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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4
by 최승우

1990s 윤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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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7-04작성자  by  최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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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포크 록 밴드 종이연의 멤버로 활동을 시작, 1994년 1집 [가을 우체국 앞에서]로 솔로 데뷔했다. 탄탄한 가창력과 뛰어난 라이브 실력으로 주목받았으며, 1997년부터 YB(윤도현 밴드)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로커의 길로 들어섰다. 록 밴드가 살아남기 힘든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YB를 이끌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수 록 뮤지션이다.

 


윤도현은 스스로를 ‘문산 촌놈’이라고 부른다. 그는 경기도 파주의 문산에서 태어나서 거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서울과는 기가 잘 안 맞는다고, 놀 곳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했다. “사람은 흙을 밟고 자연의 공기를 맡으며 살아야 활력이 생긴다”고 말이다. 이런 건강한 이미지는 데뷔 이후 30년 동안 윤도현의 정체성이 되었다.

 

윤도현은 1972년 2월 3일 태어났다. 황해도 장단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비무장지대에 있는 땅을 다시 찾기 위해 가까운 문산에 정착했다. 부모님이 세탁소를 경영했기 때문에 윤도현은 동네에서 ‘세탁소 아들’로 통했다.


음악에 미친 ‘파주 키드’

 

윤도현이 처음 접한 악기는 피아노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그의 동생을 피아노 학원에 보냈는데, 동생은 하루만에 “학원에 여자애들만 있어서 창피해서 못 가겠다”고 떼를 썼다. 한 달치 학원비는 이미 낸 상황이라 윤도현이 대신 가게 됐는데, 그는 곧 피아노의 재미에 빠졌다. 다만 넉넉치 않은 집안 사정 때문에 피아노를 살 수 없어서, 문구점에서 종이 건반을 사서 책상에 붙여 놓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윤도현에게 경희대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피아노 콩쿨에 참가해보라고 권유했다. 윤도현은 이때다 싶어서 울고불고 떼를 썼고, 부모님은 어렵게 피아노를 사 주셨다. 윤도현은 어린이 양복에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새로 사 신고 서울의 부잣집 아이처럼 꾸미고 콩쿠르에 나가서 2등상을 받았다. 그는 그 시절을 “공부도 잘했고, 콩쿨에서 상도 받아서 부모님이 기뻐하셨다”며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윤도현의 인생은 한 차례 크게 바뀔 뻔했다. 중학교 때 시작한 스피드 스케이팅 때문이었다. 그는 도내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의 유망주였다. 다만 운동을 계속하려면 빙상 명문인 파주공고로 진학해야 했기에, 윤도현은 고민 끝에 운동을 포기하고 인문계인 문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시절 많은 밴드 뮤지션이 그렇듯 윤도현의 음악적 출발점도 스쿨 밴드였다. 당시 문산고등학교에는 밴드부가 없었기에, 그와 몇몇 친구가 “우리끼리 새로 해보자”며 의기투합해 ‘단두대’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윤도현은 건반을 맡았지만 베이스, 드럼까지도 커버하곤 했다. 리더는 기타를 치는 친구였는데 그는 당시 파주에서 기타 잘 치기로 유명했고, 그의 형도 대학에서 헤비메탈 밴드를 하고 있었다.

 

단두대는 수학여행에서 첫 공연을 했고,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연주해서 친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밴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기타리스트의 형이 군대를 다녀오더니 갑자기 “음악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냐. 정신들 차려라”고 호통을 친 것이다. 그 바람에 리더부터 밴드를 그만두었고, 나머지는 하나 둘 빠져나갔다. 윤도현은 오기가 생겨서 혼자 기타에 매달렸다. 겨울에 뜨거운 방바닥에 앉아 기타에 몰두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영화 <정글 스토리>의 첫 장면에 나오는 임진강변의 화석정은 실제로 윤도현이 당시 혼자 가서 연습하던 곳이다.

 

윤도현은 중학교 때 반장을 하기도 하고 공부도 잘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에 미쳐서 성적이 사정없이 떨어졌고, 재수는 삼수로 이어졌다. 그러나 윤도현의 머릿속에는 음악을 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재수 학원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통기타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이 이끄는 포크 록 밴드 ‘종이연’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 윤도현 밴드의 멤버가 된 엄태환도 종이연의 멤버였다. 헤비메탈밖에 모르던 윤도현이 재즈와 포크를 접하고, 밥 딜런과 김민기에게 매료된 것도 종이연 선배들의 영향이었다.

 

윤도현의 데뷔 앨범이기도 한 종이연 1집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지금은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들을 수 없고, 중고시장에서 몇 십 만원에 팔리는 희귀 음반이 되었다. 그러나 윤도현은 이 시절을 “나에게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였다”고 돌아봤다.


