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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6
by 최승우

1990s 패닉 (Pa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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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6-26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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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데뷔한 패닉(Panic)은 싱어송라이터 이적, 래퍼 김진표의 2인조로 구성됐다. 데뷔곡 ‘달팽이’의 폭발적인 성공으로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지만, 이후 한국 대중음악 최대의 문제작 2집 [밑]으로 엄청난 논쟁을 몰고 오기도 했다. 파격과 서정성, 철학을 두루 갖춘, 1990년대 가장 감각적인 음악을 들려준 팀 중 하나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1990년대 중반은 단순하게 정의할 수도, 반대로 쉽게 단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시대다. 1992년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급 신드롬을 일으켰고, 그것은 무수한 작용과 반작용을 불러오면서 음악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절대강자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6년 홀연히 떠났다. 이어서 그들이 만든 물줄기 안에서 수많은 스타가 새로 등장하거나 사라졌다. 그중에서 이른바 ‘포스트 서태지’라는 수식어를 가장 많이 달고 다닌 이들이 패닉(Panic)이다.

 

물론 패닉이 ‘포스트 서태지’라는 진부한 타이틀에 만족했다면, 지금 그들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아예 잊힌 이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닉은 꽤나 과격하면서도 영리한 방식으로 이를 스스로 벗어던지는 길을 택했다.


갑작스럽게 팀을 결성하다

 

패닉의 리더인 이적이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는 비틀즈, 레드 제플린, 프린스 등의 음악에 빠져 있었고,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자작곡을 만들고 공연을 했다. 싱어송라이터 임현정, 댄스그룹 알이에프(R.ef)의 이성욱 등이 그의 고등학교 동기였으며, 같은 반 친구였던 이성욱과는 함께 밴드를 하기도 했다.

 

대학 입학 후 이적은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고자 준비를 했다. 그는 데모를 만들어서 여러 소속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퇴짜를 맞았다. 당시 박성진, 김도연, 고현기와 함께 에이틴(A-Teen)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어느 기획사의 오디션을 봤는데, 이 기획사에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윤도현이라는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나중에 이적은 “윤도현의 탁월한 가창력에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윤도현은 “이적이 뛰어난 음악성으로 먼저 활동을 시작한 걸 보고 부러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적의 가능성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들국화의 멤버 최성원이다. 그는 이적에게 자신의 음반사 신촌뮤직에서 음반 발매를 제의하면서 솔로도 밴드도 아닌 팀을 만들 것을 권했다. 이적도 솔로로 데뷔하는 건 부담스러웠기에 여기에 찬성했고, 함께 팀을 꾸릴 멤버로 어려서부터 가깝던 세 살 아래 동생 김진표를 선택했다. 이적은 “김진표도 중교교 시절 음악을 하겠다고 부모님 속을 썩였는데, 그때 옆에서 바람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상당히 위험한 유혹을 한 셈이다”라고 회고했다.

 

패닉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은 1995년 나왔다. 당시 이적이 앨범 준비를 거의 다 해 놓은 상태에서 김진표가 갑자기 합류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녹음실에서 작업을 한 기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예상외의 히트곡이 된 ‘달팽이’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집의 타이틀곡은 원래 ‘달팽이’가 아닌 ‘아무도’였다. 그러나 노래 제목처럼 그야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라디오 PD들이 신청곡 엽서를 보여주면서 “아무래도 타이틀곡 바꾸는 게 좋겠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바꾼 타이틀곡 ‘달팽이’가 대박이 나면서, 이는 역사에 남을 선택이 되었다. 나중에 방송 출연 때 김진표가 색소폰을 연주하는 연출을 부랴부랴 추가하게 된 이유다. ‘달팽이’가 히트할 줄 몰랐던 탓에 앨범 버전에 김진표의 파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패닉의 음악은 당시 주류를 이루던 누구의 음악과도 다른 것이었다. 김건모나 룰라, 듀스, 신승훈, 넥스트와도 달랐으며, 심지어 서태지와 아이들과도 달랐다. 비록 ‘달팽이’가 너무 유명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가려졌지만, 1집은 데뷔 앨범다운 신선함과 패기가 넘쳤다. 아무도’나 ‘다시 처음부터 다시’ 같은 시니컬함이 있는가 하면, ‘미안해’나 ‘안녕’ 같은 러브송도 어색하지 않게 공존했다.

 

특히 학창 시절부터 글 잘 쓰기로 유명했다는 이적의 작사 감각은 단연 돋보였다. 그중 날카로운 통찰과 은유가 번뜩이는 ‘왼손잡이’는 지금까지도 소수자를 이야기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노래다.

 

당시 패닉의 데뷔 앨범은 60만 장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적은 “처음에는 2집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만 앨범이 팔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대성공은 소속사도, 당사자인 멤버들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2집에서 ‘달팽이’와 비슷한 발라드를 내세우면 100만 장 판매도 가능하다”는 분위기였다. 그 해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자리를 패닉이라는 새로운 스타가 채우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패닉은 이런 예상을 뒤집었고, 그 후폭풍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문제작을 낳다

 

이듬해인 1996년에 나온 패닉의 두 번째 앨범 [밑]은 ‘달팽이’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누구나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만화가 이우일이 그린 그로테스크한 표지가 어울리는 괴기스럽고 공격적인 음악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세상의 밑을 뒤집어 드러낸 듯한 내용이었다.

