 이런 상황이 갑갑해서 떠난 건데, 또 하고 있나 싶었다”고 돌아봤다. 이는 이상은이 그 뒤로 연예계와 거리를 두고 온전히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티스트로 거듭난 [공무도하가], 그리고 일본 활동

 

1995년 6집 [공무도하가]는 이상은이 아이돌 이미지를 완벽하게 불식시킨 앨범이자,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남을 명반이 되었다. 이상은은 유학 시절부터 일본에서 크고 작은 활동을 해왔는데,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일본의 음반사와 계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상은이 음악적 스승으로 여기는 타케타 하지무를 파트너로 맞이한 것도 이 앨범이었다. 이상은은 “다케다상은 나를 믿고 돈도 되지 않는 일을 늘 열정적으로 해주었다. 내 음악의 방향성이 어떻게 달라지든 그분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뮤지션이 자신의 내면을 가장 치열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구현하는데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 동양적인 정서에 전통악기, 록, 포크, 프리재즈까지 교배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음반 순위를 선정할 때 결코 누락되는 법이 없는 명반이다. 타이틀곡 ‘공무도하가’, 이상은이 자신의 베스트 중 하나로 꼽은 ‘새’가 잘 알려져 있다.

 

2년 뒤 나온 7집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 이상은은 전작과 또 다른 방식을 취했다. 수많은 악기가 배치된 6집과는 반대로 사실상 타케타와 2인 체제로 작업했는데,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출한 이 앨범은 전작과 완전히 반대의 독특한 풍경을 보여준다. 아티스트로서의 욕심이 가득했던 6집보다 좀 더 힘이 빠진 [외롭고 웃긴 가게]를 선호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후 이상은은 영국의 유명 레코드사인 버진(Virgin)과 계약, 리채(Lee-tzsche)로 이름을 바꾸어 1997년 8집 [LEE-TZSCHE], 1999년 9집 [Asian Prescription]을 발표했다. 리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합친 것이고, ‘tzsche’라는 표기는 그녀가 좋아하는 철학자 니체(nietzsch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8집은 폴 매카트니, 펫 숍 보이스 등과 작업한 유명 프로듀서 리처드 나일즈(Richard Niles)가 지휘했다. 이는 일종의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을 지향하던 이상은과, 서양 음반시장 수출을 노리던 일본 자본, 그리고 아시아 음악에 흥미가 있던 버진의 교집합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였다. 이 때문에 두 앨범은 일본에서 먼저 발매되고 이후 한국으로 역수입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동양적인 색채가 짙은 이 시기의 앨범에 대해, 이상은은 “당시 나는 아시아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 대륙에서 태어났다는 게 신비롭고도 축복처럼 다가왔다”고 말했다. 다만 이 시기의 앨범은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서 평이 갈리는, 다소 혼란스러운 과도기의 작품이기도 했다.

 

2001년 30대에 접어든 이상은은 리채의 이름으로는 마지막인 정규 앨범인 10집 [Endless Lay]를 발표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앨범을 만들 당시 “대중적인 음악을 하라”는 음반사의 압박 때문에 심한 충돌이 있었는데, 그녀는 “대중성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대중성을 고려하려니 화가 났다.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으로 인해 이상은은 보편적인 소통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지루함을 싫어하는 천생 아티스트

 

다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상은은 2003년 11집 [신비체험]으로 다시 한번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자음악과 어쿠스틱이 균형감 있게 어울린 편곡, 단순 명료한 메시지는 그녀가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일반 청자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타케타 외에 장영규, 방준석, 달파란 등의 조력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상은 스스로는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색이 선명하고 느낌이 풍부한 앨범”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특히 일상의 온기를 친밀한 멜로디로 노래한 어쿠스틱 팝 ‘비밀의 화원’은 ‘언젠가는’과 함께 가장 많이 불리는 애창곡으로 자리잡았다. 

 

11집을 기점으로 이상은은 점차 완숙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즈음 그녀는 “도 닦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걸 좀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꼴리는 대로 하는 건 쉬운데, 커뮤니케이션의 보편성을 체득하는 게 정말 어렵다. 그런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5년 발표한 12집 [Romantopia], 2007년 13집 [The Third Place]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드러난 앨범이다. 사운드는 좀 더 단순하고 자연스러워졌으며, 사색은 깊어지고 넉넉해졌다. 13집의 ‘삶은 여행은’ 나중에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의 삽입곡으로 다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상은은 14집부터 브리즈뮤직이라는 1인 독립 레이블을 만들어 직접 앨범을 제작하고 있다. 100%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14집에서는 전작의 편안함을 다시 벗어던지고, 일렉트로닉 프로듀서 카입(KAYIP)을 파트너로 삼아 분열적일 정도로 실험적인 노이즈 음악을 시도했다. 반대로 15집 [LuLu]는 소박하고 자유분방한 복고풍 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냈다. 특히 15집에서는 독학으로 음악 소프트웨어를 익히고, 작곡과 편곡은 물론 모든 코드와 템포, 악기 녹음, 레코딩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하는 열정을 보였다. 2019년에는 5년 만에 새로운 EP [fLoW]를 발표했는데, 오롯이 혼자 해낸 15집과 다르게 이규호, 이능룡, 강이채 등 여러 동료 뮤지션이 힘을 보탰다.

 

이상은은 “권태, 따분함, 지루함을 세상에서 제일 못 견딘다”고 종종 말해왔다. 또 “평생 공부하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도 드러냈다. 그리고 최근까지의 행보를 보면 그녀는 자신의 말을 어떤 모순도 없이 증명하고 있다. 50대에 접어든 지금도, 이상은은 뮤지션, 미술가, 작가, 라디오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여전히 조용하지만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출처=브리즈뮤직]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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