우여곡절 끝에 데뷔하다

 

그 뒤 윤도현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두산그룹 계열의 광고회사 오리콤에서 음반사업팀을 개설했는데, 여기에서 개최한 신인 가수 오디션에 선발된 것이다. 당시 담당자는 1970년대 인기 밴드였던 휘버스 출신의 이명훈이었는데, 그는 윤도현을 눈여겨보고 유명 작곡가들을 섭외하는 등 데뷔를 지원했다. 윤도현은 “이명훈 선배가 내 촌티를 벗겨보려고 모델들과 어울리게 하고, 룸살롱에도 데려갔는데, 별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렵게 잡은 솔로 데뷔 기회는 어이없게 날아가고 말았다. 군대 문제 때문이었다. 장기 대기로 인해 면제인 줄만 알았는데 영장이 갑자기 나온 것이다. 윤도현과 이명훈 둘 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허탈해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윤도현은 “그때 데뷔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전화위복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회상했다.

 

윤도현은 군 복무 시절에도 음악을 놓지 않았다. 엄태환이 솔로 앨범을 녹음할 때 방위 복무를 하다가 위수지역을 이탈하면서까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전역 후에 다음기획의 오디션에 합격, 비로소 데뷔 앨범을 만들게 되었다. 당시 윤도현과 같은 오디션에서 경쟁한 사람이 이적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윤도현은 “그때 내가 아니고 이적을 잡았더라면 회사가 그렇게 고생 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5년에 나온 윤도현 1집 [가을 우체국 앞에서]는 포크 록의 성격이 짙은 앨범이었다. 훗날 뒤늦게 히트곡이 된 ‘사랑 Two’, ‘가을 우체국 앞에서’ 등이 이 앨범에 수록돼 있다. 윤도현은 수록된 10곡 중에서 4곡을 직접 만들었는데, 그중 타이틀곡 ‘타잔’은 특유의 ‘순수한 촌티’, 기교 없이 시원스러운 창법과 어우러지며 그의 캐릭터처럼 자리잡았다. 윤도현은 1집에 대해 “아쉬운 점은 말도 못하지만, 나의 촌스러운 이미지가 숨김없이 나타난 앨범이라 애착이 간다”고 회상했다.

 

그 와중에 윤도현은 영화 <정글 스토리>, 뮤지컬 <개똥이>에 출연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정글 스토리>는 흥행에서는 참패했지만 신해철이 담당한 사운드트랙은 크게 히트했다. 당시 윤도현은 “음악을 직접 맡지 못한 건 아쉽지만, 영화사에서 해철이 형의 인지도를 앞세워 영화를 홍보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전부터 존경하던 김민기가 연출한 뮤지컬 <개똥이> 출연 제안을 받은 것은 윤도현에게 큰 행운이 되었다. 김민기는 “노래는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윤도현에게 철저하게 주입했고, 연습 때 사소한 버릇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만큼 집요하게 지도했다. 이는 윤도현이 보컬리스트로서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뮤지컬을 끝내고 공연을 하는데, 똑같은 노래인데도 훨씬 살아나는 걸 스스로 느꼈다”고 말했다.


윤도현 밴드의 탄생

 

윤도현은 솔로 데뷔 후 거의 공연 중심의 활동을 펼쳤다. 일 년에 거의 이백 일을 공연으로 보낼 정도였다. 그는 “소속사에서 처음부터 ‘이놈은 공연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직감하고 연주자들을 붙여주고, 공연 기회를 마련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함께한 유병열(기타), 엄태환(기타, 퍼커션), 박태희(베이스), 김진원(드럼), 강호정(건반)은 2집 녹음을 함께 하면서 밴드로 뭉치게 되었다. 밴드 마스터 격인 강호정이 어떻게든 밴드로 끌고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결단을 내렸다. 즉, 윤도현 2집이 자연스럽게 윤도현 밴드의 데뷔 앨범이 된 셈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2집은 허점도 많지만 온전히 밴드의 힘으로만 만든, 잘 짜이고 세련된 시스템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매력과 에너지가 넘쳤다.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여 랩으로 소화한 ‘이 땅에 살기 위하여’는 특히 신선한 파격이었다. 이 앨범은 같은 해 나온 델리스파이스, 그리고 자우림의 데뷔작과 함께 의미 있는 데뷔 앨범으로 꼽히는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지금도 2집을 윤도현의 커리어 통틀어 최고작으로 보는 의견이 적지 않다.

 

1998년 3집 [소외]를 발표하면서 윤도현 밴드는 강호정이 탈퇴하는 변화를 겪었다. 윤도현은 “독일에서 엘리트 음악 교육을 받은 호정 형과, 밑바닥부터 올라온 나머지 멤버들은 아무래도 정서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밴드의 최연장자이자 전체적인 색깔을 확립하는 역할을 맡았던 강호정이 빠지면서, 3집은 주제와 스타일 측면에서 재정비를 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듬해인 1999년 윤도현 밴드는 네 번째 정규 앨범이자 리메이크 앨범 성격의 [한국 ROCK 다시 부르기]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윤도현 밴드는 수많은 공연으로 다져진 응집력 있는 연주를 앞세워, 들국화와 송창식, 빅토르 최 등의 원곡을 탁월하게 재해석해 호평을 이끌어냈다.