 

이는 곧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중에서도 체벌과 폭력을 일삼는 교사를 타깃으로 한 ‘벌레’, 부모의 억압에 대한 반발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mama’는 반인륜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교육계와 각종 학부모 모임에서는 앨범 판매를 금지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대부분의 곡이 방송금지 판정을 받았고, 신문의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서 다뤄질 정도였다. 때마침 그 직전에 음반사전심의제가 폐지됐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몇 달 뒤 결국 음반사에서는 수록된 몇 곡의 가사를 없앤 삭제판을 발매하기도 했다. 앨범의 가사는 표현이 거친 대신 원색적인 욕설은 나오지 않았는데, 이적은 “욕을 넣었다면 싸움은 일방적으로 끝났을 것이다. 소송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곤란한 상황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 당시 이적이 피처링을 한 이문세의 ‘조조할인’이 큰 인기를 모았는데, ‘이적은 조조할인 같은 노래도 불렀다’는 이미지가 그나마 논란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패닉이 안전한 길을 두고 이런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당시 멤버들의 성향, 그리고 너무 큰 성공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이십 대 초반 이적은 영민하고 날카로운 문화투사 같은 이미지였다. 그는 PC통신에서 음악평론가와 설전을 벌이는가 하면, “한국의 문화적 지형에서는 소수의 전위적 실험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김진표는 자신을 힘들게 했던 교사들에 대한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적은 “이런 걸 좀 세련되고 시적으로 바꾸면 그 에너지가 사라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이적은 2집에 대해 “갑자기 ‘달팽이’처럼 대중적인 히트곡을 갖게 되니 맞지 않은 옷을 기분이었고, 우리 정체성이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2집은 일부러 좀 이상한 쪽으로 가보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번 써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음반사에서는 앨범 작업 때 녹움실에 잘 찾아오지도 않을 만큼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줬다. 이적은 “최성원 선배가 나중에는 되게 후회한 것 같지만, 그때는 최대한 우리가 하고 싶은 걸 존중해줬다”고 돌아봤다.

 

비록 이런 불온한 파격에 가려져 진가를 덜 인정받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밑]은 패닉의 음악적 역량이 훨씬 단단해진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데뷔 당시에는 급조된 멤버인 탓에 포지션이 애매했던 김진표가 랩과 작곡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머릿곡 ‘UFO’는 다분히 시각적인 이미지를 일체의 전자음 없이 탄탄한 기본 악기의 편성만으로 구현했으며, ‘벌레’는 간결하고 감각적인 리듬이 돋보인다. 패닉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 꼽히곤 하는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에서는 예전부터 뮤지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적의 취향이 엿보인다. 삐삐밴드와의 라이브 협연으로 녹음한 ‘불면증’은 탁월한 연주와 이윤정의 예측불허 보컬이 어우러진 실험적인 대곡으로, 패닉의 오랜 팬들 사이에서는 숨은 명곡으로 꼽힌다. 또 ‘강’처럼 정반대의 서정이 담긴 곡도 수록됐다.

 

그 외에도 김세황, 유앤미블루, 남궁연, 이태윤, 김효국, 삐삐밴드, 김동률, 차은주 등 최고의 조력자들이 함께 했으며, 이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 앨범이기도 하다. 이적은 “패닉 2집 이후부터 동료 뮤지션들에게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활동 중단, 그리고 각자의 길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집 이후, 패닉은 일 년 정도의 공백을 가졌다. 그 사이에 이적은 김동률과 프로젝트 카니발(Carnival)을 만들어 활동했고, 김진표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래퍼로 나섰다.

 

패닉이 1997년 발표한 3집 [Sea Within]은 전작들처럼 여러 장르가 혼재됐지만 팝 성향이 좀 더 강하고, 내용 면에서는 자기성찰의 성격이 짙은 앨범이었다. 이적은 “내면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분위기도 1990년대에 발표한 세 장의 정규 앨범 중에서 가장 밝다. 지금도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고 있는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김진표가 패닉의 노래 중 가장 아끼는 곡으로 꼽은 ‘태엽장치 돌고래’, 이적 특유의 나른한 보컬이 인상적인 ‘미안해’ 등이 대표곡이다.

 

패닉은 3집 활동을 끝으로 1998년 잠정적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사실 두 사람의 조합은 싱어송라이터나 연주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음을 맞추는 보컬 그룹도 아니기에 이질적이었고, 언젠가 한계가 올 것이라는 예상은 많았다. 김진표는 당시의 결정에 대해 “지금 패닉을 계속하면 대중을 위해 억지로 뽑아낼 것 같았다. 그건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패닉은 2005년 7년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4집 [Panic 04]를 내놓았다. ‘로시난테’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4집은 음반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팬들의 높은 기대치를 채우기에는 아쉬웠고, 평론가들에게는 떨떠름한 평가를 받은 앨범이 되었다. 이적의 보컬과 김진표의 랩 모두 발전했고 40인조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등 스케일이 커졌지만, 예전 같은 에너지는 휘발된 인상을 주었다. 김진표도 “4집이 제일 즐겁지 않았다. 막상 해보니 뭔가 재기발랄한 느낌이 없었고, 뭔가 안주한 느낌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4집 이후 패닉은 20년 가까이 공식적인 작업은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적과 김진표는 모두 “우리는 해체한 적은 없다”라고 몇 차례 공언하며 훗날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바 있다. 또한 종종 서로의 무대에 게스트로 서는 등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이적은 1999년 [Dead End]로 솔로 데뷔했으며, 2020년 [Trace]까지 총 6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또 정원영, 정재일, 강호정, 한상원, 이상민과 함께 긱스(Gigs)를 결성, 두 장의 앨범을 냈다. 솔로 앨범 중에서는 2007년의 3집 [나무로 만든 노래]가 상업적, 음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최고작으로 꼽힌다. 그 외에 방송 활동, 소설 발표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펼치고 있다.

 

김진표는 예전 넥스트의 멤버들과 함께 한 록 밴드 노바소닉(NovaSonic)의 메인 보컬로 참여했으며, 7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그 외에 방송 진행자, 카 레이서, 사업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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