 

아 즈음 윤도현 밴드는 공연장에서 확고한 지지를 받는 밴드로 성장해 있었다. 엄청난 스타는 아니라도 관객이 꾸준하게 찾는 밴드가 된 것이다. 윤도현과 엄태환은 2000년 싱어송라이터 이정열, 서우영과 함께 한국의 포크 음악을 재조명하는 프로젝트 밴드 ‘김광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4집의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2000년은 윤도현 밴드 1기의 마지막 해가 되었다. 해체를 선언한 원인은 밴드의 두 축인 윤도현과 유병열의 갈등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사실상 경제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한국의 음악시장에서 록 밴드가 살아남는다는 건 여전히 어려웠기에 윤도현은 좀 더 대중적인 쪽으로 음악적 노선을 바꾸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병열은 순수한 록 밴드의 태도를 지켜야 한다는 쪽이었고, 입장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탈퇴를 선택한 것이다. 남은 멤버들은 한 명이 빠지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결국 해체를 결심했다. 윤도현은 “더욱 허탈한 건 우리가 해체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 정도로 한국에서 록 음악은 마이너였고, 록 밴드가 처해 있는 상황은 열악했다.


돌아온 YB, 그리고 월드컵의 빛과 어둠

 

해체 후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준비했다. 윤도현은 고향인 파주에서 반려견을 분양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는데 4집 ‘너를 보내고’가 뒤늦게 차트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뒤 소속사 대표가 연락해서 “새 멤버를 영입하고 다시 해보자”고 윤도현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윤도현밴드는 새로운 기타리스트 허준을 맞아들이고, 기존의 박태희, 김진원의 4인 체제로 2001년 5집 [An Urbanite]을 발표했다. 앨범은 예전의 강렬한 표현력에서는 조금 물러나서 좀 더 대중적인 친화력을 지닌 앨범이었다. 밴드의 골격을 만들던 음악적 리더 유병열이 빠진 상황에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2년, 윤도현 밴드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격변을 겪게 된다. ‘오 필승 코리아’가 대한민국의 응원가로 쓰이면서 단숨에 스타 밴드가 된 것이다.

 

‘오 필승 코리아’는 원래 윤도현 밴드의 곡이 아니었다. 윤도현은 “원래는 모 기업 광고의 CM송이었고, 나는 아르바이트로 가창비만 받고 불렀다”고 나중에 밝혔다. 게다가 월드컵 열기가 고조된 6월 중순에 윤도현은 신혼여행 때문에 한국에 없었다. 그래서 귀국하고 나서 갑자기 반전된 분위기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옛말 그대로 아침에 눈 떠보니 유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성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월드컵 벼락 스타’라는 꼬리표와 함께 특유의 ‘건강한 촌티’라는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간 윤도현 밴드는 ‘운동권 밴드’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만큼 사회적 현안에 직설적으로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돈맛을 보니 사람이 이상해진다”며 기업 행사를 일부러 줄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과 ‘월드컵 국민 밴드’의 간극은 너무 큰 것이었다.

 

윤도현 밴드는 국민 밴드의 반열에 올랐고, 윤도현은 방송 출연과 광고 촬영이 이어지는 유명 연예인이 되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유명세는 음악적으로는 깊은 슬럼프를 가져왔다. 윤도현은 당시에 대해 “나도 그렇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멤버 전부가 변했다. 갑자기 큰 인기를 얻자 다들 정신 못 차리고 바보가 됐다. 끔찍했다”고 돌아봤다.

 

이런 혼란은 음악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2003년 발표한 6집 [YB Stream 6]에서는 다수의 대중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그동안 지켜오던 색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확연이 드러났다. 높아진 인지도에 힘입어 상업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음악적으로는 최악의 앨범이라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2005년 윤도현의 솔로 앨범 [Diffrence]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슬럼프를 벗어나다

 

윤도현 밴드가 침체기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7집 [Why Be ?]부터다. 이들은 밴드 이름을 ‘YB’로 바꾸며 변화의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직선적인 하드 록 스타일로 돌아오면서도, 다양한 스타일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는 유연함도 보였다. 특히 윤도현은 자신의 약점이었던 섬세하고 서정적인 표현력에서 훨씬 발전한 모습이었다. 2009년 8집 [공존] 역시 이와 연장선상에 놓인 앨범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이후 YB는 영국 출신의 기타리스트 스콧 할로웰을 새 멤버로 영입, 2013년 9집 [REEL IMPULSE], 2019년 10집 [Twilight State]를 발표했다. 두 장의 앨범 모두 록 밴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트렌드를 영리하게 받아들인 안정적인 앨범으로 꼽힌다.

 

한편 윤도현은 YB 외에도 다방면에서 개인 활동을 하고 있다. 동료 뮤지션들의 음악에 여러 차례 목소리를 빌려주는 한편, 정진운, 윤하, 김재중 등에게 곡을 준 작곡가이기도 하다. 2011년에는 MBC <나는 가수다>에서 폭발적인 가창력과 퍼포먼스로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기도 했다.

 

또 호감형의 외모와 건강한 이미지를 살려 방송, 특히 진행자로 자주 활동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는 6년 반 동안 KBS 2TV에서 음악방송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진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2022년 봄부터는 MBC 라디오의 <4시엔 윤도현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출처=디컴퍼니]

 

 

최승우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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